쥘 아르두앙 망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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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쥘 아르두앙 망사르는 프랑스 고전주의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베르사유 궁전, 앵발리드, 방돔 광장 등 17세기 프랑스 건축의 중요한 작품들을 설계했다. 그는 루이 14세를 위해 일하며 왕실 건축가로 성장했고, 베르사유 궁전의 증축을 주도하여 '거울의 방'을 완성했으며, 앵발리드의 돔을 설계하는 등 뛰어난 건축적 역량을 발휘했다. 그의 건축 양식은 단순함, 넓은 공간, 형태의 반복을 특징으로 하며, 프랑스 후기 바로크 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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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 아르두앙 망사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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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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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쥘 아르두앙 |
로마자 표기 | Jules Hardouin-Mansart |
출생 | 1646년 4월 16일 |
사망 | 1708년 5월 11일 |
국적 | 프랑스 |
직업 | |
직업 | 건축가 건축업자 |
가족 | |
친척 | 프랑수아 망사르 (외삼촌) |
경력 | |
주요 건축물 | 베르사유 궁전 그랑 트리아농 앵발리드 플라스 데 빅투아르 플라스 방돔 |
기타 | |
영향 | 루이 14세 |
2. 생애
쥘 아르두앙 망사르는 1677년 베르사유 궁전 확장 공사를 시작하여 그의 남은 생애를 이 프로젝트에 바쳤다.[2] 그는 곧 왕립 건축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1678년 베르사유 공사 감독이 되었다.[2] 왕실에서 가장 저명한 건축가였던 그는 1681년 국왕의 수석 건축가, 1682년 귀족, 1685년 국왕의 감독관, 1691년 왕실 건물 감독관을 거쳐 1699년에는 건물 감독관 빌라세르프의 자리를 이어받았다.[2]
그의 승진은 디자인 능력뿐만 아니라 복잡한 프로젝트 관리 능력 덕분이었다.[2] 그는 아이디어를 스케치하고 필요에 따라 조정하며 예산을 관리했다.[2] 말년에는 로베르 드 코트 등에게 세부 사항을 맡겼고, 1702년 사고뉴 백작 작위를 받았지만 6개월 후 마를리 궁전에서 사망했다.[2]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쥘 아르두앙 망사르는 1646년 파리에서 쥘 아르두앙(Jules Hardouin)으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건축의 고전적 전통을 확립한 인물 중 한 명이자 그의 고모부였던 프랑수아 망사르에게서 건축을 배웠다. 아르두앙은 망사르의 설계도와 그림을 상속받았으며, 1668년 자신의 이름에 망사르라는 성을 덧붙였다.[1] 그는 형 미셸과 함께 건축 공사업자로 경력을 시작했지만, 1672년 건축에 전념하기로 했다.[1] 1674년 루이 14세를 위해 일하는 왕실 건축가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1] 그의 첫 번째 중요한 프로젝트는 왕비 몽테스팡 부인을 위해 지은 끌라니 성이었다.[1] 그는 설계와 건축뿐만 아니라 관료적 외교에도 능숙함을 보여주었다.[1] 그는 몽테스팡 부인과 전쟁장관 루부아 후작의 보호와 지원을 받았다.[1] 그는 조경 디자이너 르 노트르에게서 배우고 함께 일했으며, 마침내 국왕과 직접 일하게 되었다.[1]2. 2. 경력 초기: 왕실 건축가로의 등용
쥘 아르두앙 망사르는 1646년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프랑스 고전주의 건축의 선구자인 망사르의 조카였습니다. 그는 망사르의 설계도와 그림을 상속받았고, 1668년 자신의 이름에 망사르를 추가했습니다. 1672년 건축에 전념하기 전까지 형 미셸과 함께 건축 공사업자로 일했습니다.[1]1674년, 망사르는 루이 14세의 왕실 건축가 그룹에 합류했습니다. 그의 첫 주요 프로젝트는 왕비 몽테스팡 부인을 위해 지은 끌라니 성이었습니다. 그는 설계와 건축뿐만 아니라 관료적 외교에도 능숙했습니다. 몽테스팡 부인과 전쟁장관 루부아 후작의 지원을 받았으며, 조경 디자이너 르 노트르에게 배우고 협력하여, 마침내 국왕과 직접 일하게 되었습니다.[1]
1677년, 망사르는 베르사유 궁전 확장 공사를 시작했고, 이 프로젝트는 그의 남은 생애 동안 그를 바쁘게 만들었습니다. 곧 그는 왕립 건축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습니다. 1678년 베르사유 공사 감독이 되었고,[2] 왕실에서 가장 저명한 건축가가 되었습니다. 1681년 국왕의 수석 건축가가 되었고 1682년 귀족 작위를 받았습니다. 1685년 국왕의 감독관이 되었고, 1691년에는 고령의 건물 감독관 빌라세르프 밑에서 왕실 건물 감독관이 되었으며, 1699년 그를 대신했습니다.[1]
그의 승진은 디자인으로 후원자를 만족시키는 능력뿐만 아니라, 많은 요소와 디자이너가 포함된 크고 복잡한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능력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아이디어를 스케치하고 필요에 따라 개입하고 조정하며, 때때로 현장을 방문하여 예산이 통제되고 있는지 확인했습니다.[1]
2. 3. 베르사유 궁전 증축
167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아르두앙망사르는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 설계와 건설을 담당했다. 그는 왕실 건축가 루이 르 보의 뒤를 이어 ''바티망 뒤 루아 감독''(왕실 건물 감독)이 되었다. 1678년부터 그는 그의 전임자 루이 르 보가 시작했던 루이 13세의 원래 샤토를 둘러싼 새로운 건물의 "외피"를 완성했다.[1] 그는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궁전 1층 테라스를 그의 협력자이자 화가인 샤를 르 브륀이 풍부하게 장식한 유명한 거울의 방으로 변모시켰다.[1] 그는 또한 대리석 안뜰을 향한 1층 정면을 재건하여 큰 아치형 창문을 내어 더 많은 빛을 들여왔고, 왕실을 위한 더 큰 창문이 있는 새로운 중앙 주거 동을 추가했다.[1] 샤토 내에서 증가하는 직원과 하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그는 그랑 코뮌(1682–85)을 건설했고, 왕실 가족의 말과 마차를 위해 궁전 시가지 쪽에 두 개의 웅장한 마구간을 건설했다(1682년 완공).[1]그의 후기 궁전 증축에는 남쪽 날개 끝의 지하 중간층에 있는 오랑주리(1684–86)가 포함되는데, 두 개의 기념비적인 계단으로 접근하고 자체 침하 정원으로 열린다.[1] 생애 말기에 그는 궁정의 소음과 의식으로부터 왕을 위한 피난처로 별도의 작은 1층 궁전인 대트리아농궁(1687)을 건설했다.[1] 베르사유에서 그의 마지막 프로젝트는 남쪽 날개의 건축물에 신중하게 통합된 예배당(1699–1710)이었다.[1]
2. 4. 앵발리드 건설
쥘 아르두앙 망사르는 1676년 3월 1일, 프랑스의 전쟁장관 루부아 백작의 명으로 파리 중심부에 건설 중이던 앵발리드 건설을 인계받았다. 앵발리드는 1671년 리베랄 브륀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국왕은 브륀의 계획과 공사 지연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1]브륀의 원래 계획은 소박한 예배당이었으나, 망사르는 참전 용사들을 위한 성가대석과 국왕을 위한 돔 형태의 왕실 예배당으로 구성된 더 웅장한 계획을 제안했다. 그는 앵발리드 건물 전체의 프로젝트를 맡아 신속하게 주거 시설과 병동 건설을 완료하고, 1676년부터 참전 용사들을 위한 교회 성가대석 공사를 시작했다. 1677년 여름에는 지붕 공사가 완료되었고, 1678년 4월에는 제대석 목공 작업을, 1679년에는 오르간 제작을 의뢰했다.[2]
왕실 예배당 공사는 더 느리게 진행되었다. 돔은 발-드-그라스 교회에 이어 파리에서 가장 먼저 건설된 돔 중 하나로, 그의 고모부인 프랑수아 망사르 등이 설계한 발-드-그라스 교회와 콜레주 데 카트르 나시옹의 영향을 받았다. 초기 계획에는 돔 아래에 하나의 거대한 공간과 돔 내부의 그림 장식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프랑스군의 패배와 재정 문제로 인해 계획이 수정되었다. 망사르는 천장 그림을 제거하고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내부 돔을 사용해 돔을 재설계하고, 이중 드럼 위에 돔을 설치하여 높이를 높였다. 그는 조각가 프랑수아 지라르돈에게 건물 조각상 제작을 의뢰했고, 1690년까지 많은 조각가들이 정면 벽감 조각상 제작에 참여했다. 전쟁 후 재정 위기로 1695년에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699년 전쟁이 끝난 후 재개되어, 왕실 예배당은 1706년 8월 22일 국왕이 참석한 가운데 봉헌되었다.[3]
2. 5. 기타 주요 작품
2. 6. 후원자와 협력자
그는 유명한 고모부인 망사르에게서 배웠고, 설계도와 그림을 상속받아 1668년 자신의 이름에 망사르를 추가했다.[1] 1674년 루이 14세를 위해 일하는 왕실 건축가가 되었고, 몽테스팡 부인과 전쟁장관 루부아 후작의 후원을 받았다.[1] 르 노트르와 협업했고, 나중에는 국왕과 직접 일하게 되었다.[1]1677년 베르사유 궁전 확장 공사를 시작했고, 1678년 베르사유 공사 감독이 되었다.[2] 1681년 국왕의 수석 건축가, 1682년 귀족, 1685년 국왕의 감독관, 1691년 왕실 건물 감독관을 거쳐 1699년에는 건물 감독관 빌라세르프의 자리를 이어받았다.[2]
그는 디자인 능력뿐만 아니라 복잡한 프로젝트 관리 능력으로 후원자들을 만족시켰다.[3] 아이디어를 스케치하고 필요에 따라 조정하며 예산을 관리했다.[3] 후반기에는 로베르 드 코트 등에게 세부 사항을 맡겼다.
2. 7. 말년과 죽음
쥘 아르두앙 망사르는 말년에, 특히 그의 후계자로 선택된 로베르 드 코트를 비롯한 그 밑에서 일하는 건축가들에게 더 많은 세부 사항을 맡겼다. 그는 1702년 사고뉴 백작 작위를 받았지만, 6개월 후 왕실 마를리 궁전에서 사망했다.[1]3. 건축 양식
아르두앙 망사르는 루이 14세 양식 또는 프랑스 고전주의로 알려지게 된 건축 양식의 대표적인 거장이었다. 그는 샤토, 교회, 파빌리온, 개인 주택, 공원 및 도시 광장 등 다양한 구조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원래 건물의 특징을 잃지 않고 자신의 독창적인 변형을 더하여 건물을 개조, 수정, 확장 및 재건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는데, 특히 베르사유 궁전에서 그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의 성공은 매우 재능 있는 협력자들을 선발하고 지도할 수 있는 능력 덕분이었다. 그의 협력자들 중에는 베르사유 궁전 내부의 많은 부분을 그의 건축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한 인테리어 디자이너 샤를르 르 브룅과, 그의 처남이자 1708년 그의 후계자가 되어 그가 베르사유 궁전에서 시작한 주요 프로젝트들을 완성한 로베르 드 코트가 포함된다.[1]
그의 건축은 특히 단순함, 넓고 매끄러운 공간, 형태의 반복(특히 반원형 아치와 분리된 기둥이 있는 아케이드), 긴 수평선, 분리된 열린 공간을 특징으로 한다. 그는 종종 파사드 앞에 긴 기둥 줄을 사용하여 위엄을 더하고 구조의 불규칙성을 숨겼다. 그는 건축적 질서를 사용하여 특히 베르사유 예배당과 베르사유 궁전 및 대트리아농의 내부 표면에 특별한 장엄함을 부여하였다.
그는 앵발리드의 돔(1706년 완공)[1]과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 파사드, 그리고 베르사유의 거울의 방에서 보여주었듯이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능숙했다.
4. 주요 작품
쥘 아르두앙 망사르는 바로크 건축과 프랑스 고전주의 건축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그의 주요 작품들은 웅장함과 화려함이 특징이다. 그는 베르사유 궁전과 앵발리드 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 오랑주리, 대트리아농, 왕실 예배당 등은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앵발리드에서는 돔 교회를 설계하여 파리 건축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또한, 망사르는 도시 계획에도 참여하여 파리의 빅투아르 광장과 방돔 광장을 설계했다. 이 광장들은 루이 14세의 권위를 상징하는 기념비적인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그의 주요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 파리 천문대
- 방돔 광장
- 루아얄 다리
- 생제르맹앙레 성
- 아를 시청
- 샹보르 성 예배당
- 파리의 라 무네 내에 있는 콩티 호텔(1669)
- 클라니 샤토(1675–1683)
- 마를리 샤토(1679–1684) (프랑스 혁명 이후 철거됨)
- 네무르 시청(1669) (구 노트르담 수녀회 수도원)
- 아를 시청(1676)
- 발 샤토(1674–1677)
- 오드나의 라 셰즈 샤토(1676)
- 샹티이의 망스 파빌리옹(1676–1680)
- 카스트르 주교궁(1677–1679)
- 베르사유의 보빌리에 호텔(1681)
- 베르사유의 콜베르 드 크루아시 호텔(1682)
- 당피에르앙이벨린의 당피에르 샤토(1682–1684)
- 베르사유의 슈브뢰즈 호텔(1683)
- 부리앙벡생의 부리 샤토(1685)
- 빅투아르 광장(1686)
- 스소 샤토의 오랑주리(1686)
- 생시를레콜의 생루이 왕실 저택(1686)
- 샹티이의 Église Notre-Dame-de-l'Assomption de Chantilly|샹티이의 노트르담 드 라솜시옹 교회프랑스어 계획(1687–1692)
- 마를리르와의 생비고르 교회(1688–1689)
- 스위스 보주주의 릴 샤토 계획
- 푸아시의 생루이 교회 재건축(1695–1708)
- 그랑 도팽을 위한 메종 샤토 재건축(1698–1704)
- 리세 미셸레(방브)의 행정 건물인 현재의 방브 샤토(1698)
- 리옹 시청 재건축(1701–1703)
- 파리의 생로크 교회(1701–1722)
- 뫼동 궁(1705), 1871년 화재로 소실되고 1877년 이후 천문대로 개조됨[1]
4. 1. 베르사유 궁전
167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아르두앙 망사르는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 설계와 건설을 담당했다. 그는 왕실 건축가 루이 르 보의 뒤를 이어 ''바티망 뒤 루아 감독''(왕실 건물 감독)이 되었다. 1678년부터 그는 그의 전임자 루이 르 보가 시작했던 루이 13세의 원래 샤토를 둘러싼 새로운 건물의 "외피"를 완성했다.[1] 그는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궁전 1층 테라스를 그의 협력자이자 화가인 샤를 르 브륀이 풍부하게 장식한 유명한 거울의 방으로 변모시켰다. 그는 또한 대리석 안뜰을 향한 1층 정면을 재건하여 큰 아치형 창문을 내어 더 많은 빛을 들여왔고, 왕실을 위한 더 큰 창문이 있는 새로운 중앙 주거 동을 추가했다. 샤토 내에서 증가하는 직원과 하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그는 그랑 코뮌(1682–85)을 건설했고, 왕실 가족의 말과 마차를 위해 궁전 시가지 쪽에 두 개의 웅장한 마구간을 건설했다(1682년 완공).[1]그의 후기 궁전 증축에는 남쪽 날개 끝의 지하 중간층에 있는 오랑주리(1684–86)가 포함되는데, 두 개의 기념비적인 계단으로 접근하고 자체 침하 정원으로 열린다.[1] 생애 말기에 그는 궁정의 소음과 의식으로부터 왕을 위한 피난처로 별도의 작은 1층 궁전인 대트리아농궁(1687)을 건설했다.[1] 베르사유에서 그의 마지막 프로젝트는 남쪽 날개의 건축물에 신중하게 통합된 예배당(1699–1710)이었다.[1]
4. 2. 앵발리드
1676년 3월 1일, 프랑스의 전쟁장관 프랑수아미셸 르 텔리에 드 루부아 백작은 쥘 아르두앙 망사르에게 파리 중심부에 건설 중이던 거대한 병원이자 예배당인 앵발리드 건설을 인계했다.[1] 이 프로젝트는 1671년 리베랄 브륀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일부 주거용 건물은 완공되어 이미 사용 중이었지만, 병사들을 위한 중앙 건물인 예배당은 아직 착공되지 않았다. 국왕은 브륀이 제시한 계획에 만족하지 못하고 공사의 지연을 불만스러워했다.[1] 같은 날, 루부아는 브륀을 해임하고 왕실 내부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아르두앙 망사르를 불러 교회 건설을 맡겼다.[1]브륀이 원래 계획했던 참전 용사들을 위한 예배당은 규모와 장식이 비교적 소박했다. 아르두앙 망사르는 두 개의 인접한 부분으로 구성된 훨씬 더 장대한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하나는 참전 용사들을 위한 성가대석이고, 다른 하나는 국왕을 위한 장엄한 돔 형태의 왕실 예배당이었다. 이는 장관이 제안했던 것보다 훨씬 큰 규모였지만, 국왕의 마음에 든 것으로 보인다.[2] 긴 논의 끝에 아르두앙 망사르는 교회뿐 아니라 앵발리드 건물 전체의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 그는 신속하게 참전 용사들을 위한 주거 시설과 병동 건설을 조직하고 완료했다. 1676년 그는 참전 용사들을 위한 교회 부분인 성가대석 공사를 시작했다. 1677년 여름에는 지붕 공사가 완료되었고, 1678년 4월에는 제대석 목공 작업을, 1679년에는 오르간 제작을 의뢰할 수 있었다.[2]
왕실 예배당 공사는 더 느리게 진행되었다.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돔으로, 발-드-그라스 교회에 이어 파리에서 가장 먼저 건설된 돔 중 하나였다. 그의 초기 계획에는 돔 아래에 하나의 거대한 공간과 돔 내부의 그림 장식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사 중에 프랑스군이 네덜란드에서 패배를 당했고, 재정총감 장 바티스트 콜베르는 자금 지원을 늦추었다. 아르두앙 망사르는 초기 계획을 수정하여 천장 그림을 제거하고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내부 돔을 사용하여 돔을 재설계해야 했다. 그는 이중의 드럼 위에 돔을 설치하여 이전 파리 돔보다 높이를 높였다. 그는 조각가 프랑수아 지라르돈에게 건물의 주제, 성인의 미덕, 프랑스 국왕을 묘사하는 조각상 제작을 의뢰했다. 1690년까지 많은 조각가들이 정면의 벽감을 위한 조각상 제작에 참여했다. 전쟁 후 재정 위기가 발생하여 1695년에 공사가 완전히 중단되었고, 1699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재개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공사가 재개되어 왕실 예배당은 마침내 1706년 8월 22일 국왕이 참석한 가운데 봉헌되었고, 이는 아르두앙 망사르 사망 직전이었다.[3] 이것은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남아 있다.[3]
4. 3. 방돔 광장
아르두앙 망사르는 파리의 주목할 만한 두 주거 광장인 빅토르 광장(1685년)과 방돔 광장(1699년)을 설계한 중요한 도시 설계자였다. 이 두 광장은 그의 다른 건축물들처럼 루이 14세의 위엄과 영광을 표현하도록 설계되었다. 빅토르 광장은 루이 14세 승리 기념비를 중심으로 조화롭게 어울리는 주거용 건물들이 원형으로 둘러싸여 건설되었다. 원래 동상은 혁명 이후 녹여졌고 나중에 복제품으로 대체되었으며, 광장은 이후 다른 스타일의 가로수길과 건물들이 추가되면서 여러 차례 크게 변경되었다.[1]방돔 광장은 빅토르 광장보다 더 큰 규모였지만, 아르두앙 망사르는 안쪽을 향한 모퉁이 건물들과 장식용 박공으로 엄격한 상자 모양을 깨뜨리는 설계를 선보였다.[1]
4. 4. 기타 작품
- 파리 천문대
- 방돔 광장
- 루아얄 다리
- 생제르맹앙레 성
- 아를 시청
- 샹보르 성 예배당
- 클라니 샤토(1675–1683)
- 마를리 샤토(1679–1684) (프랑스 혁명 이후 철거됨)
- 네무르 시청(1669) (구 노트르담 수녀회 수도원)
- 발 샤토(1674–1677)
- 오드나의 라 셰즈 샤토(1676)
- 샹티이의 망스 파빌리옹(1676–1680)
- 카스트르 주교궁(1677–1679)
- 베르사유의 보빌리에 호텔(1681)
- 베르사유의 콜베르 드 크루아시 호텔(1682)
- 당피에르앙이벨린의 당피에르 샤토(1682–1684)
- 베르사유의 슈브뢰즈 호텔(1683)
- 부리앙벡생의 부리 샤토(1685)
- 파리의 빅투아르 광장(1686)
- 스소 샤토의 오랑주리(1686)
- 생시를레콜의 생루이 왕실 저택(1686)
- 샹티이의 Église Notre-Dame-de-l'Assomption de Chantilly|샹티이의 노트르담 드 라솜시옹 교회프랑스어 계획(1687–1692)
- 마를리르와의 생비고르 교회(1688–1689)
- 스위스 보주주의 릴 샤토 계획
- 푸아시의 생루이 교회 재건축(1695–1708)
- 그랑 도팽을 위한 메종 샤토 재건축(1698–1704)
- 리세 미셸레(방브)의 행정 건물인 현재의 방브 샤토(1698)
- 리옹 시청 재건축(1701–1703)
- 파리의 생로크 교회(1701–1722)
- 뫼동 궁(1705), 1871년 화재로 소실되고 1877년 이후 천문대로 개조됨
참조
[1]
서적
Holt, Rinehart and Winston
[2]
웹사이트
Jules Hardouin-Mansart French architect
https://www.britanni[...]
[3]
서적
건축의 유혹
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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