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파 델 레이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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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코파 델 레이 1911은 1911년에 개최된 코파 델 레이의 대회이다. 아틀레틱 빌바오가 결승전에서 RCD 에스파뇰을 3-1로 꺾고 우승을 차지하여 통산 4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대회 과정에서 선수 자격 논란, 심판 판정에 대한 항의 등으로 인해 여러 팀이 기권하는 등 논란이 있었다. 특히 아틀레틱 빌바오는 이 대회를 계기로 바스크 출신 선수만을 기용하는 정책을 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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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년 축구 - 1911 코파 델 레이 결승전
1911년 코파 델 레이 결승전은 아틀레틱 빌바오가 에스파뇰을 3-1로 꺾고 우승을 차지한 경기로, 마틴 베이치, 루이스 벨라운데, 마누엘 게르니카가 아틀레틱 빌바오의 득점을, 안토니오 네이라가 에스파뇰의 득점을 기록했다. - 코파 델 레이 시즌 - 코파 델 레이 20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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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파 델 레이 1911 | |
---|---|
대회 정보 | |
대회 명칭 | 코파 델 레이 |
연도 | 1911년 |
다른 명칭 | 제10회 코파 델 레이 |
국가 | 스페인 |
참가 팀 수 | 10 |
이전 시즌 우승팀 | FC 바르셀로나 (코파 FEF) 아틀레틱 빌바오 (코파 UECF) |
우승팀 | 아틀레틱 빌바오 (4번째 우승) |
준우승팀 | CD 에스파뇰 |
총 경기 수 | 8 |
총 득점 수 | 27 |
최다 득점자 | 안토니오 네이라 마틴 베이치 (3골) |
![]() | |
시즌 정보 | |
이전 시즌 | 1910년 |
다음 시즌 | 1912년 |
2. 대회 진행 과정
1911년 코파 델 레이는 1911년 4월 9일 예선 라운드를 시작으로 4월 15일 결승전까지 진행되었다.
예선 라운드에서 아틀레틱 빌바오는 포르투나 비고를 2-0으로, 빌바오 축구단은 아르티예리아를 2-1로 꺾었다.[13]
8강전에서는 에스파뇰이 인판테리아를 6-0으로 크게 이겼고, 카바예리아는 산탄데르 축구단을 1-0으로 이겼다.[7] 바르셀로나는 소시에다드 힘나스티카를 4-0으로 이겼으나[14][15], 선수 부정 출전 문제로 실격 처리되었다.[3] 아틀레틱 빌바오는 빌바오 축구단을 4-1로 꺾었다.[16]
준결승전에서 아틀레틱 빌바오는 소시에다드 힘나스티카를 2-0으로 이겼고,[17][18] 에스파뇰과 카바예리아의 경기는 치러지지 않았다.[19]
결승전에서는 아틀레틱 빌바오가 에스파뇰을 3-1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20][21]
2. 1. 예선 라운드 (1911년 4월 9일)
아틀레틱 빌바오는 1911년 4월 9일 포르투나 비고를 상대로 2-0 승리를 거두었다.[13] 마틴 베이치와 알레한드로 스미스 이바라가 득점하였다. 같은 날, 빌바오 축구단은 아르티예리아를 상대로 2-1 승리를 거두었다. 빌바오 축구단의 득점자는 미상이다.경기 결과는 다음과 같다.[5]
경기 | 날짜 | 팀 1 | 점수 | 팀 2 | 득점 1 | 득점 2 | 경기장 | 심판 |
---|---|---|---|---|---|---|---|---|
1 | 1911년 4월 9일 | 아틀레틱 빌바오 | 2–0 | 포르투나 비고 | 마틴 베이치 Martyn Veitches, 알레한드로 스미스 이바라 | 게초 홀라세타 | 토호 | |
2 | 1911년 4월 9일 | 빌바오 FC | 2–1 | 아카데미아 데 아르틸레리아 | 아드리안 오찬디아노 (5분, 45분) | 루이스 마라논 (40분) | 호살레타 경기장, 게초 | 호세 베라온도 (CD 에스파뇰) |
2. 2. 8강전 (1911년 4월 10일 ~ 4월 12일)
1911년 4월 10일, 에스파뇰은 인판테리아를 상대로 6-0 대승을 거두었다.[7] 같은 날, 카바예리아는 산탄데르 축구단을 1-0으로 꺾었다.[7]4월 12일, 바르셀로나는 소시에다드 힘나스티카를 4-0으로 완파했다.[14][15] 그러나 경기 후, 힘나스티카는 바르셀로나가 루이스 레네 골키퍼를 부정하게 출전시켰다고 항의했다. 축구 연맹은 해당 경기를 무효로 하고 재경기를 명령했지만, 바르셀로나는 아틀레틱 빌바오가 잉글랜드 선수들을 출전시켰다고 주장하며 참여를 거부해 실격 처리되었다.[3]
같은 날, 아틀레틱 빌바오는 빌바오 축구단을 4-1로 꺾었다.[16] 피치치가 빌바오 축구단의 유일한 골을 기록했다.[16]
경기일 | 팀 1 | 결과 | 팀 2 | 득점 선수 (팀 1) | 득점 선수 (팀 2) | 경기장 | 주심 |
---|---|---|---|---|---|---|---|
1911년 4월 10일 | 에스파뇰 | 6-0 | 인판테리아 | 미상 (6골) | 게초 홀라세타 | 미상 | |
1911년 4월 10일 | 카바예리아 | 1-0 | 산탄데르 축구단 | 미상 | 게초 홀라세타 | 미상 | |
1911년 4월 12일 | 바르셀로나 | 4-0 [14][15] | 소시에다드 힘나스티카 | 퍼시 월러스 (3골), 파투요 | 게초 홀라세타 | 프레시덴테 | |
1911년 4월 12일 | 아틀레틱 빌바오 | 4-1[16] | 빌바오 축구단 | 세베리노 수아소, 호세 마리아 벨라우스테, 레미히오 이사, 에바리스토 아르바이자 | 피치치 | 게초 홀라세타 | 마틴 베이치 |
2. 3. 준결승전 (1911년 4월 14일)
아틀레틱 빌바오와 소시에다드 힘나스티카의 경기는 1911년 4월 14일에 게초의 홀라세타에서 열렸다. 아틀레틱 빌바오는 마틴 베이치와 세베리노 수아소의 득점에 힘입어 2-0으로 승리했다.[17][18] 주심은 잉글랜드 출신 슬롭이었다.에스파뇰과 카바예리아의 경기는 같은 날 게초의 홀라세타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치러지지 않았다.[19]
2. 4. 결승전 (1911년 4월 15일)
1911년 4월 15일, 아틀레틱 빌바오는 게초의 홀라세타에서 열린 1911년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에스파뇰을 3-1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20][21]경기 초반 마틴 베이치의 선제골과 루이스 벨라우데의 추가골, 그리고 후반전에 터진 마누엘 게르니카의 골로 빌바오가 3-0으로 앞서나갔다. 에스파뇰은 안토니오 네이라가 한 골을 만회했지만, 경기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2]
이 경기의 주심은 잉글랜드 출신 스콧 마티가 맡았다.[11]
아틀레틱 빌바오 | 3 - 1 | 에스파뇰 |
---|---|---|
마틴 베이치 Martyn Veitch|마르틴 베이치es (전반 10분) 루이스 벨라우데 (전반 20분) 마누엘 게르니카 (후반 5분) | 안토니오 네이라 (후반 25분) |
-- |
아틀레틱 빌바오 4번째 우승 |
1911년 코파 델 레이는 여러 논란과 기권 사태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 대회는 스페인 축구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아틀레틱 빌바오의 선수 영입 정책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3. 논란 및 결과
두 준결승 경기는 기권으로 끝났다. 소시에다드 김나스티카는 심판 판정에 항의하며 후반전에 기권했고(다른 자료에서는 마드리드행 기차 시간 때문이라고도 함),[2] 다른 준결승전에서는 아카데미아 데 카바예리아는 선수 차출 문제로, CD 에스파뇰은 포르투나 데 비고와의 연대 의식으로 기권했다.[2]
결국 CD 에스파뇰은 결승전에 참가하기로 결정했지만, 아틀레틱 빌바오에 3-1로 패배했다.[2]
3. 1. 선수 자격 논란
데포르티보와 인헤니에로스는 대회 시작 전에 선수단 내 외국인 선수 배치 규정을 위반하여 참가를 철회했다.[2] 대회 도중 몇몇 구단이 항의의 표시를 보이면서 중도 포기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2]
아틀레틱 빌바오와 포르투나 비고 간의 1라운드 경기 후, 레알 소시에다드는 아틀레틱이 두 명의 잉글랜드 선수(슬룹과 마틴)를 규정에 어긋나게 배치했다고 항의했다. 이 선수들은 스페인에 필요한 기간(6개월) 동안 거주하지 않았고 스페인어를 거의 하지 못했으며, 프로 선수로 고용되었다는 의혹도 받았다.[2] 축구 연맹은 선수단 사용 허락을 내리지 않았고, 레알 소시에다드는 즉시 항의하며 중도에 철수했다. 군사 학교를 제외한 나머지 팀들이 레알 소시에다드를 두둔하면서 중도 철수 의사를 밝혔고, 아틀레틱은 그 두 선수를 자기 선수단의 경기에 기용치 않기로 결정했지만, 포르투나 비고와의 재경기를 거절했다.[2]
8강전에서 바르셀로나는 소시에다드 김나스티카를 4-0으로 꺾었지만, 김나스티카는 한 달도 안 되어 FC 에스파냐에서 뛰었던 골키퍼 루이스 레녜의 부적절한 출전(6개월 규정 미충족)을 이유로 경기에 이의를 제기했다.[2][3] 스페인 축구 협회는 경기를 다시 하도록 명령했지만, 바르셀로나는 아틀레틱 빌바오의 잉글랜드 선수 사례를 언급하며 이를 거부했고, 결국 실격 처리되고 김나스티카가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다.
이 사태를 계기로 아틀레틱 빌바오는 인근 바스크 선수들만을 영입하게 되었고, 21세기에도 이 정책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12][4]
3. 2. 아틀레틱 빌바오의 선수 영입 정책 변화
이 사태를 계기로 아틀레틱 빌바오는 인근 바스크 선수들만을 영입하게 되었고, 21세기가 된 현재에도 이 정책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12][4]
3. 3. 기타 논란
레알 소시에다드는 아틀레틱 빌바오와 포르투나 비고 간의 1라운드 경기 후, 아틀레틱이 두 명의 잉글랜드 선수(슬룹과 마틴)를 규정에 어긋나게 배치했다고 항의했다. 이 선수들은 스페인에 필요한 기간(6개월) 동안 거주하지 않았고 스페인어를 거의 하지 못했으며, 프로 선수로 고용되었다는 의혹도 받았다.[2] 스페인 축구 협회는 항의를 기각했고, 레알 소시에다드는 이에 항의하며 즉시 중도에 철수했다. 군사 학교를 제외한 나머지 팀들이 레알 소시에다드를 지지하며 기권을 위협하자, 아틀레틱은 이 선수들을 경기에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포르투나 비고의 재경기 요청은 거부했다.[2]
8강전에서 바르셀로나는 소시에다드 김나스티카를 4–0으로 꺾었지만, 김나스티카는 한 달도 안 되어 FC 에스파냐에서 뛰었던 골키퍼 루이스 레녜의 부적절한 출전(6개월 규정 미충족)을 이유로 경기에 이의를 제기했다.[2][3] 스페인 축구 협회는 경기를 재경기하도록 명령했지만, 바르셀로나는 아틀레틱 빌바오의 잉글랜드 선수 사례를 언급하며 이를 거부했고, 결국 바르셀로나는 실격 처리되고 김나스티카가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다.
두 준결승 경기는 기권으로 끝났는데, 소시에다드 김나스티카는 심판의 관대함에 항의하며 후반전(아틀레틱 빌바오가 2–0으로 앞선 상황)에 기권했다. 다른 버전에서는 그날 마드리드로 가는 기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경기를 일찍 끝내기로 결정했다고도 한다.[2] 두 번째 준결승에서는 두 팀 모두 경기 전에 기권했는데, 아카데미아 데 카바예리아는 선수들이 연대에 긴급하게 필요했기 때문이고, CD 에스파뇰은 포르투나 데 비고와의 연대 때문이었다.[2]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아틀레틱 빌바오가 인근 바스크 선수들만을 영입하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이 정책은 21세기에도 이어지고 있다.[12][4]
4. 우승
4번째 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