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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데리쿠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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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킬데리쿠스 3세는 743년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즉위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궁재 피핀 3세에게 있었다. 그는 메로빙거 왕조의 쇠퇴기에 왕위에 올랐으며, 킬페리크 2세의 아들로 추정된다. 751년 피핀 3세가 교황의 지지를 받아 왕으로 선출되면서 폐위되었고, 삭발 후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킬데리쿠스의 폐위는 메로빙거 왕조의 종말을 고하고 카롤링거 왕조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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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데리쿠스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왕위프랑크 왕
장 다시에 (1676-1763) - 프랑스의 왕 키르데리크 3세 (754).jpg
키르데리크 3세의 가상 표현, 장 다시에의 18세기 메달
통치 기간743년–751년
선임자테우데리크 4세
후임자피핀 3세
왕조메로베우스 왕조
아버지킬페리크 2세 또는 테우데리크 4세
출생일기원후 717년경
사망일기원후 754년경
배우자란의 기셀라
자녀테우데리크

2. 혈통 및 배경

킬데리쿠스 3세의 정확한 혈통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선대 국왕 테우데리히 4세가 아버지라는 설도 있으나, 테우데리히 4세는 711년 또는 712년 출생으로 추정된다. 이는 킬데리쿠스 3세와 나이 차이가 3~6세에 불과하여 부자 관계는 성립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의문이 제기된다. 따라서 킬페리크 2세의 아들이라는 설이 통설로 받아들여진다.

킬데리쿠스 3세가 메로빙거 왕조의 일족인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구체적인 혈통은 불분명하다는 설도 있어 계보가 명확하지 않다. 실제로 639년 이후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 중에는 클로비스 3세나 클로타르 4세처럼 메로빙거 혈통 계승 여부가 불확실하거나, 혈통은 인정되더라도 정확한 계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이 존재한다.

2. 1. 메로빙거 왕조의 쇠퇴

다고베르트 1세(629년-634년)의 통치 이후, 메로빙거 왕조 왕들의 권력은 점차 약화되어 의례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반면 프랑크 왕국의 실질적인 권력은 점차 궁재들이 장악해 나갔다. 718년, 카를 마르텔은 네우스트리아와 오스트라시아의 궁재직을 모두 차지하며 프랑크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로 부상했다. 테우데리히 4세 왕이 737년에 사망하자, 카를 마르텔은 새로운 왕을 세우지 않고 공위 상태로 왕국을 다스렸다.

카를 마르텔이 741년에 사망한 뒤, 그의 첫 번째 부인 로트루드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인 카를로만과 피핀 3세가 공동으로 궁재직을 계승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이복 동생인 그리포와 매형인 바이에른 공작 오딜로의 반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내부 반란은 6년간 왕이 없었던 상황에서, 자신들의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메로빙거 왕조의 왕을 다시 세우는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2. 2. 왕위 공백기와 킬데리크 3세의 즉위

다고베르트 1세 (재위 629년-634년)의 통치 이후, 메로빙거 왕조 왕들의 권력은 점차 상징적인 역할로 축소되었고, 프랑크 왕국의 실질적인 권력은 궁재들이 행사하게 되었다. 718년, 카를 마르텔은 네우스트리아와 오스트라시아의 궁재직을 겸임하며 프랑크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로 부상했다. 테우데리히 4세 왕이 737년에 사망하자, 카를 마르텔은 새로운 왕을 세우지 않고 공석인 상태로 왕국을 다스렸다.

카를 마르텔이 741년에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인 카를로만과 피핀 3세가 공동으로 궁재직을 계승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이복 동생인 그리포와 매형인 바이에른 공작 오딜로의 반란에 직면했다. 이러한 내부적인 위협은 약 6년간 지속된 왕위 공백 상태를 끝내고, 메로빙거 왕족 중에서 새로운 왕을 세워 자신들의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결정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에바리스트-비탈 루미네의 그림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Le dernier des Mérovingiens). 밧줄로 묶인 킬데리쿠스 3세의 머리카락을 수도사가 자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결국 743년 초, 궁재 카를로만과 피핀 3세 형제는 킬데리쿠스 3세를 왕위에 앉혔다[1][2]. 이로써 테우데리히 4세 사망 이후 지속된 왕위 공백기는 끝났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궁재인 피핀 3세가 쥐고 있었다. 751년, 피핀 3세는 생 드니 수도원장 풀라드를 교황 자카리아스에게 보내 "권력이 없는 자를 왕으로 두는 것보다 권력 있는 자를 왕으로 하는 것이 낫다"는 답변을 얻었다[3].

이러한 교황의 지지를 바탕으로 같은 해 11월, 피핀 3세는 프랑크족 귀족들에 의해 프랑크 왕국의 새로운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주교 보니파시오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고 공식적으로 왕위에 올랐다[4]. 명목상의 왕이었던 킬데리쿠스 3세는 폐위되어 왕권의 상징인 긴 머리카락을 잘리고 생 베르탱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그의 아들 테우데리크 역시 생 방드레이 수도원에 유폐되었으며, 이후 역사 기록에 등장하지 않아 메로빙거 왕조의 혈통은 사실상 단절되었다[4].

3. 생애



킬데리쿠스 3세의 부모가 누구인지, 메로빙거 왕조와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는 불확실하다. 힐페리크 2세 또는 테오데리크 4세의 아들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선대 왕 테오데리크 4세가 737년 사망한 후 왕위는 공석이었다. 743년 초, 당시 프랑크 왕국의 실권을 쥐고 있던 궁재 형제 카를로만과 피핀 3세는 킬데리쿠스 3세를 왕위에 앉혔다.[1][2] 그러나 그는 이름뿐인 왕으로 실질적인 권력은 없었다. 샤를마뉴의 전기 작가인 아인하르트에 따르면, 킬데리쿠스는 1년에 한 번 농부가 모는 황소 수레를 타고 궁정에 나타나 궁재가 준비한 답변을 방문하는 대사들에게 전달하는 것 외에는 공적인 역할이 거의 없었으며, 자신의 작은 영지와 궁재의 지원에 의존하는 처지였다.

751년, 실권을 장악한 피핀 3세는 교황 자카리아의 지지를 얻어 프랑크 왕으로 즉위했다.[3][4] 같은 해 킬데리쿠스 3세는 폐위되어 삭발당하고 생 베르탱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그의 긴 머리카락은 왕권의 상징이었기에, 이를 자르는 것은 왕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박탈하는 의미였다. 그의 아들 테오데리크 역시 생-방드르유 수도원으로 보내졌고, 이후 역사 기록에서 사라지면서 메로빙거 왕조는 단절되었다.[4]

킬데리쿠스 3세가 정확히 언제 사망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리며, 753년 또는 758년으로 추정된다.

3. 1. 피핀 3세의 왕위 찬탈과 카롤링거 왕조의 성립

선대 왕 테우데리크 4세가 737년 사망한 이후 프랑크 왕국은 왕위가 공석인 상태였다. 743년 초, 당시 왕국의 실권을 쥐고 있던 궁재 형제 카를로만과 피핀 3세는 킬데리쿠스 3세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1][2] 이는 수년간의 왕위 공백과 이복동생 그리포 등의 반란에 직면한 상황에서, 메로빙거 왕조의 왕을 내세워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

그러나 킬데리쿠스 3세는 이름뿐인 왕이었고 실질적인 권력은 없었다. 샤를마뉴의 전기 작가인 아인하르트는 킬데리쿠스가 공적인 역할이 거의 없었으며, 1년에 한 번 농부가 모는 황소 수레에 실려 궁정에 나타나 궁재가 미리 준비한 답변을 방문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전부였다고 기록했다. 그는 정치적, 경제적 기반 없이 자신의 작은 영지와 궁재의 지원에 의존하는 처지였다.

747년 형 카를로만이 수도원으로 은퇴하자, 피핀 3세는 단독 궁재로서 프랑크 왕국의 유일한 실권자가 되었고, 마침내 왕위를 직접 차지하기로 결심했다. 피핀은 교황 자카리아스에게 생 드니 수도원장 풀라드를 사절로 보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자와 명목상의 왕 중 누가 왕의 칭호를 가져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교황은 "권력이 없는 자를 왕으로 두는 것보다 권력 있는 자를 왕으로 하는 것이 낫다"고 답하며 사실상 피핀의 왕위 계승을 지지했다.[3]

교황의 지지를 확보한 피핀 3세는 751년 11월, 프랑크족 귀족들에 의해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주교 보니파시오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고 즉위하여 카롤링거 왕조 시대를 열었다.[4] 같은 해, 킬데리쿠스 3세는 왕위에서 폐위되고 삭발당했다. 당시 프랑크족에게 긴 머리카락은 왕권과 신성함의 상징이었으므로,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그의 모든 왕족으로서의 특권과 권위를 박탈하는 행위였다.

폐위된 킬데리쿠스 3세는 생 베르탱 수도원에 유폐되었고,[4] 그의 아들 테우데리크 역시 생-방드르유 수도원에 보내져 이후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다. 이로써 수백 년간 프랑크 왕국을 통치했던 메로빙거 왕조는 완전히 단절되었다.[4] 킬데리쿠스 3세의 정확한 사망 시기는 불확실하며, 일부 기록은 753년을, 다른 기록은 758년을 제시하고 있다.

3. 2. 폐위와 죽음



샤를마뉴의 전기 작가인 아인하르트에 따르면, 킬데리쿠스 3세는 공적인 일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1년에 한 번 농부가 모는 황소 수레를 타고 궁정에 나타나, 궁재가 미리 준비한 답변을 방문하는 대사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는 그가 정치적, 경제적 실권 없이 자신의 작은 영지와 궁재의 지원에 의존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선대 왕 테우데리크 4세가 737년에 사망한 후 왕위는 한동안 공석이었다. 743년,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궁재 형제 카를로만과 피핀 3세는 킬데리쿠스 3세를 왕위에 앉혔다.[1][2] 그러나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궁재들이 가지고 있었다.

747년 카를로만이 수도원으로 은퇴하자, 피핀 3세는 스스로 왕이 되기로 결심했다. 피핀은 교황 자카리아에게 사절을 보내 "왕의 칭호는 실권이 없는 명목상의 왕족과 실권을 행사하는 자 중 누구에게 속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교황은 "실질적인 권력을 가진 자가 왕의 칭호도 가져야 한다"고 답했다.[3] 이 응답을 명분 삼아 751년 11월, 피핀은 프랑크 귀족들에 의해 프랑크 왕으로 선출되었고, 마인츠의 주교 성 보니파시오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고 즉위했다.[4]

같은 해, 킬데리쿠스 3세는 폐위되어 삭발을 당했다. 그의 긴 머리카락은 메로빙거 왕조의 상징이자 왕권의 표시였는데, 이를 자름으로써 모든 왕으로서의 특권을 박탈당한 것이다. 폐위된 킬데리쿠스 3세는 생 베르탱 수도원에 유폐되었고, 그의 아들 테오데리크는 생-방드르유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이후 테오데리크는 역사 기록에서 사라졌으며, 이로써 메로빙거 왕조는 완전히 단절되었다.[4]

킬데리쿠스 3세가 정확히 언제 사망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일부 자료는 753년을, 다른 자료는 758년을 그의 사망 연도로 기록하고 있다.

4. 가족

킬데리쿠스 3세의 아내는 랑의 기젤라(723년경 출생)이며, 아들로 테우데리크(740년경 출생, 몰년 미상)를 두었다. 아내 랑의 기젤라는 피핀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았으며, 부부는 혈연 관계가 있는 먼 친척이다.

4. 1. 랑의 기젤라의 가계

킬데리쿠스 3세의 아내는 랑의 기젤라(723년경 출생)이며,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테우데리크(740년경 출생)가 있었다. 랑의 기젤라의 아버지는 랑의 카리베르트이다. 카리베르트는 킬데리쿠스 3세의 큰 숙부인 테우데리크 3세와 그의 왕비 클로틸다 사이에서 태어난 딸 베르트라다의 아들이다. 또한, 왕비 클로틸다는 피핀 1세의 손녀이기도 하다. 이러한 혈연 관계로 인해 랑의 기젤라는 피핀 가문(카롤링거 왕조의 전신)의 혈통을 이어받았으며, 남편인 킬데리쿠스 3세와는 먼 친척 관계에 해당한다.

랑의 기젤라의 가계에는 주목할 만한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조상 중에는 서고트 왕이었던 킨틸라와 그의 아들 투르가가 있다. 또한 서로마 제국 말기의 강력한 권력자였던 리키메르와 그의 아내 아류피아도 기젤라의 조상이다. 아류피아는 서로마 황제 안테미우스의 딸이며, 아류피아의 외할아버지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르키아누스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안테미우스 황제의 선조 중에는 로마 제국 황제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의 모계 사촌인 프로코피우스(율리아누스의 어머니 바실리나와 프로코피우스의 어머니가 자매 관계)도 있어, 로마 제국 말기를 대표하는 여러 인물들이 그녀의 가계와 연결되어 있다.

참조

[1] 서적 柴田 他
[2] 서적 ル・ジャン
[3] 서적 瀬原
[4] 서적 柴田 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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