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타 세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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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타 세레니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 2012년 사망했다. 1921년 빈에서 태어나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프랑스로 이주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유엔 구호 복구 행정처에서 난민 지원 업무를 수행했다. 1966년부터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메리 벨 사건, 프란츠 슈탕글 인터뷰 등을 다룬 책을 저술했다. 특히, 알베르트 슈페어의 전기, 홀로코스트 부정론자 데이비드 어빙과의 소송 등으로 주목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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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타 세레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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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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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21년 3월 13일 |
출생지 | 빈, 오스트리아 |
사망일 | 2012년 6월 14일 |
사망지 | 케임브리지, 잉글랜드, 영국 |
직업 | 작가 역사가 언론인 |
언어 | 영어, 독일어 |
장르 | 논픽션 |
주제 | 홀로코스트 아동 학대 사회 |
주요 작품 | The Case of Mary Bell: A Portrait of a Child Who Murdered (1972) Albert Speer: His Battle with Truth (1995) |
배우자 | 돈 허니먼 (1948년–2011년) |
친척 | 루트비히 폰 미제스 (양아버지) |
수상 | 더프 쿠퍼 상 (1995년) 제임스 테이트 블랙 기념상 (1995년) 스티그 다게르만 상 (2002년) CBE (2004년) |
기타 | |
이름 (독일어) | Gitta Sereny |
2. 생애
192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세레니 페르디난트(Serény Ferdinánd)는 프로테스탄트 신자였던 헝가리 귀족이었다. 어머니 마르기트 헤르츠펠트(Margit Herzfeld)는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배우였다[2]. 지타가 2살 때 아버지가 사망했다. 지타의 의붓아버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의 경제학자 루트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였다[3]. 지타의 어머니가 미제스와 재혼한 것은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병합되기 직전이었다.
아버지 페르디난트는 영국을 선호하여, 자녀를 영국에서 공부시키고 싶어했다. 그 뜻에 따라 지타는 잉글랜드 켄트 주에 있는 기숙학교에 다니며 영어를 배웠다. 1934년 오스트리아로 귀국했던 지타는 다시 기숙학교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탔지만, 그 기차가 고장나 뉘른베르크에서 지연되었다. 지타는 여기서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당대회를 개최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것에 참가했다고 한다. 기숙학교에 도착한 지타는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나의 투쟁』을 받았다. 이것을 읽은 지타는 "히틀러는 유대인을 진심으로 싫어한다"고 말했다고 한다[18]. 나치 당대회에 참가한 경험은 그녀를 나치 지지자로 바꾸지 않았다. 악의 매력을 탐구하고 싶어하는 그녀의 충동은 이 때의 경험에 근거했다고 한다[19].
1938년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점령하자 지타는 프랑스로 이주했다.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에서 고아들을 돌보았지만, 조국 해방을 내걸고 싸우던 지하 조직과의 연루를 이유로 국외로 탈출했다[4].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연합국의 점령 하에 있던 독일에서, 제레니는 유엔 구호 복구 행정처(The United Nations Relief and Rehabilitation Administration)에 고용되어 난민을 지원하기 위해 일했다. 그녀는 "아리아인"으로 키워질 목적으로 나치에게 납치된 아이들을 본인의 가족과 재회시키는 역할도 맡았다[5]. 납치된 아이들은 반드시 원래 가족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고, 이 경험은 심적 외상을 가져올 가능성이 있었지만, 지타가 그 아이들을 기차에 태워 폴란드로 데려갔을 때, 아이들은 회복된 모습을 보였고, 그것을 본 가족들이 매우 기뻐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5].
1947년 제레니는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에서 살았다. 여기서 장래의 남편이 될 미국인 사진가 돈 허니먼(Don Honeyman)을 만나 1948년에 결혼했다. 허니먼의 직장 때문에, 부부는 파리에서 런던으로 이사했고, 1952년에는 뉴욕시로 이주했다.
1966년 이후, 제레니는 저널리스트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녀는 저널리스트로서의 훈련을 받은 적은 없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에 걸쳐 여러 신문과 잡지에 기고했다. 1966년, 제레니는 데일리 텔레그래프(The Daily Telegraph)에 전문적인 기사를 처음 기고했다. 제레니가 쓴 기사의 대부분은 젊은이, 사회 보장, 어린이, 부모, 사회와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이후 제레니는 1968년에 두 명의 남자 아이를 살해한 당시 11세 소녀 메리 벨의 재판을 취재하여 메리 벨에 의한 살인 사건에 관한 상세한 조사를 진행했다.
1945년 4일 동안 뉘른베르크 재판에 옵서버로 참석했으며, 여기서 처음으로 알베르트 슈페어를 보았고, 나중에 그에 관한 책 ''알베르트 슈페어: 진실과의 투쟁''을 썼다.[6] 이 책으로 1995년 제임스 테이트 블랙 기념상을 수상했다. 이 책은 또한 나중에 데이비드 에드거에 의해 연극 ''알베르트 슈페어''로 각색되었고, 2000년 트레버 넌이 내셔널 시어터에서 연출했다.[6]
영국의 홀로코스트 부정론자 데이비드 어빙은 세레니와 가디언 미디어 그룹을 상대로 ''옵저버''지 서평 두 건에 대해 명예 훼손 소송을 제기했다.[28] 세레니는 서평에서 어빙이 나치를 복권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역사적 기록을 위조했다고 주장했다.[28] 어빙은 세레니의 저서 ''히틀러의 전쟁'' 출판 이후 그의 주장을 성공적으로 반박해 온 그녀를 "그 쪼그라든 나치 헌터"라고 부르며 개인적인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28]
1977년, 세레니는 히틀러가 "최종 해결"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따라서 "최종 해결"을 명령할 수 없었다는 어빙의 주장에 대한 그의 인용 출처를 대조했다.[28] 지타 세레니는 어빙이 그의 주장에 모순되는 추가적인 주장을 했다는 것을 증명했다.[28] 세레니는 "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히틀러 측근의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28] 세레니는 나중에 "그에게는 무서운 일이다. 그는 '우리는 같은 여물통에서 비빈다'고 말한다. 차이점은 그는 그 여물통을 좋아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데이비드 어빙] 이 모든 것에 절망이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28]
이 사건은 법정으로 가지 않았지만, 가디언 미디어 그룹이 법적 방어를 준비하는 데 든 비용은 80만 파운드에 달했다.[28]
지타 세레니는 오랜 투병 끝에 2012년 6월 14일, 91세의 나이로 케임브리지에 있는 애든브룩 병원(Addenbrooke's Hospital)에서 사망했다.[14]
2. 1. 초기 생애와 가족
지타 세레니는 192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헝가리 개신교 귀족인 페르디난트 세레니였으며, 그녀가 두 살 때 사망했다.[2]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전직 배우였던 어머니 마르기트 헤르츠펠트는[2] 경제학자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재혼했다.[3]아버지 페르디난트는 영국을 선호하여 자녀를 영국에서 공부시키고 싶어했고, 그 뜻에 따라 지타는 잉글랜드 켄트 주에 있는 기숙학교에 다니며 영어를 배웠다. 1934년 오스트리아로 귀국했던 지타는 다시 기숙학교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탔지만, 기차 고장으로 뉘른베르크에서 나치 당대회를 목격하고 참가했다.[18] 기숙학교에 도착한 지타는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받고, "히틀러는 유대인을 진심으로 싫어한다"고 말했다고 한다.[18]
1938년 나치의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그녀는 프랑스로 이주하여 독일 점령 기간 동안 고아들과 함께 일했으며, 프랑스 레지스탕스와의 연계 때문에 그 나라를 탈출해야 했다.[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녀는 연합국 원조 및 재건국에서 연합군 점령 하의 독일의 난민들을 위해 일했다. 그녀는 나치에 의해 납치된 아이들을 생물학적 가족과 재결합시키는 임무를 맡았는데,[5] 아이들이 항상 원래 가족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었지만, 폴란드에서 가족들이 아이들을 되찾은 것에 대해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다.[5]
1947년 제레니는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에서 미국인 사진가 돈 허니먼(Don Honeyman)을 만나 1948년에 결혼했다. 이후 런던을 거쳐 1952년 뉴욕시로 이주했다. 1966년 이후에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데일리 텔레그래프 등에 젊은이, 사회 보장, 어린이와 부모, 사회와의 관계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16][17]
2. 2. 청소년기와 나치 경험
지타 세레니는 192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헝가리 개신교 귀족 출신 아버지 페르디난트 세레니와 함부르크 출신 배우였던 어머니 마르기트 헤르츠펠트 사이에서 태어났다.[2] 그녀가 두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한 후, 어머니는 경제학자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재혼했다.[3]13세 때, 세레니는 기숙 학교로 가는 기차를 탔으나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 참석하게 되었다.[4] 그녀는 과제를 위해 전당대회에 대해 작성했고, 교사는 그녀가 본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나의 투쟁''을 읽도록 했다.[4] 이 경험은 그녀가 악의 매력을 탐구하고 싶어하는 충동의 근거가 되었다고 한다. 1938년 나치의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그녀는 프랑스로 이주하여 독일 점령 기간 동안 고아들과 함께 일했으며, 프랑스 레지스탕스와의 연계 때문에 프랑스를 탈출해야 했다.[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녀는 연합국 원조 및 재건국에서 연합군 점령 하의 독일의 난민들을 위해 일했다.[5] 그녀의 임무 중 하나는 나치에 의해 납치된 아이들을 생물학적 가족과 재결합시키는 것이었다.[5]
1945년, 세레니는 4일 동안 뉘른베르크 재판에 옵서버로 참석했으며, 여기서 처음으로 알베르트 슈페어를 보았다.[6] 1948년에는 사진작가 돈 허니먼과 결혼하여 런던으로 이주하여 두 자녀를 길렀다.[7]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까지 그녀는 존 앤스티 편집장의 ''데일리 텔레그래프 매거진''에 광범위하게 글을 썼다. 이 기사들은 종종 젊은이, 사회 서비스, 아이들, 그리고 그들의 부모 및 사회와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2. 3. 전후 활동과 뉘른베르크 재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지타 세레니는 연합국 원조 및 재건국에서 연합군 점령 하의 독일의 난민들을 위해 일했다. 그녀의 임무 중 하나는 "아리아인"으로 키우기 위해 나치에 의해 납치된 아이들을 생물학적 가족과 재결합시키는 것이었다.[5] 아이들이 항상 원래 가족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었지만, 세레니는 그러한 아이들을 태운 기차를 폴란드로 호송했을 때 원래 가족 구성원들이 아이들을 되찾은 것에 대해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다.[5]1947년 제레니는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에서 살았다. 여기서 장래의 남편이 될 미국인 사진가 돈 허니먼(Don Honeyman)을 만나 1948년에 결혼했다.[16] 허니먼의 직장 때문에, 부부는 파리에서 런던으로 이주했고, 1952년에는 뉴욕시로 이주했다.
세레니는 1945년 4일 동안 뉘른베르크 재판에 옵서버로 참석했으며, 여기서 처음으로 알베르트 슈페어를 보았고, 나중에 그에 관한 책 ''알베르트 슈페어: 진실과의 투쟁''을 썼다.[6] 이 책으로 1995년 제임스 테이트 블랙 기념상을 수상했다. 이 책은 또한 나중에 데이비드 에드거에 의해 연극 ''알베르트 슈페어''로 각색되었고, 2000년 트레버 넌이 내셔널 시어터에서 연출했다.[6]
1966년 이후, 제레니는 저널리스트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녀는 저널리스트로서의 훈련을 받은 적은 없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에 걸쳐 여러 신문과 잡지에 기고했다. 1966년, 제레니는 데일리 텔레그래프(The Daily Telegraph)에 전문적인 기사를 처음 기고했다. 제레니가 쓴 기사의 대부분은 젊은이, 사회 보장, 어린이, 부모, 사회와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이후 제레니는 1968년에 두 명의 남자 아이를 살해한 당시 11세 소녀 메리 벨의 재판을 취재하여 메리 벨에 의한 살인 사건에 관한 상세한 조사를 진행했다.
2. 4. 결혼과 저널리스트 활동
지타 세레니는 192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헝가리 개신교 귀족인 아버지와 함부르크 출신의 독일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2] 그녀의 계부는 경제학자 루트비히 폰 미제스였다.[3] 13살 때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 참석한 후, 교사의 권유로 ''나의 투쟁''을 읽었다.[4] 1938년 나치의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프랑스로 이주하여 독일 점령 기간 동안 고아들을 돌보며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연계 활동을 했다.[4]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 원조 및 재건국에서 연합군 점령 하의 독일의 난민들을 위해 일했으며, 나치에 의해 납치된 아이들을 생물학적 가족과 재결합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5] 1947년 제레니는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에서 살았다. 여기서 장래의 남편이 될 미국인 사진가 돈 허니먼(Don Honeyman)을 만나 1948년에 결혼했다. 허니먼의 직장 때문에, 부부는 파리에서 런던으로 이사했고, 1952년에는 뉴욕시로 이주했다.
1945년 4일 동안 뉘른베르크 재판에 옵서버로 참석하여 알베르트 슈페어를 처음 보았고, 이후 그에 관한 책 ''알베르트 슈페어: 진실과의 투쟁''을 썼다.[6] 1948년 돈 허니먼과 결혼하여 런던으로 이주하여 두 자녀를 길렀다.[7]
1966년 이후, 제레니는 저널리스트로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까지 ''데일리 텔레그래프 매거진'' 등에 기고하며, 주로 젊은이, 사회 서비스, 아이들과 부모 및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글을 썼다.[16] 이 과정에서 11세 메리 벨의 재판을 취재하고, 이 사건에 대한 첫 번째 조사 책을 쓰게 되었다.
2. 5. 데이비드 어빙과의 소송
영국의 홀로코스트 부정론자 데이비드 어빙은 세레니와 가디언 미디어 그룹을 상대로 ''옵저버''지 서평 두 건에 대해 명예 훼손 소송을 제기했다.[28] 세레니는 서평에서 어빙이 나치를 복권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역사적 기록을 위조했다고 주장했다.[28] 어빙은 세레니의 저서 ''히틀러의 전쟁'' 출판 이후 그의 주장을 성공적으로 반박해 온 그녀를 "그 쪼그라든 나치 헌터"라고 부르며 개인적인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28]1977년, 세레니는 히틀러가 "최종 해결"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따라서 "최종 해결"을 명령할 수 없었다는 어빙의 주장에 대한 그의 인용 출처를 대조했다.[28] 지타 세레니는 어빙이 그의 주장에 모순되는 추가적인 주장을 했다는 것을 증명했다.[28] 세레니는 "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히틀러 측근의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28] 세레니는 나중에 "그에게는 무서운 일이다. 그는 '우리는 같은 여물통에서 비빈다'고 말한다. 차이점은 그는 그 여물통을 좋아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데이비드 어빙] 이 모든 것에 절망이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28]
이 사건은 법정으로 가지 않았지만, 가디언 미디어 그룹이 법적 방어를 준비하는 데 든 비용은 80만 파운드에 달했다.[28]
2. 6. 사망
지타 세레니는 오랜 투병 끝에 2012년 6월 14일, 91세의 나이로 케임브리지에 있는 애든브룩 병원(Addenbrooke's Hospital)에서 사망했다.[14]3. 주요 저작
1972년에 세레니가 출판한 『''The Case of Mary Bell''』(→메리 벨 사건)은 메리 벨의 가족, 친구, 재판 중에 메리를 돌본 전문가에 대한 취재 방문의 기록이다. 이 책의 편집을 담당한 사람은 다이애나 애틸(''Diana Athill'')이며, 세레니의 다른 저서 『''Into That Darkness''』의 편집도 담당했다. [22]
『''Into That Darkness''』(→어둠 속으로)는 텔레그래프 잡지에 처음 기고한 기사를 바탕으로, 트레블링카와 소비보르 절멸 수용소의 장관이었던 프란츠 슈탕글(''Franz Stangl'')의 유죄에 대해 검증한 책이다.[8] 세레니는 기사를 쓰기 위해 옥중의 슈탕글과 70시간에 걸쳐 면담을 실시했다[9]。슈탕글은 면담 마지막에 자신의 죄를 인정했고, 그로부터 19시간 후에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1995년에 출판된 『''Albert Speer: His Battle with Truth''』(→알베르트 슈페어: 진실과의 싸움)는 알베르트 슈페어의 전기이며, 세레니는 "슈페어가 홀로코스트(''Holocaust'')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가?"를 탐구한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슈페어는 홀로코스트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주장하며 사형을 면했다. 그러나, 전후 슈페어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사는 유대인 단체에 편지를 보낸 사실과 1942년 1월에 열린 유대인 학살에 대한 회의(반제 회의)에 그의 보좌관이 참석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슈페어가 유대인 학살의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고 결론지었다.[12]
1998년에 출판된 『''Cries Unheard''』(→들리지 않는 외침)는 메리 벨에 관한 두 번째 책이다[10]。세레니는 이 책의 출판 수수료를 메리 벨과 공동으로 부담했고, 책 제작의 보상으로 메리 벨에게 돈을 줬기 때문에 논란의 원인이 되어 비판을 받았다.[10] 처음에는 비판을 받았지만, 이 책은 곧 문제 아동을 다루는 전문가들에게 표준 텍스트가 되었다.[11]
2002년에 세레니가 출판한 『''The German Trauma''』(→독일의 트라우마)의 제19장에 대해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책의 제19장은 제3제국 이전, 중, 그리고 종말 이후의 독일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1938년부터 1999년까지, 즉, 제 자신의 거의 전 생애에 걸쳐 보고 듣고 경험한 일들을 순서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12] 이 책은 1938년부터 2001년까지의 경험과 성찰을 담고 있다.[15][31] 독일어판은 《독일의 트라우마. 치유의 상처》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32]
; 영어
- 메리 벨 사건/The Case of Mary Bell영어
- 어둠 속으로: 자비로운 살인에서 대량 학살까지, 트레블링카(Treblinka) 사령관 프란츠 슈탕글(Franz Stangl) 연구/Into That Darkness: from Mercy Killing to Mass Murder, a study of 프란츠 슈탕글(Franz Stangl), the commandant of 트레블링카(Treblinka)영어
- ''보이지 않는 아이들: 미국, 서독, 영국에서의 아동 매춘/The Invisible Children: Child Prostitution in America, West Germany and Great Britain영어'' (1984)
- ''알베르트 슈페어: 진실과의 싸움/Albert Speer: His Battle with Truth영어'' (1995)
- ''들리지 않는 외침: 메리 벨의 이야기/Cries Unheard: The Story of Mary Bell영어'' (1998)
- ''독일의 트라우마: 경험과 성찰, 1938–2001/The German Trauma: Experiences and Reflections, 1938–2001영어'' (2002)[31]
; 독일어
- 나락에서. 양심의 탐구. 트레블링카 사령관 프란츠 슈탕글과의 대화, 외./In jene Finsternis. Eine Gewissenserforschung. Gespräche mit dem Kommandanten von Treblinka, Franz Stangl, u. ade
- 나락에서. 사형집행인과의 대화./In jene Finsternis. Gespräche mit einem Henkerde
- 독일의 트라우마. 치유의 상처./Das deutsche Trauma. Die heilende Wundede
- 진실과의 투쟁. 알베르트 슈페어와 독일의 트라우마./Die Wahrheit im Kampf. Albert Speer und das deutsche Traumade
- 한 아이가 살인한다. 메리 벨 사건./Ein Kind mordet. Der Fall Mary Bellde
- 아이들이 아이를 죽인다. 메리 벨 사건./Kinder töten Kinder. Der Fall Mary Bellde
- 아무도 듣지 못하는 외침. 어린 시절 살인을 저지른 메리 벨의 생애./Ein Schrei, den niemand hört. Das Leben von Mary Bell, die als Kind mordetede
3. 1. 《메리 벨 사건》 (1972)
''메리 벨 사건''은 메리 벨의 재판 이후 1972년에 처음 출판되었다. 세레니는 이 책에서 메리의 가족, 친구, 그리고 재판 기간 동안 메리를 돌보는 데 관여한 전문가들을 인터뷰했다. 이 책은 다이애나 애틸이 편집했다. 1998년에 출간된 메리 벨에 관한 두 번째 책인 ''들리지 않는 울음''은 출판 수익금을 메리 벨과 나누면서 영국 언론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비판을 받았지만, 이 책은 곧 문제 아동을 다루는 전문가들에게 표준 텍스트가 되었다. ''메리 벨 사건''의 개정판에는 제임스 발저 살해 사건에 대한 부록이 포함되어 있다.3. 2. 《어둠 속으로》 (1974)
《어둠 속으로》(Into that Darkness: from Mercy Killing to Mass Murder)는 텔레그래프 잡지에 처음 기고한 기사를 바탕으로, 트레블링카와 소비보르 절멸 수용소의 소장이었던 프란츠 슈탕글의 죄책감을 조사한 책이다.[8] 세레니는 기사를 위해 그를 감옥에서 70시간[9] 인터뷰했으며, 인터뷰가 끝나자 그는 마침내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그는 19시간 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3. 3. 《알베르트 슈페어: 진실과의 싸움》 (1995)
알베르트 슈페어: 진실과의 싸움'' (1995)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무기 장관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에 대한 전기 작품이다.[12] 이 책에서 세레니는 슈페어가 홀로코스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탐구한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슈페어는 홀로코스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고 주장하면서 사형을 면했다. 그러나 세레니는 슈페어가 전쟁 후 남아프리카 유대인 공동체에 보낸 편지, 그리고 그의 최측근 비서가 (유대인 대량 학살의 세부 사항이 결정된) 반제 회의에 참석했고 그에게 진행 상황을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슈페어가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결론 내린다.[12]3. 4. 《들리지 않는 외침》 (1998)
1998년, 지타 세레니는 메리 벨에 관한 두 번째 책인 《들리지 않는 외침》(''Cries Unheard: Why Children Kill: The Story of Mary Bell'')[10]을 출간했다. 이 책은 맥밀란 출판사에서 책 공동 작업에 대한 출판료를 메리 벨과 나누면서 영국 언론에서 논란을 일으켰다.[10] 세레니는 처음에 영국 언론과 영국 정부로부터 비판을 받았지만,[11] 이 책은 곧 문제 아동을 다루는 전문가들에게 표준 텍스트가 되었고 현재도 그렇다.3. 5. 《독일의 트라우마》 (2002)
세레니는 마지막 저서인 《독일의 트라우마》(2002)에서 "이 책의 19개 장은 모두 제3제국 종말 전후 동안의 독일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1938년부터 1999년까지 거의 평생 동안 보고 배우고 경험한 것을 거의 순차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라고 썼다.[12] 이 책은 1938년부터 2001년까지의 경험과 성찰을 담고 있다.[15][31] 독일어판은 《독일의 트라우마. 치유의 상처》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32]4. 영향과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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