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슈트 러요시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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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슈트 러요시 광장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위치한 광장으로, 1927년 헝가리의 정치인 러요시 코슈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 광장은 헝가리 국회의사당, 민족 박물관, 농업부 청사 등 주요 건물들이 위치해 있으며, 19세기 후반 헝가리 국가의 상징적인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2006년 헝가리 시위의 장소였으며,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학살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광장에는 코슈트 러요시 기념비, 라코치 페렌츠 2세의 기마상, 1956년 혁명 기념비 등 다양한 기념물이 있으며, 2014년에는 재건축을 통해 차량 없는 구역으로 재개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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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슈트 러요시 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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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1927년 러요시 코슈트를 기리기 위해 이름을 변경했으며, 이전에는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7] 그 이름으로는 '''오르사그하즈 테르'''("국회 광장")(1898–1927),[7] '''Tömő tér''' 또는 독일어로 '''Stadt Schopper Platz''' ("매립 광장")(1853–1898)이 있었다.[7] 이 이름은 강을 따라 있던 저지대가 당시 페슈트의 마을 외곽이었는데, 땅의 높이를 높이기 위해 쓰레기로 채워졌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7] 최초로 기록된 이름은 1820년의 '''Stadtischer Auswind Platz''' ("선박 하역 광장")였다.[7]
19세기 후반에 이 광장에는 대규모 공공 건물들이 세워졌고, 헝가리 국가의 상징적인 중심지가 되었다.[7] 헝가리 국회의사당이 광장에 위치해 있다.[7] 국회의사당 맞은편에는 민족박물관 과 농업부 청사가 있다.[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도나우강을 가로지르는 임시 다리인 코슈트 다리가 코슈트 러요시 광장과 바티아니 광장 사이에 건설되어 1946년부터 1960년까지 사용되었다.[7] 대부분의 영구적인 다리가 재건축되면서 해체되었다.[7] 이는 페슈트와 부다 쪽에 기념석으로 표시되어 있다.[7] 그 자리에 1973년과 2003년 헝가리의 공휴일 즈음에 며칠 동안 부교가 건설되었다.[7]
2006년 9월 17일부터 코슈트 러요시 광장은 2006년 헝가리 시위의 장이 되었는데,[7] 이는 페렌츠 죄르차니 총리가 2006년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고 고백하는 연설이 공개된 것에 의해 촉발된 대규모 반정부 시위였다.[7] 10월 23일까지 시위대가 광장을 계속 점거했다.[7]
10월 23일 폭동 이후 경찰은 광장을 봉쇄했다.[7] 광장의 장기간 폐쇄는 논란을 일으켰다.[7] 봉쇄는 2007년 3월 19일에야 해제되었다.[7] 손상된 공원은 이후 복원되었고, 광장은 대중에게 다시 개방되었다.[7]
이 광장은 2012년 국회의 결정에 의해 다시 폐쇄되어 1944년 이전의 원래 모습을 복원했다. 광장은 2014년에 지속 가능한 공원, 2번 트램 노선의 개편, 지하 주차장, 조각품, 그리고 1956년 10월 25일 코슈트 테르 학살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관과 함께 차량 없는 구역으로 재개장했다.
2. 1. 명칭의 변화
1927년 러요시 코슈트를 기리기 위해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되기 전까지 코슈트 러요시 광장은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7] 최초로 기록된 이름은 1820년의 슈테티셔 아우스빈트 광장/Stadtischer Auswind Platzde(선박 하역 광장)이었다.[7] 1853년부터는 퇴뫼 광장/Tömő térhu 또는 슈타트 쇼퍼 광장/Stadt Schopper Platzde(매립 광장)으로 불렸는데, 이는 당시 페슈트 마을 외곽의 저지대가 땅의 높이를 높이기 위해 쓰레기로 채워졌던 것에서 유래한다.[7] 1898년에는 '''오르사그하즈 테르'''(Országház tér, 국회 광장)로 불렸다.[7]19세기 후반에 이 광장에는 대규모 공공 건물들이 세워졌고, 헝가리 국가의 상징적인 중심지가 되었다.[7] 헝가리 국회의사당이 광장에 위치해 있으며,[7] 국회의사당 맞은편에는 민족 박물관과 농업부 청사가 있다.[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도나우강을 가로지르는 임시 다리인 코슈트 다리가 바티아니 광장 사이에 건설되어 1946년부터 1960년까지 사용되었다가[7] 대부분의 영구적인 다리가 재건축되면서 해체되었다.[7] 이는 페슈트와 부다 쪽에 기념석으로 표시되어 있다.[7] 그 자리에 1973년과 2003년 헝가리의 공휴일 즈음에 며칠 동안 부교가 건설되었다.[7]
2006년 9월 17일부터 코슈트 러요시 광장은 2006년 헝가리 시위의 장이 되었는데,[7] 이는 페렌츠 죄르차니 총리가 2006년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고 고백하는 연설이 공개된 것에 의해 촉발된 대규모 반정부 시위였다.[7] 10월 23일 폭동 이후 경찰은 광장을 봉쇄했고,[7] 광장의 장기간 폐쇄는 논란을 일으켰다.[7] 봉쇄는 2007년 3월 19일에야 해제되었다.[7] 손상된 공원은 이후 복원되었고, 광장은 대중에게 다시 개방되었다.[7]
이 광장은 2012년 국회의 결정에 의해 다시 폐쇄되어 1944년 이전의 원래 모습을 복원했다. 광장은 2014년에 지속 가능한 공원, 2번 트램 노선의 개편, 지하 주차장, 조각품, 그리고 1956년 10월 25일 코슈트 테르 학살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관과 함께 차량 없는 구역으로 재개장했다.
2. 2.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 국가 상징 중심지
이 광장은 1820년에 독일어로 슈테티셔 아우스빈트 광장(''Städtischer Auswind Platz'', 배의 짐을 내리는 광장)으로 명명된 것이 시작이다.[7] 그 후, 1853년에는 헝가리어로 퇴뫄 광장(''Tömő tér'', 매립 광장) 혹은 동의어인 독일어로 슈타트 쇼퍼 광장(''Stadt Schopper Platz'')이라고 불리게 되었다.[7] 이 이름은 강의 옆에 있는 저지대인 이곳이 다른 장소의 지면 높이까지 쓰레기로 매립되어 있었던 것에 유래한다.[7] 1898년에는 올사그하즈 광장(''Országház tér'', 국회 광장)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1927년에는 코슈트 러요시의 명예를 기려 현재의 코슈트 러요시 광장으로 개명되었다.[7]19세기 후반에는 큰 공공 시설이 광장 주변에 건설되어 헝가리의 상징적인 중심이 되었다.[7] 이를 가장 상징하는 것이 광장의 서쪽에 서 있는 국회의사당이다.[7] 또한, 국회의사당에 마주보고, 즉 광장의 동쪽에는 부다페스트 민족 박물관과 농무성이 있다.[7]
2. 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세기 후반, 코슈트 러요시 광장 주변에 대규모 공공 시설이 건설되면서 헝가리의 상징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광장 서쪽에는 헝가리 국회의사당이, 동쪽에는 부다페스트 민족 박물관과 농무성이 자리잡고 있다.[7]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6년에 도나우 강을 가로지르는 코슈트 다리가 이 광장에서 바치아니 광장까지 임시로 건설되었으나, 1960년에 해체되었다. 현재는 다리가 있던 양쪽, 즉 부다 측과 페슈트 측 모두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7] 1973년부터 2003년까지는 국민의 명절 기간 동안 부교가 설치되기도 했다.[7]
2006년 가을, 쥬르차니 페렌츠 총리의 재선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2006년 9월 17일부터 10월 23일까지 광장을 점거했다.[7] 경찰은 비상선을 치고 2007년 3월 19일까지 광장을 봉쇄했다.[7] 이후 광장은 복구되어 다시 개방되었지만, 국회는 광장을 1944년 이전의 모습으로 복원하기로 결정하여 곧 폐쇄될 예정이다.[7]
2. 4. 1956년 헝가리 혁명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1956년 10월 25일, 코슈트 러요시 광장에서 학살이 벌어졌다.[6]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진행된 코슈트 러요시 광장 재건축 때 남쪽 환기 터널에 이 학살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피의 목요일"에 희생된 이들을 기리는 추모비에는 당시의 영상, 사진, 촛불, 기념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6]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지, 왜 시위대가 그날 그 장소에 모였는지, 정확한 사망자 수는 불분명하다. 자료에 따라 사망자 수는 최소 22명에서 최대 1,000명까지 추정되며, 영국 관리들은 300명에서 800명 사이로 추정한다.[6] 추모비는 학살에 대한 정보를 가진 사람들에게 당국에 알려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6]
2. 5. 1989년 민주화 이후
1927년 코슈트 러요시의 명예를 기려 현재의 코슈트 러요시 광장으로 개명되었다.[7]19세기 후반에는 큰 공공 시설이 광장 주변에 건설되어 헝가리의 상징적인 중심이 되었다. 광장의 서쪽에 국회의사당이 있으며, 광장 동쪽에는 부다페스트 민족 박물관과 농무성이 마주보고 있다.[7]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일시적으로 도나우 강에 코슈트 다리가 이 광장에서 바치아니 광장에 걸쳐 건설되었지만, 1960년에 해체되었다. 현재는 다리가 있었던 양쪽, 즉 부다 측과 페슈트 측 모두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73년부터 2003년까지는 국민의 명절 주변 며칠 동안 이 곳에 부교가 건설되었다.[7]
2006년 9월 17일부터의 쥬르차니 페렌츠의 재선에 대한 반대 시위에서는 10월 23일까지 이 광장은 시위 참가자들에 의해 점거되었다. 2006년 10월 23일, 경찰이 비상선을 쳤고, 이 상태는 2007년 3월 19일까지 이어졌다. 그 후, 피해를 입은 부분을 수리하고 공공에 개방하고 있다. 이 광장은 국회에 의해 1944년 이전의 모습으로 복원 공사를 할 예정이다.[7]
2. 6. 2006년 반정부 시위
2006년 9월 17일부터 쥬르차니 페렌츠의 재선에 대한 반대 시위(2006년 헝가리 시위)가 일어났다.[7] 시위대는 10월 23일까지 코슈트 러요시 광장을 점거했다.[7] 경찰은 비상선을 치고 광장을 통제했으며, 이 상태는 2007년 3월 19일까지 이어졌다.[7]2. 7. 2014년 광장 재개장
19세기 후반, 코슈트 러요시 광장 주변에 큰 공공 시설이 건설되어 헝가리의 상징적인 중심이 되었다. 광장 서쪽에 있는 헝가리 국회의사당이 대표적이며, 광장 동쪽에는 부다페스트 민족 박물관과 농무성이 국회의사당을 마주보고 있다.[7]제2차 세계 대전 후, 도나우 강을 가로질러 코슈트 광장과 바치아니 광장을 잇는 코슈트 다리가 임시로 건설되었으나 1960년에 해체되었다. 현재는 다리가 있던 부다 측과 페슈트 측 양쪽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73년부터 2003년까지는 국민의 명절 기간 동안 부교가 설치되기도 했다.[7]
2006년 9월 17일부터 쥬르차니 페렌츠의 재선에 반대하는 시위]]가 발생하여, 시위대는 10월 23일까지 광장을 점거했다. 경찰은 10월 23일 비상선을 쳤고, 이 상태는 2007년 3월 19일까지 이어졌다. 이후 피해를 입은 부분을 수리하고 공공에 개방했다. 광장은 1944년 이전의 모습으로 복원될 예정이다.[7]
3. 주요 건물 및 시설
코슈트 러요시 광장 주변에는 많은 부처와 법원, 사무실 등이 세워져 있다. 주거지 옆에 위치해 있어 광장 주변은 한적하다.
광장 주변의 주요 건물 및 시설은 다음과 같다.
4. 기념물
헝가리 국회의사당 정면에는 코슈트 러요시 기념비와 승마 모습의 라코치 페렌츠 2세 동상, 그리고 1956년 헝가리 혁명에 대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2] 요제프 아틸라의 현대적인 조각상이 근처에 있으며,[2] 의사당 남쪽, 그의 시 "다뉴브 강가에서"에 묘사된 대로 강둑에 앉아 있다(실제로는 물에서 꽤 떨어진 잔디 언덕에 앉아 있다).[5] 헝가리 국회의사당 양쪽에는 티서 이슈트반 백작과 안드라시 죄르지 백작의 재건된 기념비가 있다. 2018년 12월 28일, 1996년에 세워진 너지 임레의 동상이 1934년부터 1945년까지 그 자리에 있었던 국가 순교자 기념비를 재건하기 위해 광장에서 야사이 마리 광장으로 옮겨졌다.
4. 1. 코슈트 러요시 기념비
헝가리 국회의사당 정면에는 코슈트 러요시 기념비와 승마 모습의 라코치 페렌츠 2세 동상, 그리고 1956년 헝가리 혁명에 대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2] 요제프 아틸라의 현대적인 조각상이 근처에 있으며,[2] 의사당 남쪽, 그의 시 "다뉴브 강가에서"에 묘사된 대로 강둑에 앉아 있다(실제로는 물에서 꽤 떨어진 잔디 언덕에 앉아 있다).[5] 헝가리 국회의사당 양쪽에는 티서 이슈트반 백작과 안드라시 죄르지 백작의 재건된 기념비가 있다. 2018년 12월 28일, 1996년에 세워진 너지 임레의 동상이 1934년부터 1945년까지 그 자리에 있었던 국가 순교자 기념비를 재건하기 위해 광장에서 야사이 마리 광장으로 옮겨졌다.4. 2. 라코치 페렌츠 2세 기마상
헝가리 국회의사당 정면에는 코슈트 러요시 기념비와 1956년 헝가리 혁명 기념비가 있으며, 승마 모습의 라코치 페렌츠 2세 동상이 세워져 있다.[2] 요제프 아틸라의 현대적인 조각상이 근처에 있으며,[2] 의사당 남쪽, 그의 시 "다뉴브 강가에서"에 묘사된 대로 강둑에 앉아 있다(실제로는 물에서 꽤 떨어진 잔디 언덕에 앉아 있다).[5] 헝가리 국회의사당 양쪽에는 티서 이슈트반 백작과 안드라시 죄르지 백작의 재건된 기념비가 있다.4. 3. 1956년 헝가리 혁명 기념비
국회의사당 정면에는 코슈트 러요시 기념비와 승마 모습의 라코치 페렌츠 2세 동상, 그리고 1956년 헝가리 혁명에 대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2] 요제프 아틸라의 현대적인 조각상이 근처에 있으며,[2] 의사당 남쪽, 그의 시 "다뉴브 강가에서"에 묘사된 대로 강둑에 앉아 있다(실제로는 물에서 꽤 떨어진 잔디 언덕에 앉아 있다).[5] 헝가리 국회의사당 양쪽에는 티서 이슈트반 백작과 안드라시 죄르지 백작의 재건된 기념비가 있다. 2018년 12월 28일, 1996년에 세워진 너지 임레의 동상이 1934년부터 1945년까지 그 자리에 있었던 국가 순교자 기념비를 재건하기 위해 광장에서 야사이 마리 광장으로 옮겨졌다.4. 4. 너지 임레 동상 (이전)
국회의사당 정면에는 코슈트 러요시 기념비와 승마 모습의 라코치 페렌츠 2세 동상, 그리고 1956년 헝가리 혁명에 대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4. 5. 국가 순교자 기념비 (재건)
국회의사당 정면에는 코슈트 러요시 기념비와 라코치 페렌츠 2세의 기마상, 1956년 헝가리 혁명 기념비가 있다. 국회의사당 남쪽에는 요제프 아틸라의 동상이 있는데, 그의 시 "도나우 강가"에 나오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동상에서 그는 강가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물가에서 멀리 떨어진 풀밭에 앉아 있었다.4. 6. 기타 기념물
헝가리 국회의사당 정면에는 코슈트 러요시 기념비와 승마 모습의 라코치 페렌츠 2세 동상, 그리고 1956년 헝가리 혁명에 대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2] 요제프 아틸라의 현대적인 조각상이 근처에 있으며,[2] 의사당 남쪽, 그의 시 "다뉴브 강가에서"에 묘사된 대로 강둑에 앉아 있다(실제로는 물에서 꽤 떨어진 잔디 언덕에 앉아 있다).[5] 헝가리 국회의사당 양쪽에는 티서 이슈트반 백작과 안드라시 죄르지 백작의 재건된 기념비가 있다. 2018년 12월 28일, 1996년에 세워진 너지 임레의 동상이 1934년부터 1945년까지 그 자리에 있었던 국가 순교자 기념비를 재건하기 위해 광장에서 야사이 마리 광장으로 옮겨졌다.4. 7. 1956년 코슈트 광장 학살 기념비
1956년 헝가리 혁명에 대한 기념비는 코슈트 러요시 광장에 있는 헝가리 국회의사당 정면에 위치해 있다.[6]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코슈트 러요시 광장 재건축의 일환으로, 남쪽 환기 터널에 1956년 10월 25일 코슈트 러요시 광장 학살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졌다.이 추모비는 1956년 헝가리 혁명의 일환으로 "피의 목요일"에 모였던 무장하지 않은 희생자들을 기리며, 당시의 영상, 사진, 촛불, 기념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6] 누가 처음 총을 쐈는지, 왜 시위대가 그날 그 장소에 모이게 되었는지, 사건의 사망자 수 등 이 학살에 대한 정보는 거의 확실하지 않다.[6] 자료에 따라 사망자 수는 최소 22명에서 최대 1,000명까지 언급된다.[6] 영국 관리들은 사망자 수를 300명에서 800명 사이로 추정한다.[6] 추모비는 학살에 대한 정보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내용을 당국에 알려 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데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한다.[6]
국회의사당 정면에는 코슈트 러요시 기념비와 말을 탄 라코치 페렌츠 2세의 동상도 있다. 요제프 아틸라의 현대적인 동상은 국회의사당 남쪽에 그의 시, 도나우 강가를 새겨 넣은 채 존재한다.
참조
[1]
웹사이트
Our thematic routes with
https://www.bkv.hu/e[...]
[2]
서적
Rick Steves' Budapest
https://archive.org/[...]
Avalon Travel
[3]
웹사이트
Reconstruction of Budapest’s Kossuth tér goes ahead
http://realdeal.hu/2[...]
[4]
웹사이트
The reconstruction of Kossuth Square – the Steindl Imre Programme (SIP)
http://latogatokozpo[...]
2014-11-15
[5]
문서
“On the bottom step that from the wharf descends / I sat, and watched a melon-rind float by.” (translation by Vernon Watkins; see By the Danube at Babelmatrix)
http://www.babelmatr[...]
[6]
웹사이트
BLOODY THURSDAY, 1956: THE ANATOMY OF THE KOSSUTH SQUARE MASSACRE
http://www.hungarian[...]
2014-01-15
[7]
웹사이트
Reconstruction of Budapest’s Kossuth tér goes ahead
http://realdeal.hu/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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