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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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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콜레토 전투는 1836년 3월 19일과 20일에 벌어진 텍사스 혁명 중의 전투로, 제임스 패닌 대령이 이끄는 텍사스 군과 호세 데 우레아 장군이 지휘하는 멕시코 군 사이에 벌어졌다. 텍사스군은 샘 휴스턴 장군의 빅토리아로의 철수 명령을 따르지 않고 골리아드 전도소 방어를 위해 남았지만, 패닌의 부주의한 퇴각 결정과 멕시코군의 추격으로 콜레토 크릭에서 포위되었다. 전투 이틀째, 패닌은 부상자와 물 부족으로 인해 항복했고, 텍사스군은 9명이 사망하고 51명이 부상당했다. 항복 후 텍사스 군인들은 골리아드로 이송되었고, 1836년 3월 27일, 패닌과 다른 텍사스인 포로들은 멕시코 군인들에게 총살당하는 골리아드 학살이 발생했다. 콜레토 전투는 텍사스 군인들이 멕시코 군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패닌의 지휘 능력 부족과 다른 텍사스 군대와의 협력 실패로 인해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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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토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콜레토 전투 (콜레토 크리크 전투)
일부텍사스 혁명, 골리아드 작전
콜레토 전투 당시 양측 군대의 위치
날짜1836년 3월 19일~20일
장소텍사스주골리아드 군
결과멕시코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멕시코
교전국 2[[File:Flag of the Republic of Texas (1836–1839).svg|19px]] 텍사스 공화국
지휘관 및 지도자
멕시코호세 데 우레아
텍사스[[File:Flag of the Republic of Texas (1836–1839).svg|19px]] 제임스 패닌
병력 규모
멕시코19일: 기병 80명, 보병 260명
20일: 보병 800~900명
텍사스450명, 대포 9문
피해 규모
멕시코자료 없음
텍사스전투 중 최소 10명 사망, 67명 부상
나머지는 포로로 잡혀 골리아드 학살에서 처형됨

2. 배경

샘 휴스턴 장군의 빅토리아 철수 명령에 따라, 텍사스 군은 골리아드 전도소 방어를 위해 남았다. 제임스 패닌 대령은 1835년 말과 1836년 초에 포트 디파이언스에 주둔한 텍사스 군대의 지휘관이었다. 1836년 2월 알라모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알라모에 있는 텍사스 군대를 구원하기 위해 100마일을 행군하려 했지만, 여행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우레아 장군의 멕시코 군대가 골리아드로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섰다. 알라모산타 안나의 군대에 함락된 후 텍사스군은 샘 휴스턴 장군으로부터 빅토리아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패닌은 요새를 포기했지만, 적절한 보급 없이 서두르지 않고 퇴각을 시작했다.[1]

2. 1. 텍사스군의 상황

샘 휴스턴 장군의 빅토리아 철수 명령에 따라, 텍사스 군은 골리아드 전도소 방어를 위해 남았다. 제임스 패닌 대령의 장교들은 이 결정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레토 크릭 1마일 앞에서 패닌은 부대 정지를 명령했다. 텍사스 군은 사방이 탁 트인 크릭 초원 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즉시 우레아 부대에 포위되었다. 전투 둘째 날, 부상자와 물 부족 때문에 패닌은 항복했다. 텍사스 군은 9명이 사망하고 51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패닌 자신도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1] 텍사스 군은 항복했지만, 골리아드 학살을 당하게 된다.[1]

제임스 패닌 대령은 1835년 말과 1836년 초에 포트 디파이언스에 주둔한 텍사스 군대의 지휘관이었다. 1836년 2월 알라모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알라모에 있는 텍사스 군대를 구원하기 위해 100마일을 행군하려 했지만, 여행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우레아 장군의 멕시코 군대가 골리아드로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섰다. 알라모가 산타 안나의 군대에 함락된 후 텍사스군은 샘 휴스턴 장군으로부터 빅토리아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패닌은 요새를 포기했지만, 적절한 보급 없이 서두르지 않고 퇴각을 시작했다.[1]

2. 2. 패닌의 후퇴 결정

새뮤얼 휴스턴 장군의 빅토리아로의 철수 명령에 따라 텍사스군은 골리아드 전도소 방비를 위해 남았다. 그의 장교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콜레토 크릭 1마일 앞에서 제임스 패닌은 그의 부대의 정지를 명령했다.[1] 텍사스군은 크릭의 움푹 파인 곳이 사방으로 트인 초원 지대에 있었고, 즉시 우레아 부대에 포위되었다.[1] 전투 이틀째, 부상자와 물 부족으로 인해 패닌은 항복했다.[1] 텍사스군은 9명이 사망하고 51명이 부상했으며, 패닌 자신도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다.[1] 텍사스군의 항복은 골리아드 학살을 초래하게 된다.[1]

3. 전투 과정

제임스 패닌이 이끄는 텍사스군은 샘 휴스턴 장군의 철수 명령에도 불구하고 골리아드 전도소를 지키기 위해 남았다. 그러나 패닌은 장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콜레토 크릭에서 약 1.6km 떨어진 곳에서 부대 정지를 명령했다. 이로 인해 텍사스군은 사방이 탁 트인 초원 지대에 놓이게 되었고, 곧바로 호세 데 우레아가 이끄는 멕시코군에게 포위되었다.

텍사스 군인들은 멕시코군에 맞서 사각형 대형을 이루었다. 초원의 풀이 높아 멕시코 군인들을 제대로 보기 어려웠고, 물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각 텍사스 군인에게는 3~4개의 머스킷 총이 주어졌고, 사각형 대형은 세 줄로 구성되었다.[1]

위치부대
전선샌안토니오 그레이스, 레드 로버스
후방듀발의 머스탱스, 프레이저의 레푸지오 민병대
좌익웨스트오버의 정규군
우익모바일 그레이스



사각형 대형의 모서리에는 포병대가 배치되었고, 패닌은 우익 후방에 자리 잡았다. 아벨 모건의 병원 수레 주변에는 다수의 저격병이 배치되었지만, 멕시코군의 사격으로 수레를 끌던 소가 죽으면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1]

멕시코군은 사각형 대형을 공격했다. 좌익은 모랄레스 지휘하의 소총 부대가, 우익은 척탄병 부대와 산 루이스 대대의 일부가 공격했다. 특히 우익 공격은 우레아가 직접 지휘했다. 히메네스 대대는 전면을, 가브리엘 누녜스 대령의 기병대는 후방 공격을 명령받았다. 해질 무렵, 우레아는 탄약 부족을 이유로 멕시코군의 주력 공격 중단을 명령했고, 3월 19일의 전투는 대부분 마무리되었다. 멕시코군은 세 차례에 걸쳐 공격을 시도했지만, 텍사스 군인들은 칼, 머스킷 총, 그리고 아홉 문의 대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멕시코군의 돌파를 저지했다. 우레아는 텍사스 군인들의 끈질긴 방어와 뛰어난 무기 사격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1]

텍사스군의 조셉 H. 바나드 박사는 해질 무렵까지 텍사스 군인 7명이 사망했고, 패닌을 포함하여 60명이 부상당했다고 기록했다. 부상자 60명 중 40명은 여러 번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1]

해질녘이 되자 우레아는 멕시코 저격병들에게 높은 풀 속에 자리를 잡고 텍사스 군인들을 사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텍사스 저격병들이 멕시코 총의 섬광을 보고 대응 사격을 가하기 전까지, 멕시코 저격병들은 텍사스군에 더 많은 사상자를 냈다. 3월 19일 하루 동안 벌어진 전투의 결과, 텍사스 군인 최소 10명이 사망하고 6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멕시코군의 사상자 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1]

3월 19일의 전투에도 불구하고 텍사스 군인들은 과달루페 빅토리아에서 앨버트 C. 호턴이 증원군을 이끌고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호턴은 멕시코군의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한편, 레푸지오 전투 이후 과달루페 빅토리아로 후퇴하던 텍사스 군인들은 패닌 부대의 포성을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지치고 굶주린 상태였기 때문에 전투에 합류하지 못했다. 우레아는 텍사스 군인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사각형 대형 주변에 세 개의 분견대를 배치하고, 밤에는 가짜 나팔 신호를 울려 텍사스 군인들을 계속 경계 상태로 유지했다.[1]

물 부족과 불을 피울 수 없는 상황은 부상병들을 제대로 치료할 수 없게 만들었다. 부상자들의 고통과 밤 동안의 악천후는 텍사스 군인들의 사기를 더욱 떨어뜨렸다. 또한 물 부족은 대포를 식히고 청소하는 데 필요한 물이 없어 다음 날 포병대의 효과적인 사용을 어렵게 만들었고, 3월 19일 전투로 인해 많은 텍사스 포병이 사상자를 내고 대포 탄약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모든 요인들은 패닌과 다른 장교들이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1]

우레아가 증원군을 받기 전에 어둠을 틈타 더 방어하기 쉬운 위치로 탈출하자는 의견도 제기되었지만, 부상으로 탈출할 수 없는 전우와 친척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는 결정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텍사스 군인들은 다음 날 현재 위치에서 다시 저항하기로 결정하고, 밤 동안 참호를 파고 수레와 죽은 동물들을 이용해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한편, 우레아는 골리아드로부터 탄약, 신병, 그리고 2~3문의 포를 증원받아 텍사스군 사각형 대형이 내려다보이는 경사면에 멕시코 포병을 배치했다.[1]

3월 20일 오전 6시 15분, 멕시코 군인들은 전투 준비를 마쳤다. 멕시코 포병대가 한두 발의 포탄을 발사한 후, 패닌과 그의 장교들은 텍사스 군인들이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할 수 없다는 결론을 재확인하고, 명예로운 항복 조건을 모색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이 작성한 항복 조건에는 텍사스 부상병 치료, 전쟁 포로로서의 보호, 그리고 가석방미국으로의 귀환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는 이전에 텍사스 군인들에게는 무조건 항복만이 허용된다고 언급한 바 있었기 때문에, 우레아는 이러한 항복 조건들이 모두 지켜질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었다. 그는 텍사스 군인들이 제시한 항복 조건에 대해 산타 안나와 논의하겠다고 약속했다. 항복 문서에는 벤자민 C. 월리스, 조셉 M. 채드윅, 그리고 패닌이 서명했다. 이로써 콜레토 전투는 막을 내렸다.[1]

3. 1. 후퇴의 시작과 멕시코군의 추격

1836년 3월 19일 오전 9시, 텍사스군은 짙은 안개 속에서 골리아드를 떠나 후퇴하기 시작했다. 텍사스군은 버 H. 듀발이 지휘하는 머스탱 부대, 휴 맥도날드 프레이저가 지휘하는 레푸히오 민병대, 아이라 웨스트오버가 지휘하는 텍사스 정규군, 그리고 모빌 그레이스, 샌안토니오 그레이스, 레드 로버스 등으로 구성되었다. 패닌은 9개의 구경이 다른 중포와 1000개의 머스킷을 가져가도록 명령했지만, 충분한 식량과 물을 수송하는 것은 소홀히 했다. 무거운 장비를 실은 마차는 배고프고 지친 황소가 끌고 있었다.[1]

우레아는 오전 11시가 되어서야 텍사스군이 떠난 것을 알았다. 텍사스군의 마차가 샌안토니오 강을 건너다 부서지고, 대포를 강에서 꺼내야 했으며, 패닌은 텍사스군이 마나후이아 크릭에서 약 1마일 지난 후 황소에게 풀을 뜯어 먹도록 명령하면서 2시간의 선두 시간이 사라져 후퇴가 멈췄다. 존 섀컬포드, 버 H. 듀발, 아이라 웨스트오버는 황소에게 풀을 뜯어 먹도록 허용한 패닌의 결정에 반대하며, 콜레토 크릭 숲의 보호를 받을 때까지 후퇴를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섀컬포드는 패닌이 멕시코 군대가 형편없고, 우레아가 그들을 따라오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말했다.[1]

패닌의 군대를 잡기 위해 우레아는 자신의 포병과 일부 병력을 골리아드에 남겨두었다. 멕시코 측 자료에 따르면, 그는 80명의 기병과 360명의 보병을 이끌고 추격을 시작했다. 멕시코 기마 정찰병들은 텍사스군의 위치와 병력 규모를 보고했으며, 우레아는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작다고 결론 내렸다. 그 결과, 그는 100명의 병사에게 프레시디오 라 바히아를 확보하도록 돕기 위해 골리아드로 돌아가도록 명령했다. 그는 또한 골리아드에 남겨둔 포병을 자신에게 가져오도록 명령했고, 포병은 그가 다시 보낸 병사들에 의해 호송될 것이라고 명령했다. 한편, 앨버트 C. 호턴의 기병 30명은 선봉 부대로 활동하며 텍사스군 모든 측면을 감시하도록 배치되었다. 후위 부대는 경계하지 않았고, 텍사스군에게 접근하는 멕시코 기병을 감지하지 못했다.[1]

텍사스군이 행군을 재개한 직후, 또 다른 마차가 고장나서 짐을 다른 마차로 옮겨야 했고, 후퇴가 다시 지연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패닌은 호턴을 보내 눈앞에 보이는 콜레토 크릭 숲을 정찰하도록 했고, 그 후 멕시코 기병이 패닌의 텍사스군을 따라 잡았다. 텍사스군이 기병에게 따라 잡혔을 때 있던 위치에서 400~500 야드 떨어진 고지대로 이동하려 할 때, 탄약 마차가 부서졌다.[1]

3. 2. 텍사스군의 포위와 전투

새뮤얼 휴스턴 장군의 빅토리아 철수 명령에도 불구하고, 텍사스 군은 골리아드 전도소를 방어하기 위해 남았다. 제임스 패닌은 장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콜레토 크릭에서 1마일 떨어진 곳에서 부대 정지를 명령했다. 텍사스 군은 사방이 탁 트인 초원 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즉시 우레아의 부대에게 포위되었다. 전투 이틀째, 부상자와 물 부족으로 인해 패닌은 항복했다. 텍사스 군은 9명이 사망하고 51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패닌 자신도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다.[1] 텍사스 군의 항복은 골리아드 학살로 이어졌다.

1836년 3월 19일 오전 9시, 텍사스 군은 짙은 안개 속에서 골리아드를 떠나 후퇴하기 시작했다. 텍사스 군은 버 H. 듀발이 지휘하는 머스탱 부대, 휴 맥도날드 프레이저가 지휘하는 레푸히오 민병대, 아이라 웨스트오버가 지휘하는 텍사스 정규군, 그리고 모빌 그레이스, 샌안토니오 그레이스, 레드 로버스를 포함했다. 패닌은 9개의 구경이 다른 중포와 1000개의 머스킷을 가져가도록 명령했지만, 충분한 식량과 물 수송은 소홀히 했다. 무거운 장비를 실은 마차는 배고프고 지친 황소가 끌고 있었다.[1]

우레아는 오전 11시가 되어서야 텍사스 군이 떠난 것을 알았다. 텍사스 군의 마차가 샌안토니오 강을 건너다 부서지고, 대포를 강에서 꺼내야 했으며, 패닌은 텍사스 군이 마나후이아 크릭에서 약 1마일 지난 후 황소에게 풀을 뜯도록 명령하면서 2시간의 선두 시간이 사라졌다. 존 섀컬포드, 버 H. 듀발, 아이라 웨스트오버는 황소에게 풀을 뜯도록 허용한 패닌의 결정에 반대하며, 콜레토 크릭 숲의 보호를 받을 때까지 후퇴를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섀컬포드는 패닌이 멕시코 군대가 형편없고, 우레아가 그들을 따라오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말했다.[1]

우레아는 패닌의 군대를 잡기 위해 자신의 포병과 일부 병력을 골리아드에 남겨두었다. 멕시코 측 자료에 따르면, 그는 80명의 기병과 360명의 보병을 이끌고 추격을 시작했다. 멕시코 기마 정찰병들은 텍사스 군의 위치를 파악하고 병력 규모를 보고했으며, 우레아는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작다고 결론 내렸다. 그 결과, 그는 100명의 병사에게 프레시디오 라 바히아를 확보하도록 돕기 위해 골리아드로 돌아가도록 명령했다. 그는 또한 골리아드에 남겨둔 포병을 자신에게 가져오도록 명령했고, 포병은 그가 다시 보낸 병사들에 의해 호송될 것이라고 명령했다.[1]

한편, 앨버트 C. 호턴의 기병 30명은 선봉 부대로 활동하며 텍사스 군 모든 측면을 감시하도록 배치되었다. 후위 부대는 경계하지 않았고, 텍사스 군에게 접근하는 멕시코 기병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들이 행군을 재개한 직후, 또 다른 텍사스 군 마차가 고장나서 짐을 다른 마차로 옮겨야 했고, 후퇴가 다시 지연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패닌은 호턴을 보내 눈앞에 보이는 콜레토 크릭 숲을 정찰하도록 했고, 그 후 멕시코 기병이 패닌의 텍사스 군을 따라 잡았다. 텍사스 군이 기병에게 따라 잡혔을 때 있던 위치에서 400~500 야드 떨어진 고지대로 이동하려 할 때, 탄약 마차가 부서졌다.[1]

텍사스 군인들은 멕시코 군에 맞서 사각형 대형을 형성했다. 초원의 풀이 높아서 텍사스 군인들은 멕시코 군인들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텍사스 군인들은 물이 부족했다. 각 텍사스 군인에게는 세 개에서 네 개의 머스킷 총이 지급되었다. 사각형 대형은 세 줄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선에는 샌안토니오 그레이스와 레드 로버스가 배치되었고, 후방에는 듀발의 머스탱스와 프레이저의 레푸지오 민병대가 배치되었다. 좌익은 웨스트오버의 정규군이 맡았고, 우익은 모바일 그레이스가 방어했다. 사각형 대형의 모서리에는 포병대가 배치되었다. 패닌은 우익 후방에 서 있었다. 또한, 아벨 모건의 병원 수레 주변에 다수의 저격병이 배치되었는데, 멕시코 군의 사격으로 수레를 끌던 소가 죽으면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1]

멕시코 군인들이 사각형 대형을 공격했다. 텍사스 군 사각형 대형의 좌익은 모랄레스 지휘하의 소총 부대와 맞섰고, 우익은 척탄병 부대와 산 루이스 대대의 일부가 공격했다. 사각형 대형의 우익에 대한 이 공격에 참여한 멕시코 부대는 우레아의 개인적인 지휘를 받았다. 마리아노 살라스 대령 지휘하의 히메네스 대대는 전선을 공격했고, 가브리엘 누녜스 대령의 기병대는 사각형 대형의 후방을 공격하도록 명령받았다. 해질 무렵, 우레아가 멕시코 군의 탄약 부족으로 인해 더 이상 사각형 대형에 대한 주요 공격을 중단하라고 명령했을 때, 3월 19일의 대부분의 전투는 끝났다. 멕시코 군은 사각형 대형을 세 번 공격했다. 텍사스 군인들은 칼날, 다수의 머스킷 총, 아홉 개의 대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멕시코 군이 매번 사각형 대형을 뚫는 것을 막았다. 우레아는 텍사스 군인들이 세 번의 돌격에 맞서 사각형 대형을 유지한 것에 감명받았으며, 텍사스 군인들의 무기 사격에도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1]

조셉 H. 바나드 박사는 해질 무렵까지 텍사스 군인 7명이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또한 패닌을 포함하여 텍사스 군인 60명이 부상당했다고 기록했다. 부상자 60명 중 40명은 여러 번 부상당했다.[1]

해질 무렵, 우레아는 멕시코 저격병들에게 사각형 대형 주변의 높은 풀 속에 자리를 잡고 텍사스 군인들에게 사격하라고 명령했다. 텍사스 저격병들이 멕시코 총에서 발생하는 섬광을 쏘아 멕시코 저격병이 가하는 위협을 제거하기 전에, 멕시코 저격병들은 더 많은 텍사스 군인에게 사상자를 입힐 수 있었다. 3월 19일에 발생한 모든 전투의 결과, 텍사스 군인들은 최소 10명이 사망하고 60명이 부상당했으며, 멕시코 군은 불특정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1]

3월 19일의 전투는 텍사스 군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그들은 과달루페 빅토리아에서 호턴이 패닌에게 텍사스 증원군을 성공적으로 보낼 것이라는 생각에 용기를 얻었다. 그러나 호턴은 멕시코 군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 그날의 전투 동안, 이전 레푸지오 전투 이후 과달루페 빅토리아로 후퇴하던 텍사스 군인들은 패닌의 포성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쳐서 배가 고팠고 사각형 대형으로 이동하지 않았다. 우레아는 사각형 대형 주변에 멕시코 군 3개 분견대를 배치하여 사각형 대형의 텍사스 군인들이 탈출하는 것을 막았으며, 밤에는 멕시코 군이 가짜 나팔 신호를 울려 텍사스 군인들을 경계하게 했다.[1]

텍사스 군인들의 물 부족과 사각형 대형에서 불을 피울 수 없다는 것은 부상당한 텍사스 군인들을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부상자들이 겪는 고통은 밤 동안 텍사스 군인들의 사기 저하로 이어졌다. 밤 동안의 악천후는 군인들의 사기를 더욱 떨어뜨렸다. 물 부족은 또한 다음 날 포병대가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는데, 대포를 식히고 청소하는 데 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3월 19일의 전투로 인해 많은 텍사스 포병이 사상자를 냈고, 대포 탄약도 부족했다. 이러한 모든 요인들은 밤 동안 패닌과 다른 장교들이 또 다른 전투를 견딜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데 기여했다.[1]

우레아가 증원군을 받기 전에 어둠 속에서 더 방어하기 쉬운 위치로 텍사스 군인들이 탈출하자는 아이디어는 부상으로 탈출할 수 없는 사람들, 즉 부상당하지 않은 텍사스 군인들의 친구와 친척들을 버려둘 수 없다는 결정으로 인해 거부되었다. 따라서 텍사스 군인들은 다음 날 현재 위치에서 다시 저항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밤 동안 텍사스 군인들은 참호를 파고 수레와 죽은 동물의 바리케이드를 세웠다. 한편, 우레아는 골리아드에서 탄약, 신병, 2~3문의 포로 증원을 받았다. 그는 텍사스 군 사각형 대형이 내려다보이는 경사면에 멕시코 포병을 배치했다.[1]

3월 20일 오전 6시 15분에 멕시코 군인들은 전투를 위해 집결했다. 멕시코 포병대가 한두 발을 발사한 후, 패닌과 그의 장교들은 텍사스 군인들이 또 하루의 전투를 견딜 수 없다는 결론을 되풀이하고, 항복에 대한 명예로운 조건을 모색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항복 조건을 작성했는데, 여기에는 텍사스 부상병을 치료하고, 전쟁 포로로서 예상되는 모든 보호를 받으며, 가석방되어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는 이전에 텍사스 군인들은 무조건 항복만 허용된다고 언급했다. 그 결과, 우레아는 모든 조건이 산타 아나에 의해 지켜질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었다. 그는 텍사스 군인들이 제시한 항복 조건에 대해 산타 아나와 이야기하겠다고 말했다. 항복 문서는 벤자민 C. 월리스, 조셉 M. 채드윅, 그리고 패닌이 서명했다. 그 결과 콜레토 전투는 끝났다.[1]

3. 3. 전투의 지속과 텍사스군의 항복

샘 휴스턴 장군의 빅토리아 철수 명령에도 불구하고, 텍사스 군은 골리아드 전도소 방어를 위해 남았다. 제임스 패닌은 장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콜레토 크릭 1마일 앞에서 부대 정지를 명령했다. 텍사스 군은 사방이 탁 트인 초원 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우레아의 부대에게 즉시 포위되었다.

텍사스 군인들은 멕시코 군에 맞서 사각형 대형을 형성했다. 초원의 풀이 높아 멕시코 군인들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물도 부족했다. 각 텍사스 군인에게는 3~4개의 머스킷 총이 지급되었고, 사각형 대형은 세 줄로 이루어졌다.[1] 사각형 대형의 전선에는 샌안토니오 그레이스와 레드 로버스가, 후방에는 듀발의 머스탱스와 프레이저의 레푸지오 민병대가 배치되었다. 좌익은 웨스트오버의 정규군, 우익은 모바일 그레이스가 방어했고, 모서리에는 포병대가 배치되었다. 패닌은 우익 후방에 위치했다. 아벨 모건의 병원 수레 주변에는 다수의 저격병이 배치되었으나, 멕시코군의 사격으로 수레를 끌던 소가 죽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1]

멕시코 군은 사각형 대형을 공격했다. 좌익은 모랄레스 지휘하의 소총 부대, 우익은 척탄병 부대와 산 루이스 대대의 일부가 공격했다. 우레아는 우익 공격을 직접 지휘했다. 히메네스 대대는 전면, 가브리엘 누녜스 대령의 기병대는 후방 공격을 명령받았다. 해질 무렵, 우레아는 탄약 부족으로 공격 중단을 명령했고, 3월 19일 전투는 대부분 끝났다. 멕시코군은 세 번 공격했으나, 텍사스 군인들은 칼, 머스킷 총, 대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막아냈다. 우레아는 텍사스 군인들의 방어와 무기 사격에 감명을 받았다. 조셉 H. 바나드 박사는 텍사스 군인 7명이 사망하고, 패닌을 포함해 60명이 부상당했다고 기록했다. 부상자 중 40명은 여러 번 부상당했다.[1]

해질 무렵, 우레아는 저격병들에게 높은 풀 속에 자리를 잡고 텍사스 군인들을 사격하라고 명령했다. 텍사스 저격병들이 멕시코 총의 섬광을 쏘아 대응하기 전까지, 멕시코 저격병들은 더 많은 사상자를 냈다. 3월 19일 전투 결과, 텍사스 군인 최소 10명이 사망하고 60명이 부상당했으며, 멕시코군 사상자는 불분명하다. 텍사스 군인들은 과달루페 빅토리아에서 호턴이 증원군을 보낼 것이라는 생각에 용기를 얻었다. 그러나 호턴은 멕시코군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 레푸지오 전투 이후 과달루페 빅토리아로 후퇴하던 텍사스 군인들은 패닌의 포성을 들었지만, 지치고 배가 고파 합류하지 못했다. 우레아는 3개 분견대를 배치하여 텍사스 군인들의 탈출을 막고, 밤에는 가짜 나팔 신호를 울려 경계하게 했다.[1]

물 부족과 불을 피울 수 없는 상황은 부상병 치료를 불가능하게 했다. 부상자들의 고통과 밤 동안의 악천후는 사기를 더욱 떨어뜨렸다. 물 부족은 대포 사용을 어렵게 했고, 대포 탄약도 부족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패닌과 장교들은 또 다른 전투를 견딜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우레아가 증원군을 받기 전 탈출하자는 의견은 부상자들을 버릴 수 없다는 결정으로 거부되었다. 텍사스 군인들은 다음 날 다시 저항하기로 결정하고, 참호를 파고 수레와 죽은 동물로 바리케이드를 세웠다. 우레아는 골리아드에서 탄약, 신병, 2~3문의 포를 증원받아 텍사스 군 사각형 대형이 내려다보이는 경사면에 배치했다.[1]

3월 20일 오전 6시 15분, 멕시코 군은 전투를 위해 집결했다. 멕시코 포병대가 한두 발 발사한 후, 패닌과 장교들은 항복 조건을 모색하기로 결정했다. 항복 조건에는 텍사스 부상병 치료, 전쟁 포로 보호, 가석방 후 미국 귀환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는 텍사스 군인들에게 무조건 항복만 허용한다고 언급했기에, 우레아는 모든 조건이 지켜질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었다. 그는 텍사스 군인들의 항복 조건에 대해 산타 아나와 이야기하겠다고 말했다. 항복 문서는 벤자민 C. 월리스, 조셉 M. 채드윅, 그리고 패닌이 서명했다. 이로써 콜레토 전투는 끝났다.[1]

4. 전투의 결과: 골리아드 학살

샘 휴스턴 장군의 빅토리아 철수 명령에 따라, 텍사스 군은 골리아드 전도소 방어를 위해 남았다. 장교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콜레토 크릭 1마일 앞에서 패닌은 부대 정지를 명령했다. 텍사스 군은 사방이 탁 트인 크릭 초원 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즉시 우레아의 부대에게 포위되었다. 전투 둘째 날, 부상자와 물 부족 때문에 패닌은 항복했다. 텍사스 군은 9명이 사망하고 51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패닌 자신도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텍사스 군의 항복은 골리아드 학살로 이어졌다.[1]

걸을 수 있는 텍사스 병사들은 멕시코군의 호송을 받으며 골리아드로 보내졌다. 걷지 못하는 텍사스 병사들이 골리아드로 이송되기까지는 3월 23일경까지 걸렸다. 그 기간 동안 멕시코 의사들은 부상당한 멕시코인들을 부상당한 텍사스인들보다 우선적으로 치료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패닌은 3월 22일에 골리아드에 도착했다. 한편 우레아는 과달루페 빅토리아로 이동하여 텍사스인 포로들을 관용으로 대우해야 한다고 산타 안나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산타 안나는 우레아의 권고를 따르지 않고, 대신 골리아드의 멕시코 사령관 호세 니콜라스 데 라 포르티야에게 텍사스인 포로들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종려주일인 1836년 3월 27일, 패닌과 약 425~445명의 다른 텍사스인 포로들은 멕시코 군인들에게 총살당했다. 이 처형은 골리아드 학살로 알려지게 되었다.[1]

5. 전투의 의의 및 영향

콜레토 전투는 훈련받지 못한 텍사스 군인들이 멕시코 군인들에게 맞서 싸우고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에 의미가 있었다.[1] 이 전투는 주로 패닌이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 충분히 결단력 있게 행동하지 않았고, 자신과 맞선 멕시코군의 질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에 패배했다. 또한 이 전투는 패닌이 다른 텍사스 군대와 자신의 행동을 조율하는 것을 꺼려했으며, 이는 많은 텍사스 지휘관들에게 흔한 특징이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걸을 수 있는 텍사스 병사들은 멕시코군의 호송을 받으며 골리아드로 보내졌다. 걷지 못하는 텍사스 병사들이 골리아드로 이송되기까지는 3월 23일경까지 걸렸다. 그 기간 동안 멕시코 의사들은 부상당한 멕시코인들을 부상당한 텍사스인들보다 우선적으로 치료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패닌은 3월 22일에 골리아드에 도착했다. 한편 우레아는 빅토리아로 이동하여 텍사스인 포로들을 관용으로 대우해야 한다고 산타 안나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산타 안나는 우레아의 권고를 따르지 않고, 대신 골리아드의 멕시코 사령관 호세 니콜라스 데 라 포르티야에게 텍사스인 포로들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종려주일인 1836년 3월 27일, 패닌과 약 425~445명의 다른 텍사스인 포로들은 멕시코 군인들에게 총살당했다. 이 처형은 골리아드 학살로 알려지게 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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