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탐페레 전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탐페레 전투는 1918년 핀란드 내전 중 탐페레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1910년대 핀란드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자 핀란드 노동 운동의 중심지였던 탐페레는 적위대(붉은군)의 주요 거점이었으며, 백군은 3월 15일 탐페레를 포위하고 공격했다. 3월 28일 백군은 대규모 공세를 펼쳤지만 큰 사상자를 냈으며, 4월 3일 시가전을 시작하여 4월 5일 도시를 장악했다. 전투 후 백군은 적군을 대량 처형했으며,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를 냈다. 전투를 기념하는 다양한 기념물이 세워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18년 대량 살인 - 적색 테러
    적색 테러는 러시아 내전 당시 볼셰비키 정권이 반대파와 잠재적 위협 인물을 제거하기 위해 체카를 동원하여 자행한 테러로, 레닌의 지시 하에 백색 테러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되어 반혁명 분자 처형과 밀고 장려를 통해 전개되었으며, 반공주의 확산과 유사 테러 캠페인의 선례가 되었다.
  • 1918년 3월 -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은 1918년 러시아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하기 위해 독일 등 동맹국과 체결한 강화 조약으로, 러시아는 막대한 영토를 상실하고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이후 연합국의 승리로 무효화되었다.
탐페레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 이름탐페레 전투
분쟁핀란드 내전
전투 후 탐멜라 지역
전투 후 탐멜라 지역
날짜1918년 3월 15일 – 1918년 4월 6일 ()
장소핀란드 탐페레
결과핀란드 백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파일:Flag of Finland 1918 (state).svg|border|25px]] 핀란드 백군
[[파일:Flag of the Swedish Brigade (Ruotsalainen prikaati).svg|border|25px]] 스웨덴 여단
교전국 2[[파일:Red flag.svg|border|25px]] 핀란드 적군
지휘관
지휘관 1[[파일:Flag of Finland 1918 (state).svg|border|25px]] C. G. E. 만네르헤임
[[파일:Flag of the Swedish Brigade (Ruotsalainen prikaati).svg|border|25px]] 햘마르 프리셀
지휘관 2[[파일:Red flag.svg|border|25px]] 우고 살멜라
[[파일:Red flag.svg|border|25px]] 게오르기 불라첼
[[파일:Red flag.svg|border|25px]] 알리 아알토넨
[[파일:Red flag.svg|border|25px]] 베르네르 레흐티매키
병력 규모
병력 116,000명
스웨덴 의용군 400명
병력 214,000명
사상자
사상자 1820명 사망
사상자 22,000명 사살 또는 처형
10,000–11,000명 포로

2. 배경

1910년대 탐페레는 교외 지역을 포함하여 약 6만 명의 인구를 가진 핀란드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 핀란드 노동 운동의 중심지로 여겨질 만큼 핀란드에서 가장 산업화된 도시였으며, 1905년 총파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노동 조합과 사회민주당의 핵심 거점이었다.[4]

1918년 1월 말 내전이 시작되자, 적군(붉은군)은 탐페레 북쪽 100km 지점에 있는 중요한 철도 교차점인 하파매키(Haapamäki)를 공격했다. 전선은 곧 탐페레 북쪽 50km~60km 지점에 형성되었고, 타바스티아 전선(Tavastia Front)이 전쟁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많은 노동자 계급 인구와 철도 연결망으로 인해 탐페레는 적위대(붉은근위대)의 주요 기지가 되었지만, 적색 정부는 헬싱키(Helsinki)에서 활동하고 있었다.[5]

2. 1. 핀란드 내전 발발

1910년대 탐페레는 핀란드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으며, 교외를 포함한 인구는 약 6만 명이였다. 핀란드에서 가장 산업화된 도시였으며, 핀란드 노동 운동의 중심지였다. 탐페레는 1905년 총파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 도시는 노동 조합과 사회민주당의 근거지였다.

1918년 1월 하순에 내전이 시작되자, 적위대는 탐페레 북쪽 100km 지점에 있는 Haapamäki|하파매키fi의 중요한 철도 분기점을 목표로 삼았다. 전선은 곧 탐페레 북쪽 50km~60km에 설치되었고, 타바스티아 전선은 전쟁의 주요 전장이 되었다. 노동 계급 인구가 많고 철도가 지나갔기 때문에, 탐페레는 적위대의 주요 거점이 되었지만, 적위대 정부는 헬싱키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월 27일, 탐페레는 완전히 적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30] 탐페레 적위대는 300명의 여성을 포함한 약 6,000명의 대원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이는 전체의 약 5%에 불과했다.

2. 2. 탐페레의 중요성

탐페레는 1910년대 핀란드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으며, 교외 지역을 포함하여 약 6만 명의 인구가 거주했다. 핀란드에서 가장 산업화된 도시로 핀란드 노동 운동의 중심지였다.[4] 탐페레는 1905년 총파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노동 조합과 사회민주당의 핵심 거점이었다.[4]

1918년 1월 말 내전이 시작되자 적군(붉은군)은 탐페레 북쪽 10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중요한 철도 교차점인 하파매키(Haapamäki)를 공격했다. 전선은 곧 탐페레 북쪽 50~60킬로미터 지점에 형성되었고, 타바스티아 전선(Tavastia Front)이 전쟁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많은 노동자 계급 인구와 철도 연결망으로 인해 탐페레는 적위대(붉은근위대)의 주요 기지가 되었지만, 적색 정부는 헬싱키(Helsinki)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월 27일, 탐페레는 완전히 적군의 통제하에 들어갔다.[5]

3. 탐페레 포위

탐페레 전투의 지도. 백군 포병의 사격 목표가 포함되어 있다.


응급처치소에서 부상당한 적군 병사들


2월 말과 3월 초 적군의 공세가 실패하자, 백군은 3월 15일 탐페레 공략 작전을 개시했다. 목표는 타바스티아 전선에서 적군을 포위하고 탐페레에 진입하는 것이었다. 얌새, 오리베시, 루오베시, 빌플라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3월 16일 얌새에서 벌어진 랭키포흐야 전투와 이틀 후 오리베시에서 벌어진 오리베시 전투였다.[4] 적군 전선이 붕괴되면서 병력은 탐페레로 후퇴했으며, 탐페레에는 약 15,000명의 적군 병력이 남게 되었다. 적군 지휘부는 항복하는 대신 가능한 한 오랫동안 도시를 방어하기로 결정했다.

백군은 3월 23일 탐페레에 도착하여 17,000명의 병력으로 도시를 포위 공격했는데, 이는 이 전쟁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군사 작전이었다.[4] 율뢰야르비, 피르칼라, 메수퀼래, 아이톨라흐티, 렘페엘래, 베실라흐티, 토티야르비 지역에서 관련 전투가 벌어졌으며, 서쪽으로는 사타쿤타 전선의 카르쿠와 해메엔퀴뢰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4]

3월 23일, 백군은 북동쪽에서 탐페레에 접근하여 도시 동쪽 10km 지점인 베흐마이넨에서 적군 방어선과 충돌했다.[4] 다음 이틀 동안 백군은 남동쪽의 교외인 메수퀼래(잠시 동안 이곳에 속한 타카후티 마을을 점령)[18][6]과 탐페레 남쪽 15km 지점에 있는 렘페엘래 마을을 공격했지만 격퇴당했다.[4] 백군 포병이 도시에 포격을 시작하자, 적군은 탐페레 동부 노동자 계급 지역인 탐멜라를 떠나야 했다.[4] 백군은 탐페레 동쪽 15km 지점에 있는 캉가살라 마을을 점령했지만, 기갑열차를 이용한 300명의 적군이 백군의 진격하는 부대를 뚫고 메수퀼래로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3] 3월 24일 저녁, 적군은 마침내 렘페엘래를 잃었다. 백군은 이제 적군의 주요 보급선인 리히미키-탐페레 철도를 차단할 수 있게 되었다.[3]

백군은 3월 26일, 탐페레 서쪽 20km 지점 시우로 마을에 있는 포리 철도의 시우로 역을 점령함으로써 포위망을 완성했다.[3] 같은 날, 적군은 메수퀼래의 방어진지를 버리고 칼레바 지역 옆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4] 백군은 또한 탐페레 북서쪽 10km 지점에 있는 율뢰야르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4] 율뢰야르비를 점령한 후, 백군은 즉시 도시 서쪽의 에필래와 남쪽의 하탄패를 공격했지만 큰 피해를 입고 격퇴당했다.[4] 반대로 적군은 에이노 라흐야의 지휘 아래 3,500명의 병력으로 렘페엘래를 역공격했다. 투르쿠와 율래네의 적군은 남쪽으로 향하는 헬싱키 철도를 따라 동시 돌파를 시도했다. 최대 30명의 병사가 사망했고 기갑열차는 후퇴해야 했다. 3월 27일, 메수퀼래-칼레바 지역, 에필래, 렘페엘래에서 전투가 계속되었다.[4]

3. 1. 타바스티아 전선

1910년대 탐페레는 핀란드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으며, 교외를 포함하여 약 6만 명의 인구가 거주했다. 핀란드에서 가장 산업화된 도시였으며, 핀란드 노동 운동의 중심지였다. 탐페레는 1905년 총파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 도시는 노동 조합과 사회민주당의 근거지였다.

1918년 1월 하순에 내전이 시작되자, 적위대는 탐페레 북쪽 10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하파매키의 중요한 철도 분기점을 목표로 삼았다. 전선은 곧 탐페레 북쪽 50~60킬로미터에 설치되었고, 타바스티아 전선은 전쟁의 주요 전장이 되었다. 노동 계급 인구가 많고 철도가 지나갔기 때문에, 탐페레는 적위대의 주요 거점이 되었지만, 적위대 정부는 헬싱키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월 27일, 탐페레는 완전히 적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30] 탐페레 적위대는 300명의 여성을 포함한 약 6,000명의 대원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이는 전체의 약 5퍼센트에 불과했다.

3. 2. 백군의 포위 작전

2월 말과 3월 초에 적군의 공세가 실패하자, 백군은 3월 15일 탐페레에 대한 작전을 개시했다. 목표는 타바스티아 전선의 적군을 포위한 후 탐페레를 침공하는 것이었다. 얌새, 오리베시, 루오베시, 빌플라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3월 16일 얌새에서 벌어진 랭키포흐야 전투와 이틀 후 오리베시에서 벌어진 오리베시 전투였다.[4] 적군 전선이 붕괴되고 병력은 탐페레로 후퇴했으며, 탐페레에는 약 15,000명의 적군 병력이 남게 되었다.[4] 항복하는 대신 적군 지휘부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도시를 방어하기로 결정했다.[4] 백군은 3월 23일 탐페레에 도착하여 17,000명의 병력으로 도시를 포위 공격했는데, 이는 이 전쟁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군사 작전이었다.[4] 율뢰야르비, 피르칼라, 메수퀼래, 아이톨라흐티, 렘페엘래, 베실라흐티, 토티야르비 지역에서 관련 전투가 벌어졌으며, 서쪽으로는 사타쿤타 전선의 카르쿠와 해메엔퀴뢰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4]

3월 23일, 백군은 북동쪽에서 탐페레에 접근하여 도시 동쪽 10km 지점인 베흐마이넨에서 적군 방어선과 충돌했다.[4] 다음 이틀 동안 백군은 남동쪽의 교외인 메수퀼래(잠시 동안 이곳에 속한 타카후티 마을을 점령)[18][6]과 탐페레 남쪽 15km 지점에 있는 렘페엘래 마을을 공격했지만 격퇴당했다.[4] 백군 포병이 도시에 포격을 시작하자, 적군은 탐페레 동부 노동자 계급 지역인 탐멜라를 떠나야 했다.[4] 백군은 탐페레 동쪽 15km 지점에 있는 캉가살라 마을을 점령했지만, 기갑열차를 이용한 300명의 적군이 백군의 진격하는 부대를 뚫고 메수퀼래로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3] 3월 24일 저녁, 적군은 마침내 렘페엘래를 잃었다. 백군은 이제 적군의 주요 보급선인 리히미키-탐페레 철도를 차단할 수 있게 되었다.[3]

백군은 3월 26일, 탐페레 서쪽 20km 지점 시우로 마을에 있는 포리 철도의 시우로 역을 점령함으로써 포위망을 완성했다.[3] 같은 날, 적군은 메수퀼래의 방어진지를 버리고 칼레바 지역 옆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4] 백군은 또한 탐페레 북서쪽 10km 지점에 있는 율뢰야르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4] 율뢰야르비를 점령한 후, 백군은 즉시 도시 서쪽의 에필래와 남쪽의 하탄패를 공격했지만 큰 피해를 입고 격퇴당했다.[4] 반대로 적군은 에이노 라흐야의 지휘 아래 3,500명의 병력으로 렘페엘래를 역공격했다. 투르쿠와 율래네의 적군은 남쪽으로 향하는 헬싱키 철도를 따라 동시 돌파를 시도했다. 최대 30명의 병사가 사망했고 기갑열차는 후퇴해야 했다. 3월 27일, 메수퀼래-칼레바 지역, 에필래, 렘페엘래에서 전투가 계속되었다.[4]

3. 3. 전투 경과

2월 말과 3월 초에 적군의 공세가 실패하자, 백군은 3월 15일 탐페레 공략 작전을 개시했다. 목표는 타바스티아 전선의 적군을 포위한 후 탐페레를 침공하는 것이었다. 얌새, 오리베시, 루오베시, 빌플라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3월 16일 얌새에서 벌어진 랭키포흐야 전투와 이틀 후 오리베시에서 벌어진 오리베시 전투였다. 적군 전선이 붕괴되고 병력은 탐페레로 후퇴했으며, 탐페레에는 약 15,000명의 적군 병력이 남게 되었다. 항복하는 대신 적군 지휘부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도시를 방어하기로 결정했다. 백군은 3월 23일 탐페레에 도착하여 17,000명의 병력으로 도시를 포위 공격했는데, 이는 이 전쟁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군사 작전이었다. 율뢰야르비, 피르칼라, 메수퀼래, 아이톨라흐티, 렘페엘래, 베실라흐티, 토티야르비 지역에서 관련 전투가 벌어졌으며, 서쪽으로는 사타쿤타 전선의 카르쿠와 해메엔퀴뢰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4]

3월 23일, 백군은 북동쪽에서 탐페레에 접근하여 도시 동쪽 10km 지점인 베흐마이넨에서 적군 방어선과 충돌했다. 다음 이틀 동안 백군은 남동쪽의 교외인 메수퀼래(잠시 동안 이곳에 속한 타카후티 마을을 점령)[18][6]과 탐페레 남쪽 15km 지점에 있는 렘페엘래 마을을 공격했지만 격퇴당했다. 백군 포병이 도시에 포격을 시작하자, 적군은 탐페레 동부 노동자 계급 지역인 탐멜라를 떠나야 했다. 백군은 탐페레 동쪽 15km 지점에 있는 캉가살라 마을을 점령했지만, 기갑열차를 이용한 300명의 적군이 백군의 진격하는 부대를 뚫고 메수퀼래로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3월 24일 저녁, 적군은 마침내 렘페엘래를 잃었다. 백군은 이제 적군의 주요 보급선인 리히미키-탐페레 철도를 차단할 수 있게 되었다.[3]

백군은 3월 26일, 탐페레 서쪽 20km 지점 시우로 마을에 있는 포리 철도의 시우로 역을 점령함으로써 포위망을 완성했다.[3] 같은 날, 적군은 메수퀼래의 방어진지를 버리고 칼레바 지역 옆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 백군은 또한 탐페레 북서쪽 10km 지점에 있는 율뢰야르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율뢰야르비를 점령한 후, 백군은 즉시 도시 서쪽의 에필래와 남쪽의 하탄패를 공격했지만 큰 피해를 입고 격퇴당했다. 반대로 적군은 에이노 라흐야의 지휘 아래 3,500명의 병력으로 렘페엘래를 역공격했다. 투르쿠와 율래네의 적군은 남쪽으로 향하는 헬싱키 철도를 따라 동시 돌파를 시도했다. 최대 30명의 병사가 사망했고 기갑열차는 후퇴해야 했다. 3월 27일, 메수퀼래-칼레바 지역, 에필래, 렘페엘래에서 전투가 계속되었다.[4]

4. 피의 목요일 (3월 28일)

3월 28일은 백군에게 "피의 목요일"로 불릴 만큼 큰 피해를 준 날이었다.[7] 백군은 탐페레 도시 진입을 위해 대규모 공격을 시도했으나, 칼레반캉가스 묘지(Kalevankangas Cemetery)와 경마장 지역에서 격렬한 전투 끝에 적군을 격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도시 진입에는 실패했다.[4]

이날 전투에서는 백색근위대 대신 징집병과 예거 장교들이 이끄는 부대가 투입되었다. 이들은 전투 경험 부족으로 큰 피해를 보았는데, 백군 3개 대대에서 최소 200명이 사망하고 전체 사상자는 병력의 50%를 넘었다. 스웨덴 여단(Swedish Brigade)과 예거 부대도 큰 손실을 입었다.[4][8]

적군 역시 50~70명의 전사자를 냈으며, 지휘관 후고 살멜라(Hugo Salmela)가 본부에서 수류탄 폭발로 사망하고 베르네르 레히티매키(Verner Lehtimäki)가 그 뒤를 이었다.[3][7][9]

이후 5일 동안 백군은 공격을 중단하고 도시를 포격했다. 이로 인해 탐멜라(Tammela)와 퀴틋텔래(Kyttälä) 지역이 파괴되고 최소 2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4]

4. 1. 백군의 대공세

3월 28일, 백군은 그동안 전쟁에서 가장 큰 일일 사상자를 냈는데, 이는 나중에 "피의 목요일"이라고 불렸다.[7] 백군은 마침내 도시에 진입하기 위해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전투는 탐페레 동부 외곽의 깔레반캉가스 묘지(Kalevankangas Cemetery)와 경마장 지역에 집중되었다.[7] 공격은 오전 9시에 시작되었다. 7시간의 전투 끝에 백군은 칼레바 지역에서 적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지만 도시에는 진입하지 못했다.[4]

의용군인 백색근위대 대신 백군은 이제 징집병으로 구성되고 예거 장교들이 지휘하는 부대를 사용했다. 징집병들은 자원병인 백색근위대보다 지휘하고 격렬한 전투에 투입하기가 훨씬 쉬웠다. 불복종 대신 문제는 이제 전투 경험의 부족이었고, 그 결과 큰 손실을 초래했다. 백군 3개 대대에서 최소 200명이 사망했고, 총 사상자는 사망 또는 부상으로 인해 병력의 50%를 넘었다. 또한 자원병인 스웨덴 여단(Swedish Brigade)과 독일군 훈련을 받은 예거 부대도 큰 손실을 입었다.[8] 스웨덴군은 흰색 눈 위장복을 입고 있어 눈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쉬운 표적이 되었다. 예거들은 녹색 군복을 입고 있어 회색 군복을 입은 사병들 사이에서 쉽게 눈에 띄었다. 결과적으로 400명으로 구성된 스웨덴 여단은 20명, 예거 부대는 27명의 장교를 잃었다.[4]

스웨덴 자원병들


그날 적군은 50~70명의 전투원이 사망했다. 적군 지휘관인 후고 살멜라(Hugo Salmela)는 그의 본부에서 수류탄이 실수로 폭발한 후 사망했다.[3][7][9] 그는 베르네르 레히티매키(Verner Lehtimäki)에게 뒤를 이었다. 프랑스 기자 앙리 라포르트(Henry Laporte)에 따르면, 레히티매키는 자신의 부하들을 격려하기 위해 차를 타고 적군 전선을 앞뒤로 돌아다녔다고 한다.[10] 라포르트는 러시아에 대한 공식 임무에서 돌아온 은퇴한 장교였다. 그는 나중에 1929년 책 "붉은 군대의 첫 번째 실패(Le Premier Échec des Rouges)"에서 탐페레 전투에 대한 경험을 묘사했다.[11]

공격 실패 후 백군은 다음 5일 동안 공세를 중단했다. 포격만이 도시를 맹타격했다. 포격으로 최소 2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그중 일부는 중립 또는 백군 지지자였으며, 탐멜라(Tammela)와 퀴틋텔래(Kyttälä)의 노동자 계급 지역이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5일 동안 렘페엘래(Lempäälä)에서 전투가 계속되었는데, 적군은 여전히 필사적으로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애썼다.[4]

4. 2. 막대한 사상자

3월 28일, 백군은 전쟁에서 가장 큰 일일 사상자를 냈는데, 이는 나중에 "피의 목요일"이라고 불렸다.[7] 백군은 도시에 진입하기 위해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전투는 탐페레 동부 외곽의 깔레반캉가스 묘지(Kalevankangas Cemetery)와 경마장 지역에 집중되었다.[7] 7시간의 전투 끝에 백군은 깔레바 지역에서 적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지만 도시에는 진입하지 못했다.[4]

백군은 예거 장교들이 지휘하는 징집병 부대를 사용했다. 징집병들은 자원병인 백색근위대보다 지휘와 전투 투입이 쉬웠으나, 전투 경험 부족으로 큰 손실을 보았다. 백군 3개 대대에서 최소 200명이 사망했고, 총 사상자는 병력의 50%를 넘었다. 스웨덴 여단(Swedish Brigade)과 예거 부대도 큰 손실을 입었다.[8] 스웨덴군은 흰색 눈 위장복을 입어 눈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표적이 되기 쉬웠고, 예거들은 녹색 군복 때문에 회색 군복을 입은 사병들 사이에서 눈에 띄었다. 스웨덴 여단은 20명, 예거 부대는 27명의 장교를 잃었다.[4]

같은 날 적군은 50~70명의 전투원이 사망했다. 적군 지휘관 후고 살멜라(Hugo Salmela)는 본부에서 수류탄이 실수로 폭발하여 사망했고,[3][7][9] 베르네르 레히티매키(Verner Lehtimäki)가 뒤를 이었다. 프랑스 기자 앙리 라포르트(Henry Laporte)는 레히티매키가 부하들을 격려하기 위해 차를 타고 적군 전선을 오갔다고 전했다.[10]

4. 3. 전투 중단

3월 28일 공격 실패 후, 백군은 5일 동안 공세를 중단하고 도시를 포격했다. 포격으로 탐멜라(Tammela)와 퀴틋텔래(Kyttälä)의 노동자 계급 지역이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고, 최소 2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4] 사망자 중에는 중립적이거나 백군 지지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5일 동안 렘페엘래(Lempäälä)에서는 전투가 계속되었으며, 적군은 여전히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4]

5. 시가전

4월 6일, 백군은 서부 교외를 공격하려 했지만, 오전 8시 30분 퓌이니키 탑(Pyynikki Tower) 꼭대기에 백기가 게양되면서 전투는 끝났다. 그러나 며칠 동안 고립된 적군 저격병들이 남아 있었다.[4]

중앙 광장에 잡힌 적군 포로들

5. 1. 백군의 시가지 장악

백군은 4월 3일 오전 2시 30분 결정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첫날,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탐멜라와 퀴텟탤러의 동부 노동자 계급 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전투는 블록 단위, 집 단위로 계속되었다. 백군은 마침내 도시를 둘로 나누는 탐메르코스키(Tammerkoski) 강에 도달했다. 당일 백군은 207명이 사망했고, 적군은 115~170명이 사망했다. 또한 민간인 약 20명이 사망했다.[4] 도시를 떠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교외 주민들은 도심으로 피신했다. 교회와 기타 공공 건물은 난민들로 가득 찼고, 지역 주민들은 지하실에 숨었다.[12] 1,700명이 탐페레 대성당(Tampere Cathedral)에 피신했다.[3]

네실린나 궁전(Näsilinna Palace) 동쪽 끝에서 사망한 적군 병사들


같은 날, 예거 구나르 멜린(Gunnar Melin)이 이끄는 백군 부대는 할리투스카투를 따라 네신칼리오(Näsinkallio) 언덕에 있는 네실린나 궁전(Näsilinna Palace)을 점령했지만, 주력 부대가 탐메르코스키 강 동쪽에 갇히면서 저녁에 다시 잃었다. 멜린의 부대는 백군 사령관 C. G. E. 만네르하임(C. G. E. Mannerheim)이 서명한 전단지에서 포로를 사살하지 않겠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네실린나 궁전 마당에서 항복한 적군 20명을 처형했다.[4]

만네르하임 장군(General Mannerheim)이 서명한 백군이 배포한 선전(propaganda) 전단.


다음 날 오전 4시, 백군은 철도 교량과 사타쿤난실타(Satakunnansilta), 헤메엔실타(Hämeensilta) 다리를 포함한 여러 지점에서 탐메르코스키 강을 건넜다. 저녁에는 도시 서쪽의 헤메엔푸이스토(Hämeenpuisto) 거리에 도달했다. 4월 5일, 백군은 나머지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 적군 저항지는 남녀 전투원들이 함께 방어한 시청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탐페레 여성 적위대가 항복을 거부했기 때문에 시청이 이렇게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 시청 방어자들은 오후 5시 30분에 결국 항복했다. 나머지 적군은 퓌이니키(Pyynikki)와 피스팔라(Pispala)의 서부 교외로 후퇴했다. 저녁에, 많은 수의 적군이 퓌헤야르비와 네시야르비(Näsijärvi) 호수의 얼음판을 건너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그들 중에는 적군 지도자 베르네르 레히티매키(Verner Lehtimäki), 알리 알토넨(Ali Aaltonen), K. M. 에바(K. M. Evä)가 있었다.[4]

5. 2. 적군의 저항과 패배

4월 5일, 백군은 도시의 나머지 부분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 적군 저항지는 남녀 전투원들이 함께 방어한 시청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탐페레 여성 적위대가 항복을 거부했기 때문에 시청이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 시청 방어자들은 오후 5시 30분에 항복했다. 나머지 적군은 퓌이니키(Pyynikki)와 피스팔라(Pispala)의 서부 교외로 후퇴했다. 저녁에 많은 적군이 퓌헤야르비와 네시야르비(Näsijärvi) 호수의 얼음판을 건너 도망쳤다. 여기에는 적군 지도자 베르네르 레히티매키(Verner Lehtimäki), 알리 알토넨(Ali Aaltonen), K. M. 에바(K. M. Evä)가 포함되었다.[4]

4월 6일, 백군은 서부 교외를 공격하려 했지만, 오전 8시 30분 퓌이니키 탑(Pyynikki Tower) 꼭대기에 백기가 게양되면서 전투는 끝났다. 그러나 며칠 동안 고립된 적군 저격병들이 남아 있었다.[4]

6. 사상자 및 피해

전투 후 알렉산테린카투(알렉산테린카투) 교차로 근처 수반토카투에서 발견된 어린 소년의 시체


탐페레 전투의 정확한 사상자 수는 불분명하다. 백군은 600~820명, 적군은 600~1,000명 정도로 추산되며, 전투 후 적군 1,000명과 러시아군 200명이 처형되었다. 칼레반칸가스 묘지의 대량 매장지에는 적군 2,751명이 매장되었고, 그중 1,208명이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자료가 있다. 핀란드 1914~1922년 전쟁 희생자 데이터베이스에는 백군 824명, 적군 1,087명, 기타 67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4]

올로프 팔메[13], 에른스트 사아리[14], 유호 레흐무스[15], 마티 키베케스[16], 유하니 실요[17], 게오르기 불라첼[18], 다비드 콜레이마이넨[19], 칼레 빌야마[20] 등 여러 주요 인물들이 탐페레 전투에서 사망했다.

6. 1. 사상자 규모



탐페레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의 정확한 수는 명확하지 않다. 백군의 사망자는 대략 600명에서 820명 사이로 추정되며, 적군의 사망자는 600명에서 1,000명 사이로 추산된다. 전투 이후에는 1,000명의 적군과 200명의 러시아군이 처형되었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칼레반칸가스 묘지의 대량 매장지에는 2,751명의 적군이 매장되어 있으며, 이 중 1,208명이 전투 중 사망했다고 한다.[4] 핀란드 1914~1922년 전쟁 희생자 데이터베이스에는 백군 824명, 적군 1,087명, 기타 67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4]

탐페레 전투에서 사망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 스웨덴 역사학자 올로프 팔메[13]
  • 국회의원 에른스트 사아리[14]
  • 국회의원 유호 레흐무스[15]
  • 편집자이자 번역가 마티 키베케스[16]
  • 시인 유하니 실요[17]
  • 러시아 장교 게오르기 불라첼[18]
  • 올림픽 선수 다비드 콜레이마이넨[19]
  • 올림픽 선수 칼레 빌야마[20]

6. 2. 주요 사망자



탐페레 전투에서 사망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 올로프 팔메 (스웨덴 역사학자)[13]
  • 에른스트 사아리 (국회의원)[14]
  • 유호 레흐무스 (국회의원)[15]
  • 마티 키베케스 (편집자, 번역가)[16]
  • 유하니 실요 (시인)[17]
  • 게오르기 불라첼 (러시아 장교)[18]
  • 다비드 콜레이마이넨 (올림픽 선수)[19]
  • 칼레 빌야마 (올림픽 선수)[20]

7. 전후 처리 및 학살

백군은 적군이 항복하자마자 처형을 시작했다. 탐페레에 있던 러시아인 전원과 최대 1,000명이 총살당했다. 처형된 200명 이상의 러시아인 대부분은 군인이었다. 포로로 잡힌 여성 전투원들은 라흐티비보르크에서처럼 백군에 의해 체계적으로 총살당하지는 않았지만, 여성과 어린이도 처형 대상에 포함되었다.[4]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거나 적위대원이 아니었던 사람들도 투옥되어 살해되었다.[12]

항복한 사람의 수가 너무 많아져서 모두 총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만 명이 넘는 적군이 중앙 광장에 모여 거의 24시간 동안 서 있어야 했다. 이후 포로들은 칼레바 지역 동부에 설립된 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 후 5개월 동안 탐페레 수용소에서 1,228명의 적군이 처형, 질병 또는 기아로 사망했다.[4]

8. 기념물

탐페레 전투에는 백군과 적군의 기념물이 모두 존재한다.

칼레반캉가스 묘지에는 1941년에 붉은군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 기념비는 1918년 당시 15세로 칼레반캉가스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조각가 유시 히에타넨이 디자인했다.[26] 마지막 붉은군이 항복했던 피스팔라에도 또 다른 기념비가 있다.[26]

백군 사령관 C. G. E. 만네르하임의 동상은 그가 전투를 관찰했던 장소에 세워졌다. 1939년 코스키푸이스토 공원에 처음 제안되었으나 논란 끝에 1956년 탐페레에서 8km 떨어진 언덕으로 이전되었다.[21] 외딴 위치 때문에 이 동상은 지역 무정부주의자들과 좌파 급진주의자들에 의해 종종 훼손되었다.[22]

조각가 빅토르 얀손의 '바파우덴파츠스'(자유의 여신상)는 탐페레 백군 정복을 기념하는 또 다른 동상이다. 1921년 하메엔푸이스토 공원에 세워졌으며, 극우 성직자 엘리아스 시모요키를 모델로 하였다. 이 동상은 공원 반대편에 있는 탐페레 노동자회관을 향해 칼을 들고 있다.[23] 70명 이상의 붉은군을 처형한 악명 높은 백군 처형자 요하네스 프롬의 별명을 따서 '룸민-유시'라고도 불린다.[24]

스웨덴 여단 기념비는 칼레반캉가스 묘지 근처에 있으며, 조각가 구나르 핀네의 작품이다.[25]

8. 1. 백군 기념물

C. G. E. 만네르하임 동상은 그가 전투를 관찰했던 장소에 세워졌다. 1939년 코스키푸이스토 공원에 처음 제안되었으나 논란 끝에 1956년 탐페레에서 8km 떨어진 언덕으로 이전되었다.[21] 외딴 위치 때문에 이 동상은 지역 무정부주의자들과 좌파 급진주의자들에 의해 종종 훼손되었다.[22]

조각가 빅토르 얀손의 '바파우덴파츠스'(자유의 여신상)는 탐페레 백군 정복을 기념하는 또 다른 동상이다. 1921년 하메엔푸이스토 공원에 세워졌으며, 극우 성직자 엘리아스 시모요키를 모델로 하였다. 이 동상은 공원 반대편에 있는 탐페레 노동자회관을 향해 칼을 들고 있다.[23] 70명 이상의 붉은군을 처형한 악명 높은 백군 처형자 요하네스 프롬의 별명을 따서 '룸민-유시'라고도 불린다.[24]

스웨덴 여단 기념비는 칼레반캉가스 묘지 근처에 있으며, 조각가 구나르 핀네의 작품이다.[25]

8. 2. 적군 기념물

칼레반캉가스 묘지에는 1941년에 붉은군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 기념비는 1918년에 15세의 나이로 칼레반캉가스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조각가 유시 히에타넨이 디자인했다.[26] 마지막 붉은군이 항복했던 피스팔라에도 또 다른 기념비가 있다.[26]

참조

[1] 서적 Dictionary of Battles and Sieges: P-Z https://books.google[...] Greenwood Publishing Group
[2] 뉴스 Suomalaiset kuvaavat sotien jälkiä kaupungeissa – katso kuvat ja tarinat tutuilta kulmilta https://yle.fi/uutis[...]
[3] 웹사이트 Battle of Tampere http://encyclopedia.[...]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the First World War 2014-10-08
[4] 서적 Amatöörien sota. Rintamataisteluiden henkilötappiot Suomen sisällissodassa 1918 Prime Minister's Office of Finland 2006
[5] 뉴스 100 years ago today: Reds take Tampere, Finnish Civil War begins https://yle.fi/uutis[...] Yle News 2018-01-27
[6] 웹사이트 Punaisten puolustus murtuu Tampereen pohjoispuolella http://www15.uta.fi/[...]
[7] 웹사이트 Tampereen kevät 1918 oli ennennäkemätön verilöyly – näin punaisten ja valkoisten suurtaistelu eteni https://www.is.fi/su[...] 2017-01-06
[8] 웹사이트 Ruotsalaisen sivistyksen puolesta barbariaa vastaan – ruotsalainen prikaati lähti Suomen sisällissotaan sankariteot mielessä, mutta ne hautautuivat Kalevankankaan veriseen lumeen https://yle.fi/uutis[...] 2021-10-04
[9] 서적 Tie Tampereelle: 1918: dokumentoitu kuvaus Tampereen antautumiseen johtaneista sotatapahtumista Suomen sisällissodassa WSOY
[10] 웹사이트 Verner Lehtimäen elämästä http://www.migration[...] Institution of Migration
[11] 서적 History of Scandinavia: Norway, Sweden, Denmark, Finland, and Iceland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0
[12] 서적 The Finnish Civil War 1918: History, Memory, Legacy https://books.google[...] Brill Publishing 2014
[13] 웹사이트 Olof Palme (1884 -1918). Mannen som kunde ha blivit en svensk fascistledare http://www.dn.se/ark[...] Dagens Nyheter 1995-11-26
[14] 웹사이트 Ernst Saari (1882–1918) http://62.148.204.4/[...] HELEMI – Lapuan historiallinen tietokanta 2012-06-05
[15] 웹사이트 Juho Lehmus https://www.eduskunt[...] Parliament of Finland
[16] 웹사이트 Viimeinen kesä http://suomenkuvaleh[...] Suomen Kuvalehti 2007-05-03
[17] 서적 A History of Finnish Literature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Group 1997
[18] 서적 Sisällissodan pikkujättiläinen WSOY 2009
[19] 웹사이트 Vuoden 1918 kahinoissa kuoli viisi suomalaista olympiaurheilijaa http://www.saunalaht[...] Suomen Urheilutietäjät 2013
[20] 웹사이트 Viljamaa, Kalle Albinus http://vesta.narc.fi[...] War Victims of Finland 1914–1922 Database
[21] 웹사이트 Evert Porila http://www.tampere.f[...] City of Tampere 2006
[22] 웹사이트 Mannerheimin patsas töhrittiin Tampereella jälleen - puhtaaksi itsenäisyyspäivään mennessä http://yle.fi/uutise[...] Yle Uutiset 2013-11-25
[23] 웹사이트 Viktor Jansson http://www.tampere.f[...] City of Tampere 2006
[24] 웹사이트 Vapaudenpatsas töhrittiin anarkistien A:lla Tampereella http://yle.fi/uutise[...] Yle Uutiset 2015-04-30
[25] 웹사이트 RUOTSALAISEN PRIKAATIN MUISTOKIVI 1918 http://www.tampere.f[...] City of Tampere 2006
[26] 웹사이트 Vakaumuksensa puolesta kuolleiden muistomerkki http://www.tkm.fi/pu[...] Werstas – The Finnish Labour Museum 2006
[27] 웹사이트 Suomalaiset kuvaavat sotien jälkiä kaupungeissa – katso kuvat ja tarinat tutuilta kulmilta https://dyle.fi/a/3-[...] YLE(フィンランド国営テレビ) 2024-05-29
[28] 웹사이트 Ruotsalaisen sivistyksen puolesta barbariaa vastaan – ruotsalainen prikaati lähti Suomen sisällissotaan sankariteot mielessä, mutta ne hautautuivat Kalevankankaan veriseen lumeen https://yle.fi/a/3-1[...] Yle(フィンランド国営テレビ) 2024-05-29
[29] 웹사이트 Tampere, Battle of https://encyclopedia[...] 2024-05-28
[30] 웹사이트 100 years ago today: Reds take Tampere, Finnish Civil War begins https://yle.fi/a/3-1[...] Yle(フィンランド国営放送) 2024-05-28
[31] 웹사이트 Punaisten puolustus murtuu Tampereen pohjoispuolella https://webpages.tun[...] 2024-05-29
[32] 서적 Dictionary of Battles and Sieges: P-Z http://books.google.[...] Greenwood Publishing Group
[33] 서적 The Rough Guide to Finland http://books.google.[...] Rough Guides 2010-06-01
[34] 웹사이트 Civil War https://www.youtube.[...] 2016-04-2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