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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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해진은 9세기 신라 시대에 장보고가 해적을 소탕하고 해상 무역을 장악하기 위해 설치한 군사 기지이다. 완도에 위치하여 당나라와 일본을 연결하는 해상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했으며, 해상 무역을 통해 신라의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청해진은 군사적 방어 시설과 상업 시설을 갖추었으며, 장보고 사후 신라 귀족과의 갈등으로 폐쇄되었다. 현재는 유적지로 지정되어 있으며,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관광 명소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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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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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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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 청해진 |
한자 | 淸海鎭 |
로마자 표기 | Cheonghaejin |
상세 정보 | |
위치 |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734번지 |
종류 | 사적 |
지정 번호 | 308호 |
지정일 | 1984년 9월 1일 |
면적 | 482,884m² |
시대 | 신라 |
설명 | 완도 장도에 위치한 청해진 유적 |
역사 | |
설립 배경 | 해상 무역 거점 및 군사 기지 |
설립 시기 | 신라 시대 |
주요 역할 | 해적 소탕 및 해상 무역 장악 |
관련 인물 | 장보고 |
현재 | |
관리 | 문화재청 |
보존 상태 | 유적지로 보존 |
추가 정보 | 완도의 주요 관광지 |
2. 역사적 배경
장보고는 신라 해안 지역 출신으로,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徐州)의 무령군중소장(武寧軍中小將)을 지냈다. 신라로 돌아온 그는 당나라 해적들이 신라 주민을 잡아다 노비(奴婢)로 팔고 있는 상황을 목격했다.[4] 이에 장보고는 해적을 소탕하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흥덕왕에게 청해진 설치를 요청했고, 왕은 이를 수락하여 828년 4월에 장보고를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로 임명하였다.[5]
청해진은 신라 바닷길의 요충지에 설치되어 군사 기지로서 해적을 소탕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2. 1. 당나라, 일본과의 해상 무역의 중요성 증대
신라는 당나라, 일본과 활발한 해상 무역을 전개하며 경제적, 문화적 교류를 이어갔다. 당시 항해 기술의 한계로 인해 가능한 육지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연근해 항로를 이용해야 했고, 당나라와 일본의 항로는 한반도 남부 해안을 통과해야만 했다.[13]동국대학교 윤명철 교수에 따르면, 고대 신라와 당나라를 오가는 항로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가 있었다.[12]
항로 | 설명 |
---|---|
황해중부 횡단항로 | 산둥반도의 등주 · 적산 및 밀주 등지에서 출발하여 150여 km를 횡단해 한반도의 백령도 · 덕적도 등 경기도 연안에 도착, 여기서 다시 남쪽으로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영산강 하구권의 고이도나 무주 같은 항구나 주변 해역 등을 거치는 루트. |
황해남부 사단항로 | 지금의 전라남도 등지의 해안에서 출발해 사선으로 비껴서 항해하여 장강 하구의 장쑤성(江蘇省) · 저장성(折江省) 항저우 및 밍저우(닝보)와 그 외곽의 저우산 군도(舟山群島) 등의 중국 강남 지역 항구로 도달하는 루트(역루트도 가능하다). |
동중국해 사단항로 | 절강 이남 지역을 출발하여 지금의 동중국해와 제주도 해역, 흑산도, 황해 남부를 거쳐 신라로 도달하는 루트. |
장보고는 신라 해안 지역 출신으로, 친구 정년과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徐州)에서 무령군중소장(武寧軍中小將)이라는 벼슬을 지냈다. 신라로 돌아온 장보고는 당나라 해적들이 신라 주민을 노비(奴婢)로 팔고 있는 상황을 보고, 해적 소탕을 위한 군사 거점인 청해진 설치를 흥덕왕에게 건의하였다.
이들 항로에서 중국측 선착지인 산둥반도의 등주 · 밀주, 양자강 하구의 쑤저우나 양저우, 항저우와 밍저우 등지에는 당에 체류하는 신라인들이 모여사는 신라방(일종의 「신라인 자치주」)이 존재했다.[13]
청해진이 위치한 완도 일대는 남북 연근해항로가 통과하는 곳으로 한반도에서는 남해와 서해가 만나는 지점이자, 중국 강남 지역에서 한반도로 북상하는 항로가 만나는 곳이기도 했다.
3. 장보고의 생애와 청해진 설치
이후 신라 중앙 정부의 귀족들은 자객 염장을 보내 장보고를 암살했다. 장보고 암살 이후 청해진은 염장이 관리했지만, 장보고의 죽음을 슬퍼한 청해진 주민들은 청해진을 떠났다. 이들은 주로 신라의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으며, 일부는 중국이나 일본으로 이주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중앙 정부가 851년 2월에 청해진을 폐쇄하고, 남은 주민들을 벽골군으로 이주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권제32 잡지(雜志)제1 제사조에는 신라에서 중사(中祀)로서 제사 지내던 곳 중 하나로 청해진이 언급되어 있다.
3. 1. 청해진 대사 임명과 해적 소탕
장보고는 신라 주민을 노비(奴婢)로 팔고 있는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 군사 거점인 청해진 설치를 건의하였다. 흥덕왕은 이를 수락하여 828년에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로 임명하였다.[4] 장보고는 청해진에 1만 명의 군사를 주둔시키고 해적을 소탕하였다.[5] 청해진은 당나라 및 일본과의 상업적 관계를 유지하며 신라 상인과 해안 거주민을 해적으로부터 보호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장보고는 무역과 문화 교류를 위해 '호역사'라는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3. 2. 청해진의 발전과 해상 무역 장악
장보고는 신라 해안 지역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무령군중소장(武寧軍中小將)을 지냈다. 신라로 돌아온 그는 당나라 해적들이 신라 주민을 노비(奴婢)로 팔고 있는 것을 보고 해적 소탕을 위한 군사 거점으로 청해진 설치를 왕에게 요청했다. 흥덕왕 3년(828년) 4월, 왕은 장보고를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로 임명하였다.[4]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청해진은 신라 바닷길의 요충지로 조음도(助音島)라고도 불렸으며, 《삼국사기》 편찬 당시에는 완도(莞島)라 불렸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거점으로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해적을 소탕하고, 중국 · 일본 간의 해상무역에 개입해 부를 쌓았다.[5] 청해진은 해상무역의 거점 항구이자 바닷길의 요충지로 성장했다. 또한, 무력을 갖추고 신라 정계의 왕위 다툼에도 개입해 민애왕을 죽이고 신무왕을 옹립하기도 했다.
청해진은 당나라 및 일본과의 강력한 상업적 관계를 유지했으며, 신라 상인과 해안 거주민을 해적으로부터 성공적으로 보호했다. 장보고는 무역 활동과 문화 교류를 위해 '호역사'(호역사)라는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4. 청해진의 구조와 역할
9세기 통일 신라 시대,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한반도 삼면의 해상 무역로를 장악하는 거점 역할을 수행했다.[12] 청해진은 군사 기지이자 해상 무역 거점이었다.
4. 1. 지리적 위치와 방어 체계
완도는 한반도 서남해의 리아스식 해안과 인접한 섬으로, 조수간만의 차가 적고 파도가 잔잔하여 선박이 정박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섬 내부에는 산이 있어 방어 거점으로서도 유리했으며, 강진, 해남 등 배후 도시가 존재하여 물자 조달과 인력 확보에도 유리했다.청해진은 섬 입구에 '''목책(木柵)'''을 설치하고, 성벽을 쌓아 방어 체계를 강화하였다. 목책은 굴참나무 기둥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길이는 331m이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으로 분석한 결과, 9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6] 청해진성은 흙을 다져 쌓는 판축 기법으로 만들어졌으며, 총 길이는 890m이다.[9]
방어 시설로는 외성문과 내성문을 두어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고대(高臺)'''를 설치하여 해상 감시를 강화하였다. 외성문은 성의 안팎을 연결하는 통로이며, 내성문은 성 안에 있는 두 번째 문이다.[7] 고대는 청해진 남쪽 성벽 중간에 위치하여, 해상 상선과 해적을 감시하기에 유리한 장소였다.[7]
해안 구조물인 「ㄱ」자형 판축 유구는 우물을 보호하고 외성문을 보완하는 기능을 했다. 남아있는 우물의 깊이는 5.8m이다.[7]
4. 2. 군사적 역할과 해상 무역 활동
장보고는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안에 출몰하던 해적을 소탕하였다.[12] 이로써 청해진은 해상무역의 거점 항구로 성장했으며, 중국과 일본 간의 해상 무역에 개입해 부를 축적했다. 청해진은 바닷길의 요충지이자 해상무역의 거점 항구로서 기능했다.[12]청해진은 신라, 당나라, 일본을 잇는 해상 무역로의 중심에 위치했다. 당시의 항해 기술로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항해가 어려웠기 때문에, 당나라와 일본을 잇는 항로는 한반도 남부 해안을 통과해야만 했다.[13] 청해진은 서해에서 남해로 돌아가는 지점에 위치하여 이러한 항로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청해진이 위치한 완도 일대는 한반도의 남해와 서해가 만나는 지점이자, 중국 강남 지역에서 한반도로 북상하는 항로가 만나는 곳이었다. 또한, 리아스식 해안과 가까운 섬임에도 불구하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지 않고, 섬 내부로 들어오면 파도가 일지 않아 방어 거점으로도 유리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청해진은 국제 무역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4. 3. 유적과 유물
'''완도 청해진 유적(莞島 淸海鎭 遺蹟)'''은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734번지 장도(將島)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군진(軍鎭) 유적이다. 1984년 9월 1일 사적 제308호로 지정되었으며, 완도에서 목교(木橋)로 이어진 장도라는 섬에 있다. 완도에서 장도까지 거리는 약 180m쯤 되며, 하루 2차례씩 썰물 때는 바닥이 드러나 걸어갈 수도 있다.
청해진 유적은 1959년 태풍 사라 이후 드러난 목책(원목열)으로 인해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1991년부터 1996년까지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를 통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 '''목책(원목열)''': 섬 입구 방어용 목책으로 추정되는 원목렬은 총 길이 331m로 대부분 굴참나무 기둥을 사용하였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으로 분석한 결과, 9세기 중반경으로 확인되어 장보고가 활동한 9세기경에 축성·사용된 것이 과학적인 근거로 밝혀졌다.[14]
- '''청해진 성(城)''': 총 길이 890m로, 1단 또는 2단의 돌을 폭 5-6m 간격으로 평행하게 배열한 뒤, 그 안쪽을 주변 흙으로 겹겹이 다져 단단하게 쌓아 올린 판축기법이 사용되었다.[14]
- '''법화사터''': 장좌리 뒤쪽 상황봉 기슭에 장보고가 산둥성 적산에 세웠던 법화원을 본떠 세웠다고 전해지는 법화사터가 있다.
- '''ㄷ자형 판축유구(版築遺構)와 우물''': ㄷ자형 판축유구는 해안 구조물로서 국내는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그 유례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ㄷ자형 판축유구는 우물을 보호하고 외성문을 보완하는 기능을 한다. 우물은 잔존 깊이 5.8m이며, 이곳에서는 주름무늬병과 철제편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15]
- '''외성문''': 성의 내외를 연결하는 통로로서 유사시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 적을 역습하거나 격퇴하는 통로이다.[15]
- '''내성문''': 성 내부에 있는 두 번째 출입문으로 방어 기능을 한다.[15]
- '''고대(高臺)''': 동서로 이어지는 청해진 남쪽 성벽의 높은 중간지점에 있으며 외국에서 내륙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연안의 상선과 해적을 감시하기 유리한 곳이다.[15]
5. 장보고의 죽음과 청해진의 쇠퇴
청해진은 당나라 및 일본과의 강력한 상업적 관계를 유지하며 신라 상인과 해안 거주민을 해적으로부터 성공적으로 보호하는 임무를 매우 잘 수행했다. 장보고는 무역 활동과 문화 교류를 위해 '호역사'라는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했다.[4] 그러나 장보고 사후 청해진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5. 1. 중앙 귀족과의 갈등
장보고의 세력 확장은 중앙 귀족들에게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특히 장보고가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들이려 하자, 중앙 귀족들은 강력하게 반발하였다.[4] 청해진은 사적 해상 무역에서 이익을 잃었기 때문에 많은 신라 중앙 귀족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신라 귀족들은 자객 염장을 보내 장보고를 암살했다.[5]5. 2. 염장에 의한 암살
신라 중앙 귀족들은 사적 해상 무역에서 이익을 잃었기 때문에 장보고를 미워했다. 귀족들은 자객 염장을 보내 장보고를 암살하였다.[4] 장보고 암살 이후, 청해진은 염장이 관리했지만, 장보고의 죽음을 슬퍼한 청해진 주민들은 청해진을 떠났다. 주민들은 주로 신라의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으며, 일부는 중국이나 일본으로 이주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중앙 정부가 851년 2월에 청해진을 폐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5]5. 3. 청해진 폐지와 주민 이주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중앙 정부는 851년 2월에 청해진을 폐쇄하고, 남은 주민들을 벽골군(현재의 김제시)으로 이주시켰다.[4] 장보고 암살 이후 염장이 청해진 기지를 유지했지만, 장보고의 죽음을 슬퍼한 청해진 주민들은 청해진을 떠나 신라의 다른 지역이나 중국, 일본으로 이주했다.6. 역사적 의의와 평가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신라 사람들이 해적에게 잡혀 노비로 팔리는 것을 보고, 흥덕왕에게 해적 소탕을 위한 군사 거점 설치를 요청하여 청해진을 설치했다.[1] 청해진은 신라 바닷길의 요충지(현재의 완도)로, 삼국사기에는 조음도(助音島)라고도 불렸다.[1] 장보고는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해적을 소탕, 당나라와 일본 간의 해상무역에 개입해 부를 쌓아 청해진을 해상무역 거점 항구로 성장시켰다.[1]
이러한 청해진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 '''해상 세력의 중요성 인식''': 해적 소탕뿐만 아니라, 해상 무역로 확보와 해상 세력 강화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 '''국제 무역의 선구자''': 당나라, 일본과의 활발한 해상 무역을 통해 동아시아 국제 무역 발전에 기여했다.
6. 1. 해상 세력의 중요성 인식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해적들이 신라 주민들을 잡아다가 노비로 팔고 있는 것을 보고, 해적을 소탕하기 위한 군사 거점으로 청해진을 설치할 것을 왕에게 요청했다. 왕은 이를 수락하여 흥덕왕 3년(828년) 4월 장보고를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로 임명하였다.[1]청해진은 해상무역의 거점 항구로서 성장하여 바닷길의 요충지가 되었으며, 장보고는 재력과 무력을 갖추고 신라 정계의 왕위 다툼에도 개입하였다. 민애왕을 죽이고 신무왕을 옹립하기도 했으나, 자신의 딸을 문성왕의 차비(次妃)로 들이려던 시도가 실패하고, 장보고는 염장에게 살해되었다. 문성왕 13년(851년) 청해진은 폐지되었다.[1]
6. 2. 국제 무역의 선구자
장보고는 당나라와 일본과의 해상 무역을 활발히 전개하여 동아시아 국제 무역 발전에 기여하였다. 청해진은 동아시아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서, 다양한 문화 교류가 이루어지는 장이 되었다.[1]장보고는 신라 해안 지역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무령군중소장(武寧軍中小將)을 지냈다. 신라로 돌아온 후, 당나라 해적들이 신라 주민을 노비로 팔고 있는 상황을 보고 왕에게 해적 소탕을 위한 군사 거점 설치를 요청했다. 흥덕왕은 이를 수락하여 828년 4월 장보고를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로 임명하였다.[1]
청해진은 신라 바닷길의 요충지로, 삼국사기에는 조음도(助音島)라고도 불렸으며, 현재의 완도이다. 청해진을 거점으로 장보고는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해적을 소탕하고, 중국 · 일본 간의 해상무역에 개입해 부를 쌓았다. 이로써 청해진은 해상무역의 거점 항구로서 성장하였다.[1]
7. 현대의 청해진
청해진은 현재 전라남도 완도군에 위치해 있으며, 이 지역의 주요 관광 명소이다. 청해진 거주민들을 벽골군으로 이주했음을 기념하는 비석과 다양한 유적들이 있다. 청해진에서는 다양한 상업 제품과 접시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신라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1]
참조
[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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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2]
웹사이트
청해진 淸海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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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웹사이트
청해진 淸海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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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뉴스
Jang Bogo, the King of the S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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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뉴스
Jang Bogo, the King of the Seas
https://world.kb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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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4
[6]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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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Reference to Local signs
[8]
웹사이트
淸海鎭遺跡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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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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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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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ortal.nrich.[...]
[11]
웹사이트
청해진유적지
http://www.wando.go.[...]
[12]
문서
황해중부 횡단항로
[13]
문서
초기 견당사와 후기 견당사의 항로 비교 및 엔닌의 귀국 경로
[14]
웹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완도 청해진유적 참고
http://encykorea.aks[...]
[15]
문서
현지 안내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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