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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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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 무왕은 기원전 311년 진 혜문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인물로, 재위 기간 동안 승상 제도를 도입하고, 의양 전투를 치르는 등 여러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힘을 숭상하여 무장을 중용했으며, 낙양에서 정을 들어 올리다 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에는 아들이 없어 이복 동생인 소양왕이 즉위했으며, 영릉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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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무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영탕(嬴蕩)
영(嬴)
칭호
시호무왕(武王)
묘호없음
재위 기간기원전 310년 – 기원전 307년
출생기원전 329년
사망기원전 307년 (21–22세)
수도함양
가계
아버지혜문왕
어머니혜문후
배우자도무후
왕조
왕조
계승
전임자혜문왕
후임자소양왕
능묘
능묘영릉

2. 생애

기원전 311년 혜문왕이 죽자, 태자 탕(蕩)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진 무왕이다.[7] 무왕은 혜문왕의 신하들을 그대로 중용하였고, 상앙에게 주어졌던 영지를 빼앗아 검중군을 설치하였다. 또한 승상 제도를 도입하여 저리질을 좌승상에, 감무를 우승상에 임명하였다. 감무에게 의양 정벌과 낙양으로 들어가 주나라 왕실 보물인 구정을 보도록 지시하였다. 힘센 장사 맹열이 구정을 들어올리자, 무왕도 직접 구정을 들어보려다 힘이 빠져 구정에 깔려 죽고 말았다. 무왕은 태자 시절부터 장의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여러 신하들이 장의를 모함하였다.[7]

2. 1. 즉위와 초기 통치

기원전 311년, 혜문왕이 붕어하자 태자 탕(蕩)이 즉위하였다. 즉위한 태자 탕은 사후 무왕[7]이라 불리었다. 무왕은 혜문왕의 신하를 중용하였고, 상앙이 받았던 영지를 빼앗아 검중군을 설치하였다. 승상 제도를 도입하여 좌승상에는 저리질을, 우승상에는 감무를 임명했다. 감무에게 의양을 정벌하고 낙양으로 들어가 주나라 왕실 보물인 구정을 보게 하였는데, 장사 맹열이 구정을 들어 올리자 무왕이 스스로 구정을 들다가 힘이 빠져 놓치게 되어 깔려서 죽게 되었다. 무왕은 태자 시절부터 장의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여러 신하들이 장의를 참소하였다.

혜문왕 14년, 혜문왕이 사망하자 태자 탕이 즉위하였다. 사마착이 초를 공격하여 상·어의 땅(과거 상앙이 봉해진 땅)을 빼앗아 검중군을 설치하였다.

무왕 원년(기원전 310년), 무왕은 의 혜왕과 임진에서 회합했다. 장의는 무왕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가 저를 원망하고 있으니, 부디 저를 위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반드시 제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그 틈을 타 위나라와 을 공격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이듬해 무왕 2년(기원전 309년)에 장의는 위나라로 갔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기원전 310년, 촉 경영의 일환으로 성도에 대성을 축조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309년, 촉의 국상 진장이 모반을 일으켜 촉후 통을 살해했다. 무왕은 감무와 사마착에게 명하여 촉을 토벌, 진장을 주살하고 난을 수습했다.

무왕 3년(기원전 308년), 공자 운(혜문왕의 아들)을 촉후로 봉하여 촉의 정세를 안정시켰다.

같은 해, 진나라에 처음으로 승상을 설치하고, 저리질(혜문왕의 동생, 저리자라고도 함)과 감무를 각각 좌우 승상으로 삼았다.

무왕 2년(기원전 309년) 11월, 무왕은 감무 등에게 명하여 위전률을 제정하게 했다. 이는 농전과 도로의 제도를 규정하고, 매년 지정된 시기에 보수하는 내용이었다.

2. 2. 승상 제도 도입

기원전 308년, 진나라에 처음으로 승상 제도가 설치되었다. 혜문왕의 동생 저리자라고도 불리는 저리질과 감무를 각각 좌우 승상으로 삼았다.[7]

2. 3. 의양 전투

무왕은 감무에게 "병거를 삼천(이수, 낙수, 황하가 있는 땅)에 투입하여 그곳을 지나 서주실을 위협하여 천하에 호령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7]

감무는 이를 듣고 "원컨대 저를 위나라에 보내어 진나라와 함께 한나라를 공격하는 약속을 정하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고, 무왕은 감무와 향수를 위나라로 보냈다. 그 후 향수가 먼저 귀국하여 "위나라는 제 말을 들었습니다. 왕께서는 한나라를 치지 마십시오"라는 감무의 전언을 전했다.[7]

무왕은 감무가 위나라에서 귀국하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위나라에 가까운 식양 땅까지 마중 나갔다. 감무는 귀국하여 그 식양에서 무왕을 만났다. 무왕은 즉시 사정을 물었다.[7]

감무는 "의 중요한 거점인 의양은 큰 고을입니다. 함락시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지금 저는 밖에 있습니다. 전쟁 중에, 왕족인 추리질이나 공손연(객경 대신, 서수라고도 함) 등이 한나라에 호의를 보이면 왕께서는 반드시 위나라를 속이실 것입니다. 옛날 증자의 어머니에게 어떤 남자가 '증참이 사람을 죽였다'고 알렸습니다. 증자의 어머니는 처음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 2명도 똑같이 말했기 때문에 증자의 어머니는 믿고 도망갔습니다. 증자 정도의 현명함과 어머니의 두터운 신뢰가 있어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신의 현명함은 증자에게 미치지 못하고, 왕의 신에 대한 신뢰도 증자의 어머니만큼은 아닐 것입니다. 게다가 신을 의심하는 자는 3명만이 아닙니다. 신은 왕께서 저를 버리실까 걱정입니다"라고 말하며 왕의 각오를 확인했다.[7]

무왕은 이에 "나는 추리자나 공손연 등의 말을 듣지 않겠다. 맹세한다"고 대답하고 감무와 식양에서 굳게 맹세를 맺었다.[7]

무왕 3년 가을, 무왕은 감무와 서장봉에게 의양을 치게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나, 이듬해 무왕 4년이 되어도 감무는 의양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역시 추리질과 공손연이 감무를 비난하고 해임을 꾀했다. 무왕은 참지 못하고 감무를 소환하려 했다.[7]

감무는 이를 듣고 "식양은 거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했다.[7]

무왕은 "그랬지"라고 말하고, 전군을 동원하여 다시 감무에게 의양을 공격하게 했다.[7]

마침내 감무는 의양을 함락시키고, 6만 명의 수급을 베는 성과를 거두어 황하를 건너 무수에 성을 쌓기에 이르렀다(宜陽之戰|의양 전투중국어). 이 의양 전투는 대격전이었기 때문에, 한나라뿐만 아니라 함락시킨 진나라도 크게 피폐해지는 결과를 낳았다.[7]

2. 4. 죽음

무왕은 힘이 세고 평소에 힘을 겨루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임비나 오획 등 힘이 센 무장들이 모두 대관에 임명되었다.[7]

무왕 4년 8월, 무왕은 낙양을 방문하여 맹분이라는 괴력의 소유자와 정을 들어올리는 시합을 하다가 경골을 부러뜨리고 사망했다. 향년 23세였다. 그 때문에 맹분은 죄를 받아 일족이 멸망했다. 무왕이 아들이 없는 채로 급사했기 때문에 후계자 다툼이 일어났지만, 연에 있던 이복 동생 공자 직이 즉위했는데, 이가 소양왕이다.[7]

무왕은 영릉에 묻혔다. 『사기집해』는 『괄지지』를 인용하여, 그 위치를 옹주 함양현 서북 10리 지점으로 잘못 "주무왕릉"이라고 불리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산시성 함양시 위성구 주릉가도에는 주문왕릉·주무왕릉으로 전해지는 봉분(무덤)이 있다. 보링 조사를 통해 이 지하에 진나라 시대의 능과 환호의 존재가 확인되었으며, 영릉의 유력한 후보지이다. 혹은 그 동남 3.8킬로미터에 있는 2기의 봉분과 묘를 영릉으로 보는 설도 있다.[7]

3. 가족 관계

관계이름
도무왕후
자녀없음

[8]

4. 대중 문화


  • 2012년 드라마 ''대진제국 2: 연맹''에서 허쯔밍이 연기하였다.[5]
  • 2015년 드라마 ''미월전''에서 파투가 연기하였다.[4]

5. 무덤

무왕은 낙양에서 맹분과 정을 들어올리는 시합을 하다가 경골을 부러뜨리고 사망했다. 향년 23세였다.[1] 아들이 없어 후계자 다툼이 일어났지만, 연에 있던 이복 동생 공자 직이 즉위했는데, 이가 소양왕이다.[1]

무왕은 영릉에 묻혔다.[1] 『사기집해』는 『괄지지』에서 그 위치를 옹주 함양현 서북 10리 지점으로 잘못 "주무왕릉"이라고 불리는 곳이라고 한다.[1] 산시성함양시위성구 주릉가도에는 주문왕릉·주무왕릉으로 전해지는 봉분(무덤)이 있다.[1] 보링 조사를 통해 이 지하에 진나라 시대의 능과 환호가 존재함이 확인되어 영릉의 유력한 후보지이다.[1] 혹은 그 동남 3.8킬로미터에 있는 2기의 봉분과 묘를 영릉으로 보는 설도 있다.[1]

참조

[1] 서적 These Bones Shall Rise Again: Selected Writings on Early China https://books.google[...] SUNY Press 2014-08-13
[2] 서적 A Brief History of Ancient China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2023-07-13
[3] 서적 史記 秦始皇本紀
[4] 서적 世本
[5] 서적 史記索隠 秦本紀
[6] 간행물 春秋戦国時代秦王陵の被葬者と変遷 http://repo.komazawa[...]
[7] 서적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8] 서적 史記 진본기(秦本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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