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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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아부는 전한 문제 시기 조후에 봉해진 인물로,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한 명장이다. 주발의 아들로, 흉노 침입 당시 세류영에서 뛰어난 군사적 면모를 보였고, 경제의 신임을 얻어 태위와 승상을 역임했다. 오초칠국의 난에서 뛰어난 전략으로 반란을 진압했으나, 경제와의 갈등, 양효왕과의 불화 등으로 인해 실각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사했다. 그의 죽음은 경제 치세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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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143년 사망 - 유불식
유불식은 전한 시대 경제에 의해 제음왕에 책봉되었으나 아들 없이 사망하여 제음나라가 폐지되었으며, 그의 생애는 역사서에 기록되었다. - 전한의 태위 - 노관
유방의 친구이자 연왕에 봉해진 노관은 유방과 같은 날에 태어나 어릴 적부터 친밀했으며, 유방의 거병에 참여하여 초한전쟁에서 공을 세웠으나 진희의 반란과 연루되어 흉노로 망명하여 위만조선의 성립에 영향을 미쳤다. - 전한의 태위 - 전분 (전한)
전분은 전한 시대의 관료로, 태위와 승상을 역임하며 무안후에 봉해졌고, 황태후의 친척으로 열후에 봉해졌으나, 권력 다툼 끝에 실각하여 사망했다. - 전한의 거기장군 - 관영 (전한)
관영은 전한 시대의 무장으로, 유방을 섬겨 진나라와 항우를 격파하고, 한나라 건국 후 진희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여씨의 난 때 유씨 가문을 지지하여 문제의 즉위에 기여한 인물이다. - 전한의 거기장군 - 위청 (전한)
위청은 전한 무제 시대에 흉노 정벌로 큰 공을 세워 대장군에 오른 인물이지만, 미천한 신분에서 출발하여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주아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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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주아부는 전한 건국의 공신 주발의 아들로, 형 주승지가 죄를 지어 봉국을 빼앗기자 문제에게서 조후에 봉해져 아버지의 작위를 이었다.[6] 흉노가 상군·운중군을 침입했을 때[7], 문제는 군을 편성해 흉노를 막으면서 주아부를 장군으로 삼아 세류에 진을 치게 했다.
오초칠국의 난이 발발하자, 주아부는 태위가 되어 오나라와 초나라를 치러 나갔다. 그는 오나라와 초나라 군과 직접 교전하는 대신, 양나라에 맡겨두고 양도를 끊는 전략을 택했다.[9] 결국 반란군 중 가장 강력한 나라인 오나라와 초나라를 평정하여 큰 공을 세웠다.[3]
이후 승상에 취임했으나, 경제와 여러 갈등을 겪은 끝에 닷새를 굶다 피를 토하고 죽었으며, 봉국은 폐해졌다.[6]
2. 1. 초기 생애와 세류영
주발의 아들로, 형 주승지가 죄를 지어 봉국을 빼앗기자 문제에게서 조후에 봉해져 아버지의 작위를 이었다.[6]흉노가 상군·운중군을 침입했을 때[7], 문제는 군을 편성해 흉노를 막으면서 주아부를 장군으로 삼아 세류에 진을 치게 했다. 문제가 군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각 군영에 도착했을 때, 세류에서는 전투태세를 갖추고 황제의 진입을 저지했다. 황제가 부절을 사자에게 줘 조명을 전하게 한 후에야 들어갈 수 있었고, 이때에도 군중에서는 말을 타고 달리지 못하는 군법을 황제 일행에게 지키게 했으며, 군례에 따라 인사했다.[6] 문제는 이에 감동하여 주아부의 군영을 칭찬했다.
한나라 건국의 공신인 주발의 차남으로, 젊은 시절부터 군사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흉노의 침입에 맞서 군대를 이끌고 방어 임무를 수행했고, 세류에 주둔하며 엄격한 군율을 적용하여 황제에게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훗날 문제는 이러한 주아부의 모습을 칭찬하며, 황태자(후의 경제)에게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주아부를 군의 총수로 삼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2]
2. 2. 오초칠국의 난 진압
경제는 즉위 후 어사대부 조조의 계책을 받아들여 제후왕의 영토를 삭감하는 중앙집권적 정책을 폈다. 이는 제후왕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경제 3년(기원전 154년)에 오왕 유비의 봉토를 삭감하자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났다.[9]
중위를 지낸 주아부는 태위가 되어 오나라와 초나라를 치러 나갔다. 주아부는 오나라와 초나라 군과 교전하는 것을 피하고, 양나라에게 맡겨두는 한편 양도를 끊는 전략을 세웠다.[9] 조섭이라는 사람의 진언을 받아들여 무관을 통해 낙양으로 갔고, 형양에서 병사를 모았다.
오나라는 양나라를 공격했고, 양나라는 거듭 패해 황제의 조서까지 받아 주아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주아부는 극벽에서 수비를 견고히 할 뿐 양나라를 직접 구원하지 않고, 한퇴당 등에게 경기병을 맡겨 오나라와 초나라의 양도를 끊게 했다. 오나라와 초나라는 양나라의 마지막 반격에 패퇴했고, 주아부를 공격하려 하읍에 주둔하였다. 주아부는 오나라와 초나라의 도전에 응하지 않고, 군중에 소란이 있었음에도 상황을 진정시켰다. 오나라와 초나라 군은 양식이 떨어져 양동작전을 벌였으나 주아부는 이를 간파해 마지막 공격을 무위로 돌렸다. 오나라와 초나라 군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자 주아부는 정예병을 내 추격해 대파했다. 오왕 유비는 강수를 건너 단도로 달아났고, 초왕 유무는 자살했다. 주아부는 오나라와 초나라의 현들을 항복시키고 오왕에게 현상금을 거니, 동월에서 오왕의 머리를 베어 바쳤다.
결국 서로 싸운 지 석 달 만에 반란군 중 가장 강력한 나라인 오나라와 초나라를 평정했다. 제나라·조나라 방면의 반란군은 난포와 역기 등이 제압해 오초칠국의 난은 반군의 패망으로 끝났다. 제장들은 주아부의 계책이 옳았다고 여겼으나, 양효왕과 주아부 사이에는 틈이 생겼다.[3]
2. 3. 실각과 죽음
오초칠국의 난을 평정하고 태위직을 계속 지냈고, 5년 뒤 승상에 취임해 경제에게 중용됐다. 그러나 경제가 율태자를 폐하려는 것에 반대하여 얼마 못 가 틈이 생겼다. 또 양효왕은 입조할 때마다 태후와 함께 주아부의 단점을 늘어놓았다.[6]한편 태후는 효경황후의 오빠 왕신을 후로 삼고자 했고, 경제는 태후의 형제들이 외척이라는 이유만으로 후가 되지 못했다며 반대했으나, 태후는 그 때문에 자기 오빠 두건이 생전에 후가 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며 굽히지 않았다. 경제는 주아부와 의논해 보겠다고 했고, 주아부는 “고황제가 약속하기를 '유씨가 아니면 왕이 되지 못하며, 공이 없으면 후가 되지 못한다. 이를 어기는 자, 천하가 그를 쳐라!'라 했습니다. 왕신은 비록 황후의 오라비이나, 공이 없는데 후작이 되는 것은 이에 어긋납니다.”라고 답했다.[6]
나중에 흉노에서 왕 유서로 등 5명이 투항했는데, 주아부는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했으나 경제는 이들을 모두 열후로 삼았다. 이에 주아부는 칭탈하고 사직했으며, 기원전 147년에 병으로 승상에서 면직됐다.[6] 얼마 지나지 않아 주아부는 경제의 부름을 받아 식사를 했는데, 자르지도 않은 큰 고깃덩이만을 받았고 젓가락도 없었다. 주아부가 젓가락을 청하자, 경제는 웃으면서 "이 정도도 그대에게는 부족한가?"라고 말했다. 주아부가 즉시 사죄하고 물러나니, 그 모습을 보고 경제는 "저렇게 언짢아하는 사람이라니, 어린 임금의 신하는 아니로구나!"라고 말했다.[6]
주아부의 아들이 상방의 공관에 갑옷과 방패 500장을 사서 장례를 준비했는데, 품꾼을 고되게 부리고 돈을 주지 않았다. 품꾼은 이것이 황제의 물건을 함부로 매매한 것임을 알고 분노해 고발했고, 주아부도 연좌돼 심문을 받았다. 주아부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자 경제는 분노해 사건을 대리[10]에게 맡겼고, 대리가 꾸짖었다.
"군후는 모반하려고 했는가?"
"신이 산 것은 부장품일 뿐인데 어찌 모반했다 합니까?"
"군이 지상에서 반역하려 한 게 아니라면, 지하에서 반역하려 했을 테지!"
원래 주아부는 소환되었을 때 자결하려고 했으나 아내의 만류로 그만두고 대리에게 넘겨진 것인데, 대리의 심문은 더욱 혹독해졌다. 결국 주아부는 닷새를 굶다 피를 토하고 죽었으며, 봉국은 폐해졌다.[6] 가문은 형제 주견이 평곡후(平曲侯)에 봉해짐으로써 이어졌다.
3. 평가
주아부의 평가는 엇갈린다. 그는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웠지만, 황제를 포함하여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강력한 인물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성격으로 인해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4] 그의 삶과 죽음은 명성이 높았던 경제의 치세와는 대조적이다.[4]
4. 가계
周亞夫|주아부중국어는 전한 경제 때의 인물로, 주발의 아들이다.[11]
관계 | 이름 |
---|---|
아버지 | 주발 |
5. 기타
전한 문제 후6년(기원전 159년) 겨울, 흉노가 상군·운중군을 침입했을 때[7], 문제는 군을 편성해 흉노를 막으면서 주아부를 종정 유례(후의 초문왕), 축자후 서한[8]과 함께 장군으로 임명하여 각각 패상·극문·세류에 진을 치게 했다. 문제가 군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각 군영에 곧장 수레를 달려 들어가자 패상과 극문에서는 영접했으나, 세류에서는 전투태세를 갖추고 선발대의 진입을 저지했다. 천자가 곧 도착한다고 선발대가 말했으나 통하지 않았고, 황제가 부절을 사자에게 줘 조명을 전하게 한 후에야 들어갈 수 있었다. 이때에도 군중에서는 말을 타고 달리지 못하는 군법을 황제 일행에게 지키게 했으며, 절하지 않고 군례에 따라 인사했다. 문제는 매우 감동했고, 나와서는 놀라워하는 신하들에게 함부로 범할 수 없는 군영이라며 주아부의 군영을 칭찬했다.[6]
주아부가 하내수이던 시절, 온(溫) 땅의 허부(許負)라는 노파가 주아부에게 3년 뒤에는 후(侯)에 봉해지고, 그러고 나서 또 3년 뒤에 장상(將相)이 되어 나라를 다스릴 것이며, 또 9년 뒤에는 굶어서 돌아가실 것이라고 예언했다. 주아부는 자신의 형 주승지가 이미 아버지 주발의 뒤를 이어 후가 되었으니, 형이 죽으면 그 아들이 이어야 할 것이고, 자신이 존귀해진다면 어찌 굶어죽겠냐며 믿지 않았다. 그러나 3년 후 주승지는 죄를 지어 작위가 박탈되었고, 문제가 주발의 아들들 중 어진 자를 물으니 모두 주아부를 추천하여 그가 대신 작위를 이었다.[6]
주아부는 혹리 중 한 명이었던 조우를 냉혹하고 인정없는 인물이라고 평가하지 않았다.
- 미인심계 (2012년, 중국)
5. 1. 일화
전한의 개국공신 주발의 아들로, 형 주승지가 죄를 지어 봉국을 빼앗기자 문제에게서 조후에 봉해져 아버지의 작위를 이었다.[6]문제 후6년(기원전 159년) 겨울, 흉노가 상군·운중군을 침입했을 때[7], 문제가 군을 편성해 흉노를 막으면서 주아부는 종정 유례(후의 초문왕), 축자후 서한[8]과 함께 장군이 돼 각각 패상·극문·세류에 진을 쳤다. 문제가 군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각 군영에 곧장 수레를 달려 들어가자 패상과 극문에서는 영접했으나, 세류에서는 전투태세를 갖추고 선발대의 진입을 저지했다. 천자가 곧 도착한다고 선발대가 말했으나 통하지 않았고, 황제가 부절을 사자에게 줘 조명을 전하게 한 후에야 들어갈 수 있었다. 이때에도 군중에서는 말을 타고 달리지 못하는 군법을 황제 일행에게 지키게 했으며, 절하지 않고 군례에 따라 인사했다. 문제는 매우 감동했고, 나와서는 놀라워하는 신하들에게 함부로 범할 수 없는 군영이라며 주아부의 군영을 칭찬했다.[6]
주아부가 하내수이던 시절, 온(溫) 땅의 허부(許負)라는 노파가 주아부에게 3년 뒤에는 후(侯)에 봉해지고, 그러고 나서 또 3년 뒤에 장상(將相)이 되어 나라를 다스릴 것이며, 또 9년 뒤에는 굶어서 돌아가실 것이라고 예언했다. 주아부는 자신의 형이 이미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후가 되었으니, 형이 죽으면 그 아들이 이어야 할 것이고, 자신이 존귀해진다면 어찌 굶어죽겠냐며 믿지 않았다. 그러나 3년 후 주승지는 죄를 지어 작위가 박탈되었고, 문제가 주발의 아들들 중 어진 자를 물으니 모두 주아부를 추천하여 그가 대신 작위를 이었다.
한나라 건국 공신인 주발의 차남인 주아부는, 문제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던 장형 주승지가 사람을 죽인 죄로 작위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대신 가문을 계승하여 조후에 봉해졌다.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군사 분야에서 활약하여, 흉노가 한나라 영토 내로 침공해 왔을 때 문제로부터 군대를 이끌고 그 방위의 일익을 담당하도록 명을 받았다. 정세가 안정되자, 문제는 장병들을 위문하고자 각 진영을 방문했는데, 어느 진영이나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문제를 맞이했지만, 세류에 있던 주아부의 진영(유영)은 "이곳은 전쟁터이므로, 황제 폐하께서도 그에 상응하는 예법으로 열병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며, 문제에게도 진중의 예법을 지키게 하고, 진영 내에서도 하마한 후에 통과하도록 했다.
문제의 측근들은 주아부를 비난했지만, 문제는 그를 진정한 장군다운 인물이라고 칭찬했다.
하내군 태수였던 시절, 위표의 측실이었던 박씨 (문제의 생모)에게 예언을 적중시킨 역자 허부가 주아부에게 3년 후에 열후로 승진하고, 8년 후에 대장군이 되어 군권을 장악할 것이며, 9년 후에는 굶어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주아부는 형이 이미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는데 자신이 열후가 될 수 있겠냐며 반박했다. 허부는 주아부의 입에 세로 줄이 파인 것을 보고 '굶어 죽을 상'이라고 말했다(『사기』 「강후주발세가」).
주아부는 혹리 중 한 명이었던 조우를 냉혹하고 인정없는 인물이라고 평가하지 않았다.
5. 2.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 미인심계 (2012년, 중국)
참조
[1]
문서
[2]
서적
Kingly Splendor
Columbia University Press
2020-12-16
[3]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Han dynasty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3
[4]
간행물
Reasons for Changing the System of Prime Ministers in the Western Han Dynasty
https://doi.org/10.2[...]
2013-07-01
[5]
문서
[6]
위키문헌
사기 권57 강후주발세가제27
:zh:史記/卷057
[7]
위키문헌
사기 권10 효문본기제10
:zh:史記/卷010
[8]
문서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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