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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포인트 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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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 장벽에 있던 검문소로, 동독과 서독 사이의 국경 통과 지점이었다.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 이후 외국인과 연합군 관계자만 통행할 수 있었으며, 냉전 시기 동서 진영 간의 대립을 상징하는 장소였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후 폐쇄되었으며, 현재는 관광 명소와 박물관, 기념 시설 등이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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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포인트 찰리
지도
1963년, 미국 구역에서 바라본 체크포인트 찰리
체크포인트 찰리가 표시된 베를린 장벽 지도
기본 정보
명칭체크포인트 찰리
영어 명칭Checkpoint Charlie
다른 영어 명칭Checkpoint C
역사
개요베를린 장벽의 유명한 통과 지점
용도베를린 장벽 당시 서베를린과 동베를린 사이의 검문소
현재박물관
위치
좌표52°30′27″N 13°23′25″E

2. 배경

1981년 당시 서베를린으로 진입하는 체크포인트 찰리의 표지판


체크포인트 찰리는 베를린 시내 거의 중앙부 프리드리히슈타트 구역의 프리드리히 거리와 짐머 거리 (Zimmerstraßede) 교차로에 설치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베를린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소비에트 연방) 4개국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는데, 체크포인트 찰리는 미국 통치 지역과 소련 통치 지역의 경계에 있으면서 영국 통치 지역과도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동서 분단기 베를린에는 많은 검문소가 있었고, 그중 일부는 서베를린·서독 시민 통행용이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외국인, 외교관, 서방 국가 군 관계자가 도보 또는 자동차로 통행하기 위한 검문소였으며, 서방 국가 군 관계자는 다른 검문소 통행이 허용되지 않았다. 동서 베를린 간 이동 외국인이 통행할 수 있는 검문소는 이곳 외에 인근 프리드리히 거리역뿐이었는데, 이곳은 모든 국적의 사람이 수속할 수 있어 혼잡하기도 했다.

검문소 운영 기간 동안 동쪽에서는 벽, 감시탑, 지그재그 펜스, 차량 및 승객 검사용 부스 등 시설 확장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미국 측에서는 영구적인 건축물 없이 목조 오두막만 설치되었다. 이 오두막은 1980년대에 더 큰 금속제 오두막으로 교체되었고, 베를린 장벽 붕괴 후 검문소 자체가 폐지되어 철거되었지만, 동서독 통일 후에는 목조 오두막이 재건되어 베를린의 관광 명소가 되었다.

2. 1. 1950~60년대의 이주 제한

1950년대 초, 소련은 탈주 제한을 강화하며 국경선을 철저히 관리했다. 그러나 1952년까지 동독서독을 분리하는 분단 선에는 대체로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지점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양독국경은 닫혔고 철조망 담으로 둘러졌다.[8][9]

그러나 1952년 독일 내 국경선이 공식적으로 닫힌 후에도 베를린은 도시 내 분단 선을 통해 오가기가 수월했기 때문에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넘어가는 주요 경로가 되었다. 베를린은 동서를 나누던 분단 선의 유일한 구멍이자, 당시 동베를린 주민들의 돌파구이자 희망이었다.[10][11]

1961년까지 350만 명, 즉 동독 주민의 20%가 서독으로 탈출했다. 탈주자들은 대부분 젊고 좋은 교육을 받은 이들이었다. 그렇다 보니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대부분의 지식층이 빠져나가면서 동독의 손실이 상당했다.[31][5][6][7]

2. 2. 베를린 장벽의 등장

전문가들의 두뇌유출로 인해 동독의 정치적 신뢰성과 경제적 안전성이 크게 나빠져서 소련의 국경 재확보가 시급했다. 1949년과 1961년 사이, 250만 명의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탈출했다.[32]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 3년 동안 이 수치는 증가했는데, 1959년에는 14만 4천 명, 1960년에는 19만 9천 명, 그리고 1961년 첫 7개월 동안만 20만 7천 명이 탈출했다. 따라서 동독의 경제난은 심해져만 갔다.[33]

1961년 8월 13일, 이후 베를린 장벽으로 발전한 베를린을 가로지르는 철조망 담이 처음 동독에 의해 세워졌다. 이틀 후, 경찰과 군인들이 영구적인 콘크리트 벽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장벽과 더불어 1,336km에 달하는 구역 경계는 독일 일부 지역에서 동독 쪽으로 5.6km까지 확장되었으며, 지뢰가 매설된 "죽음의 지대"를 따라 높은 철망 울타리가 설치되었고, 탈출자의 속도를 늦추고 발자국을 더 쉽게 발견하기 위해 갈아엎은 땅의 수로도 설치되었다.[13]

1961년 서베를린으로의 인구 유출에 위기감을 느낀 동독 정부에 의해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쪽으로 탈출하는 수단은 여러 가지 남아 있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당초 하나의 게이트로 동서를 가르고 있었을 뿐이었기에, 자동차로 돌진하여 게이트를 파괴하고 강행 돌파하거나, 차고가 낮은 오픈카로 게이트 아래를 빠져나가는 동독 시민들이 나타났다. 이에 대해 당국은 게이트의 차단봉을 강화하거나 차단 위치의 높이를 낮추는 등의 대응을 했다.

3. 검문소로서의 역할

체크포인트 찰리는 프리드리히 거리(''Friedrichstraße''), 짐머 거리(''Zimmerstraße'')와 마우어 거리(''Mauerstraße'')의 교차로에 위치한 베를린 장벽의 검문소였다. 이곳은 외국인과 연합군 관계자만이 도보 또는 차량으로 통행할 수 있도록 지정되었으며, 이들은 프리드리히거리 철도 역과 같이 외국인이 사용하는 다른 구역의 검문소를 이용하는 것이 제한되었다.

"찰리"라는 이름은 NATO 음성 코드의 "C"에서 유래했다. 마찬가지로 서쪽에서 아우토반(''Autobahn'')에 위치한 다른 연합군의 검문소에는 체크포인트 알파(헬름슈테트)와 체크포인트 브라보(반제)가 있었다. 소련은 이곳을 프리드리히 거리 검문소(КПП Фридрихштрассе|KPP Fridrikhshtrasseru)라고 불렀고, 동독은 공식적으로 프리드리히-침머 거리 국경 검문소(Grenzübergangsstelle Friedrich-/Zimmerstraßede)라고 불렀다.[29]

베를린 장벽 검문소 중 가장 눈에 띄는 곳이었던 체크포인트 찰리는 종종 스파이 영화나 책에 등장하기도 했다.[14] 검문소 오른쪽에는 연합군 관계자, 국군, 방문객을 위한 카페 아들러("독수리 카페", Cafe Adlerde)라는 유명한 카페와 조망 위치가 있어, 동독을 관찰하기 좋은 장소였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동독과 서독 국경 당국의 상반된 우선순위를 반영하여 비대칭적인 구조를 가졌다. 28년간 운영되는 동안 동쪽 측면의 인프라는 장벽, 감시탑, 지그재그 장벽뿐만 아니라 차량과 탑승객을 검사하는 다차선 격납고를 포함하도록 확장되었다. 그러나 연합군은 영구적인 건물을 설치하지 않았고, 1980년대에 더 큰 금속 구조물로 교체되기 전까지는 나무 헛간을 경비초소로 사용했다. 연합군이 영구적인 건물을 짓지 않은 이유는 내부 베를린 지구 경계선을 국제 국경으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독에서 바라본 동독. 배경에 동독의 망루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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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도의 체크포인트 찰리


1984년 사람들이 체크포인트 찰리를 걸어서 통과하는 모습


1982년 체크포인트 찰리 관측소에서 본 소련 지역

4. 관련된 사건 사고

1962년 8월 17일, 18세의 동독 주민 페터 페히터는 체크포인트 찰리 근처 베를린 장벽에서 서독으로 탈출을 시도하다 동독 경비병에게 총격을 당했다. 페히터는 등에 총을 맞고 가시철조망에 걸린 채 쓰러졌고, 서방 언론인 등 수백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과다출혈로 사망했다.[17] 미군 병사들은 경계선에서 동쪽으로 수 미터 떨어진 곳에 쓰러진 페히터를 구조할 수 없었고, 동독 경비병들 역시 서방 병사들을 자극할까 두려워 접근하지 못했다. 페히터의 시신은 1시간 이상이 지난 후에야 동독 병사들에 의해 수습되었다.

이 사건으로 검문소 미국 측에서는 동독과 서독 양측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며칠 뒤 티어가르텐의 소련 전사 묘지로 향하던 소련 버스에 시민들이 돌을 던졌고, 소련군은 장갑차로 버스를 호위해야 했다. 이후 소련군은 티어가르텐과 가장 가까운 잔트크루크 다리 검문소만 통행을 허용하고, 영국 지역으로 장갑차 진입을 금지했다.

서방군은 이 금지령을 철저히 하기 위해 9월 초 무기, 탄약, 군용 차량을 배치했으나, 탄약은 사용되지 않았다. 1973년에는 동독 국경 경비병의 자동소총 발포로 체크포인트 찰리에 총탄 자국이 남는 사건이 발생했지만, 미군 사상자는 없었다.

4. 1. 베를린 위기: 소련과 미국 탱크 교착 사건

베를린 장벽 건설 직후, 미국소련의 탱크들이 체크포인트 찰리를 중심으로 대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1961년 10월 22일, 동독 군인이 오페라를 관람하기 위해 동독을 통과하려는 미국 외교관 앨런 라이트너(Allan Lightner)의 여행 문서를 검사하면서 시작되었다.[35]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 건설 직후, 체크포인트 찰리 양쪽에서 미군과 소련군 전차가 대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10월 22일, 동독 국경수비대가 서베를린 주재 미국 외교관 앨런 라이트너의 여행 서류를 검사할 권한이 있는지에 대한 분쟁으로 시작되었다. 라이트너는 동베를린에서 오페라 공연을 관람하려고 했다.

독일을 점령하고 있는 연합국 4개국 간의 협정에 따르면, 연합군은 베를린 전체에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야 했고, 서독이나 동독 어느 쪽의 군대도 베를린에 주둔할 수 없었다. 서방 연합국은 또한 초기에는 동독 국가와 동베를린에 남아 있을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동베를린에 대한 소련의 권한만 인정했다.

10월 27일, 10대의 소련 전차와 같은 수의 미국 전차가 체크포인트 양쪽에 약 91.44m(약 91미터) 간격으로 배치되었다. 이 대치는 10월 28일, 전차 철수와 긴장 완화에 대한 미소 양국의 암묵적인 합의에 따라 평화적으로 종결되었다. 이 합의에는 미국 법무장관 로버트 F. 케네디와 소련 정보 장교 게오르기 볼샤코프 간의 논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15]

검문소 운영이 시작된 지 2개월 후인 1961년 10월, 체크포인트 찰리에서 발생한 미소 양군의 대치는 “미소 양국의 최초이자 마지막 직접적인 무력 충돌의 장”이라고 불렸다.

미·영·불·소 연합군 4개국은 1945년 포츠담 회담에서 “4개국의 관계자는 베를린의 어느 지역에서든 독일 경찰의 여권 검사를 받지 않고 이동할 수 있다”는 합의를 서로 맺었으며, 동베를린 당국에도 소련 국방장관 로디온 말리놉스키로부터 “소련의 허가 없이 경계선에서 아무것도 변경해서는 안 된다”는 통지가 내려왔다. 그러나 1961년 10월, 동베를린 당국은 이 합의를 무시하고, 동측 경비대가 서측 문관에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10월 22일, 서베를린 주재 미국 공사 에드윈 앨런 라이트너와 그의 아내가 동베를린에서 공연을 보기 위해 체크포인트 찰리를 통과할 때, 동독 경비대는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지만, 라이트너는 이를 거부했다.

이후 소련군 정치 고문 대리 라자레프 대령이 도착하여 동독 측의 행동에 대해 사과했지만, 한편으로 무장한 미군의 소련 관리 지역 진입에 대해서는 분개하며 항의했다.

10월 25일, 민간인 복장의 미군 헌병대 장교 2명이 공용차 번호판을 단 차로 검문소에 나타났다. 경비대가 깃발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 차를 정지시키자 차는 되돌아갔지만, 이번에는 호위를 받고 나타나 검문소를 방문했다. 다시 되돌아가자 이번에는 미군 전차가 등장하여, 미국 측은 거듭 자국의 외교권을 과시했다. 10월 26일 이후에도 과시 행동을 반복했고, 27일에도 민간 공무원의 차를 병사가 호위하여 동베를린에 들어갔다.

그런데 바로 그 직후, 소련의 T-54 전차 33대가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출동했다. 이 전차 중 10대가 프리드리히 거리를 진행하여 체크포인트 찰리의 미소 경계선까지 50~100미터 지점에서 정지했다. 미군은 전차를 반전시켜 경계선까지 소련군 전차와 거의 같은 거리의 위치까지 진출시켰다. 오후 6시경 체크포인트 찰리를 사이에 두고 양군의 전차가 대치했다.

이후 양군은 서로 같은 수의 전차를 증원하여, 최종적으로는 서로 20대의 전차를 현장에 배치했다. 미군은 M48 패튼 전차 4량, 그리고 400m 후방에 4량을 대기시키고, 이 외에 5량의 병력 수송차와 5대의 지프를 출동시켰다. 베를린 주재 미군은 전 장병 6,500명이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영·불 양국도 즉각 지원 태세를 취하여, 프랑스군은 3,000명의 병사 전원을 병영에 대기시키고, 영국군은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 550m 지점에 대전차포를 배치하고, 무장 순찰대를 철조망으로 된 바리케이드 직전까지 진출시켰다.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고 긴장 상태를 완화시키는 것에 합의했다. 케네디는 소련 측이 먼저 전차를 철수한다는 조건과 맞바꿔 이후 베를린 시내에서의 소련 측 행동에 대해 눈감아주겠다고 제안했다. 소련 측은 이것을 외교적 승리로 받아들이고 케네디의 제안을 수락했다.

10월 28일, 10시 30분에 소련군 전차가 체크포인트 찰리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30분 후 미군 전차도 철수를 시작했고, 약 18시간 만에 양군의 대치가 해소되었다.[30]

4. 2. 초기 엽기적인 탈출들

베를린 장벽은 1961년 동독 정부에 의해 세워졌다. 초기에는 체크포인트 찰리가 간단한 문으로만 분단 선을 막았고, 베를린 장벽 또한 낮았기 때문에 다양하고 기발한 탈출 사례들이 나타났다.[36]

동독 주민들은 자동차로 체크포인트 찰리의 문을 들이받고 탈출하거나, 접이식 자동차(컨버터블)를 이용하여 장벽에 접근해 지붕을 내려 서독으로 도망쳤다. 어떤 이들은 고속 열차를 몰고 경로를 이탈하여 분단 선을 넘기도 했고, 열기구를 타고 탈출하기도 했다.[36] 1979년에는 16일 동안 땅굴을 파서 단체로 서독에 입성하기도 했다.[37] 동독 군인들조차 가시철사를 뛰어넘거나, 분단선 근처 아파트에서 창밖으로 뛰어넘는 시도들도 있었다.[37]

이러한 상황 때문에, 이후 체크포인트 찰리는 자동차들의 무분별한 질주를 막기 위해 더 튼튼한 장애물이 설치되었다. 장벽 또한 위아래로 길이가 늘어졌고 여러 차례를 거쳐 거대한 콘크리트 벽으로 자리 잡았으며 감시가 강화되었다.

4. 3. 페터 페흐터의 죽음

페터 페흐터


1962년 8월 17일, 페터 페흐터는 친구 헬무트 쿠바이크와 함께 동독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였다. 그 계획은 베를린 장벽 짐머거리(''Zimmerstraße'') 주변의 목공소 작업실에 숨어 있다가 창문으로 뛰어내려 죽음의 띠로 가는 것이었다. 죽음의 구역을 건넌 뒤 가시 돋힌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는 2미터 벽을 올라간 후 체크포인트 찰리 근처 서독의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 주로 가려고 했었다.

벽에 도착했을 때 경비대는 그들에게 총을 쐈다. 헬무트는 벽을 통과하는 데 성공했지만, 페터는 수백 명이 보고 있는 가운데 벽에 매달린 채 골반에 총을 맞았다. 그는 동독 쪽 죽음의 구역(''Death Strip'')으로 떨어졌고, 신문 기자들을 포함한 서독 주민들이 보고 있음에도 방치되었다. 비명을 질렀지만 동독으로부터 어떠한 의료지원도 받지 못했고, 서독 또한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서독 경찰은 그에게 붕대를 던져주었으나 그에게 닿지 못했다. 그는 약 한 시간 뒤 과다출혈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죽음의 결과로 서독에 수백 명의 시위대가 형성되었고 국경 수비대에게 "살인자"라고 소리 질렀다.[17]

페터 페흐터의 기념비 "그는 단지 자유를 원했다"


페터 페흐터에 대한 의료 지원 부족은 상호 간의 공포의 결과였다. 서독 행인들은 총의 위협 때문에 그를 돕는 것을 방해받았다. 타임지에서 보고된 것에 따르면, 미군 소위가 서베를린 미 사령관으로부터 특별 지시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서베를린으로부터 의료지원을 확실히 불가능하게 하는 재판 중에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범죄과학 병리학자 오토 프로코프(''Otto Prokop'')의 보고에 따르면 "페흐터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오른쪽 엉덩이에 박힌 총알은 심각한 내부 손상을 야기했다. 동독 군인들은 그가 떨어진 지 한 시간 뒤에 페터 페흐터의 시신을 회수하였다.

페터가 죽은 자리에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 위에는 ''"er wollte nur die Freiheit"'' "그는 단지 자유를 원했다"라고 새겨져 있다.

1962년 서베를린으로 탈출을 시도하다 총에 맞은 페히터의 시신이 베를린 장벽 옆에 놓여 있다

5. 오늘날의 체크포인트 찰리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면서 시내 국경 검문소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그 후에도 체크포인트 찰리는 공식적으로는 외국인과 외교관을 위한 검문소 역할을 유지했지만, 1990년 독일 통일을 앞둔 6월 22일에 검문소 건물이 철거되었다. 이 건물은 시내 체렌도르프 지역에 있는 연합군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2000년, 주변 지역 재개발로 인해 구 동독의 감시탑이 철거되었다. 체크포인트 찰리 건물 중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감시탑이었지만, 새로 건설되는 사무실 건물과 상업 시설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당초 베를린시는 이 감시탑을 보존하려 했으나, 역사적 건축물로 인정받지 못해 포기했다. 철거 작업은 세간의 주목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2004년 10월 31일부터 2005년 7월 5일까지 실제 장벽의 일부를 사용해 새로 흰색으로 칠한 벽과 냉전 시대에 장벽을 넘으려다 목숨을 잃은 1,067명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십자가가 부지에 세워졌다.

2007년 10월에는 독일 방송사 ARD가 2부작 영화 『Die Frau vom Checkpoint Charlie』(체크포인트 찰리의 여인)을 방영했다. 이 작품은 두 딸과 함께 서독과 동독으로 갈라져 살게 된 한 여성이 1980년대에 체크포인트 찰리 앞에서 동독에 대한 항의 활동을 벌여 유명해지면서 동서독 간 정치 문제로까지 발전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체크포인트 찰리의 옛터와 그 주변은 베를린의 관광 명소 중 하나로 꼽힌다. 옛날에 장벽이 있었던 곳에는 그 선을 따라 도로에 벽돌로 표시가 되어 있다. 검문소 옛터에는 2000년에 복원된 오두막과 표지판이 서 있으며, 오두막 외벽에는 미국군과 소련군 사진이 앞뒤로 크게 걸려 있다. 미국군 사진은 구 소련 지역 쪽을, 소련군 사진은 구 미국 지역 쪽을 향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은 1990년대 초 베를린에 주둔했던 병사들로, 소련군 병사의 신원은 불명이나 미국군 병사의 경우 이름과 소속 등이 밝혀져 있다.

관광객들은 유료로 연합군 헌병으로 분장한 배우들과 함께 초소 앞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지만, 베를린 당국은 2019년 11월 배우들이 명소에서 사진 촬영 비용을 요구하며 관광객을 착취해왔다는 이유로 이 관행을 금지했다.

2006년 여름부터는 옛 경계선 일대에서 무료 야외 전시가 시작되었다. 프리드리히 거리, 짐머 거리, 슈체엔 거리 (Schützenstraßede) 세 개의 길을 따라 세 가지 다른 주제로 당시 자료가 공개되고 있다. 먼저 프리드리히 거리 서쪽 벽면에서는 장벽을 넘어 서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과 처음에는 작았던 검문소가 9개의 접수 창구를 갖추게 될 때까지 확장된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동쪽 벽면에서는 냉전의 상징으로서 체크포인트 찰리를 주제로 1961년 미소 양국의 전차가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던 당시 사진 등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짐머 거리 전시 구역에서는 장벽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장소와 실제 장벽의 유적 등이 설치되어 있다.

5. 1. 체크포인트 찰리의 보존

베를린 장벽이 1989년 11월에 개방되고 체크포인트 찰리는 1990년 6월 22일에 제거되었다.[18] 달렘(''Dahlem'')에 위치한 연합군 박물관에는 실제 체크포인트 찰리의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19] 이전의 장벽과 국경의 모습은 현재 자갈들로 이루어진 선으로 거리에 표시되어 있다. 국경 횡단을 표시했던 검문소의 복사본이 체크포인트 찰리가 한때 있었던 곳에 나중에 지어졌다. 이 복사본은 1961년에 만들어진 다른 검문소들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분단선과 검문소 사이에는 샌드백으로 된 벽이 항상 존재했었다. 1990년에 제거된 검문소는 최초의 체크포인트 찰리보다 상당히 컸으며 샌드백이 없었다.

오늘날의 체크포인트 찰리. 동쪽에서 바라보았을 때 미군이 지켜보고있다.


베를린 장벽 이전 표지


1989년 11월 장벽이 개방되고 1990년 6월 22일 검문소 부스가 철거되었지만,[18] 1990년 10월 독일 통일까지 검문소는 외국인과 외교관을 위한 공식 통행 지점으로 남아 있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그 이후로 베를린의 주요 관광 명소 중 하나가 되었으며, 국경 통과 지점의 원래 유적 일부와 재건된 부분, 기념 시설 및 관광 시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미국 측의 초소는 1990년에 철거되었고, 현재 베를린-체를렌도르프에 있는 연합군 박물관의 야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19] 초소와 국경 통과 지점을 표시했던 표지판의 복제품이 나중에 거의 같은 장소에 재건되었다. 이는 1961년 국경 쪽 사주막 뒤에 세워진 최초의 초소와 비슷하다. 수년에 걸쳐 크기와 배치가 다른 초소로 여러 번 교체되었다. 1990년에 철거된 것은 최초의 것보다 훨씬 컸고 사주막이 없었다.

2006년 여름 야외 전시회가 개장했다. 프리드리히슈트라세와 짐머슈트라세를 따라 있는 갤러리 벽에는 탈출 시도, 검문소 확장 방법, 냉전 기간 중 중요성(1961년 소련과 미국의 전차 대치 포함), 독일 분단과 장벽에 관한 다른 중요한 기념관과 박물관에 대한 개요 등에 대한 정보가 제공된다.

개발업체들은 사무실과 상점을 만들기 위해 2000년에 체크포인트 찰리의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주요 원형 구조물인 동독 감시탑을 철거했다. 도시는 탑을 보존하려고 했지만 역사적 랜드마크로 분류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러나 개발은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

2017년부터 이 부지에 대한 호텔 건설 계획은 해당 지역의 적절한 개발에 대한 전문적이고 정치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2018년 부지가 보호 문화유산 지역으로 최종 등재된 후 계획은 문화유산 친화적인 접근 방식으로 변경되었다.[20] 그러나 짐머슈트라세와 마우어슈트라세/슈체첸슈트라세 사이의 지역은 비어 있으며, 다수의 임시 관광 및 기념 시설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5. 2. 체크포인트 찰리 박물관

검문소 근처에 위치한 체크포인트 찰리 박물관(Haus am Checkpoint Charlie)은 라이너 힐데브란트(Rainer Hildebrand)가 1963년에 개관한 민간 박물관이다.[24] 1990년대에 새로운 건물로 보강되었다. 1990년대 초 베를린에 주둔했던 미군과 소련군, 두 군인의 사진이 기념비에 전시되어 있다.

체크포인트 찰리 박물관


"마우어무제움 - 박물관 하우스 암 체크포인트 찰리"는 1963년 6월 14일 베를린 장벽 바로 인근에 개관했다. 이곳에는 독일 분단과 관련된 사진과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다. 국경 요새화와 "보호국의 지원"이 설명되어 있다. 성공적인 탈출 시도 사진 및 문서 외에도 열기구, 탈출용 자동차, 의자 리프트, 소형 잠수함 등의 탈출 도구가 전시되어 있다.

이 박물관은 라이너 힐데브란트 박사가 설립한 등록된 협회인 '아르바이츠게마인샤프트 13. 아우구스트 e. V.'에서 운영한다. 관장은 설립자의 미망인인 알렉산드라 힐데브란트이다. 박물관은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이 설계한 "체크포인트 찰리의 집" 건물 일부에 자리 잡고 있다.

2007년 85만 명의 방문객을 기록한 체크포인트 찰리 박물관은 베를린과 독일에서 가장 많이 방문하는 박물관 중 하나이다.[24]

체크포인트 찰리 박물관은 베를린의 주요 관광 명소 중 하나이다. 관광객들은 복제된 체크포인트 찰리 앞에 서 있는 연합 군사 경찰로 분장 한 배우들과 유료로 촬영 할 수 있다. 군사 모조품들로 이루어진 여러 기념품들이 있고 상점들도 많아지고 있다.

1963년에 개관한 민간 박물관인 체크포인트 찰리 박물관에는 자동차, 비행선, 잠수함, 터널 등을 이용하여 장벽을 넘어 서쪽으로 탈출하려 했던 사람들의 소개 외에도, 독일 분단의 역사와 베를린 장벽에 대한 자료를 많이 전시하고 있으며 베를린 시내 박물관 중에서도 손꼽히는 방문객 수를 자랑한다.

5. 3. 체크포인트 찰리 관련 전시들

2006년 여름부터 야외 전시가 시작되었다. 프리드리히슈트라세와 짐머슈트라세를 따라 있는 갤러리 장벽에는 탈출 시도, 검문소 확장 과정, 냉전 시대의 중요성, 특히 1961년 소련미국의 탱크 충돌과 같은 정보들이 전시되어 있다.[38]

2012년에는 기존 체크포인트 찰리 위치 근처에 '블랙박스-냉전의 역사(''Blackbox-The History of Cold War'')' 전시장이 개장되어 대형 사진, 영상 등 다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같은 해 9월에는 블랙박스 옆에 분단 당시 상황을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아씨씨 야데가(''Asisi Yadegar'')의 파노라마 작품 프로젝트 Die Mauer/The Wall도 제공되었다. 이 전시들은 냉전독일 분단, 그리고 장벽에 대한 정보 제공에 힘쓰고 있다. 2015년에는 블랙박스 전시장을 박물관으로 만들 계획이 있었다.[38]

6. 예술 속 체크포인트 찰리

체크포인트 찰리는 냉전을 배경으로 한 다양한 영화와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하며, 냉전의 상징적인 장소로 묘사된다.

Die Frau vom Checkpoint Charliede[39] (사랑의 국경선 / 체크포인트 찰리의 여인)는 유타 플룩(Jutta Fleck)의 실화[40]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프랑스-독일 공동 출자 문화 방송국인 Arte를 통해 2007년 10월 처음 방영됐다. 영화 속 주인공 사라 벤더는 두 딸들과 함께 1982년에 동독에서 서독으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아이들과 떨어지게 된다. 동독에 남겨진 아이들을 되찾기 위해 외국인들이 지나가는 곳이자 동독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체크포인트 찰리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몇 년간 시위를 한다. 영화 속의 체크포인트 찰리는 주인공이 일인시위를 벌인 상징적이며, 외국인들이 지나감으로써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동독의 심기를 건드린 전략적인 장소이다.

냉전을 배경으로 영국과 동독 첩보전을 그린 존 르 카레의 영국 소설 The Spy who came in through the Cold영어와 Жерар де Вилье(Gérard de Villiers)의 프랑스 첩보 소설 시리즈 S.A.S 중 베를린을 배경으로 한 Berlin: Check-point Charlie프랑스어, 제임스 본드 시리즈와 같이 냉전의 상징답게 첩보물의 단골 배경이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존 르 카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1965년 영화 《첩보원》의 오프닝 장면에 등장하지만, 소설 자체에는 체크포인트가 나오지 않는다.

제임스 본드(로저 무어 분)는 1983년 영화 《옥토퍼시》에서 서베를린에서 동베를린으로 체크포인트 찰리를 통과한다.[25]

1985년 영화 《Gotcha!》에는 주인공(앤서니 에드워즈 분)이 체크포인트 찰리를 통과하여 서베를린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영화 《간첩교》에서는 체포된 미국 대학생 프레데릭 프라이어가 소련 스파이 루돌프 아벨과 잠입 비행기 조종사 프랜시스 게리 파워스의 교환 협상의 일환으로 체크포인트 찰리에서 석방된다. 프라이어의 석방은 화면 밖에서 이루어지고 파워스와 아벨의 교환은 글라이니케 다리에서 이루어진다.

2015년 영화 《맨 프롬 U.N.C.L.E.》의 오프닝 장면에도 묘사되었다.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는 자신의 히트곡 "올리버의 군대(Oliver's Army)"에서 체크포인트 찰리를 언급한다.[26]

더 식스티나인 아이즈(The 69 Eyes)는 앨범 《데빌스(Devils)》에 수록된 곡 "필 베를린(Feel Berlin)"에서 체크포인트 찰리를 언급한다.

참조

[1] 웹사이트 A brief history of Checkpoint Charlie https://www.historye[...] 2022-03-19
[2] 서적 Kennedy in Berlin Cambridge University Press
[3] 서적 The hidden hand: Gorbachev and the collapse of East Germany American Enterprise Institute
[4] 논문
[5] 논문
[6] 논문
[7] 논문
[8] 논문
[9] 논문
[10] 논문
[11] 서적 Spying on Science: Western Intelligence in Divided Germany 1945–1961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12] 논문
[13] 논문
[14] 웹사이트 Insider's Guide to Cold War Berlin https://web.archive.[...] 2014-11-06
[15] 서적 Berlin 1961 https://archive.org/[...] Penguin Group (USA)
[16] 뉴스 Berlin Wall: What You Need To Know About the Barrier That Divided East and West https://www.independ[...] The Independent 2014-11-07
[17] 웹사이트 Media battle ensues following the death of Peter Fechter https://www.axelspri[...] 2023-09-06
[18] 웹사이트 June 22, 1990: Checkpoint Charlie Closes https://abcnews.go.c[...] 2011-06-21
[19] 웹사이트 Allied Museum Berlin https://web.archive.[...]
[20] 뉴스 At Checkpoint Charlie, Cold War History Confronts Crass Commercialism https://www.nytimes.[...] 2019-02-05
[21] 웹사이트 Black Box Cold War https://www.berlin.d[...] 2016-05-25
[22] 뉴스 Berlin Council Targets 'Checkpoint Charlie' Memorial https://www.npr.org/[...] NPR
[23] 간행물 Checkpoint Charlie: Between Memorials and Snack Bars https://www.orte-der[...] Haus der Geschichte
[24] 웹사이트 Museen in Berlin: Die Top Ten – 4. Platz 4: Mauermuseum - Haus am Checkpoint Charly https://www.berlin.d[...] 2014-07-04
[25] 웹사이트 Bond's Border Crossing (Checkpoint Charlie) – James Bond Locations https://web.archive.[...]
[26] 웹사이트 Elvis Costello – Oliver's Army https://genius.com/E[...] 2023-01-07
[27] 웹사이트 Checkpoint Charlie https://www.flickr.c[...] 2016-06-02
[28] 웹사이트 In Hyder, roaming grizzlies, no police and large doses of Canada https://www.adn.com/[...] 2016-07-04
[29] 서적 観光コースでないベルリン ヨーロッパ現代史の十字路 高文研
[30] 웹사이트 The Wall, 1958-1963 http://homepages.stm[...]
[31] 서적 Closed Borders: The Contemporary Assault on Freedom of Movement Yale University Press
[32] 서적 The hidden hand: Gorbachev and the collapse of East Germany American Enterprise Institute
[33] 논문 The Assault on Freedom of Emigration World Affairs
[34]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s://web.archive.[...] 2015-10-11
[35] 서적 Berlin 1961 Penguin Group (USA)
[36] pdf http://www.mauermuse[...]
[37]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mentalfloss.c[...] 2015-10-11
[38]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www.visitberl[...] 2015-10-11
[39]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www.arte.tv/d[...] 2015-10-11
[40] 웹사이트 http://www.focus.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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