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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파르불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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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롤루스 파르불루스는 846년 서프랑크에서 태어난 샤를 2세의 아들로, 855년 아키텐의 왕으로 임명되었으나 실권은 없었다. 그는 아키텐의 독립을 원하는 귀족들의 반발과 노르만족의 침입 속에서 866년 사고로 정신적 무능력 상태가 되었고, 이듬해 사망했다. 아키텐은 그의 형제인 루이 2세에게 넘어갔으며, 카롤링거 왕조는 아키텐에 대한 통치력을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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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루스 파르불루스
기본 정보
칭호아키텐의 왕
출생알 수 없음
사망866년, 부제
매장알 수 없음
가족 관계
아버지샤를 2세
어머니에르멘트루드 도를레앙
배우자아내
자녀알 수 없음

2. 생애

카롤루스 파르불루스는 855년부터 866년까지 아키텐의 왕이었으나, 실권은 전혀 없었다.[5] 864년 피핀 2세가 체포된 후에야 리모주에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성장하면서 스스로 주권을 행사하려 했으나, 수도원이나 성당, 왕궁의 재산을 처분할 권한은 없었다.

866년 모의 전투 중 말에서 떨어지면서 머리(혹은 이마)에 칼을 맞아 심하게 멍이 들었고, 이후 정신적으로 무능력하게 되었다. 같은 해, 후계자 없이 간질을 앓다가 뷔장케에서 사망했으며, 시신은 부르쥬의 성당에 매장되었다.[5] 이후 아키텐은 그의 형 루이 2세가 차지했다.

아버지 대머리왕 카를에 의해 아키텐의 명목상 분국왕에 봉해졌지만, 루이 말더듬이 재위기간 중 노르만 및 무슬림의 잦은 침입으로 카롤링거 왕조는 아키텐에 대한 통치력을 상실하게 된다.

2. 1. 초기 생애

846년 서프랑크 브로슈에서 서프랑크의 왕 샤를 '대머리왕'와 왕비 오를레앙의 이르멘가르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루이 '말더듬이'의 동생이다.[5]

2. 2. 아키텐의 왕

838년 삼촌인 피핀 1세가 죽자 아버지 대머리왕 카를은 아키텐의 왕위를 주장하였다. 아버지 대머리왕 카를은 젊은 조카 피핀 2세를 체포하여 구금시키고, 독일인 루트비히의 반발을 무마하고, 아키텐 분리주의를 막기 위해 855년 10월 15일 리모주에서 아키텐의 왕으로 세웠다. 이때 부르주 대주교 라울 부르주가 기름을 붓는 의식을 집전했다.[5] 그러나 피핀 2세는 탈옥하여 동프랑크 왕국으로 건너갔다.

아키텐의 귀족들은 서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했고, 855년 10월 피핀 1세의 아들 피핀 2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샤를은 864년 피핀 2세가 체포된 뒤에나 리모주에서 아키텐의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이전의 아키텐의 왕들과는 달리 샤를은 실권이 전혀 없는 왕이었다.

864년 3월 아키텐의 피핀 2세가 노르만 용병들을 고용해 아키텐을 침공, 푸아투툴루즈를 점령했다. 그해 6월 푸아투의 레녹스 백작이 피핀 2세를 사로잡아 대머리 카를에게 넘겼다.

865년 부왕 대머리 카를의 궁정으로 소환되었다가 그해 5월 다시 아키텐으로 보내졌다.

2. 3. 결혼과 이혼

862년 아버지 샤를 ''대머리왕''의 뜻에 거슬러 백작 훔베르트의 미망인과 결혼했으나 이듬해 이혼했다.[5] 샤를은 아내를 버리고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강요했지만, 카롤루스 파르불루스는 이를 거부했다. 865년 아키텐의 일부 귀족들은 이 결혼을 인정했지만, 자녀는 없었고 곧 다시 헤어졌다.

2. 4. 아키텐의 위기

864년 3월 피핀 2세는 노르만 용병을 고용해 아키텐을 침공, 푸아투툴루즈를 점령했다.[5] 그해 6월 푸아투의 레녹스 백작은 피핀 2세를 사로잡아 대머리 카를에게 넘겼다.

865년 카롤루스 파르불루스는 부왕 대머리 카를의 궁정으로 소환되었다가 그해 5월 다시 아키텐으로 보내졌다.

2. 5. 죽음

866년 모의 전투 중, 말에서 떨어지면서 머리(혹은 이마)에 칼을 맞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소년 샤를은 심하게 멍이 들었고, 이후 정신적으로 무능력하게 되었다. 같은 해, 샤를은 후계자 없이 사고 후유증으로 간질을 앓다가 뷔장케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부르쥬의 성당에 매장되었다.[5] 이후 아키텐은 그의 형 루이 2세가 차지하게 되었다.

3. 아키텐에 대한 영향

855년 10월 15일 리모주에서 샤를이 아키텐의 분국왕으로 임명되면서, 아키텐은 일시적으로 서프랑크 왕국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5] 그러나 샤를은 실권이 없는 왕이었고, 아키텐 귀족들은 서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했다. 864년 아키텐의 피핀 2세가 노르만 용병을 고용하여 아키텐을 침공하기도 했다. 샤를 사후 아키텐은 루이 2세에게 넘어갔지만, 루이 2세 재위 기간 동안 노르만족과 무슬림의 잦은 침입으로 카롤링거 왕조는 아키텐에 대한 통치력을 잃게 되었다.

참조

[1] 문서 Charles the Bald
[2] 서적 Warfare and Society in the Barbarian West, 450–900 Routledge 2003
[3] 문서 864
[4] 문서
[5] 문서 일설에는 동생이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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