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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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금은 전한 문제 때 시작된 제도로, 열후들에게 봉국의 호구 수에 따라 황금을 징수하거나 특산물을 바치도록 한 것이다. 전한 무제 때인 원정 5년에는 주금을 바치는 과정에서 헌상된 금의 순도가 미달하여 105명의 열후가 작위를 박탈당하고, 승상 조주가 이 사실을 묵인한 죄로 자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열후들이 봉국을 잃었고, 고제의 공신 자손들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주금은 문제 때부터 시행된 제도로, 종묘 제사에 사용될 술(주; 酎)과 함께 황금을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열후들에게서 봉국의 호구 수에 따른 일정량의 황금을 징수하였으며, 호구 수가 적은 경우에는 양조를 돕게 하였다.[1] 교지, 구진, 일남에서는 코뿔소 뿔이나 대모 등딱지를, 울림에서는 상아나 비취를 황금 대신 바치게 하였고, 거두어들인 물품은 소부가 관리하였다.[1]
무제 원정 5년(기원전 112년), 전한은 남월 정벌을 계획하였다. 이때 복식이란 자가 종군을 자청하자, 무제는 이를 치하하고 천하에 포고하였다. 그러나 백 명이 넘는 열후들 중 종군에 나서는 이는 없었다.
2. 주금 제도
2. 1. 주(酎)와 황금
문제 때부터 시행되었다. 주(酎)는 여러 번 발효시킨 술로, 새해 첫날에 빚어서 8월까지 숙성시켰다. 8월이 되면 이 '주'를 종묘에 바치는 의식을 행하고, 이때 열후들에게서 봉국의 호구 수에 따른 일정량의 황금을 징수하였다. 1,000호당 황금 4냥을 징수하였으며, 호구 수가 이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양조를 거들었다.[1]
2. 2. 특산물 징수
문제 때부터 시행되었다. 교지, 구진, 일남에서는 길이 9촌 이상의 코뿔소 뿔이나 대모 등딱지를, 울림에서는 길이 3척 이상의 상아 또는 비취를 황금 대신 징수했다.[1] 거두어들인 물품은 소부가 관리하였다.
3. 주금 사건
이러던 중, 주를 바치는 의식에서 헌상된 금의 순도가 규정에 미치지 못함이 발견되었다. 이 사건으로 105명의 열후가 작위를 잃었고, 승상 조주는 이 사실을 알고도 규탄하지 않은 죄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2]
이 사건으로 조주를 포함한 106명의 열후가 봉국을 잃었고, 고제의 공신 자손으로서 봉국을 유지하고 있었던 집안은 이를 계기로 거의 명맥이 끊겼다.
3. 1. 황금 품질 검사
전한 무제 때인 원정 5년(기원전 112년), 종묘 제사에 헌상된 금을 조사하던 중 소부 당[2]이 금의 순도가 규정에 미치지 못함을 발견하였다.
3. 2. 열후들의 처벌
무제 때인 원정 5년(기원전 112년), 전한은 남월 정벌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주를 바치는 의식에서 소부 당[2]이 헌상된 금을 조사하여 순도가 규정에 미치지 못함을 발견하였다. 이 사건으로 106명의 열후가 작위를 박탈당했고, 승상 조주는 이 사실을 알고도 규탄하지 않은 죄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2]
고제의 공신 자손으로서 봉국을 유지하고 있던 집안은 조주를 포함한 106명의 열후가 봉국을 잃은 이 사건을 계기로 거의 명맥이 끊겼다.
3. 3. 사건의 영향
원정 5년(기원전 112년), 무제가 남월 정벌을 계획했을 때, 백 명이 넘는 열후들 중 아무도 종군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주를 바치는 의식에서 소부 당[2]이 헌상된 금의 순도가 규정에 미치지 못함을 발견하였다. 이 사건으로 106명의 열후가 작위를 잃었고, 승상 조주는 이 사실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은 죄로 자결하였다.[2]
이 사건으로 조주를 포함한 106명의 열후가 봉국을 잃었다. 고제의 공신 자손으로 봉국을 유지하던 집안은 이 사건으로 거의 몰락했다.
4. 역사적 평가
주금 사건은 원정 5년 (무제 시기) 남월 정벌을 계획하던 중 발생했다. 당시 전한은 대규모 군사 활동으로 재정 부담을 안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106명의 열후가 봉국을 잃으면서 고제의 공신 자손으로서 봉국을 유지하던 집안은 거의 명맥이 끊기게 되었다.[2]
이 사건은 중앙집권 강화 조치로 해석될 수 있다. 복식이 종군을 자청했을 때 백 명이 넘는 열후 중 종군을 자청하는 이는 없었다는 점,[2] 주금의 순도 미달을 이유로 열후들의 작위를 박탈하고 승상 조주까지 자결하게 한 점[2] 등은 무제가 제후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주금 사건은 국가 재정 운영의 투명성과 공정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4. 1. 중앙집권 강화
원정 5년(무제 시기), 남월 정벌을 계획하던 중 복식이 종군을 자청하자 무제가 칭찬하였으나, 백 명이 넘는 열후 중 종군을 자청하는 이는 없었다.[2]이때 주를 바치는 의식에서 소부 당이 헌상된 금의 순도가 규정에 미치지 못함을 발견하였다. 이로 인해 105명의 열후가 작위를 박탈당했고, 승상 조주는 이를 알고도 보고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2]
이 사건으로 조주를 포함한 106명의 열후가 봉국을 잃었으며, 고제의 공신 자손으로서 봉국을 유지하던 집안은 거의 명맥이 끊겼다.[2]
4. 2. 경제적 배경
기원전 112년, 전한은 남월 정벌을 계획하였다. 당시 대규모 군사 활동으로 인해 재정 부담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금 사건이 발생하여 재정 상황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해석이 있다.주금을 바치는 의식 중 소부 당[2]이 헌상된 금의 순도가 규정에 미치지 못함을 발견하였다. 이 사건으로 105명의 열후가 작위를 박탈당했고, 승상 조주는 이 사실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은 죄로 자결하였다.
이 사건을 통해 국가 재정 운영의 투명성과 공정성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참조
[1]
문서
역시 4냥을 징수하였다는 기록도 공존한다.
[2]
서적
한서 권19하 백관공경표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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