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트릭 맥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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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패트릭 맥구언(1928-2009)은 아일랜드계 배우로, 텔레비전 시리즈 《비밀 지령》과 《6번 죄수》로 유명하다. 1950년대 중반부터 배우 활동을 시작하여 영화 《알카트라즈 탈출》, 《브레이브 하트》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했으며, 《형사 콜롬보》 시리즈에 여러 차례 출연하여 에미상을 두 번 수상했다. 또한, 《심슨 가족》에서 목소리 연기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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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맥구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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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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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패트릭 조지프 맥구한 |
다른 이름 | 패디 피츠 |
출생지 | 퀸스, 뉴욕 시, 미국 |
사망지 | 산타모니카, 캘리포니아 주, 미국 |
국적 | 아일랜드, 미국 |
직업 | 배우 영화 감독 각본가 |
활동 기간 | 1948년 – 2002년 |
배우자 | 조앤 드러먼드 (1951년 결혼) |
자녀 | 3명 (장녀: 캐서린) |
경력 | |
에미상 최우수 조연 남우상 | 1975년 - 형사 콜롬보 1990년 - 신・형사 콜롬보 |
주요 작품 | 프리즈너 No.6 알카트라즈 탈출 평결의 때 브레이브하트 |
2. 생애
패트릭 맥구언은 1955년 단역으로 영화계에 데뷔하여 배우, 작가, 감독으로 활동했다. 1960년 텔레비전 시리즈 《비밀 지령》에서 NATO 스파이 존 드레이크 역을 맡아 인기를 얻었고, 60분으로 확대된 후속편 《비밀 첩보원 존 드레이크》에서도 주연을 맡아 인기를 이어갔다. 두 작품은 미국에서도 방송되었으며, 맥구언은 최우수 텔레비전 배우로 선정되어 영국에서 가장 높은 출연료를 받는 배우가 되었다.[6]
1967년에는 TV 시리즈 《6번 죄수》를 제작, 각본, 감독하고 주연까지 맡았다. 이 작품은 실험적인 요소와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 영국식 유머를 결합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고, 오늘날까지도 컬트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미국에서는 《형사 콜롬보》 시리즈에 여러 차례 출연하여 에미상을 수상했고, 피터 포크와 친분을 쌓았다. 영화 《북극의 기지 잠항 대작전》, 《대륙 횡단 특급》, 《알카트라즈 탈출》, 《브레이브 하트》, 《굿바이 마이 러브》 등에도 출연했다.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역과 《반지의 제왕》의 간달프 역 제안을 거절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951년 배우 조앤 드라몬드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으며,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족과 함께 은퇴 생활을 하다가 2009년 1월 13일 산타모니카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42][43][44][45][46]
2. 1. 초기 생애 (1928-1954)
패트릭 조셉 맥구언은 1928년 3월 19일, 미국 뉴욕 시 퀸스의 아스토리아에서 아일랜드계 가톨릭 이민자였던 토마스 맥구언과 로즈 맥구언(결혼 전 성은 피츠패트릭) 사이에서 태어났다.[2] 그의 본명은 '''패트릭 조지프 맥구언'''(Patrick Joseph McGoohan)이다. 그가 태어난 직후 가족은 아일랜드로 돌아가 카운티 리트림의 캐리갈렌 지역인 멀라모어에 정착했다.[3][4]7년 후, 가족은 영국으로 이주하여 웨스트요크셔의 셰필드에 정착했다. 맥구언은 셰필드에서 세인트 마리 학교, 세인트 빈센트 학교[5], 드 라 살레 칼리지를 다녔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러프버러로 대피했으며, 미래의 배우 이안 배넌과 같은 시기에 래트클리프 칼리지에 다녔다. 맥구언은 수학과 권투에 뛰어났으며, 16세에 학교를 졸업하고 셰필드로 돌아와 닭 농장, 은행원, 트럭 운전사로 일하다가 셰필드 레퍼토리 극장의 무대 감독으로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던 중 배우 한 명이 병에 걸려 그를 대신하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연기 경력의 시작이 되었다.[6]
어릴 때부터 심한 기관지 천식으로 고생했지만, 학창 시절에는 복싱을 열심히 했으며, 특히 수학에 뛰어난 학생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 집안에서 자랐고[41], 허약했던 탓에 어릴 때부터 가톨릭 사제가 되는 것을 꿈꿨지만, 연극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고민 끝에 연극의 길을 걷게 된다.
래트클리프 칼리지 졸업 후, 은행이나 양계장 등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몇몇 아마추어 극단에서 연기 실력을 쌓았다. 셰필드 레퍼토리 극장에서 극장 뒷일 담당 겸 매니저로 일하던 중, 병으로 하차한 배우의 대역으로 급하게 무대에 섰던 것을 계기로, 이후 동 극단의 주력 배우로 활약한다.
2. 2. 경력
패트릭 맥구언은 1950년대 중반부터 연극과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하기 시작했으며, 1955년 단역으로 영화계에 데뷔했다.1960년 텔레비전 시리즈 《비밀 지령》에서 NATO 스파이 존 드레이크 역을 맡아 인기를 얻었고, 60분으로 확대된 후속편 《비밀 첩보원 존 드레이크》에서도 주연을 맡아 인기를 이어갔다. 두 작품은 미국에서도 방송되었으며, 맥구언은 최우수 텔레비전 배우로 선정되어 영국에서 가장 높은 출연료를 받는 배우가 되었다.
1967년에는 TV 시리즈 《6번 죄수》의 제작, 각본, 감독 및 주연을 맡았다. 이 작품은 실험적인 요소와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 영국식 유머를 결합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고, 오늘날까지도 컬트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미국에서는 《형사 콜롬보》 시리즈에 여러 차례 출연하여 에미상을 수상했고, 피터 포크와 친분을 쌓았다. 영화 《북극의 기지 잠항 대작전》, 《대륙 횡단 특급》, 《알카트라즈 탈출》, 《브레이브 하트》, 《굿바이 마이 러브》 등에도 출연했다.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역과 《반지의 제왕》 간달프 역 제안을 거절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2. 2. 1. 초기 경력 (1955-1959)
1955년, 맥구언은 웨스트 엔드 연극 무대에서 성공회 교구 목사로 출연하여 동성애자로 고발당하는 내용의 작품인 ''심각한 고발''에 출연했다.[7]맥구언의 무대 장악력에 "압도"된 오슨 웰스는 그의 요크 극장 제작 ''모비 딕 - 리허설''에서 스타벅 역으로 그를 캐스팅했다.[8] 웰스는 1969년에 맥구언이 "TV가 그를 붙잡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 시대의 거물 배우 중 한 명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가 "필요한 모든 자질, 외모, 강렬함, 의심할 여지 없는 연기력과 눈 속의 반짝임"을 갖추고 있다고 언급했다.[2]
맥구언의 첫 텔레비전 출연은 "You Are There" 시리즈(1954년)의 "파넬의 몰락"에서 찰스 스튜어트 파넬 역이었다.[10][11] 그는 영화 ''댐 버스터스''(1955년)에서 브리핑 룸 밖을 지키는 역할로 크레딧에 오르지 않았다. 그는 "죄송합니다, 친구, 비밀입니다.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 어서 가세요!"라는 대사를 했지만, 이 대사는 영화의 일부 인쇄본에서 삭제되었다.
그는 또한 ''패시지 홈''(1955년), ''다크 어벤저''(1955년) 및 ''나는 카메라이다''(1955년)에서도 작은 역할을 맡았다. 그는 워릭 영화의 ''자라크''(1956년)에서도 볼 수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Terminus''(1955년)에서 "오류의 여지"에 출연했고, ''아서 왕의 모험''과 ''외인부대 배정'' 및 ''애기 이야기''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그는 BBC ''일요 밤 극장''(1955년)에서 "메이크피스 이야기"에서 주연을 맡았다. 그는 또한 웰스의 영화 버전인 ''모비 딕 - 리허설''에도 출연했다.
그는 1956년에 무대에서 ''Ring for Catty''를 공연했다.[12]
2. 2. 2. 랭크 오가니제이션 시절 (1957-1959)
스크린 테스트 대역으로 일하면서 맥구언은 랭크 오거니제이션과 계약을 맺었다. 랭크 오거니제이션은 그에게 주로 악당 역할을 맡겼는데, 필립 레이콕이 감독한 ''정오의 하이 타이드''(1957), 사이 엔필드가 감독한 ''헬 드라이버스''(1957), 조셉 로지가 감독한 ''집시와 신사''(1958) 등이 있었다.[13]그는 ''텔레비전 플레이라이트'', ''폴리오'', ''암체어 시어터'', ''ITV 플레이 오브 더 위크'', ''ITV 텔레비전 플레이하우스''와 같은 텔레비전 앤솔로지 시리즈에서 자주 역할을 맡았다. 그는 남아프리카에서 촬영된 ''밤에는 달도 없다''(1958)에서 주연을 맡았다.[14] 랭크 경영진과의 몇 차례 분쟁 후 계약은 해지되었다. 그 후 그는 텔레비전 작업을 하다가 1960년 영국 아카데미 텔레비전상(BAFTA)을 수상했다.[15]
그가 무대 연기에서 가장 좋아했던 역할은 헨리크 입센의 ''브란트''의 주연이었으며, 이 역할로 상을 받았다. 그는 또한 1959년 8월 BBC 텔레비전 프로덕션에서 이 역할을 연기했다.[16] 무대 버전을 번역한 마이클 마이어는 맥구언의 연기가 그가 본 것 중 최고이자 가장 강력했다고 생각했다.[17] 이 작품은 맥구언의 마지막 무대 출연이었으며, 이후 28년 동안 무대에 서지 않았다.
2. 2. 3. 《데인저 맨》 (1960-1962, 1964-1968)
프로덕션 이그제큐티브 루 그레이드는 곧 맥고한에게 스파이 존 드레이크를 연기하는 텔레비전 시리즈를 제안했다. 랭크에서의 경험을 통해 배운 맥고한은 몇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모든 주먹 싸움은 달라야 하고, 캐릭터는 총을 사용하기 전에 항상 머리를 써야 하며, 임원들을 경악하게 한 조건으로, 키스는 없어야 했다. 이 쇼는 1960년에 미국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30분짜리 프로그램인 ''데인저 맨''으로[18] 데뷔했다. 기대만큼은 아니었지만, 꽤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19][20]제작은 1년 동안 39개의 에피소드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 시리즈가 끝난 후, 한 인터뷰어는 맥고한에게 계속 하고 싶었는지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지만, 한 가지 말씀드리죠. 몇 년 전에 제가 서명했던 랭크 계약 하에서 겪었던 일을 겪는 것보다 TV 시리즈를 20편 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 계약에 대해서는 누구도 탓하지 않고, 저 자신만을 탓합니다."[21]
맥고언은 007 노에서 제임스 본드 역으로 고려된 여러 배우 중 한 명이었다. 맥고언은 가톨릭 신자였기에 도덕적인 이유로 그 역할을 거절했지만,[22] 일반적으로 본드 영화의 성공이 ''위험한 남자''가 부활한 이유로 꼽힌다.[23] 그는 나중에 ''007 죽느냐 사느냐(Live and Let Die)''에서도 같은 역할을 고려했지만, 다시 거절했다.
또한 사이먼 템플러 역을 세인트에서 거절한 후,[23] 레우 그레이드는 맥고한에게 존 드레이크 역을 다시 해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이번에는 맥고한이 시리즈에 더 많은 발언권을 갖게 되었다. ''Danger Man''(미국에서는 ''Secret Agent'')은 1964년에 한 시간짜리 프로그램으로 부활했다. 이제 대본은 맥고한이 연기에서 더 많은 범위를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시리즈의 인기로 인해 그는 영국에서 가장 많은 출연료를 받는 배우가 되었으며,[24] 이 쇼는 거의 3년 더 지속되었다.[25]
''Danger Man''의 유일한 두 개의 컬러 에피소드를 촬영한 후, 맥고한은 그레이드에게 배역에서 하차하겠다고 말했다.[26]
2. 2. 4. 《더 프리즈너》 (1967-1968)
맥고언이 《데인저 맨》에서 하차할 의사를 보이자, 그레이드는 그에게 최소한 자신을 위해 "무언가"라도 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맥고언은 분노하며 사임하고 초현실적이고 쾌활한 휴양 리조트 마을로 납치된 비밀 요원에 관한 미니시리즈를 제안했다. 그레이드는 예산을 물었고, 맥고언은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토요일 아침 일찍 악수를 통해 《더 프리즈너》를 제작하기로 계약했다.[18]맥고언은 이 시리즈의 주인공일 뿐만 아니라, 프로듀서 데이비드 톰블린과 함께 에브리맨 필름을 설립하여 총괄 프로듀서를 맡았으며, 일부 에피소드에서는 가명을 사용하여 직접 쓰고 연출하기도 했다.[27][28] 원래 의뢰받은 7개의 에피소드는 17개로 늘어났다.
제목의 등장인물, 즉 이름이 없는 "넘버 식스"는 "더 빌리지"라는 미스터리한 감옥 공동체에서 탈출하려고 애쓰며 그 통치자의 정체를 알아내려 한다. 빌리지의 관리자들은 그가 스파이직에서 사임한 이유를 밝히도록 강요하거나 속이려 하지만, 그는 이를 거부한다. 이 시리즈의 주요 외부 촬영 장소는 이탈리아 건축 양식의 리조트 마을인 포트메이리온, 그위네드, 웨일스였으며, 이곳은 《데인저 맨》의 일부 에피소드에 등장했었다.
2. 2. 5. 1970년대 이후
맥고한은 1971년 영화 ''메리, 여왕''에서 제임스 스튜어트 역을 맡았다. 그는 리치 헤이븐스를 기용하여 록 오페라 버전의 ''오셀로''를 연출했는데, 제목은 ''Catch My Soul''(1974)이었지만, 이 경험을 좋아하지 않았다.[30]맥고한은 오랜 친구인 피터 포크와 함께 텔레비전 시리즈 ''콜롬보''에서의 활약으로 두 개의 에미상을 받았다. 맥고한은 1974년 에피소드 "새벽의 첫 빛"에 출연한 것이 아마도 가장 좋아하는 미국 역할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5개의 ''콜롬보'' 에피소드를 연출했는데, 그중 4개에 출연했으며, 그 중 하나는 직접 쓰고, 두 개는 제작하기도 했다. 맥고한은 1974년부터 2000년까지 어떤 형태로든 ''콜롬보'' 시리즈에 참여했으며, 그의 딸 캐서린 맥고한은 그와 함께 "Ashes to Ashes"(1998) 에피소드에 출연했다. 그가 출연한 다른 두 개의 ''콜롬보'' 에피소드는 "정체성의 위기"(1975)와 "살인의 아젠다"(1990)이다.
맥고한은 랭크 오가니제이션에서 경력을 시작했을 때처럼, 악당 역할을 전문적으로 맡아, ''A Genius, Two Partners and a Dupe''(1975), ''실버 스트릭''(1976) 및 ''철가면''(1977)에 출연했다.
1977년, 그는 퇴역한 군의관이 개인 병원을 개업하는 내용의 텔레비전 시리즈 ''래퍼티''에서 주연을 맡았다.[31]
그는 캐나다 영화 ''Kings and Desperate Men''에서 주연을 맡았고,[32] 이후 ''브래스 타겟''(1978)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알카트라즈 탈출''(1979)에서 교도소장 역으로 조연을 맡았다. 1980년 그는 영국 텔레비전 영화 ''더 하드 웨이''에 출연했다.
1981년 그는 SF/공포 영화 ''스캐너스''와 ''자메이카 인''(1983) 그리고 ''트레스패스(Trespasses)'' (1984)에 출연했다.
1985년 그는 유일한 브로드웨이 작품에 출연하여 로즈메리 해리스와 함께 휴 화이트모어의 ''팩 오브 라이즈''에 출연했으며, 그곳에서 또 다른 영국 스파이 역할을 맡았다.[33] 그는 이 공연으로 드라마 데스크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는 또한 영화 ''베이비: 잃어버린 전설의 비밀''(1985), ''오브 퓨어 블러드''(1986)와 ''마녀의 집'' 에피소드에도 출연했다. 맥고한은 1991년작 《The Best of Friends》에 출연했으며, 그의 경력을 되살린 영화인 멜 깁슨 주연의 브레이브 하트 (1995)에서 잉글랜드 왕국의 에드워드 1세 역을 맡았다. 이듬해에는 《A Time to Kill》에서 오마 노스 판사 역을, 코믹 스트립을 영화화한 《팬텀》에도 출연했다.[23]
2000년, 그는 《심슨 가족》의 "컴퓨터가 위협하는 신발" 에피소드에서 넘버 식스 역을 다시 연기했다. 이 에피소드에서 호머 심슨은 자신의 웹사이트를 더 인기 있게 만들려고 뉴스 기사를 조작하고, 휴양지로 위장된 감옥에서 깨어난다. 넘버 파이브로 불린 그는 넘버 식스를 만나고, 나중에 그를 배신하고 보트를 타고 탈출한다. 《더 프리즈너》에서 래프트를 타고 탈출하려는 그의 수많은 시도를 언급하며, 넘버 식스는 "이런 일이 세 번째야!"라고 소리친다.
맥고언의 마지막 영화 역할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 《보물성》(2002)에서 빌리 본즈의 목소리였다. 같은 해, 그는 《더 프리즈너》로 프로메테우스 명예의 전당 상을 받았다.
맥고언의 이름은 《더 프리즈너》의 새로운 영화 버전을 제작하려는 몇 차례의 무산된 시도와 관련되었다. 2002년, 사이먼 웨스트가 이 이야기의 연출을 맡게 되었다. 맥고언은 영화의 총괄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렸지만, 결국 제작되지는 않았다. 이후, 크리스토퍼 놀란이 영화 버전의 감독으로 제안되었다. 그러나 원작은 장편 영화로 각색하기 어렵고 파악하기 어려운 채로 남았다. 맥고언은 최종적으로 완성된 프로젝트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2008년 말, AMC 네트워크를 위해 미니시리즈가 촬영되었고, 2009년 11월에 방영되었다.
2. 2. 6. 은퇴와 죽음
2009년 1월 13일,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에 있는 세인트 존스 헬스 센터(Saint John's Health Center)에서 단기간의 질병으로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6] 병명은 공개되지 않았다.3. 사생활
맥고언은 1951년 5월 19일 배우 조앤 드럼먼드와 결혼했다.[41] 슬하에 캐서린 맥고안을 포함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1960년대 대부분 기간 동안 런던 밀 힐의 리지웨이에 있는 한적한 단독 주택에서 살았다. 1970년대 중반에는 로스앤젤레스의 퍼시픽 팰리세이즈 지역에 정착했다.
만년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아내, 딸, 손자 등 가족과 은퇴 생활을 보냈지만, 2009년 1월 13일 산타모니카 병원에서 사망했다.[42][43][44][45][46] 병명은 공개되지 않았다.
4. 출연 작품
롬니 마쉬의 허수아비
1964–68
1975
1976
1990
1998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