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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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은 1899년 창단된 우루과이의 축구 클럽으로, 우루과이 축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팀 중 하나이다. 49번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을 포함하여 다수의 국내 대회를 제패했으며,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3회, 인터컨티넨탈컵 3회, 코파 인테라메리카나 2회,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1회 우승을 차지하며 국제적인 성공도 거두었다. 라이벌 CA 페냐롤과의 경기는 '클라시코 델 푸트볼 우루과요'로 불리며, 팬들은 '인차'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단은 축구 외에도 풋살, 농구, 사이클, 배구 등 다양한 스포츠 팀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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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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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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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명칭 |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
별칭 | 볼소 (Bolso) 트리콜로르 (Tricolor) 볼시유도 (Bolsilludo) 데카노 (Decano, 장로) |
창단일 | 1899년 5월 14일 |
경기장 | 그란 파르케 센트랄 |
수용 인원 | 38,000명 |
회장 | 알레한드로 발비 |
감독 | 마르틴 라사르테 |
리그 | 프리메라 디비시온 |
시즌 | 2024년 |
현재 시즌 | 2023년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시즌 |
2023년 시즌 순위 | 프리메라 디비시온 2위 (16개 팀 중)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유니폼 정보 | |
홈 유니폼 | 흰색 상의, 흰색 하의, 흰색 양말 |
원정 유니폼 | 빨간색 상의, 흰색 하의, 흰색 양말 |
서드 유니폼 | 파란색 상의, 파란색 하의, 파란색 양말 |
클럽 명칭 (원어) | |
스페인어 | Club Nacional de Football |
IPA (스페인어) | kluβ nasjoˈnal de ˈfuðβol |
FIFA 클럽 정보 | |
FIFA 클럽 정보 | FIFA.com 클럽 소개 |
관련 링크 | |
관련 링크 | 우루과이 클럽 창립일 CONMEBOL 공식 대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역대 순위 코파 인테르아메리카나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아르헨티나-우루과이 명예 컵 코파 알다오 - 리오플라텐세 챔피언십 개요 코파 리오 데 라 플라타 에스코바-헤로나 컵 나시오날, 아르티가스 깃발 게양 그란 파르케 센트랄 FIFA.com - 페냐롤 - 나시오날, 특별한 라이벌 관계 CONMEBOL 랭킹 IFFHS 역사 : 2001-2010년 남미 최고의 클럽 새로운 팬: 4,000명의 신규 회원 가입 |
2. 역사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은 1899년 5월 14일 몬테비데오 축구 클럽과 우루과이 운동 클럽의 합병으로 탄생했다. 클럽 깃발은 우루과이의 국가적 영웅인 호세 게르바시오 아르티가스와 역사적으로 연관된 세 가지 색(빨강, 파랑, 흰색)을 담고 있다. 1900년, 나시오날은 에스타디오 그란 파르케 센트랄에서 경기를 시작했다.
1903년 9월, 나시오날은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을 대표하여 아르헨티나를 3-2로 꺾고, 우루과이 축구 역사상 최초의 국제 경기(국가대표팀 간) 승리를 기록했다. 1905년에는 첫 국제 타이틀인 코파 데 오노르 쿠세니에르에서 우승했다.
1925년, 나시오날은 유럽 원정에서 190일 동안 38경기를 치러 26승 7무 5패(130득점 30실점)를 기록했다.[57] 1927년에는 북미 투어에서 16승 2무 1패를 기록했다.
1932년 우루과이 축구가 프로화되면서 나시오날은 'La Máquina Blanca'(백색 기계)라는 별명을 얻었다. 1939년부터 1943년까지는 5년 연속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23]
나시오날은 1971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1971 인터컨티넨탈 컵에서 우승하며 첫 클럽 월드 타이틀을 획득했다.[65] 1980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컨티넨탈 컵에서, 1988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컨티넨탈 컵에서 우승하며 세 차례 세계 챔피언에 등극했다.
2000년대 이후, 나시오날은 국내 리그에서 꾸준히 우승하고 있으며,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코파 수다메리카나 등 국제 대회에도 지속적으로 참가하고 있다.
2. 1. 창단과 초기 (1899-1931)

나시오날은 1899년 5월 14일 몬테비데오 축구 클럽과 우루과이 운동 클럽의 합병으로 탄생했다. 클럽의 깃발에는 우루과이의 국가적 영웅인 호세 게르바시오 아르티가스와 역사적으로 연관된 세 가지 색(빨강, 파랑, 흰색)을 포함하기로 결정했다. 클럽의 유니폼은 주로 빨강과 파랑이었다. 1900년 나시오날은 클럽 데펜사를 포함했고 선수들을 영입했으며, 에스타디오 그란 파르케 센트랄에서 경기를 시작했다. 같은 해에 외국인들이 운영하는 4개의 클럽(알비온 FC, CURCC, 우루과이 운동 클럽 및 도이처 FK)이 "우루과이 협회 리그"를 창설했다. 나시오날의 가입 요청은 '크리오요' 클럽과 선수들에게 자격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57] 그러나 리그 클럽들은 여러 친선 경기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후 1901년에 나시오날의 가입을 허용해야 했다. 1902년에 나시오날은 첫 번째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타이틀을 획득했다. 1902년에는 빨간색 유니폼 대신 흰색 유니폼을 사용했다.
1903년 9월 나시오날은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을 대표하여 아르헨티나를 3-2로 꺾고, 우루과이 축구 역사상 최초의 국제 경기(국가대표팀 간)에서 승리했다. 1905년 나시오날은 첫 번째 국제 타이틀인 코파 데 오노르 쿠세니에르에서 우승했다.
1911년에 열린 정기 총회에서 클럽 회장 호세 마리아 델가도가 이끄는 대중주의 다수가 엘리트 소수를 상대로 승리하여 제도적 변혁을 가져왔다. 클럽은 압돈 포르테와 같은 하위 계층의 선수들에게 문을 열었고, 그는 결국 1918년의 갑작스러운 죽음 전까지 나시오날에서 선수 생활을 하며 클럽의 가장 큰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18]

나시오날 선수들은 이미 1900년경부터 빠르고, 정교한 연계 플레이와 빈번한 드리블로 이루어진, 덜 육체적이고 더 상상력이 풍부한 새로운 플레이 스타일을 개발하기 시작했다.[19]
1912년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후, 그들은 1915년 ''트리플 크라운''(3관왕)을 획득했는데, 여기에는 당시의 3대 국내 및 국제 토너먼트인 프리메라 디비시온, 타이 컵, 코파 데 오노르 쿠세니에르가 포함된다. 나시오날은 1916년과 1917년 리그 챔피언십에서 모두 우승하여 최초의 ''코파 우루과야 엔 프로피에다드''(연속 3회 챔피언십 우승팀)를 획득했으며, 1919년, 1920년, 1922년, 1923년 및 1924년 리그 타이틀도 획득했다.
국제 대회에서 나시오날은 3번의 코파 알다오 (1916년, 1919년, 1920년), 3회 연속 코파 데 오노르 쿠세니에르 (1915년, 1916년, 1917년), 그리고 2번의 타이 컵 (1913년, 1915년)에서 우승했다.
2. 2. 국제 무대 진출과 성공 (1920년대)
1924년 파리 올림픽에는 안드레스 마사리, 산토스 우르디나라, 엑토르 스카로네, 앙헬 로마노, 알프레도 시베치, 파스쿠알 소마 등 6명의 선수를 우루과이 대표팀에 보냈다. 우루과이는 결승에서 스위스를 꺾고 첫 출전, 첫 우승을 달성했다.[57]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과 1930년 자국에서 개최된 제1회 FIFA 월드컵에서도 나시오날은 우루과이 대표팀에 다수의 선수를 보냈고, 모든 대회에서 우루과이는 우승을 차지했다.1925년, 국내 리그에서의 성공과 소속 선수들의 대표팀 활약으로 나시오날은 장기간의 유럽 원정에 초청받아 190일 동안 38경기를 치렀다. 9개국 프로 축구 클럽 및 각국 대표팀과 대결하여 26승 7무 5패 (130득점 30실점)의 성적을 기록했다.[57] 유럽 원정 중에는 약 80만 장의 티켓이 팔렸다.[64] 1927년에는 북미 투어를 떠나 16승 2무 1패의 성적을 거두었다.
2. 3. 프로 리그 시대와 5연패 (1932-1940년대)
1932년 우루과이 축구가 프로화되면서 나시오날은 'La Máquina Blanca'(백색 기계)라는 별명의 팀을 구성했다. 이 팀은 1932 시즌 첫 4경기에서 28골을 기록했다. 1933년 나시오날은 12번째 1부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다음 해에도 우승을 반복했다.[23] 1933년 챔피언십은 페냐롤과의 일련의 결승전 끝에 1934년 11월에 종료되면서 역대 가장 긴 챔피언십으로 기억된다. 마지막 경기는 나시오날이 엑토르 카스트로의 3골로 3-1로 승리했다.
1938년, 보카 주니어스에서 아틸리오 가르시아가 입단했다. 같은 해 나시오날은 국제 친선 챔피언십인 토르네오 인터나시오날 노투르노 리오플라텐세에서 우승했다.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전 선수였던 엑토르 카스트로의 지도 아래 나시오날은 'Quinquenio de Oro' (킨케니오 데 오로, 1939년부터 1943년까지 5년 연속 챔피언십)를 차지했다. [23] 이 5년 동안 국내 리그에서 96경기를 치러 77승 9무 10패(318득점 108실점)의 성적을 남겼다. 1941 시즌은 프로 리그화 이후 유일한 완전 우승(20전 전승)으로 리그를 제패했다. 이 시기의 몇 가지 하이라이트는 아틸리오 가르시아의 4골로 페냐롤을 5-1로 이긴 경기였다.
이 시대 나시오날의 페냐롤에 대한 우위는 몇 가지 특정한 업적으로 가장 잘 나타난다.
- 1938년부터 1943년까지 23번의 ''클라시코스''가 있었으며, 나시오날이 18승, 라이벌이 4승을 거두었다.
- 1941년 12월 14일 나시오날은 우루과이 클라시코 역사상 가장 큰 승리를 거두며 페냐롤을 6-0으로 꺾었다. (그 해 나시오날은 챔피언십 20경기를 모두 승리했다.)
- 1943년 11월 23일 나시오날은 10번째 캄페오나토 우루과요 ''클라시코''에서 연승을 거두었다.[23]
이 시대의 주목할 만한 선수로는 아틸리오 가르시아 (나시오날 역대 최다 득점자, 우루과이 클라시코 역대 최다 득점자(34골), 8번의 우루과이 챔피언, 8번의 리그 최다 득점자), 아니발 파스 (9번의 우루과이 챔피언이자 1950년 우루과이 대표팀 월드 챔피언), 슈베르트 감베타 (9번의 우루과이 챔피언이자 1950년 월드 챔피언), 루이스 에르네스토 카스트로 (7번의 우루과이 챔피언), 아니발 시오카 (8번의 우루과이 챔피언), 에우제니오 ''파토'' 갈발리시 (7번의 우루과이 챔피언), 로베르토 포르타 (6번의 우루과이 챔피언), 비비아노 자피라인 (6번의 우루과이 챔피언) 등이 있다.[23]
가르시아는 페르난도 모레나에 이어 국내 리그 통산 역대 2위인 209골을 기록했으며, 나시오날에 재적한 14시즌 동안 7년 연속을 포함한 8번의 득점왕, 통산 207골, 페냐롤전에서의 통산 35골, 페냐롤전에서의 1경기 4골(모두 역대 최다) 등의 기록을 남겼다. 또한, 클럽으로서도 5연패를 포함한 8번의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2. 4. 남미 및 세계 챔피언 (1940년대-1980년대)
나시오날은 1948년 캄페오나토 수다메리카노 데 캄페오네스(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의 전신)에서 3위를 차지했다.[65] 1964년, 1967년, 1969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에 진출했지만, 각각 인데펜디엔테, 라싱 클럽, 에스투디안테스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1971년, 나시오날은 워싱턴 에참멘디 감독의 지휘 아래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 플라타를 꺾고 마침내 첫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차지했다. 같은 해, 1971 인터컨티넨탈 컵에서 그리스의 파나티나이코스를 상대로 루이스 아르티메의 골에 힘입어 승리하며 첫 클럽 월드 타이틀을 획득했다.[65] 파나티나이코스는 원래 유럽 챔피언이었던 AFC 아약스가 남아메리카 팀들의 거친 플레이를 우려하여 출전을 거부했기 때문에 대신 출전했다. 이듬해 나시오날은 코파 인테라메리카나에서 멕시코의 크루스 아술을 꺾고 우승했다.
1980년, 나시오날은 결승에서 브라질의 인터나시오날을 꺾고 두 번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달성했다. 이어 인터컨티넨탈 컵에서 잉글랜드의 노팅엄 포레스트를 발데마르 빅토리노의 결승골로 1-0으로 꺾고 두 번째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1988년, 나시오날은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의 뉴웰스 올드 보이스를 에르네스토 바르가스, 산티아고 오스톨라사, 우고 데 레온의 골로 3-0으로 완파하고 세 번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같은 해 인터컨티넨탈 컵에서는 구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네덜란드의 PSV 에인트호번을 상대로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산티아고 오스톨라사의 두 골(두 번째 골은 연장전 마지막 골)로 2-2 무승부를 기록, 승부차기에서 승리하며 세 번째 세계 챔피언에 등극했다. 이듬해 나시오날은 코파 인테라메리카나에서 온두라스의 CD 올림피아를 꺾고 우승했고,[65] 수페르코파 수다메리카나에서 라싱을 꺾고 우승했다.[66]
2. 5. 2000년대 이후
2000년, 2001년, 2002년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에서 3년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27] 2005년에는 클럽 소유의 그란 파르케 센트랄 경기장을 복원하여, 이후 대부분의 홈 경기를 이곳에서 개최하고 있다.2009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는 준결승까지 진출했으나, 이후 우승팀이 되는 에스투디안테스(아르헨티나)에게 패했다. 2010년대에는 국내 리그에서 꾸준히 우승을 차지하며,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코파 수다메리카나 등 국제 대회에도 지속적으로 참가하고 있다.
3. 경기장
나시오날은 몬테비데오에 있는 그란 파르케 센트랄 경기장을 홈 경기장으로 사용한다. 1900년에 지어진 이 경기장은 1811년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가 "동방의 지도자"로 임명된 역사적인 장소에 있다.[29]
최근에는 페냐롤과 함께 국립 경기장인 센테나리오 경기장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2005년 그란 파르케 센트랄로 복귀했다. 이후 지속적인 개조를 통해 대부분의 국내 경기와 많은 국제 경기를 이곳에서 치르고 있다. 그러나, 위험도가 높은 경기나 더비 경기는 여전히 센테나리오 경기장에서 개최된다.
3. 1. 경기장 명칭
나시오날은 대부분의 홈 경기를 몬테비데오에 있는 그란 파르케 센트랄 경기장에서 치른다. 1900년에 처음 건설된 이 경기장은 현재 38,0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점차 40,089석으로 확장될 예정이다. 이 경기장은 1811년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가 "동방의 지도자"로 임명된 역사적인 장소인 "킨타 데 라 파라과야"에 위치해 있다.[29]최근까지 페냐롤과 함께 국립 경기장인 센테나리오 경기장을 사용했지만, 2005년에 그란 파르케 센트랄로 복귀했다. 지속적인 개조 작업을 통해 현재는 대부분의 국내 경기와 많은 국제 경기를 이곳에서 치르고 있다. 다만, 위험도가 높은 경기나 더비 경기는 여전히 센테나리오 경기장에서 열린다.
경기장의 네 개 스탠드는 나시오날의 상징적인 인물 네 명을 기리기 위해 다음과 같이 명명되었다.
- 호세 마리아 델가도 (José María Delgado) 스탠드: 클럽의 가장 중요한 회장 중 한 명이었던 호세 마리아 델가도의 이름을 땄으며, 언론 및 VIP석을 포함하는 공식 스탠드이다.
- 아틸리오 가르시아 (Atilio García) 스탠드: 나시오날 역대 최고 득점자인 아틸리오 가르시아의 이름을 딴 스탠드로, 델가도 스탠드 맞은편에 위치한 가장 큰 스탠드이다.
- 압돈 포르테 (Abdón Porte) 스탠드: 팀에서 강등된 후 경기장 중앙에서 자살한, 나시오날의 가장 큰 상징 중 한 명인 압돈 포르테의 이름을 땄다. 이 스탠드는 조직적인 서포터 그룹이 응원하는 곳이다.
- 헥토르 스카로네 (Héctor Scarone) 스탠드: '마법사'라는 별명을 가진 또 다른 역사적인 스트라이커 헥토르 스카로네의 이름을 땄다.
현재 아틸리오 가르시아 스탠드와 압돈 포르테 스탠드를 연결하는 코너 구조 공사가 진행 중이며, 향후 세 스탠드에 세 번째 층이 추가될 예정이다.
경기장 모습은 다음과 같다.
4. 서포터
남미의 축구팬, 또는 응원문화를 가리키는 말로 '''인차'''(hinchaes)가 있다. 이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들이 바로 나시오날의 팬들이다.
인차는 축구공에 공기를 넣는 것을 가리키는 라플라타 유역 속어인 ''hincharlas''(스페인어에선 ''infrar''라고 함)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1900년대 레예스라 불리던 열정적인 나시오날의 직원(팬)들이 공기 주입기를 사용해 응원하던 것이 그 기원이다. 그 후로 전 세계의 스페인어 사용 축구팬들에게 널리 사용되고 있다.[104] 20세기 초 나시오날의 관계자였던 프루덴시오 미겔 레예스는 오랫동안 클럽에 공헌하여 유명했다. 레예스의 직무 중 하나는 공에 공기를 넣는 것이었는데("팽창하다"라는 스페인어는 일반적으로 inflar이지만, 우루과이에서는 hinchar가 자주 사용된다), 다른 서포터들이 직무명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불과 몇 경기 만에 레예스는 나시오날의 "인차"로 널리 알려졌다. 이것이 전 세계 스페인어 사용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인차라는 단어의 기원이다.[73]
나시오날은 3색의 클럽 컬러에서 '''트리콜로레스'''(Tricolores, 삼색), 과거에 가슴 포켓이 달린 유니폼을 사용했던 데에서 '''볼소스'''(Bolsos, 포켓) 또는 '''볼실류도스'''(Bolsilludos, 배짱이 두둑한), 클럽의 역사적 길이에서 '''데카노'''(Decano, 장로) 등의 별명을 가지고 있다.
나시오날의 클럽 회원(소시오) 수는 2011년에 40,000명[74], 2012년에 50,000명을 돌파했다[75]。2018년 시점에서는 85,000명이다.
5. 라이벌
CA 페냐롤과의 경기는 클라시코 델 푸트볼 우루과요(클라시코 또는 수페르클라시코)라고 불린다. 우루과이의 수페르클라시코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더비이다.[69] 첫 경기는 1900년 7월 15일에 열렸으며, 페냐롤(당시 CURCC)이 2-0으로 승리했다.[70] 2019년 12월 15일까지 544경기가 열렸으며, 페냐롤이 191승, 나시오날이 177승, 무승부가 176경기이다.[70] 두 강팀의 국내 리그 우승 횟수를 합하면 리그 개최 횟수 전체의 약 80%에 달한다.[71] 아마추어 리그 시대에는 나시오날이 약간 우세했지만, 프로 리그화 이후에는 점차 페냐롤이 우세를 역전시켰다.
1939 시즌부터 1943 시즌까지 나시오날은 국내 리그 5연패(킨케니오 데 오로)를 달성했다. 1938년부터 1943년 사이에 23번의 클라시코가 열렸고, 나시오날은 CA 페냐롤을 상대로 18승 1무 4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했다. 1941년 12월 14일의 대결에서는 6-0으로 대승을 거두며, 클라시코에서 최대 점수 차 기록을 세웠다. 1943년 11월 21일의 페냐롤전에서는, 사상 최장인 국내 리그에서의 클라시코 10연승을 달성했다.
6. 우승 기록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은 국내외 대회에서 수많은 우승을 차지한 우루과이의 명문 축구 클럽이다.
'''국제 대회'''에서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3회(1971, 1980, 1988), 인터콘티넨털컵 3회(1971, 1980, 1988), 코파 인테라메리카나 2회(1972, 1989), 레코파 수다메리카나 1회(1989) 우승을 달성했다. 특히 인터콘티넨털컵에서는 한 번도 패하지 않고 3회 우승한 최초의 클럽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 (AFA)와 우루과이 축구 협회 (AUF)가 공동 주최한 대회에서도 코파 알다오 3회(1916, 1919, 1920), 타이 컵 2회(1913, 1915), 코파 데 오노르 쿠세니에르 4회(1905, 1915, 1916, 1917) 우승을 차지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쌓았다.
6. 1. 국내 대회
(리그)토너먼트
(리그)
(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