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타리우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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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클로타리우스 2세는 584년 네우스트리아의 왕이 되었으며, 어머니 프레데군트와 백부 군트람의 섭정을 받았다. 그는 여러 차례의 전쟁과 정략 결혼을 통해 왕국의 권력을 강화했으며, 특히 브룬힐데와의 대립에서 승리하여 프랑크 왕국을 통일했다. 614년에는 파리 칙령을 반포하여 귀족의 권리를 보장하고, 623년에는 아들 다고베르트 1세를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으로 임명했다. 클로타리우스 2세는 629년에 사망했으며, 아들 다고베르트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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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타리우스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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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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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프랑크 왕 |
왕국 | 프랑크 왕국 |
출생일 | 584년 5월/6월 |
사망일 | 629년 말 또는 630년 초 (45세 또는 46세) |
왕조 | 메로빙거 왕조 |
아버지 | 킬페리크 1세 |
어머니 | 프레데군데 |
배우자 | 할데트루데 베르트루데 시킬데 |
자녀 | 카리베르트 2세 다고베르트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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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 |
왕위 계승 | 네우스트리아/수아송 왕 |
통치 기간 | 584년–629년 |
이전 통치자 | 킬페리크 1세 |
다음 통치자 | 다고베르트 1세 (네우스트리아) 카리베르트 2세 (아키텐) |
왕위 계승 1 | 부르군트 왕 |
통치 기간 1 | 613년–629년 |
이전 통치자 1 | 지게베르트 2세 |
다음 통치자 1 | 다고베르트 1세 |
왕위 계승 2 | 아우스트라시아 왕 |
통치 기간 2 | 613년–623년 |
이전 통치자 2 | 지게베르트 2세 |
다음 통치자 2 | 다고베르트 1세 |
2. 가계
힐페리히 1세와 프레데군다의 아들이다.[23] 다고베르트 1세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는 먼저 할데트루드와 결혼하여 다음과 같은 자녀를 두었다.
- 메로베흐, 부르고뉴에 대한 원정 중에 포로로 잡혀 브룬힐다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다.
- 오스트라시아의 엠마, 618년에 켄트 왕 에드발드와 결혼했다. 최근에는 그녀가 대신 누스트리아의 궁재인 에르키노알드의 딸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23]
- 다고베르트 1세, 프랑크 왕
그의 두 번째 아내인 베르트루드는 부르고뉴의 귀족 리코메르와 게르트루드의 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결혼으로 다음과 같은 자녀가 태어났다.
- 617년에 유아로 사망한 아들.
- 베르타, 부르고뉴 궁재 바르나케르의 아내.
618년, 그는 고마트루드의 여동생인 지칠데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나중에 다고베르트 1세와 결혼했고, 나중에는 샤리베르 2세를 지지하는 브로둘프의 여동생이었을 것이다. 이 결혼으로 다음과 같은 자녀가 태어났다.
- 샤리베르 2세, 아키텐 왕.
- 오다, 딸.
3. 초기 생애
584년 아버지 킬페리크 1세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 4개월 된 클로타르는 어머니 프레데군데의 섭정과 백부 군트람의 후견 하에 네우스트리아의 왕위를 계승했다.[25][26] 프랑크 관습에 따라, 메로빙거 왕조의 상징적인 이름과 관련된 우려를 피하기 위해 신생아에게는 즉시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힐페리히 1세는 아들을 즉시 세례시키지 않았고, 프레데군트는 네 명의 형들이 살해당한 정치적 음모 속에서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비트리-앙-아르투아의 왕실 별장에 숨겨 비밀리에 길렀다.[5]
힐페리히 1세의 죽음은 뉘스트리아에 혼란과 불안을 야기했다.[6] 오스트라시아인들은 뉘스트리아의 일부를 약탈했고,[7] 리군트 공주는 툴루즈에서 군도발드와 결탁한 디디에 공작에게 포획되어 지참금을 빼앗기고 결혼을 포기해야 했다.[8] 오를레앙, 블루아, 샤르트르는 샤토덩과 전쟁을 벌였다.[9] 프레데군트는 국고와 장군 안소알드, 오돈 등 주요 정치 인물을 유지했지만, 실내 관리인 에베룰 등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버렸다. 프레데군트는 군트람에게 아들의 보호와 뉘스트리아에 대한 권한 행사를 요청했다.[10]
힐데베르트 2세는 파리 공격을 고려했지만 군트람이 저지했다. 군트람은 프레데군트의 인도를 거부하고 뉘스트리아 회의를 소집하여 클로타르를 힐페리히의 아들로 인정하고, 클로타르라는 이름을 붙인 후 그를 입양하여 대부가 되었다.[7] 안소알드는 뉘스트리아가 잃었던 도시들을 다시 통제하고 군트람과 클로타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군트람은 뉘스트리아의 일을 정리하면서 주교직의 핵심 인물을 교체하고 위치를 옮겼다.[11] 샤토덩의 프로모투스 주교는 이를 교회법 위반으로 간주하고 개인 재산 회복을 요구했다.[7]
투르의 그레고리와 베난티우스 포르투나투스의 도움으로 브룬힐데의 특사들은 리모주, 투르, 푸아티에를 오스트라시아의 영향력으로 설득했으나, 군트람은 군대를 보내 잃어버린 도시들을 회복하고 충성을 되돌렸다.[7] 프레데군트는 루앙 교구의 보드뢰유 빌라로 보내져 프레텍스타투스 주교의 감독을 받았다.
585년, 군트람은 클로타르의 대부 역할을 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와 프레데군트와 함께 클로타르 2세를 힐페리히 1세의 아들로 인정했다. 트루아 공의회가 소집될 예정이었지만, 오스트라시아는 군트람이 클로타르를 상속받지 않으면 참여를 거부하여 부르고뉴로 옮겨졌고, 클로타르는 585년 10월 23일에 세례를 받았다.
군트람이 셉티마니아를 점령하기 위해 싸우는 동안, 프레데군트는 주교의 감시에서 탈출하여 루앙으로 도망쳤다. 프레데군트는 프레텍스타투스 주교를 암살하려 했고, 주교는 죽기 전에 그녀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7]
그 후 프레데군트는 자신의 자유를 이용해 아들에게 귀족과 주교들을 모으고 권력을 되찾았다.[7] 군트람은 뉘스트리아 귀족 일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루아르와 센 사이의 뉘스트리아 영토를 유지함으로써 프레데군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587년에는 앙제, 생트, 낭트 마을을 점령했다.[7]
프레데군트는 평화 협상을 제안했지만, 군트람은 뉘스트리아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브룬힐다, 힐데베르트 2세와 안델로 조약을 체결하여 둘 중 한 명이 죽으면 다른 왕이 왕국을 상속받기로 했다. 592년 군트람이 죽자 힐데베르트가 오스트라시아와 부르고뉴의 왕이 되었다.[7]
3. 1. 프레데군트의 섭정 (584년 - 597년)
584년 킬페리크 1세가 첼스 별장 근처에서 사냥 중 브룬힐다 여왕의 명령으로 추정되는 암살을 당하면서[6] 뉘스트리아는 혼란에 빠졌다.[6] 오스트라시아인들은 뉘스트리아의 일부를 약탈하고 귀중품과 문서를 압수했다.[7] 리군트 공주는 툴루즈에서 군도발드와의 음모에 연루되어 지참금을 모두 뺏기고 결혼이 좌절되었으며,[8] 오를레앙, 블루아, 샤르트르는 샤토덩과 전쟁을 벌였다.[9]프레데군트는 국고와 주요 정치 인물들을 지키며 아들 클로타르를 비트리로 데려가 군트람에게 보호를 요청했다.[10] 힐페리크가 살해당했을 때 모에 있던 힐데베르트 2세는 파리 공격을 고려했지만 군트람이 먼저 파리에 도착했다. 군트람은 프레데군트의 인도를 거부하고 뉘스트리아 회의를 소집하여 클로타르를 힐페리히의 아들로 인정하고 그를 입양했다.[7]
군트람은 뉘스트리아의 상황을 정리하며 프레데군트의 조언을 거부하고 교회 인물들을 교체했다.[11] 프레데군트는 루앙 교구의 보드뢰유 빌라로 보내져 프레텍스타투스 주교의 감독을 받았다.[7]
585년 여름, 군트람은 클로타르의 대부로서 파리로 돌아와 클로타르 2세를 힐페리히 1세의 아들로 인정했다. 트루아 공의회가 소집될 예정이었지만, 오스트라시아는 군트람이 클로타르를 상속하지 않으면 참여를 거부하여 부르고뉴에서 공의회가 열리고 클로타르는 세례를 받았다.[7]
군트람이 셉티마니아 점령을 위해 싸우는 동안 프레데군트는 루앙에서 탈출했다. 프레텍스타투스는 칼에 찔렸지만 즉사하지 않았고, 프레데군트는 그를 방문하여 호의를 얻으려 했지만, 그는 그녀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저주했다.[7]
프레데군트는 자유를 되찾아 아들에게 귀족과 주교들을 모으고 권력을 회복했다.[7] 군트람은 뉘스트리아 귀족 일부를 자기 편으로 만들고 루아르와 센 사이의 뉘스트리아 영토를 유지하여 프레데군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으며, 587년에는 앙제, 생트, 낭트를 점령했다.[7]
프레데군트는 평화 협상을 제안했지만 군트람은 사절단을 체포하고 브룬힐다와 힐데베르트 2세에게 접근하여 안델로 조약을 체결했다.[7] 592년 군트람이 사망하고 힐데베르트가 오스트라시아와 부르고뉴의 왕이 되었다.[7]
593년, 9살의 클로타르 2세는 군대를 이끌고 뉘스트리아를 침공한 오스트라시아의 빈트리오 공작을 드로이지 전투에서 격파했다. 596년, 클로타르와 프레데군트는 파리를 점령하고 라포에 군대를 파견하여 테우데베르트와 테우데리크의 군대를 격파했다.[7]
3. 2. 군트람의 후견 (584년 - 592년)
584년 아버지 힐페리히 1세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 4개월 된 클로타르는 어머니 프레데군데의 섭정과 백부 군트람의 후견 하에 네우스트리아의 왕위를 계승했다.[25][26] 프랑크 관습에 따라, 메로빙거 왕조의 상징적인 이름과 관련된 우려를 피하기 위해 신생아에게는 즉시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힐페리히 1세는 아들을 즉시 세례시키지 않았고, 프레데군트는 네 명의 형들이 살해당한 정치적 음모 속에서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비트리-앙-아르투아의 왕실 별장에 숨겨 비밀리에 길렀다.[5]힐페리히 1세의 죽음은 뉘스트리아에 혼란과 불안을 야기했다.[6] 오스트라시아인들은 뉘스트리아의 일부를 약탈했고,[7] 리군트 공주는 툴루즈에서 군도발드와 결탁한 디디에 공작에게 포획되어 지참금을 빼앗기고 결혼을 포기해야 했다.[8] 오를레앙, 블루아, 샤르트르는 샤토덩과 전쟁을 벌였다.[9] 프레데군트는 국고와 장군 안소알드, 오돈 등 주요 정치 인물을 유지했지만, 실내 관리인 에베룰 등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버렸다. 프레데군트는 군트람에게 아들의 보호와 뉘스트리아에 대한 권한 행사를 요청했다.[10]
힐데베르트 2세는 파리 공격을 고려했지만 군트람이 저지했다. 군트람은 프레데군트의 인도를 거부하고 뉘스트리아 회의를 소집하여 클로타르를 힐페리히의 아들로 인정하고, 클로타르라는 이름을 붙인 후 그를 입양하여 대부가 되었다.[7] 안소알드는 뉘스트리아가 잃었던 도시들을 다시 통제하고 군트람과 클로타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군트람은 뉘스트리아의 일을 정리하면서 주교직의 핵심 인물을 교체하고 위치를 옮겼다.[11] 샤토덩의 프로모투스 주교는 이를 교회법 위반으로 간주하고 개인 재산 회복을 요구했다.[7]
투르의 그레고리와 베난티우스 포르투나투스의 도움으로 브룬힐데의 특사들은 리모주, 투르, 푸아티에를 오스트라시아의 영향력으로 설득했으나, 군트람은 군대를 보내 잃어버린 도시들을 회복하고 충성을 되돌렸다.[7] 프레데군트는 루앙 교구의 보드뢰유 빌라로 보내져 프레텍스타투스 주교의 감독을 받았다.
585년, 군트람은 클로타르의 대부 역할을 하기 위해 파리로 돌아와 프레데군트와 함께 클로타르 2세를 힐페리히 1세의 아들로 인정했다. 트루아 공의회가 소집될 예정이었지만, 오스트라시아는 군트람이 클로타르를 상속받지 않으면 참여를 거부하여 부르고뉴로 옮겨졌고, 클로타르는 585년 10월 23일에 세례를 받았다.
군트람이 셉티마니아를 점령하기 위해 싸우는 동안, 프레데군트는 주교의 감시에서 탈출하여 루앙으로 도망쳤다. 프레데군트는 프레텍스타투스 주교를 암살하려 했고, 주교는 죽기 전에 그녀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7]
그 후 프레데군트는 자신의 자유를 이용해 아들에게 귀족과 주교들을 모으고 권력을 되찾았다.[7] 군트람은 뉘스트리아 귀족 일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루아르와 센 사이의 뉘스트리아 영토를 유지함으로써 프레데군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587년에는 앙제, 생트, 낭트 마을을 점령했다.[7]
프레데군트는 평화 협상을 제안했지만, 군트람은 뉘스트리아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브룬힐다, 힐데베르트 2세와 안델로 조약을 체결하여 둘 중 한 명이 죽으면 다른 왕이 왕국을 상속받기로 했다. 592년 군트람이 죽자 힐데베르트가 오스트라시아와 부르고뉴의 왕이 되었다.[7]
4. 네우스트리아의 통치자
584년에 아버지인 네우스트리아의 왕 킬페리크 1세가 사망하여 네우스트리아 왕위를 계승했지만, 그는 생후 4개월이었기 때문에[25], 597년까지 어머니인 프레데군데가 섭정을 했다. 또한, 백부인 부르군트 왕 군트람이 후견인이 되었다[26]。
599년, 사촌인 아우스트라시아 왕 테우데베르트 2세, 부르군트 왕국의 테우데리크 2세와 싸웠다. 테우데리크 2세와는 여러 차례 싸웠지만, 613년 테우데리크는 사망했다[27]。부르군트는 테우데리크의 아들 시게베르트 2세가 계승했지만, 시기베르트의 증조모인 브룬힐데가 지배했다.
613년에 브룬힐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프랑크 왕국을 통일[27]。파리로 천도했다. 브룬힐데는 붙잡혀 처형되었다[27]。
614년 10월 18일에 파리 칙령을 발포[28]。각 분왕국의 귀족의 요구를 수용하는 형태로, 궁재에게 권한을 위임[28]。또한 교회에 재판 특권을 부여했다.
623년에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아들 다고베르트 1세를 아우스트라시아 왕으로 삼았다[29]。또한, 피핀 1세를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로 임명했지만,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의 실권을 쥐고 있던 피핀 1세 및 메스 주교 아르눌프는 다고베르트 1세를 조종함으로써 권력 유지를 꾀했다고 여겨진다[29]。
629년, 클로타르 2세는 사망하고, 다고베르트 1세가 아우스트라시아에 더하여,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 왕위도 계승하여 왕국은 통일되었다[30]。또한, 다고베르트 1세는 이복 동생 카리베르트 2세를 아키타니아 왕으로 삼았다.
4. 1. 아우스트라시아 및 부르군디와의 갈등 (599년 - 613년)
599년, 클로타리우스 2세는 조카이자 사촌인 부르고뉴의 테우데리크 2세와 아우스트라시아의 테우데베르 2세와 전쟁을 벌였다.[27] 도르멜 전투(몽테로-포-욘 인근)에서 패배한 클로타리우스 2세는 왕국 영토가 보베, 아미앵, 루앙 지역으로 축소되는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나머지 지역은 테우데리크 2세와 테우데베르 2세에게 분할되었으나, 이들은 곧 서로에게 칼을 겨누었다.[12] 605년, 클로타리우스 2세는 테우데리크 2세의 왕국을 침략했지만 정복하지 못했고, 613년 테우데리크 2세가 메츠에서 사망할 때까지 잦은 전쟁을 벌였다.[12]604년, 왕국 회복을 위한 클로타리우스 2세의 첫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의 아들 메로베흐는 에탕프 전투에서 테우데리크 2세에게 포로로 잡혔고, 브룬힐데의 명령에 따라 베르토알드에 의해 살해되었다. 607년, 클로타리우스 2세는 테우데리크 2세 아들의 대부가 되었고, 그의 아들 이름을 메로베흐라고 지었다.[12]
같은 시기, 테우데리크 2세는 서고트 왕국 공주 에르멘베르그와의 결혼을 추진하며 새로운 갈등을 일으켰다. 에르멘베르그의 아버지 비테리크는 클로타리우스 2세, 롬바르드 왕국의 아길룰프와 동맹을 맺었으나, 이 연합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610년, 테우데베르트 2세와 테우데리크 2세는 전쟁을 시작했다. 테우데베르트 2세는 초반에 승리했고, 테우데리크 2세는 클로타리우스 2세에게 북부 네우스트리아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테우데베르트 2세는 612년 쾰른 근처의 툴 전투와 톨비악 전투에서 패배했다.

테우데리히 2세는 약속대로 북부 네우스트리아를 클로타르 2세에게 양도했지만, 곧바로 배신하고 네우스트리아 침공을 계획했다. 그러나 613년 메츠에서 이질로 사망했고, 그의 군대는 흩어졌다. 브룬힐다는 증손자 지게베르트 2세를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위에 앉혔다.[13]

당시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 바르나카르와 부르군드의 궁재 라도는 브룬힐다와 지게베르트 2세를 배신했고, 온 왕국은 클로타리우스 2세의 차지가 되었다. 브룬힐다와 지게베르트 2세는 엔 강에서 클로타리우스 2세의 군대와 맞섰지만, 귀족 알레테우스, 로코 공작, 시그발드 공작이 군대를 이탈하면서 도망쳐야 했다. 뇌샤텔 호 근처에서 클로타리우스 2세의 병사들에게 붙잡힌 그들과 지게베르트 2세의 남동생 코르보는 모두 처형되었고, 메로베크, 그의 대자, 도망친 힐데베르트를 제외한 많은 이들이 처형되었다.
브룬힐데는 네우스트리아 왕족 10명을 포함한 여러 프랑크 왕족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녀는 말에 묶여 찢겨 죽는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14] 이 승리로 클로타리우스 2세는 프랑크 민족의 유일한 왕이 되어 권력을 강화했다.[27]
4. 2. 도르멜 전투 (599년)
599년, 클로타리우스 2세는 조카이자 사촌뻘인 부르고뉴의 테우데리크 2세와 오스트라시아의 테우데베르 2세와 전쟁을 벌였다.[12] 그들은 도르멜 전투(몽테로-포-욘 인근)에서 클로타리우스 2세를 격파하여, 그의 왕국을 보베, 아미앵, 루앙 지역으로 축소하는 조약을 체결하게 했다.[12] 나머지 지역은 두 형제에게 분할되었다.[12] 그러나 이 시점에서 두 형제는 서로에게 무기를 들었다.[12]4. 3. 브룬힐다와의 전쟁 (613년)
테우데리히 2세는 합의에 따라 북부 네우스트리아를 클로타르에게 양도했지만, 이후 돌아서서 네우스트리아 침공을 조직했다. 그러나 그는 613년 메츠에서 이질로 사망했고, 그의 군대는 즉시 흩어졌다.[13] 브룬힐다는 자신의 증손자 지게베르트 2세를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위에 앉혔다.[13]그 당시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인 바르나카르와 부르고뉴의 궁재인 라도는 브룬힐다와 지게베르트 2세를 버렸고, 온 왕국이 클로타르의 손에 넘어갔다.[14] 브룬힐다와 지게베르트는 엔 강에서 클로타르의 군대와 만났지만, 귀족 알레테우스, 로코 공작, 시그발드 공작이 군대를 이탈했고, 늙은 여왕과 그의 왕은 도망쳐야 했다.[14] 그들은 오르브 강까지 갔지만, 클로타르의 병사들이 뇌샤텔 호 근처에서 그들을 따라잡았다.[14] 그들과 지게베르트의 남동생 코르보 모두 클로타르의 명령에 의해 처형되었고, 이후 메로베크, 그의 대자, 그리고 도망친 힐데베르트를 제외한 이 가문의 많은 사람들을 처형했다.[14]
브룬힐데는 네우스트리아 왕족 10명과 다른 프랑크 왕족들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녀는 말에 끌려 찢어지는 매우 가혹한 고문과 처형을 당했다.[14] 이 승리 이후, 클로타르는 프랑크 민족의 유일한 왕으로 남게 되었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14] 613년에 브룬힐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프랑크 왕국을 통일했다.[27] 파리로 천도했으며, 브룬힐데는 붙잡혀 처형되었다.[27]
5. 프랑크 왕국의 통일 (613년 - 629년)
모든 프랑크족을 통일한 클로타르 2세는 파리와 알랑투르 저택에 거주했다.[15] 584년에 그의 아버지인 네우스트리아의 왕 킬페리크 1세가 사망하여, 네우스트리아 왕위를 계승했지만, 그는 생후 4개월이었기 때문에[25], 597년까지 그의 어머니인 프레데군데가 섭정을 했다. 또한, 백부인 부르군트 왕 군트람이 후견인이 되었다[26]。
599년, 사촌인 아우스트라시아 왕의 테우데베르트 2세, 부르군트 왕국의 테우데리크 2세와 싸웠다. 테우데리크 2세와는 여러 차례 싸웠지만, 613년 테우데리크는 사망했다[27]。부르군트는 테우데리크의 아들 시게베르트 2세가 계승했지만, 시기베르트의 증조모인 브룬힐데가 지배했다.
613년에 브룬힐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프랑크 왕국을 통일[27]。파리로 천도했다. 브룬힐데는 붙잡혀 처형되었다[27]。
614년 10월 18일에 파리 칙령을 발포했다.[28] 각 분왕국의 귀족의 요구를 수용하는 형태로, 궁재에게 권한을 위임했다.[28] 또한 교회에 재판 특권을 부여했다.
623년에 아우스트라시아 귀족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아들 다고베르트 1세를 아우스트라시아 왕으로 삼았다[29]。또한, 피핀 1세를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로 임명했지만,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의 실권을 쥐고 있던 피핀 1세 및 메스 주교 아르눌프는 다고베르트 1세를 조종함으로써 권력 유지를 꾀했다고 여겨진다[29]。
629년, 클로타르 2세는 사망하고, 다고베르트 1세가 아우스트라시아에 더하여,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트 왕위도 계승하여 왕국은 통일되었다[30]。또한, 다고베르트 1세는 이복 동생 카리베르트 2세를 아키타니아 왕으로 삼았다.
5. 1. 파리 칙령 (614년)
614년, 클로타리우스 2세는 파리 공의회를 소집하고 파리 칙령을 반포했는데, 이 칙령은 프랑크 귀족에게 많은 권리를 부여하는 동시에 유대인을 왕실의 모든 공직에서 배제했다.[17][18] 이 금지령은 모든 문맹을 메로빙거 왕조의 성직자 통제하에 두는 결과를 낳았으며, 주교가 보통 귀족 출신이었기에 귀족들 역시 크게 만족했다. 칙령 11조는 "왕국 내의 평화와 규율"을 회복하고 "반란과 무례함"을 진압하기 위한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 칙령은 세 왕국 전체에서 비준되었다. 킬페리크가 임명한 관료들의 권력 남용이 여러 차례 발생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의무가 부과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관료가 봉직하는 지역 출신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19]614년 10월 18일에 파리 칙령을 발포했다.[28] 각 분왕국의 귀족의 요구를 수용하는 형태로, 궁재에게 권한을 위임했다.[28] 또한 교회에 재판 특권을 부여했다.
5. 2. 아우스트라시아에 다고베르트 1세 임명 (623년)
623년, 클로타리우스 2세는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을 어린 아들 다고베르트 1세에게 넘겨주었다.[20] 이는 메츠의 아르눌프 주교와 피핀 1세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정치적 행보였으며, 이들에게는 사실상 자치가 허용되었다.[20] 피핀 1세는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로 임명되었는데, 다고베르트 1세를 조종함으로써 권력 유지를 꾀했다고 여겨진다.[29]
동시에 클로타르는 랭스 지역을 네우스트리아에 할당하여 영토 변경을 시도했다. 그러나 626년에 다고베르트는 이 지역의 반환을 협상했다.
6. 사망
클로타르 2세는 629년에 4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아버지 킬페리크 1세처럼 파리의 생-뱅상 대성당(나중에 생 제르맹 데 프레 교회로 편입됨)에 묻혔다. 그의 통치는 그의 할아버지 클로타르 1세를 제외한 다른 어떤 메로빙거 왕보다 더 오래 지속되었다. 클로타르의 아들 다고베르트 1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네우스트리아와 부르군디를 통치했다. 그러나 다고베르트의 이복 형제 카리베르트 2세는 아키텐의 왕이 되었다.
7. 가족 관계
클로타리우스 2세는 힐페리히 1세와 프레데군다의 아들이다.[23] 첫 번째 부인은 할데트루드이며, 자녀로는 메로베흐, 오스트라시아의 엠마, 다고베르트 1세가 있었다. 메로베흐는 부르고뉴 원정 중 포로로 잡혀 브룬힐다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다. 오스트라시아의 엠마는 618년에 켄트 왕 에드발드와 결혼했다.[23] 최근에는 그녀가 누스트리아의 궁재인 에르키노알드의 딸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23] 다고베르트 1세는 프랑크 왕이었다.
두 번째 부인은 베르트루드이며, 617년에 유아로 사망한 아들과 베르타를 낳았다. 베르타는 부르고뉴 궁재 바르나케르의 아내가 되었다.
618년에는 지칠데와 결혼하여 샤리베르 2세와 오다를 낳았다. 샤리베르 2세는 아키텐 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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