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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우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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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티베리우스 2세는 560년대 중반에 태어난 동로마 제국의 황제이다. 그는 유스티누스 2세의 후원을 받아 엑스큐비토룸 백작으로 승진했으며, 아바르족과의 협상과 전쟁을 수행했다. 574년 카이사르로 임명된 후, 관대한 기부와 세금 감면 정책을 펼쳤지만, 과도한 지출로 재정을 악화시켰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마우리키우스를 등용하고, 슬라브족과 아바르족의 침입에 대응했다. 578년 아우구스투스로 즉위했으며, 582년 마우리키우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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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우스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
로마자 표기Tiberius Constantinus
그리스어 표기Τιβέριος Κωνσταντῖνος (Tibérios Kōnstantĩnos)
다른 표기티베리우스 노부스 콘스탄티누스 (Τιβέριος νέος Κωνσταντῖνος)
황제를 묘사한 금화
티베리우스 2세의 솔리두스. 범례: tib(erius) constant(inus) }}.}}
통치
작위동로마 황제
재위 시작578년 9월 26일 (아우구스투스)
재위 종료582년 8월 14일
카이사르 임명574년 12월 7일
전임유스티누스 2세
후임마우리키우스
개인 정보
출생지트라키아
출생명티베리우스
사망일582년 8월 14일
사망 장소콘스탄티노폴리스 (현재의 이스탄불, 터키)
배우자이노 아나스타시아
자녀알려지지 않음
콘스탄티나
카리토
아버지유스티누스 2세 (양아버지)
종교칼케돈 기독교
왕조
왕조유스티니아누스 왕조
기타 정보
완전한 통치자 명칭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플라비우스 티베리우스 콘스탄티누스 아우구스투스

2. 초기 생애와 경력

트라키아 교구에서 560년대 중반에 태어난[4] 티베리우스는 노타리우스 직책에 임명되었다. 552년 이후 어느 시점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에우티키우스를 통해 미래의 황제 유스티누스 2세를 소개받아 그와 굳건한 친구가 되었다. 유스티누스의 후원으로, 티베리우스는 ''엑스큐비토룸 백작''으로 승진하여 대략 565년부터 574년까지 역임했다. 그는 565년 11월 14일 유스티누스의 황제 즉위식과 566년 1월 1일 집정관 취임식에 참석했다.

유스티누스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아바르족에게 하던 지불을 중단했다. 569년, 유스티누스는 티베리우스를 ''마기스터 우트리우스케 밀리테''에 임명하여 아바르족과 그들의 요구를 처리하게 했다. 협상 끝에 티베리우스는 여러 아바르 족장에게서 남성 인질을 받는 대신 아바르족이 발칸반도의 로마 영토에 정착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유스티누스는 아바르 칸 가문에서 인질을 요구하며 이 합의를 거부했고, 아바르족이 이 조건을 거부하자 티베리우스는 전쟁을 준비했다.

2. 1. 아바르족과의 전쟁 (570년)

570년, 티베리우스는 트라키아에서 아바르족 군대를 격파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다.[4] 570년 말 또는 571년 초, 티베리우스는 또 다른 전투에서 패배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4] 그의 군대는 전장에서 도망치고 있었다.[4] 휴전에 동의한 후, 티베리우스는 유스틴과 조약 조건을 논의할 아바르 사절단에게 호송을 제공했다.[4] 돌아오는 길에 아바르 사절단은 지역 부족민들에게 공격받고 강탈당했는데, 티베리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4] 티베리우스는 범인들을 추적하여 빼앗긴 물건을 돌려주었다.[4]

3. 카이사르 즉위 (574-578년)

574년 12월 7일 카이사르로 임명된 티베리우스는 역병이 잦아들면서 유스티누스 2세보다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유스티누스 2세와 다른 노선을 택하여, 국경 방어와 민심 수습을 위해 모아둔 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1][2] 투르의 그레고리와 바울 디아코누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나르세스의 보물과 10만 파운드의 금(7,200,000 솔리디)이 담긴 보물을 발견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3]

티베리우스는 관대한 기부와 함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제정한 포도주와 빵에 대한 세금을 폐지하여 국가 수입을 줄였다. 그는 총독직 매매를 금지하는 정책을 유지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아바르족과 휴전을 맺고 연간 80,000 노미스마타를 지불하여 다뉴브 국경을 방어하게 하였고, 이를 통해 페르시아와의 분쟁에 대비하여 동쪽으로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었다.[4]

575년, 티베리우스는 트라키아일리리쿰의 군대를 동부 지역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페르시아와 3년 휴전에 합의하고 를 지불했지만, 이 휴전은 아르메니아 주변 지역은 제외되었다.[4] 티베리우스는 바두아리우스에게 증원군을 보내 롬바르드족의 침략을 막도록 했다. 그는 로마를 롬바르드족으로부터 구원하고 프랑크 왕국의 왕 힐데베르트 2세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576년 바두아리우스가 패배하고 사망하면서 제국 영토가 더 잃게 되었다.[4] 사산 제국의 황제 호스로 1세가 576년에 제국의 아르메니아 지역을 공격하여 멜리테네와 세바스테아를 약탈하자, 티베리우스는 장군 유스티니아누스를 보내 페르시아를 유프라테스 강 너머로 밀어냈다. 비잔틴 군대는 페르시아 영토 깊숙이 진격하여 아트로파테네를 습격했다. 그러나 577년 유스티니아누스가 패배하자, 티베리우스는 그를 미래의 황제 마우리키우스로 교체했다.[2][4] 티베리우스는 호스로와의 휴전 기간 동안 동방 군대를 강화하여 약 15,000명에 달하는 새로운 페데라티 부대를 구성했다.[2][4]

577년부터 578년까지 티베리우스는 페르시아와의 분쟁에 집중하기 위해 다른 문제들을 피했다. 그는 칼케돈파와 단성론파 기독교인들을 달랬고,[5] 롬바르드족 부족장들에게 를 지불하여 분열시키고 왕 선출을 막으려 했다. 슬라브족일리리쿰을 침략했을 때, 아바르족 군대를 보내 공격하게 했다. 578년 호스로가 로마 메소포타미아를 침략했을 때, 장군 마우리키우스는 페르시아 아르자네네와 메소포타미아를 침략하여 페르시아군을 격퇴했다.[5]

3. 1. 카이사르로서의 통치

574년 12월 7일 카이사르로 임명된 티베리우스는 역병이 잦아들면서 유스티누스 2세보다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유스티누스 2세와 다른 노선을 택하여, 국경 방어와 민심 수습을 위해 모아둔 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1][2] 투르의 그레고리와 바울 디아코누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나르세스의 보물과 10만 파운드의 금(7,200,000 솔리디)이 담긴 보물을 발견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3]

티베리우스는 관대한 기부와 함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제정한 포도주와 빵에 대한 세금을 폐지하여 국가 수입을 줄였다. 그는 총독직 매매를 금지하는 정책을 유지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다. 또한 아바르족과 휴전을 맺고 연간 80,000 노미스마타를 지불하여 다뉴브 국경을 방어하게 하였고, 이를 통해 페르시아와의 분쟁에 대비하여 동쪽으로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었다.[4]

575년, 티베리우스는 트라키아와 일리리쿰의 군대를 동부 지역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페르시아와 3년 휴전에 합의하고 를 지불했지만, 이 휴전은 아르메니아 주변 지역은 제외되었다.[4] 티베리우스는 바두아리우스에게 증원군을 보내 롬바르드족의 침략을 막도록 했다. 그는 로마를 롬바르드족으로부터 구원하고 프랑크 왕국의 왕 힐데베르트 2세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576년 바두아리우스가 패배하고 사망하면서 제국 영토가 더 잃게 되었다.[4] 사산 제국의 황제 호스로 1세가 576년에 제국의 아르메니아 지역을 공격하여 멜리테네와 세바스테아를 약탈하자, 티베리우스는 장군 유스티니아누스를 보내 페르시아를 유프라테스 강 너머로 밀어냈다. 비잔틴 군대는 페르시아 영토 깊숙이 진격하여 아트로파테네를 습격했다. 그러나 577년 유스티니아누스가 패배하자, 티베리우스는 그를 미래의 황제 마우리키우스로 교체했다.[2][4] 티베리우스는 호스로와의 휴전 기간 동안 동방 군대를 강화하여 약 15,000명에 달하는 새로운 페데라티 부대를 구성했다.[2][4]

577년부터 578년까지 티베리우스는 페르시아와의 분쟁에 집중하기 위해 다른 문제들을 피했다. 그는 칼케돈파와 단성론파 기독교인들을 달랬고,[5] 롬바르드족 부족장들에게 를 지불하여 분열시키고 왕 선출을 막으려 했다. 슬라브족이 일리리쿰을 침략했을 때, 아바르족 군대를 보내 공격하게 했다. 578년 호스로가 로마 메소포타미아를 침략했을 때, 장군 마우리키우스는 페르시아 아르자네네와 메소포타미아를 침략하여 페르시아군을 격퇴했다.[5] 이 기간 동안 병든 황제 유스티누스 2세는 578년 10월 5일에 사망했다.

4. 아우구스투스로서의 통치 (578-582년)

578년 9월 26일, 유스티누스 2세는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티베리우스를 아우구스투스(공동 황제)로 임명했다.[1] 티베리우스는 즉위 기념으로 7,200 파운드의 금을 백성에게 하사했고, 이후 4년 동안 매년 같은 양을 하사했다.[2]

유스티누스 2세의 황후 소피아는 남편이 죽은 후에도 권력을 유지하고자 티베리우스에게 결혼을 제안했으나, 티베리우스는 이미 이노와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거절했다. 티베리우스가 부황제(카이사르)였을 때, 소피아는 이노와 그녀의 자녀들이 황궁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 근처의 작은 집에 머물게 했다.[3] 티베리우스가 황제가 된 후 가족을 궁으로 데려오고 이노에게 아나스타시아라는 새 이름을 주자, 소피아는 티베리우스가 해임한 장군 유스티니아누스와 비밀 협약을 맺고 황제를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실패했다. 소피아는 적은 연금만 받게 되었고, 유스티니아누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용서받았다.[4]

동방에서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티베리우스는 서방으로 눈을 돌렸다. 579년, 서로마 제국 영토에 대한 군사 활동을 재개하여 라벤나를 강화하고 클라시스 항구를 되찾기 위해 이탈리아에 군대와 자금을 보냈다.[5] 그는 서고트의 왕자와 동맹을 맺고, 북아프리카에서 반란을 일으킨 베르베르족을 격파했다. 또한 프랑크 문제에 개입하여, 아서 왕 전설에 나오는 황제 루시우스 티베리우스의 모델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제국은 심각하게 팽창되어 있었다. 579년, 티베리우스가 다른 지역에 집중하는 동안, 아바르는 발칸 반도의 군사력 부족을 틈타 시르미움을 포위했다. 동시에 슬라브족이 트라키아,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남부로 이주하기 시작했지만, 티베리우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 때문에 막을 수 없었다. 동방 군대는 봉급을 받지 못해 반란을 위협했다.

580년, 장군 마우리키우스티그리스강 너머로 진격했고, 이듬해에는 페르시아령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크테시폰 근처까지 도달했지만, 페르시아의 반격으로 철수해야 했다. 582년까지 전쟁이 끝나지 않자, 티베리우스는 아바르족에게 배상금을 지불하고 시르미움을 넘겨주었다. 슬라브족의 이주는 계속되어 아테네까지 이르렀다. 582년 6월 콘스탄티나에서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아냈지만, 티베리우스는 독이 든 음식을 먹고 죽어가고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두 명의 후계자를 지명하고 각각 자신의 딸과 결혼시켰다. 마우리키우스는 콘스탄티나와, 게르마누스는 카리토와 약혼했다. 티베리우스는 제국을 동서로 나누려 했으나,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고, 582년 8월 13일 마우리키우스를 황제로 임명했다. 티베리우스는 다음 날인 582년 8월 14일에 사망했으며, 그의 마지막 말은 후계자에게 "이 소녀와 함께 나의 주권을 너에게 넘겨주노라. 그것을 사용하며 행복하게, 항상 형평과 정의를 사랑하는 것을 기억하라."였다.

4. 1. 소피아 황후와의 갈등

소피아는 유스티누스 2세의 황후였으나, 남편이 죽은 후 새 황제인 티베리우스 2세와 결혼하여 자신의 권력과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이미 이노와 결혼한 상태였기에 소피아의 제안을 거절하였다.[1] 티베리우스가 카이사르에 즉위했을 때, 소피아는 이노와 그녀의 자녀들이 황궁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였고, 그들은 황궁 근처의 작은 거처에 머물며 황궁 출입이 금지되었다.[2] 이후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에 즉위한 후, 자신의 가족을 황궁으로 옮기고 이노의 이름을 아나스타시아로 바꾸자 소피아는 분노하였다.[1] 이에 소피아는 복수를 계획하였고, 티베리우스가 해임한 장군 유스티니아누스와 은밀히 협약을 맺었다. 이들은 황제를 전복하고 유스티니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소피아는 적은 연금을 받는 처지가 되었고, 유스티니아누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용서받았다.[3]

4. 2. 서방 정책

티베리우스 2세는 전임자와는 다른 정책을 펼쳤다. 유스티누스 1세가 국경 방어와 백성 설득을 위해 모아둔 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투르의 그레고리와 바울 디아코누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나르세스의 보물과 10만 파운드의 금 또는 7,200,000 솔리디에 해당하는 1,000 "켄테나리아"(centenaria)라는 두 개의 보물을 발견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1][2]

또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제정한 포도주와 빵에 대한 세금을 폐지하고, 총독직 매매를 금지하는 등 인기 있는 정책을 펼쳤다. 아바르족과는 연간 80,000 노미스마타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휴전 협정을 맺어 다뉴브 국경을 방어하게 하고, 동쪽으로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었다.[3]

575년, 티베리우스는 롬바르드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바두아리우스 휘하의 증원군을 이탈리아에 파견했다. 로마를 롬바르드족으로부터 구원하고, 프랑크 왕국의 왕 힐데베르트 2세와 동맹을 맺어 롬바르드족을 격퇴하려 했다. 그러나 바두아리우스는 576년에 패배하여 전사했고, 이탈리아 내 제국 영토는 더욱 줄어들었다.[3]

579년, 티베리우스는 다시 서로마 제국의 잔존 세력에 대한 군사 활동을 확대했다. 라벤나를 강화하고 클라시스 항구를 되찾기 위해 이탈리아에 자금과 군대를 보냈다.[4] 서고트의 한 왕자와 동맹을 맺었고, 그의 장군들은 북아프리카에서 베르베르족을 격파했다.[4] 또한 프랑크 문제에 개입하여 아서 왕 전설에 나오는 황제 루시우스 티베리우스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4]

그러나 579년, 티베리우스가 다른 지역에 집중하는 동안 아바르족은 시르미움을 포위했고, 슬라브족은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남부 아카이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티베리우스는 페르시아가 동쪽에서 평화에 동의하지 않아 이를 막을 수 없었다.[5]

4. 3. 제국의 위기

578년 9월 26일, 티베리우스는 건강이 나빠진 유스티누스 2세에 의해 공동 황제(아우구스투스)로 임명되었다.[1] 그는 즉위 기념으로 7,200 파운드의 금을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고, 이후 4년 동안 매년 같은 양의 금을 하사했다.[2]

소피아 황후는 남편 유스티누스 2세가 죽은 후에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티베리우스에게 결혼을 제안했지만, 티베리우스는 이미 이노와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거절했다. 티베리우스가 부황제(카이사르)였을 때, 소피아는 이노와 그녀의 자녀들이 황궁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 근처의 작은 집에 머물게 했다.[3] 티베리우스가 황제가 된 후 가족을 궁으로 데려오고 이노에게 아나스타시아라는 새 이름을 주자, 소피아는 복수를 결심했다. 소피아는 티베리우스가 해임한 장군 유스티니아누스와 비밀 협약을 맺고 황제를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음모는 실패했고, 소피아는 적은 연금만 받게 되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용서받았다.[4]

동방에서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티베리우스는 서방으로 눈을 돌렸다. 579년, 그는 서로마 제국 영토에 대한 군사 활동을 재개했다. 라벤나를 강화하고 클라시스 항구를 되찾기 위해 이탈리아에 군대와 자금을 보냈다.[5] 그는 서고트의 왕자와 동맹을 맺고, 북아프리카에서 반란을 일으킨 베르베르족을 격파했다. 또한 프랑크 문제에 개입하여, 아서 왕 전설에 나오는 황제 루시우스 티베리우스의 모델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제국은 심각하게 팽창되어 있었다. 579년, 티베리우스가 다른 지역에 집중하는 동안, 아바르는 발칸 반도의 군사력 부족을 틈타 시르미움을 포위했다. 동시에 슬라브족이 트라키아,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남부로 이주하기 시작했지만, 티베리우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 때문에 막을 수 없었다. 동방 군대는 봉급을 받지 못해 반란을 위협했다.

580년, 장군 마우리키우스티그리스강 너머로 진격했고, 이듬해에는 페르시아령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크테시폰 근처까지 도달했지만, 페르시아의 반격으로 철수해야 했다. 582년까지 전쟁이 끝나지 않자, 티베리우스는 아바르족에게 배상금을 지불하고 시르미움을 넘겨주었다. 슬라브족의 이주는 계속되어 아테네까지 이르렀다. 582년 6월 콘스탄티나에서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아냈지만, 티베리우스는 독이 든 음식을 먹고 죽어가고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두 명의 후계자를 지명하고 각각 자신의 딸과 결혼시켰다. 마우리키우스는 콘스탄티나와, 게르마누스는 카리토와 약혼했다. 티베리우스는 제국을 동서로 나누려 했으나,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고, 582년 8월 13일 마우리키우스를 황제로 임명했다. 티베리우스는 다음 날인 582년 8월 14일에 사망했으며, 그의 마지막 말은 후계자에게 "이 소녀와 함께 나의 주권을 너에게 넘겨주노라. 그것을 사용하며 행복하게, 항상 형평과 정의를 사랑하는 것을 기억하라."였다.

4. 4. 페르시아와의 전쟁 재개

카이사르로 임명된 다음 날, 티베리우스는 유스티누스 2세가 이루지 못했던 것보다 더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유스티누스가 국경을 방어하고 백성을 설득하기 위해 모아둔 돈을 쓰기 시작했다.[1][2] 투르의 그레고리와 바울 디아코누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나르세스의 보물과 10만 파운드의 금 (7,200,000 솔리디)을 포함한 두 개의 보물을 발견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3]

티베리우스는 관대한 기부와 함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제정한 포도주와 빵에 대한 세금을 폐지하여 국가 수입을 줄였다. 그는 총독직 매매에 대한 공식적인 금지를 계속 유지했는데, 이는 매우 인기가 있었다. 그는 또한 아바르족과 휴전을 협상하여, 아바르족이 다뉴브 국경을 방어하는 데 동의하는 대가로 연간 80000USD를 지불했고, 이를 통해 티베리우스는 페르시아와의 분쟁 재개를 계획하며 동쪽으로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었다.[4]

575년, 티베리우스는 트라키아일리리쿰의 군대를 동부 지역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필요한 준비를 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그는 페르시아와 3년 휴전에 동의하고 30000USD를 지불했지만, 이 휴전은 아르메니아 주변 지역에서의 행동을 제외했다.[4] 티베리우스는 바두아리우스의 지휘 하에 이탈리아에 증원군을 파견하여 롬바르드족의 침략을 막도록 했다. 그는 로마를 롬바르드족으로부터 구원했고,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 프랑크 왕국의 왕인 힐데베르트 2세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바두아리우스는 576년에 패배하여 사망했고, 이탈리아 내 제국 영토가 더욱 많이 잃게 되었다.[4] 사산 제국 황제 호스로 1세가 576년에 제국의 아르메니아 지역을 공격하여 멜리테네와 세바스테아를 약탈했기 때문에 티베리우스는 대응할 수 없었다. 그의 관심을 동쪽으로 돌려 티베리우스는 그의 장군 유스티니아누스를 동부 군대와 함께 보내 페르시아를 유프라테스 강 너머로 밀어냈다. 비잔틴 군대는 따라가서 페르시아 영토 깊숙이 진격하여 아트로파테네를 습격하는 것으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577년, 유스티니아누스는 페르시아 아르메니아에서 패배하여 비잔틴 군대의 철수를 강요했다.[4] 그 패배에 대응하여 티베리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를 미래의 황제 마우리키우스로 교체했다.[2][4] 티베리우스는 호스로와 맺은 휴전 기간 동안, 서방 군대에서 전출된 병력뿐만 아니라 야만족 징집병을 통해 동방 군대를 부지런히 강화했으며, 이를 새로운 페데라티 부대로 구성하여 그의 통치 말에는 약 15,000명에 달했다.[2][4]

577년부터 578년까지, 티베리우스는 다가오는 페르시아와의 분쟁에서 주의를 산만하게 할 수 있는 다른 모든 문제들을 피했다. 그는 전략적 임명과 박해 완화를 통해 칼케돈파와 단성론파 기독교인들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달랬다.[5] 그는 롬바르드족 부족장들에게 약 200000USD를 지불하여 그들을 분열시키고 왕의 선출을 막으려 했다. 슬라브족이 일리리쿰을 침략했을 때, 그는 아바르족 군대를 수송하여 그들을 공격하고 후퇴하도록 강요했다. 결과적으로, 호스로가 578년에 로마 메소포타미아를 침략했을 때, 그의 장군 마우리키우스는 페르시아 아르자네네와 메소포타미아를 침략하여 주요 도시들을 약탈하고 페르시아인들이 진격을 포기하고 자국 영토를 방어하도록 강요할 수 있었다.[5]

580년, 장군 마우리키우스는 새로운 공세를 시작하여 티그리스강 너머로 깊숙이 침략했다. 이듬해 그는 다시 페르시아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페르시아 수도인 크테시폰에 거의 도달할 뻔했지만, 비잔틴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페르시아의 반격으로 인해 그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철수해야 했다. 582년까지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지 않자, 티베리우스는 아바르족과 협상해야 했고, 배상금을 지불하고 아바르족이 약탈한 시르미움의 중요한 도시를 넘겨주기로 동의했다. 슬라브족의 이주는 계속되어 그들의 침입은 아테네까지 미쳤다. 582년 6월 콘스탄티나에서 결정적인 패배로 새로운 페르시아의 침공이 저지되었지만, 이 무렵 티베리우스는 죽어가고 있었다.

4. 5. 죽음과 유산

578년 9월 26일, 티베리우스는 건강이 나빠진 유스티누스에 의해 아우구스투스로 임명되었다.[1] 그는 이 기회를 틈타 7,200 파운드의 금을 기부했고, 이러한 관행은 재위 4년 동안 매년 이어졌다.[2]

소피아는 유스티누스의 부인으로, 새 황제와 결혼하여 자신의 권력과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으나, 티베리우스는 이미 이노와 결혼했기 때문에 거절했다. 티베리우스가 처음 카이사르가 되었을 때, 소피아는 이노와 그녀의 자녀들이 황궁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 근처의 작은 집에 머물게 했다.[3] 그러나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가 된 후, 가족을 궁궐로 옮기고 이노의 이름을 아나스타시아로 바꾸자 소피아는 분노했다. 소피아는 복수를 위해 티베리우스가 해임한 장군 유스티니아누스와 은밀히 협약을 맺고 황제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음모는 실패했고, 소피아는 적은 연금을 받게 되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용서받았다.[3]

동방에서 페르시아에 대한 지속적인 성공으로 티베리우스는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579년, 서로마 제국의 잔존 세력에 대한 군사 활동을 확대했다. 라벤나를 강화하고 클라시스 항구를 되찾기 위해 이탈리아에 군대를 보냈다.[4] 서고트의 한 왕자와 동맹을 맺고, 장군들은 북아프리카에서 베르베르들을 격파했다.[4] 그는 또한 프랑크 문제에 개입했는데,[4] 이는 아서 왕 전설의 황제 루시우스 티베리우스의 모델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제국은 심각하게 팽창했다. 579년, 아바르족은 시르미움을 포위했고, 슬라브는 트라키아, 마케도니아와 남부 그리스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티베리우스는 페르시아와의 문제 때문에 이를 막을 수 없었다.[5] 동방 군대는 봉급을 받지 못해 반란을 위협했다.[5]

580년, 장군 마우리키우스는 티그리스강 너머로 깊숙이 침략했다. 이듬해 다시 페르시아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크테시폰에 거의 도달했지만, 비잔틴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페르시아의 반격으로 철수해야 했다.[5] 582년까지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지 않자, 티베리우스는 아바르족과 협상하여 배상금을 지불하고 시르미움을 넘겨주었다. 슬라브족의 이주는 계속되어 아테네까지 이르렀다.[5] 582년 6월 콘스탄티나에서 페르시아의 침공을 저지했지만, 티베리우스는 독살로 추정되는 음식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었다.[2][1]

티베리우스는 두 명의 상속자를 지명하고, 각자 딸과 결혼시켰다. 마우리키우스는 콘스탄티나와, 게르마누스는 카리토와 결혼했다.[5] 제국을 둘로 나누는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이나,[5] 582년 8월 13일, 마우리키우스를 아우구스투스로 높였다.[1][5]

티베리우스는 다음 날인 582년 8월 14일에 사망했으며, 그의 마지막 말은 후계자에게 전해졌다.

> 이 소녀와 함께 나의 주권을 너에게 넘겨주노라. 그것을 사용하며 행복하게, 항상 형평과 정의를 사랑하는 것을 기억하라.

5. 성격 및 평가

에드워드 기번은 티베리우스 2세를 인간성, 정의, 절제, 용기를 갖춘 훌륭한 황제로 평가했다. 그는 티베리우스 2세가 백성들에게 관대하고 자비로웠으며, 공정하고 승리한 통치자였다고 묘사했다. 특히 기독교 영웅의 정신으로 포로들을 치료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낸 점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티베리우스 2세는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세금을 감면하고, 자연재해나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는 데 힘썼으며, 백성들의 눈물에서 나온 금을 혐오했다는 점을 강조했다.[5]

반면, 존 배그널 베리는 티베리우스 2세가 훌륭한 황제가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티베리우스 2세가 세금을 감면하고 병사들과 다양한 직업군에 기부금을 지급하는 등 지나치게 관대한 정책을 펼쳐 재정을 악화시켰다고 비판했다. 베리는 티베리우스 2세가 첫 해에만 7,200파운드의 금과 많은 은, 비단을 소비했으며,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비상시를 대비해 마련해 둔 비축 자금까지 사용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러한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궁궐에 새로운 건물을 짓는 데 돈을 낭비했다고 비판했다.

티베리우스 2세는 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위엄 있는 태도를 지녔다고 전해진다. 그는 온화하고 인자했으며 관대함으로 명성이 높았다. 전임자와 달리 단성론 신자들을 거의 박해하지 않았지만, 서방의 아리우스파 신자들은 탄압했다. 그는 건축 사업에도 많은 돈을 썼는데, 특히 콘스탄티노플 대궁전을 확장하는 데 힘썼다.[4]

6. 가족 관계

티베리우스 2세는 젊은 시절 이노의 딸과 약혼했으나, 딸과 남편이 사망한 후 이노와 결혼했다. 이노는 티베리우스 2세가 황위에 오른 578년에 '아나스타시아'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티베리우스 2세와 이노 사이에는 세 자녀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티베리우스 2세가 574년에 카이사르가 되기 전에 사망했다. 다른 두 딸인 콘스탄티나는 마우리키우스와 결혼했고, 카리토는 게르마누스와 결혼했다. 티베리우스 2세의 아내와 두 딸은 모두 그보다 오래 살았다.

참조

[1] 서적 Corpus scriptorum historiae Byzantinae. Chronicon Paschale. Volumen I Walter de Gruyter GmbH & Co KG 2021-07-19
[2] 서적 Archiv für Papyrusforschung und verwandte Gebiete, Volume 50, Nummer 2 B. G. Teubner 2004-01-01
[3] 서적 Griechische Papyri (Nr. 1–18): Byzantinische Papyri Walter de Gruyter 2014-01-01
[4] 서적 ODB
[5] 서적 Annals of Byzant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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