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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린 드 프랑스 왕녀 (14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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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트린 드 프랑스 왕녀 (1401년)는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막내딸로, 잉글랜드 왕 헨리 5세와 결혼하여 잉글랜드 왕비가 되었다. 1421년 헨리 5세와의 사이에서 헨리 6세를 낳았으나, 헨리 5세가 사망한 후 오언 튜더와 재혼하여 에드먼드 튜더 등을 낳았다. 카트린은 1437년 3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녀의 두 번의 결혼은 잉글랜드 역사에서 중세에서 근세로 전환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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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린 드 프랑스 왕녀 (1401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보챔프 페이지, 1483–1494년 그림
보챔프 페이지에서 가져온 그림, 1483–1494년경
칭호잉글랜드 왕비
재위 기간1420년 6월 2일 – 1422년 8월 31일
대관식1421년 2월 23일
배우자헨리 5세 (1420년 결혼, 1422년 사망)
오언 튜더 (1428년경 결혼)
자녀헨리 6세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
베드퍼드 공작 제스퍼 튜더
왕가발루아 가
아버지샤를 6세
어머니이사보 도 바비에르
출생일1401년 10월 27일
출생지호텔 생폴, 프랑스
사망일1437년 1월 3일 (향년 35세)
사망지런던, 잉글랜드
매장지웨스트민스터 사원, 런던
결혼과 자녀
배우자 1헨리 5세
배우자 2오언 튜더
자녀헨리 6세, 에드먼드 튜더, 제스퍼 튜더
가계
아버지샤를 6세
어머니이사보 도 바비에르

2. 생애

헨리 5세의 아버지 헨리 4세는 아들 헨리와 카트린의 결혼을 일찍부터 추진했지만, 성사시키지 못하고 사망했다. 프랑스 왕실은 카트린의 언니 발루아의 이자벨의 전례 때문에 이 결혼에 소극적이었다.[5]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영국이 대승을 거두자, 헨리 5세는 프랑스에 카트린과의 결혼 및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요구했다. 카트린의 어머니 이자보가 이 조건을 수용하여 1420년 트루아 조약이 체결되었다. 1420년 6월 2일 헨리 5세와 카트린은 트루아의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1421년 2월 23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치렀다.[6]

1421년 12월 6일 윈저 성에서 아들 헨리 6세가 태어났지만, 헨리 5세는 1422년 8월 급사했다.[6]

헨리 5세와 카트린 드 발루아의 결혼식. 삽화, 장 샤르티에, 샤를 7세 연대기, 1494년경, 영국 도서관, Royal E.V., f. 9v.


이후 카트린은 오언 튜더와 재혼하여 제1대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 등 4남 3녀를 낳았다.[7] 카트린과 오언 튜더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다음과 같다.

이름출생 및 사망 (추정)비고
에드먼드 튜더헨리 7세의 아버지
재스퍼 튜더
에드워드수도사가 되어 어린 나이에 사망[1]
오언젖먹이였던 막내로 수도원에서 양육되어 승려가 됨
마가렛수녀가 되어 어린 나이에 사망
캐서린 (또는 마가렛)1437년막내. 출산 직후 사망[7]



카트린은 1437년 초 막내(이름: Catherine 또는 Margaret)를 낳은 직후 사망하여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7] 그녀가 오언과의 사이에서 낳은 에드먼드는 이후 튜더 왕조를 연 헨리 7세의 아버지이다.

2. 1. 초기 생애

카트린 드 발루아는 1401년 10월 27일 파리의 왕궁인 오텔 생폴(Hôtel Saint-Pol)에서 프랑스 왕 샤를 6세와 그의 아내 바이에른의 이자보의 막내딸로 태어났다.[4] 어린 시절, 잉글랜드 왕 헨리 4세는 자신의 아들인 헨리(훗날 헨리 5세)와 카트린의 결혼을 추진했으나, 헨리 4세가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5]

일부 저술가들은 카트린이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소홀히 방치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어머니 이자보의 재정 기록에 따르면, 카트린은 프랑스 공주에게 어울리는 장난감을 제공받았고, 종교 서적을 읽었으며, 푸아시(Poissy)의 수녀원에서 종교 교육을 받았다.[4]

1408년, 헨리 4세는 다시 카트린과 헨리 5세의 결혼을 제안했다. 그러나 카트린의 언니 발루아의 이자벨이 잉글랜드에서 프랑스로 간신히 탈출해야 했던 과거 때문에 프랑스 측은 이 결혼에 반대했다. 협상은 헨리 5세 즉위 후에도 계속되었고, 내전 상태였던 프랑스에서 아르마냐크파부르고뉴파는 각각 헨리 5세에게 지원을 요청하며 정략결혼을 제안했다. 아르마냐크파는 카트린을, 부르고뉴파는 부르고뉴 공작 장 1세의 딸 카트린을 왕비 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헨리 5세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요구하면서 협상은 결렬되었고, 1415년 3월 영불 협상은 최종적으로 결렬되었다.[5]

2. 2. 잉글랜드 왕비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잉글랜드가 대승을 거두자, 헨리 5세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과 카트린과의 결혼을 요구했다.[5] 1420년 트루아 조약에 따라 헨리 5세와 카트린은 트루아에서 결혼식을 올렸고,[6] 1421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치렀다.[6]

1421년 12월 6일, 카트린은 윈저 성에서 아들 헨리 6세를 낳았으나,[6] 헨리 5세는 1422년 8월 이질로 급사했다.[7]

2. 3. 오언 튜더와의 재혼

1422년 8월, 헨리 5세가 이질로 사망하면서, 캐서린은 결혼 2년 만에 젊은 미망인이 되었다.[6] 이후 9월 의회 개회식에 어린 아들 헨리 6세를 무릎에 앉히고 참석했으며, 1430년경까지 아들을 보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7]

캐서린은 어린 아들을 돌보기 위해 왕실 가정에서 살았지만, 이는 궁정 관리들이 왕비 미망인을 감시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서린은 1421년 프랑스에서 헨리 5세의 집사였던 월터 헌거포드 경을 섬겼던 웨일스인 오언 튜더와 관계를 맺었다. 튜더는 캐서린의 가정이나 의류 보관소의 관리인으로 임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관계는 캐서린이 윈저 성에 살 때 시작되었으며, 그곳에서 첫 아이를 임신했다. 어느 시점에서 캐서린은 왕실 가정을 떠났고, 1432년 5월 의회는 오언에게 영국인의 권리를 부여했는데, 이는 헨리 4세의 웨일스인 권리 제한 법률 때문에 중요한 조치였다.

캐서린과 오언의 결혼 날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들의 결혼 유효성과 자녀들의 적통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동시대의 증거는 없다. 튜더 왕조는 오언 튜더와 캐서린의 관계에서 시작되었으며, 헨리 7세가 그 계보를 이었다. 튜더 역사가들은 오언과 캐서린이 결혼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그들의 합법적인 결혼이 튜더 왕조의 주장에 존경심과 더 강력한 왕족 관계를 더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언과 캐서린 사이에는 적어도 여섯 명의 자녀가 있었다.

이름출생 및 사망 (추정)비고
에드먼드 튜더헨리 7세의 아버지
재스퍼 튜더
에드워드수도사가 되어 어린 나이에 사망[1]
오언젖먹이였던 막내로 수도원에서 양육되어 승려가 됨
마가렛수녀가 되어 어린 나이에 사망
캐서린 (또는 마가렛)1437년막내. 출산 직후 사망[7]



에드먼드, 재스퍼, 에드워드는 모두 궁정 밖에서 태어났다.[1] 오언과의 관계가 세상에 알려지자 오언은 투옥되었으나, 후에 탈출했다.[7] 아이들과 헤어진 캐서린은 런던 남쪽 사우쓰워크의 버몬지 수도원에 감금되어 1437년 1월 3일 35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사인은 불우한 환경 속에서 겪은 심적 고통으로 여겨진다.[7]

유복자 중 장남 에드먼드와 재스퍼는 서퍽 백작윌리엄 드 라 폴의 여동생에게 맡겨져 양육되었고, 성장하여 이복 형인 헨리 6세에게 발탁되어 각각 리치몬드 백작과 펜브룩 백작에 서임되었다.

2. 4. 죽음

캐서린은 1437년 초 막내 출산 직후 사망하여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7] 사망일은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출산이 아닌 질병으로 인해 버먼지 수도원에 들어갔다는 기록도 있어 사망 원인에 대한 논란은 존재한다. 캐서린은 사망 3일 전 유언장을 작성했으며, 현재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헨리 5세 예배당에 안치되어 있다.

사망 후, 캐서린의 적들은 퀸 다우어저의 재혼 법을 위반한 혐의로 오언을 기소하기로 결정했다. 오언은 의회에 출두하여 체포되어 뉴게이트 감옥에 수감되었으나,[7] 1438년 초 탈출, 그 해 7월 윈저 성에 갇히게 되었다.

한편, 오웬과 캐서린의 두 아들인 에드먼드와 재스퍼는 바킹 수녀원의 수녀이자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의 여동생인 캐서린 드 라 폴에게 맡겨졌다. 1442년 이후, 왕(그들의 이복형제)이 양육에 관여하게 되었고, 아버지 오웬은 2000파운드의 보석금으로 풀려났지만 1439년 11월 사면되었다.( 1440년 보석금 취소). 오웬은 그 후 1450년대 중반까지 왕실 가정의 일원으로 대우받았으며, 1461년 헤리퍼드셔 모티머 크로스 전투에서 요크 가문에 의해 처형될 때까지 살았다. 캐서린의 아들 헨리 6세는 살아남은 오웬의 아들들에게 백작 작위를 주었다. 에드먼드는 존 오브 곤트의 후손으로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던 마거릿 보퍼트와 결혼했고, 전쟁으로 다른 후보자들이 대부분 제거된 후, 그들의 아들 헨리 7세가 왕위에 올랐다.

캐서린의 장례식에 사용된 나무 장례상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남아있으며, 이전에는 언더크로프트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박물관에 전시되었으나 현재는 사원 트리포리움의 새로운 퀸즈 다이아몬드 주빌리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다. 묘비에는 원래 석고 기념물이 있었지만, 손자 헨리 7세 치세에 사원 확장 공사 중 고의로 파괴되었다. 일설에는 헨리가 자신의 사생아 출신을 숨기기 위해 기념물을 치우라고 명령했다고도 한다. 이때 관 뚜껑이 우연히 열리면서 시신이 드러났고, 여러 세대에 걸쳐 관광 명소가 되었다. 1669년 일기 작가 새뮤얼 핍스는 자신의 생일에 오래전에 사망한 왕비에게 키스하기도 했다.

캐서린의 유해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까지 제대로 매장되지 않았다.

3. 잉글랜드 역사에 끼친 영향

헨리 5세와 캐서린의 결혼은 랭커스터 왕조의 몰락과 튜더 왕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헨리 5세와 캐서린의 아들 헨리 6세는 샤를 6세의 광기 유전자를 물려받아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고, 이는 장미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7]

오언 튜더(en)와의 사이에서 낳은 에드먼드 튜더의 아들 헨리 7세는 장미 전쟁에서 승리하여 튜더 왕조를 열었다. 헨리 7세는 윌리엄 1세 이후의 대륙과의 연합 국가 구상을 버리고, 아더 왕 이후의 브리튼 섬 회귀주의를 채택했다.

캐서린의 두 번의 결혼은 잉글랜드 역사를 중세에서 근세로 전환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4. 자녀

헨리 5세와의 사이에서 아들 헨리 6세를 낳았다. 이후 오언 튜더(en)와의 사이에서 에드먼드 튜더, 저스퍼 튜더 등 최소 3남 1녀, 혹은 4남 1녀를 두었다.[1] 카트린은 1437년 초에 막내(이름: Catherine 또는 Margaret)를 출산한 직후 사망했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7] 그녀가 오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에드먼드는 훗날 튜더 왕조를 연 헨리 7세의 아버지이다.

4. 1. 헨리 5세와의 사이

1421년 12월 6일 윈저성에서 아들 헨리 6세를 낳았지만, 1422년 8월 남편 헨리 5세가 이질로 급사하는 비운을 겪었다.[6] 헨리 5세가 죽은 지 몇 달 후 샤를 6세가 사망하여 어린 헨리 6세는 잉글랜드와 잉글랜드가 점령한 북부 프랑스의 왕이 되었다.[7] 카트린은 어린 시절 아들을 매우 귀여워했다.

헨리 5세와 사이에 1남을 두었다.

이름출생사망비고
헨리 6세1421년1471년잉글랜드 왕


4. 2. 오언 튜더와의 사이

오언 튜더와의 사이에서 최소 3남 1녀, 혹은 4남 1녀를 두었다고 알려져 있다.[1]

이름출생사망비고
에드먼드1430년1456년장남, 리치먼드 백작, 헨리 7세의 아버지
저스퍼1431년경1495년차남, 펨브로크 백작, 베드퍼드 공작
오언(Owen) 또는 에드워드(Edward)삼남, 수도사가 되어 어린 나이에 사망[1]
마가렛(Margaret) 또는 타시나(Tasin)요절, 수녀가 됨



오언과의 관계가 세상에 알려진 후, 오언은 투옥되었다가 탈출했고, 카트린은 아이들과 헤어져 런던 남쪽 사우쓰워크의 버몬지 수도원에 감금되었다.[7] 유복자 중 장남 에드먼드와 재스퍼는 서퍽 백작윌리엄 드 라 폴의 여동생에게 맡겨져 양육되었고, 성장하여 이복 형인 헨리 6세에게 발탁되어 각각 리치몬드 백작과 펜브룩 백작에 서임되었다. 젖먹이였던 막내 오언은 수도원에서 양육되어 승려가 되었다.

5. 문화적 묘사


  •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5세''(약 1599년)는 아쟁쿠르 전투 이후 잉글랜드의 헨리 5세와 카트린 드 발루아의 결혼을 묘사한다.[1]
  • 메리 픽스의 희곡 ''퀸 캐서린; 또는, 사랑의 폐허''(1698년)는 카트린과 오언 튜더의 관계 종말을 묘사한다.[1]
  • 로즈메리 앤 시슨의 희곡 ''여왕과 웨일스인''(1957년)은 카트린 드 발루아와 오언 튜더의 이야기를 들려준다.[1]
  • 로즈메리 홀리 저먼의 소설 ''촛불 속의 왕관''(1978년)의 주제는 카트린 드 발루아이다.[1]
  • 마가렛 프레이저의 중세 미스터리 소설 ''소년의 이야기''(1995년)에는 카트린과 그녀의 아들들 에드먼드와 재스퍼가 등장한다.[1]
  • 진 플레이디의 ''여왕의 비밀''에서 카트린은 제목 인물이다.[1]
  • 진 플레이디의 또 다른 소설 ''세 여인을 위한 비문''은 헨리 6세의 섭정 시대를 카트린, 잔 다르크와 글로스터 공작 부인 엘레오노르의 삶에 초점을 맞춰 재구성한다.[1]
  • 역사 소설 ''운명이 그의 검을 만들다''에서 마사 로프하트는 카트린을 헨리 5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다섯 명의 화자 중 한 명으로 설정한다.[1]
  • 데드위드 존스의 소설 ''백합과 용''(2002년)은 오웬 튜더와 카트린 드 발루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1]
  • 조안나 힉슨의 소설 ''아쟁쿠르의 신부''(2013년)는 카트린 드 발루아의 초기 삶을 다루고, 속편 ''튜더 신부''(2014년)는 그녀의 잉글랜드 왕비로서의 삶과 오언 튜더와의 관계를 다룬다.[1]
  • 앤 오브라이언의 소설 ''금지된 여왕''(2013년)은 카트린 드 발루아의 삶을 자세히 묘사한다.[1]
  • 바노라 베넷의 소설 ''왕족의 피/여왕의 연인''(2009년)은 카트린의 어린 시절부터 오언 튜더와의 비밀 결혼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1]
  • 마리 그리피스의 소설 ''튜더 장미의 뿌리''(2014년)는 카트린의 헨리 5세와의 짧은 결혼과 그 후 오웬 앱 마레디드 앱 투두르와의 은밀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1]
  • 로렌스 올리비에 영화 ''헨리 5세''(1944년)에서 카트린(캐서린으로 표기)은 르네 애셔슨이 연기했다.[1]
  • 케네스 브래너 영화 ''헨리 5세''(1989년)에서 카트린(캐서린으로 표기)은 엠마 톰슨이 연기했다.[1]
  • 홀로 크라운 TV 시리즈(2012년)의 일부로 ''헨리 5세''의 BBC 각색에서 카트린(캐서린으로 표기)은 멜라니 티에리가 연기했다.[1]
  • 넷플릭스 영화 ''킹''(2019년)에서 카트린은 릴리-로즈 뎁이 연기했다.[1]

참조

[1] 논문 The lost Tudor 2023-03-01
[2] 논문 Stephan III.
[3] 서적 A Distant Mirror Alfred A. Knopf Inc.
[4] 서적 森、P57 - P58
[5] 서적 森、P59 - P62、石井、P253 - P254、ロイル、P129 - P130
[6] 서적 森、P62 - P64、石井、P249 - P252、P254 - P256、ロイル、P148 - P152
[7] 서적 森、P56 - P57、P64 - P67、石井、P256 - P260、ロイル、P159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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