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I. 하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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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칼 I. 하겐은 노르웨이의 정치인으로, 1978년부터 2006년까지 진보당 대표를 역임했다. 그는 1981년부터 2009년까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으며, 2005년부터 2009년까지 국회 부의장을 지냈다. 하겐은 포퓰리즘, 이민, 이슬람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표명했으며, 언론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2009년 정계 은퇴 후, 2021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오플란 지역구로 스토르팅에 재선되었고, 2025년 선거 불출마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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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I. 하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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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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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노르웨이어) | Carl Ivar Hagen |
출생일 | 1944년 5월 6일 |
출생지 | 오슬로, 노르웨이 |
국적 | 노르웨이 |
배우자 | 니나 오모트 (1970–1975), 엘리 하겐 (1983–현재) |
자녀 | 2명 |
모교 | 선덜랜드 기술 대학 |
소속 정당 | 진보당 |
경력 | |
병역 | [[파일:Coat of arms of the Norwegian Army.svg|20px]] 노르웨이 육군 |
임기 시작 | 2005년 10월 10일 |
임기 종료 | 2009년 9월 30일 |
의장 | 토르비에른 야글란 |
이전 | 잉에 뢰닝 |
이후 | 외위빈 코르스베르그 |
임기 시작 | 1978년 2월 11일 |
임기 종료 | 2006년 5월 6일 |
이전 | 아르베 뢰눔 |
이후 | 시브 옌센 |
선거구 | 오슬로 |
임기 시작 | 1974년 10월 18일 |
임기 종료 | 1977년 9월 30일 |
임기 시작 | 1981년 10월 1일 |
임기 종료 | 2009년 9월 30일 |
이전 | 안데르스 랑에 |
선거구 | 오플란 |
임기 시작 | 2021년 10월 1일 |
임기 시작 | 1981년 10월 2일 |
임기 종료 | 2005년 10월 5일 |
대표 | 자신 |
이전 | 하랄 비아르네 슬레테뵈 |
이후 | 시브 옌센 |
2. 초기 생애 및 교육
칼 I. 하겐은 CEO 라그나르 하겐(1908–1969)과 회계사 게르트 감보르(1914–2008) 사이에서 태어났다.[2] 부친의 조부 칼과 모친의 조부 이바르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3] 남동생 1명과 누나 1명이 있다.[4] 청년 보수당의 소극적인 회원이였으며, 부모님은 모두 노동당에 투표했다.[5] 1961년, 17세에 노르웨이 아메리카 라인 선박 ''MS 폴덴피요르''에서 견습생으로 일했다.[3] 1963년 Examen artium을 취득했고, 1964년 노르웨이 육군에 징집되어 Hønefoss 근처 Eggemoen과 Troms의 Maukstadmoen에서 공병으로 복무했다.[3]
이후 잉글랜드로 건너가 선덜랜드에서 수학 시험에 떨어졌지만, 뉴캐슬에서 마케팅 및 경영학을 공부하여 1968년 경영학 고급 국립 디플로마를 받았다.[2][3] 북부 잉글랜드 학생 정치에서 활동했으며, 1967년 전국 학생 연합 부회장 자리를 놓고 잭 스트로와 경쟁했다.[6]
정치에 전념하기 전, 1970년부터 1974년까지 테이트 앤 라일 노르웨이의 CEO였으며, 의회에서 물러난 후인 1977년부터 1979년까지 Finansanalyse의 컨설턴트,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석유 산업의 경제 정책 컨설턴트로 활동했다.[2]
2. 1. 출생 및 가정 환경
칼 I. 하겐은 CEO 라그나르 하겐(1908–1969)과 회계사 게르트 감보르(1914–2008) 사이에서 태어났다.[2] 그는 부친의 조부 칼과 모친의 조부 이바르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3] 남동생 1명과 누나 1명이 있다.[4] 하겐은 진보당에 합류하기 전 청년 보수당의 소극적인 회원이였으며, 부모님은 모두 노동당에 투표했다.[5] 하겐과 그의 중등학교 급우들에 따르면, 어린 시절 비교적 수줍음이 많았다. 1961년, 17세에 노르웨이 아메리카 라인 선박 ''MS 폴덴피요르''에서 견습생으로 일했다.[3] 1963년 Examen artium을 취득했고, 1964년 노르웨이 육군에 징집되어 Hønefoss 근처 Eggemoen과 Troms의 Maukstadmoen에서 공병으로 복무했다.[3]이후 잉글랜드로 떠났다. 원래 엔지니어가 되기를 원했지만, 선덜랜드에서 수학 시험에 떨어졌고, 뉴캐슬에서 마케팅 및 경영학을 공부하여 1968년 경영학 고급 국립 디플로마를 받았다.[2][3] 북부 잉글랜드 학생 정치에서 활동했으며, 1967년 전국 학생 연합 부회장 자리를 놓고 잭 스트로 (후에 노동당 국회의원 및 영국의 법무부 장관)와 경쟁했다.[6]
2. 2. 교육 및 군 복무
칼 I. 하겐은 CEO 라그나르 하겐(1908–1969)과 회계사 게르트 감보르(1914–2008) 사이에서 태어났다.[2] 그는 부친의 조부 칼과 모친의 조부 이바르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3] 그에게는 남동생 1명과 누나 1명이 있었다.[4] 하겐은 진보당에 합류하기 전 청년 보수당의 소극적인 회원이였으며, 그에 따르면 부모님 모두 노동당에 투표했다.[5] 하겐 본인과 그의 중등학교 급우들에 따르면, 어린 시절 비교적 수줍음이 많았다. 1961년, 17세가 되던 해에 그는 노르웨이 아메리카 라인 선박 ''MS 폴덴피요르''에서 견습생으로 일했다.[3] 1963년 Examen artium을 취득했다. 1964년에는 노르웨이 육군에 징집되어 Hønefoss 근처의 Eggemoen과 Troms의 Maukstadmoen에서 공병으로 복무했다.[3]이후 그는 잉글랜드로 노르웨이를 떠났다. 원래 엔지니어가 되기를 원했지만, 선덜랜드에서 수학 시험에 떨어졌고, 대신 뉴캐슬에서 마케팅 및 경영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하여 1968년에 경영학 고급 국립 디플로마를 받았다.[2][3] 어린 시절에는 내성적인 편이었지만, 곧 북부 잉글랜드 학생 정치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1967년에는 전국 학생 연합 부회장 자리를 놓고 잭 스트로 (후에 노동당 국회의원 및 영국의 법무부 장관)와 경쟁했다.[6]
2. 3. 영국 유학
칼 I. 하겐은 CEO 라그나르 하겐(1908–1969)과 회계사 게르트 감보르(1914–2008) 사이에서 태어났다.[2] 이후 노르웨이를 떠나 잉글랜드에서 유학했다. 원래 엔지니어가 되기를 원했지만, 선덜랜드에서 수학 시험에 떨어졌다. 대신 뉴캐슬에서 마케팅 및 경영학을 공부하여 1968년에 경영학 고급 국립 디플로마를 받았다.[2][3] 어린 시절에는 내성적인 편이었지만, 곧 북부 잉글랜드 학생 정치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1967년에는 전국 학생 연합 부회장 자리를 놓고 잭 스트로 (후에 노동당 국회의원 및 영국의 법무부 장관)와 경쟁했다.[6]3. 정치 경력
하겐은 페르 보르텐 내각(1965~1971) 시절 보수당이 사회 민주주의의 대안으로서 신뢰를 잃었다고 설명했는데, 이는 노동당 시절보다 세금과 국가 권력이 더 증가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겐은 개인에 대한 국가 권력을 축소하길 원했고, 이 때문에 안데르스 랑에의 정치적 견해가 그에게 호소력을 가졌다.[5]
하겐은 1973년 안데르스 랑에 당의 국회 부대표로 정치 경력을 시작하여, 이후 여러 직책을 거치며 노르웨이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노르웨이 전기 사전에 기고한 구들레이브 포르에 의해 노르웨이 최초의 포스트모던 정치인으로 평가받기도 했다.[5]
하겐의 정치 경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기간 | 직책 |
---|---|
1973 | 안데르스 랑에 당 국회 부대표 |
1974 | 개혁당 창당, 국회의원 (안데르스 랑에 사망 후) |
1977 | 진보당으로 당명 변경 |
1978-2006 | 진보당 대표 |
1979-1982, 1987-1991, 1995-1999 | 오슬로 시의회 의원 |
1981-2009 | 국회의원 (7선) |
2005-2009 | 국회 부의장 |
2010 | 오슬로 시장 후보 출마 (낙선) |
2021 | 오플란 지역구 국회의원 당선 |
하겐은 대중 연설과 미디어 활용 능력이 뛰어났으며, 안데르스 랑에의 저속한 어조에서 당 이미지를 완화하는 데 성공했다.[5] 그는 스스로를 고전적 자유주의자로 여겼지만, 정치 평론가들은 그의 행보를 대중주의적이라고 평가했다.[5]
3. 1. 초기 정치 활동 (1973-1978)
하겐은 페르 보르텐 내각(1965~1971) 시절 보수당이 사회 민주주의의 대안으로서 신뢰를 잃었다고 설명했는데, 이는 노동당 시절보다 세금과 국가 권력이 더 증가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겐은 개인에 대한 국가 권력을 축소하길 원했고, 이 때문에 안데르스 랑에의 정치적 견해가 그에게 호소력을 가졌다.[5]하겐은 1973년, 새로 창당된 안데르스 랑에 당의 국회 부대표가 되면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1973년 4월 '사가 키노'에서 열린 당 창당 회의에 참석했고, 부대표 에릭 옘스-온스타드로부터 당 선거에 출마할 의향이 있는지 질문을 받았다.[3] 그러나 하겐은 곧 다른 이유로 안데르스 랑에에게도 신뢰를 잃었고, 1974년 몇몇 다른 당 "온건파"와 함께 탈당하여 단명한 개혁당을 창당했다.[5][7] 그 해 말, 국회에서 1년 동안 활동한 후, 안데르스 랑에가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하겐은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는 랑에의 국회 부대표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개혁당은 다음 해에 안데르스 랑에 당으로 돌아가 합병되었다.[5] 1977년, 당은 이름을 진보당으로 변경했고, 하겐은 1978년 전국 대의원 회의에서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1977년 선거에서 당이 대표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하면서 하겐은 4년 동안 국회에서 물러났지만, 1981년에 선출되었다.
3. 2. 진보당 대표 (1978-2006)
하겐은 페르 보르텐 내각(1965~1971) 시절 보수당이 사회 민주주의의 대안으로서 신뢰를 잃었다고 설명했는데, 이는 노동당 시절보다 세금과 국가 권력이 더 증가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겐은 개인에 대한 국가 권력을 축소하길 원했고, 이 때문에 안데르스 랑에의 정치적 견해가 그에게 호소력을 가졌다.[5]하겐은 1973년, 새로 창당된 안데르스 랑에 당의 국회 부대표가 되면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1973년 4월 '사가 키노'에서 열린 당 창당 회의에 참석했고, 부대표 에릭 옘스-온스타드로부터 당 선거에 출마할 의향이 있는지 질문을 받았다.[3] 그러나 하겐은 곧 다른 이유로 안데르스 랑에에게도 신뢰를 잃었고, 1974년 몇몇 다른 당 "온건파"와 함께 탈당하여 단명한 개혁당을 창당했다.[5][7] 그 해 말, 국회에서 1년 동안 활동한 후, 안데르스 랑에가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하겐은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는 랑에의 국회 부대표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개혁당은 다음 해에 안데르스 랑에 당으로 돌아가 합병되었다.[5] 1977년, 당은 이름을 진보당으로 변경했고, 하겐은 1978년 전국 대의원 회의에서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1977년 선거에서 당이 대표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하면서 하겐은 4년 동안 국회에서 물러났지만, 1981년에 선출되었다.

하겐은 노르웨이 전기 사전에 기고한 구들레이브 포르에 의해 노르웨이 최초의 포스트모던 정치인으로 여겨졌다.[5] 그의 초기 성공은 대중적인 연설을 통해 자신의 이익에 맞게 미디어를 활용하는 능력에 기인한 것으로 평가된다.[5] 그는 또한 안데르스 랑에의 보다 저속한 어조에서 당의 이미지를 어느 정도 완화하는 데 성공했다.[5] 비록 스스로를 고전적 자유주의자로 인식하지만, 그의 정치적 행보는 정치 평론가들에 의해 대중주의적이라고 묘사되었다.[5] 다양한 정치적 방향을 조율하는 그의 능력은 포르에 의해 "당 대표로서의 역할을 숙달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졌다.[5] 포르는 또한 하겐이 이중 소통의 재능을 가지고 있어, 때로는 내부 분열로 이어지기도 하는, 당의 다양한 유권자 그룹에게 당의 정책에 대한 다양한 인상을 남겼다고 주장했다.[5] 그의 성공은 또한 그의 지도력 전술에 기인했는데, 여기에는 그의 견해에서 지나치게 벗어난 당원들을 정직시키고 해임하는 것이 포함되었다.[8]
하겐은 1981년부터 2009년 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사임할 때까지 7번의 연속적인 4년 임기 동안 국회에 선출되었다.[9] 1979년부터 1982년, 1987년부터 1991년, 1995년부터 1999년까지 그는 오슬로 시의회 의원이기도 했다.[10] 2005년, 하겐은 국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 2009년 국회를 떠날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 2006년, 그는 시브 옌센에게 당 대표직을 넘겨주었다.
3. 3. 국회의원 및 국회 부의장 (1981-2009)
하겐은 1981년부터 2009년 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사임할 때까지 7번의 연속적인 4년 임기 동안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9] 1979년부터 1982년, 1987년부터 1991년, 1995년부터 1999년까지 그는 오슬로 시의회 의원이기도 했다.[10] 2005년, 하겐은 국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 2009년 국회를 떠날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 2006년, 그는 시브 옌센에게 당 대표직을 넘겨주었다. 그가 2007년에 재선에 불출마하기로 결정한 것은 연금 수령 연령에 도달한 것 외에도, 당 대표에서 물러난 후 소외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휴식을 취하고 컨설턴트로 일할 시간을 더 원한다고 말했다.[10]3. 4. 정계 은퇴와 복귀 (2009-현재)
하겐은 1981년부터 2009년 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사임할 때까지 7번의 연속적인 4년 임기 동안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9] 1979년부터 1982년, 1987년부터 1991년, 1995년부터 1999년까지는 오슬로 시의회 의원이었다.[10] 2005년에는 국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어 2009년 국회를 떠날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 2006년에는 시브 옌센에게 당 대표직을 넘겨주었다. 그가 2007년에 재선에 불출마하기로 결정한 것은 연금 수령 연령에 도달한 것 외에도, 당 대표에서 물러난 후 소외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휴식을 취하고 컨설턴트로 일할 시간을 더 원한다고 말했다.[10] 정계 은퇴 후, 2009년 홍보 에이전시 버슨-마스텔러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며, 그곳에서 회사의 최고 수입 강사 중 한 명이 되었다.[11]

2010년 3월, "진보당 핵심 정치인"들이 그를 오슬로 시장 후보로 출마시키기를 원하면서 노르웨이 정치 복귀에 대한 추측이 있었다. 하겐 자신도 그 생각을 완전히 부인하지 않았고, 정치가 그가 없으니 지루해졌다고 생각하면서 정치가 그립다고 말했다.[12][13] 2010년 9월, 하겐은 2011년 지방 선거에 오슬로 시장 후보로 출마한다고 발표했고,[14] 버슨-마스텔러와의 관계를 청산했다.[15] 암울한 여론 조사 결과가 나오자, 하겐은 선거 3일 전에 사실상 레이스에서 물러났다.[16]
2011년 11월 9일 당내 회의에서 하겐은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의 진보당 대표로 선출되려 시도했고, 이에 대응하여 당 중앙 위원회와 "원로 장군" 직에서 물러났다. 회의 후, 그는 5페이지 분량의 메모를 발표하여 시브 옌센을 비판하고, 그의 사임 이유를 "당 지도부"로부터 받은 "대우와 굴욕" 때문이라고 밝혔다.[17][18]
2013년 4월, 하겐과 옌센은 그들 사이의 갈등이 해결되었다고 발표했다.[19] 하겐은 2013년 에르나 솔베르그 내각에 합류한 이후, 특히 자신의 당을 비판하면서 공공 정치 토론에서 여전히 활동하고 있으며, 이는 당이 정부에 참여한 최초의 사례였다.
하겐은 2021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오플란으로 스토르팅에 재선되었다. 그는 선출 당시 1927년 이후 가장 나이가 많은 스토르팅 대표가 되었다.[20] 2024년 80번째 생일에 그는 2025년 선거에 재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21]
4. 정치적 견해
칼 I. 하겐은 포퓰리즘, 이민과 이슬람, 언론관 등 여러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겐의 정치적 견해는 크게 포퓰리즘적 행보, 이민 및 이슬람에 대한 입장, 언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4. 1. 포퓰리즘
진보당이 포퓰리즘적이라는 주장은 1986년 카레 빌로크 보수당 총리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5년 의회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진보당은 사회주의 정부에 기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보수당 주도 정부가 휘발유세 인상을 제안한 후 하겐은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고, 이는 노동당 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졌다.[9]2016년 7월, 하겐은 도널드 트럼프를 미국의 대통령으로 지지하며 그를 "민중의 사람"이라고 칭하고 로널드 레이건에 비유했다.[22]
4. 2. 이민과 이슬람
칼 I. 하겐은 외국인과 이민자에 대한 국내의 공포심을 이용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주로 이민에 대한 그의 포퓰리즘적 견해 때문에, 진보당의 정치적 반대자들은 하겐에게 반복적으로 물리적 공격을 가했다.[23]그는 특히 무슬림과 종교로서의 이슬람에 대해 여러 차례 비난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4][25] 1987년 선거 운동 기간 중, 당 대회에서 하겐은 "무스타파 서한"을 낭독했는데 (이는 후에 하겐이 완전히 인지하고 있었던 위조된 문서로 밝혀졌다[26]), 노르웨이의 미래 이슬람화를 묘사했다. 이 선거는 결국 진보당의 주요 선거 돌파구가 되었다.[27]
2004년 하겐은 독립 기독교 단체 레벤데 오르드의 대회에서 연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아이들에게 매우 관심이 많습니다. 예수는 어린 아이들을 내게 오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무함마드가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가 같은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어린 아이들을 내게 오게 하라, 그러면 내가 그들을 이용하여 세상을 이슬람화하는 투쟁에 이용할 것이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는 또한 만약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싸움에 진다면,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이 원하는 대로 된다면 유럽은 "이슬람에 굴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오래 전에 장기적인 계획이 세상을 이슬람화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들은 먼 길을 왔고, 아프리카 깊숙이 침투했으며, 유럽으로도 멀리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는 이 연설로 인해 노르웨이의 정치인들과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28] 며칠 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이집트, 모로코 대사와 튀니지의 임시 대리 대사는 신문 ''아프텐포스텐''에 실린 서한을 통해 하겐을 이례적으로 강하게 비난했다.[29]
하겐은 또한 이민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으로 칭찬을 받기도 했다. 2009년 그는 파키스탄 독립 기념일을 기념하는 노르웨이에서, "통합 정책에 대한 강력한 참여"를 인정받아 노르웨이-파키스탄 위원회로부터 "다리 건설자 상"을 받았다.[30]
4. 3. 언론관
칼 I. 하겐은 언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노르웨이 방송 협회(NRK)를 "ARK"("Arbeiderpartiets Rikskringkasting", 노동당 방송 협회)라는 별명으로 불렀는데, 이는 NRK가 노동당에 편향되었다는 그의 인식을 드러내는 말장난이었다. 하겐은 NRK를 비롯한 다른 언론들이 진보당에 대해 편향적이라고 주장했다.[31] 그는 2009년 노르웨이 총선이 진보당에 대한 언론 편향의 최악의 사례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하며, 노르웨이 언론이 토론 중 발언을 끊는 대상, 정당별 질문 주제, 토론 초대 대상 등을 이전보다 더 많이 통제했다고 비판했다.[32]5. 저서
- Ærlig taltno (솔직히 말해서)는 카펠렌 담에서 출판한 칼 I. 하겐의 회고록이다. 이 책에서 하겐은 자신의 정치 경력 동안의 전략적 선택, 주요 정치 과정, 갈등과 승리, 그리고 자신과 당에 미친 영향에 대해 솔직하게 썼다.[33] 그는 "경험 많고 솔직한 정치인"으로 묘사되었으며, 책에서 "강력하고, 본질을 꿰뚫으며, 지속적인 의지와 도발 능력을 보여주었다"고 평가받았다.[33] 책에는 하겐의 정치적 적들에 대한 개인적인 묘사도 담겨있다.[34] 하겐은 테리에 쇠비크네스 성 추문 사건, 노르웨이 이민 정책과 네빌 체임벌린의 아돌프 히틀러와의 협상 비교, 윌란스 포스텐 무함마드 만평 논란과 언론의 자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35][25]
- Klar taleno (분명한 이야기)는 하겐이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을 담은 토론 서적이다. 하겐은 이 책에서 사회주의 정당들이 잘못된 해결책으로 복지 국가를 파괴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예산 규칙(handlingsregelen)이 노르웨이 발전을 저해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금융 위기 이후 노르웨이의 낮은 실업률에 대한 옌스 스톨텐베르그 총리의 주장을 비판하며, 노르웨이의 석유 부를 고려하면 당연한 결과라고 주장했다.[36] 그는 진보당과 보수당 간의 정부 협력의 어려움을 언급하며, 특히 이민 정책에서 진보당이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37]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노르웨이에 "로젠고르드"가 나타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고,[38] 난민 신청자를 국가 대신 자원봉사자들이 돌보도록 제안했다.[39] 그는 인위적인 기후 변화를 "기후 사기"라고 칭하며, 인간이 생산하는 CO2가 기후 변화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선거 봉쇄 조항을 높여 소규모 정당의 의회 진출을 막아야 한다고 제안했다.[40]
6. 사생활
하겐은 1970년 니나 아모트(1945년 1월 17일 출생)와 결혼했다. 그들은 두 자녀를 두었으며, 하겐에 따르면 그의 정치 활동의 결과로 1975년에 이혼했다. 몇 년간의 동거 후, 1983년 그는 또한 두 아이의 어머니이자 이혼녀인 엘리 아스와 재혼했다. 그녀는 그의 정치 경력 동안 하겐의 가장 가까운 정치적 동료이자 조언자가 되었다.[5][41] 2009년 8월 현재, 하겐은 일곱 명의 손주를 두고 있다.
카를-아셀 하겐 소령(오슬로 전쟁대학교 강사)은 그의 아들이다.[42]
수년간 뇌테뢰이에 거주한 후, 하겐과 그의 아내는 2006년 오슬로로 이사했다. 그들은 또한 산데, 베스트폴에 별장을 소유하고 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는 엘비스 프레슬리이며, 그는 테니스를 즐겨 친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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