조충국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충국은 전한 시대의 무장으로, 기병 출신으로 시작하여 흉노 정벌과 강족 반란 진압 등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 무제 때 흉노를 상대로 큰 부상을 입었으며, 소제 시대에는 저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흉노를 공격하여 서기왕을 사로잡았다. 선제 즉위에 기여하여 영평후에 봉해졌으며, 흉노의 침입을 막아내기도 했다. 강족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신무현과의 갈등으로 아들 조앙이 죽음을 맞이한 후 은퇴했으며, 감로 2년에 사망하여 시호를 장(壯)이라 받았다.
조충국은 무제 때부터 선제 때까지 활약한 장군으로, 흉노와 강족 등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조충국의 가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삼로조관비(三老趙寬碑)에 조충국의 성씨인 '조'(趙)씨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조씨 가문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1]
서적
한서 권19
2. 생애
신작 원년(기원전 61년), 전한에 복속되어 있던 강족 중 일부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자, 광록대부 의거안국(義渠安國)은 선령강(先零羌)의 수령 30명을 잡아 죽였다. 이에 나머지 강족 무리가 반발하였는데, 이때 조충국의 나이는 일흔이 넘어 선제는 다른 사람을 쓰려 했다. 그러나 조충국은 이를 무릅쓰고 직접 진압에 나섰다.[1]
조충국은 지구전을 펼치며 강족에게 사면 의사를 보였다. 선제는 조충국의 아들 우조중랑장(右曹中郞將) 조앙(趙卬)에게 기문과 우림의 기병을 통솔하게 하고, 죄수와 각 지방 병력 6만 명을 동원하였다. 주천태수 신무현은 기병으로 우회하여 후방을 쳐 보급로를 끊자고 했으나, 조충국은 반대하였다.[1]
선제는 허연수를 강노장군(強弩將軍)에, 신무현을 파강장군(破羌將軍)에 임명하고 조충국을 문책하였다. 그러나 조충국은 둔전을 건의하며 반발했고, 조정 대신들도 조충국 의견에 동조했다. 결국 선제는 조충국 의견을 받아들이는 한편 허연수·신무현에게 군대를 출발시켰다. 허연수 등은 강족을 물리쳤고, 조충국은 이듬해 귀환하였다. 이후 강족 내부 반목으로 반란은 진압되었고, 조충국은 후장군과 위위[1]를 겸임하였다.[1]
이 일로 조충국과 신무현은 사이가 틀어졌고, 신무현이 조앙이 궁궐 비밀을 누설했다며 고발하여 조앙은 하옥되어 자결했다. 조충국은 은퇴하였고, 감로 2년(기원전 52년)에 죽었다. 시호는 장(壯)[2]이라 하였고, 작위는 아들 조홍이 이었다.[1]
2. 1. 초기 생애와 군 경력
본래 기병 출신으로, 기사(騎射)에 능하여 우림에 편입되었다. 병법을 익혔고, 여러 이민족들에 대해 잘 알았다.[1]
무제 때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의 가사마(假司馬)가 되어 흉노 정벌에 종군하였는데, 흉노의 포위를 받은 조충국은 백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이를 돌파하였다. 이때 스무 군데에 상처를 입으니 이광리가 무제에게 이를 보고하였고, 무제는 조충국을 불러들여 직접 상처를 보고는 탄식하였다. 곧 조충국은 중랑(中郞)에 임명되었고, 거기장군의 장사가 되었다.[1]
소제 때, 무도의 저가 반란을 일으켰다. 조충국은 대장군 곽광의 호군도위가 되어 이를 진압하였고, 중랑장(中郞將)이 되어 상곡에 주둔하였다. 원봉 원년(기원전 80년)에 수형도위에 임명되었고, 흉노를 쳐 서기왕(西祁王)을 사로잡아 원평 원년(기원전 74년)에 후장군을 겸임하였다.[1]
이후 선제 즉위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영평후(營平侯)에 봉해졌다. 본시 2년(기원전 72년), 포류장군(蒲類將軍)이 된 조충국은 흉노를 쳐 수백 명의 수급을 얻었고, 조정에 돌아와 후장군과 소부를 겸임하였다.[1] 이후 흉노는 기병 십수 만을 동원하여 전한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이를 먼저 알아차린 조정에서는 조충국에게 기병 4만 명을 주어 변경에 주둔시키니 흉노는 물러갔다.
2. 2. 소제 시대의 활약
본래 기병 출신으로, 기사(騎射)에 능하여 우림에 편입되었다. 병법을 익혔고, 여러 이민족들에 대해 잘 알았다.[1]
소제 때, 무도의 저가 반란을 일으키자, 대장군 곽광의 호군도위가 되어 이를 진압하였다. 중랑장(中郞將)이 되어 상곡에 주둔하였고, 원봉 원년(기원전 80년)에 수형도위에 임명되었다. 흉노를 쳐 서기왕(西祁王)을 사로잡아 원평 원년(기원전 74년)에 후장군을 겸임하였다.[1]
이후 선제 즉위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영평후(營平侯)에 봉해졌다. 본시 2년(기원전 72년), 포류장군(蒲類將軍)이 된 조충국은 흉노를 쳐 수백 명의 수급을 얻었고, 조정에 돌아와 후장군과 소부를 겸임하였다.[1] 이후 흉노는 기병 십수 만을 동원하여 전한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이를 먼저 알아차린 조정에서는 조충국에게 기병 4만 명을 주어 변경에 주둔시키니 흉노는 물러갔다.
신작 원년(기원전 61년), 전한에 복속되어 있었던 강족의 무리 중 일부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 전한의 광록대부 의거안국(義渠安國)은 선령강(先零羌)의 수령 서른 명을 붙잡아 죽였고, 이에 나머지 무리가 반발하였다. 이때 조충국의 나이는 일흔이 넘었기 때문에 선제는 다른 사람을 쓰려 하였으나, 조충국은 이를 무릅쓰고 직접 진압에 나섰다.[1]
조충국은 지구전을 펼쳐, 강족 무리에게 사면의 의사가 있음을 보였다. 선제는 조충국의 아들인 우조중랑장(右曹中郞將) 조앙(趙卬)에게 기문과 우림의 기병을 통솔하게 하였고, 또 죄수와 각 지방의 병력을 모아 6만 명을 동원하였다. 주천태수 신무현은 기병을 거느리고 우회하여 후방을 쳐 보급로를 끊자고 하였으나, 조충국은 이에 반대하였다.[1]
선제는 허연수를 강노장군(強弩將軍)에, 신무현을 파강장군(破羌將軍)에 임명하였고, 조충국을 문책하였다. 그러나 조충국은 다시 반발하며 둔전을 건의하였다. 조정의 대신들 또한 조충국의 의견에 동조하니, 선제는 조충국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한편 허연수·신무현으로 하여금 군대를 출발시키게 하였다. 허연수 등은 강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렸고, 조충국은 이듬해에 귀환하였다. 이후 강 내부에서 반목이 일어나 반란은 진압되었고, 조충국은 후장군과 위위를 겸임하였다.[1]
2. 3. 선제 시대의 공적
무제 때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의 가사마(假司馬)가 되어 흉노 정벌에 종군하였는데, 흉노의 포위를 받은 조충국은 백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이를 돌파하였다. 이때 스무 군데에 상처를 입으니 이광리가 무제에게 이를 보고하였고, 무제는 조충국을 불러들여 직접 상처를 보고는 탄식하였다. 곧 조충국은 중랑(中郞)에 임명되었고, 거기장군의 장사가 되었다.
소제 때, 무도의 저가 반란을 일으켰다. 조충국은 대장군 곽광의 호군도위가 되어 이를 진압하였고, 중랑장(中郞將)이 되어 상곡에 주둔하였다. 원봉 원년(기원전 80년)에 수형도위에 임명되었고, 흉노를 쳐 서기왕(西祁王)을 사로잡아 원평 원년(기원전 74년)에 후장군을 겸임하였다.
이후 선제 즉위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영평후(營平侯)에 봉해졌다. 본시 2년(기원전 72년), 포류장군(蒲類將軍)이 된 조충국은 흉노를 쳐 수백 명의 수급을 얻었고, 조정에 돌아와 후장군과 소부[1]를 겸임하였다. 이후 흉노는 기병 십수 만을 동원하여 전한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이를 먼저 알아차린 조정에서는 조충국에게 기병 4만 명을 주어 변경에 주둔시키니 흉노는 물러갔다.
신작 원년(기원전 61년), 전한에 복속되어 있었던 강족의 무리 중 일부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 전한의 광록대부 의거안국(義渠安國)은 선령강(先零羌)의 수령 서른 명을 붙잡아 죽였고, 이에 나머지 무리가 반발하였다. 이때 조충국의 나이는 일흔이 넘었기 때문에 선제는 다른 사람을 쓰려 하였으나, 조충국은 이를 무릅쓰고 직접 진압에 나섰다.
조충국은 지구전을 펼쳐, 강족 무리에게 사면의 의사가 있음을 보였다. 선제는 조충국의 아들인 우조중랑장(右曹中郞將) 조앙(趙卬)에게 기문과 우림의 기병을 통솔하게 하였고, 또 죄수와 각 지방의 병력을 모아 6만 명을 동원하였다. 주천태수 신무현은 기병을 거느리고 우회하여 후방을 쳐 보급로를 끊자고 하였으나, 조충국은 이에 반대하였다.
선제는 허연수를 강노장군(強弩將軍)에, 신무현을 파강장군(破羌將軍)에 임명하였고, 조충국을 문책하였다. 그러나 조충국은 다시 반발하며 둔전을 건의하였다. 조정의 대신들 또한 조충국의 의견에 동조하니, 선제는 조충국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한편 허연수·신무현으로 하여금 군대를 출발시키게 하였다. 허연수 등은 강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렸고, 조충국은 이듬해에 귀환하였다. 이후 강 내부에서 반목이 일어나 반란은 진압되었고, 조충국은 후장군과 위위[1]를 겸임하였다.
2. 4. 말년과 죽음
조충국은 은퇴하였고, 감로 2년(기원전 52년)에 86세로 죽었다. 시호는 장(壯)이라 하였다.[2]
3. 가계
참조
[2]
서적
전한기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