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옥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팽옥린은 청나라 말기의 무관이다. 안휘성 안경 출신으로, 태평천국군이 호남성에 진출하자 향용을 조직했다. 1853년 증국번이 상군 수사를 설립하자 수사제독에 임명되어 양악빈과 함께 수군을 지휘하며 태평천국 진압에 참여했다. 광동 포정사, 병부우시랑 등을 역임했으며, 청불 전쟁 때 광동성 방어를 위해 파견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했다. 사후 태자태보로 추증되었으며, 강직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군무와 함께 그림과 시문을 지었으며, 그의 시는 '평강직시집'으로 정리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안칭시 출신 - 나준전
나준전은 청나라 말기의 관료로, 태평천국 운동 시기에 활약하다가 항주 함락 후 자결했으며 장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안칭시 출신 - 방포
방포는 청나라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시대에 활동한 학자이자 문인으로, 퉁청파의 비조로 추앙받았으며, 주자학을 기반으로 한 학문과 당송 고문을 따른 문장을 통해 황실 시험 제도의 수필 스타일 확립에 기여했다. - 청나라의 병부상서 - 기윤
기윤은 청나라 건륭, 가경 연간의 문인이자 학자로서, 《사고전서》 편찬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초자연 현상과 사회 풍자를 담은 《열미초당필기》를 저술하여 중국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청나라의 병부상서 - 영록
영록은 청나라 말기 만주족 출신 정치인이자 군인으로, 무술정변에서 서태후를 지지하고 의화단의 난 진압 과정에서 공사관 보호에 힘썼으며, 사후 태부로 추증되고 선통제 푸이의 외조부가 되었다. - 1816년 출생 - 김효주 (종교인)
김효주 아녜스는 1816년 밤섬에서 태어나 언니 김효임 콜룸바와 함께 신앙 생활을 하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순교자이며,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1816년 출생 - 카를 차이스
카를 자이스는 독일의 정밀 기계공이자 기업가로, 자이스 광학 회사를 설립하여 현미경 제작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에른스트 아베, 오토 쇼트와의 협력을 통해 광학 설계 및 광학 유리 개발에 혁신을 가져와 자이스를 세계적인 광학 기기 제조업체로 성장시켰다.
팽옥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원어 이름 | 彭玉麟 또는 彭玉麐 |
출생일 | 1816년 |
출생지 | 안휘성 안경 |
사망일 | 1890년 |
국적 | 청나라 |
직업 | 군인 |
소속 | 상군 |
경력 | 수사제독 |
관직 | |
안후이 순무 (대리) | 1861년 |
선대 | 이속의 |
차대 | 이속의 |
조운총독 | 1865년 |
선대 | 오당 |
차대 | 오당 |
양강총독 | 1881년 |
선대 | 유곤일 |
차대 | 좌종당 |
병부 한상서 | 1883-1888년 |
선대 | 장지완 |
차대 | 허경신 |
2. 생애
안휘성 안경에서 태어나 1832년 아버지를 따라 본적인 호남성 형양으로 돌아왔다. 태평천국군이 호남성에 진출하자 향용을 조직했다.[1]
1853년, 증국번이 상군 수사를 설립하자 수사제독에 임명되어 양악빈과 함께 수군을 이끌며 장강 연안에서 태평천국과 전투를 벌였다.[1]
1861년, 광동 포정사로 발탁되었으나 수군 지휘가 전문 분야라 사양하고 수사제독에 임명되었다. 1862년 병부우시랑으로 남경을 포위하는 증국전을 보좌했다. 1868년 증국번과 장강수사영제를 상주하여 방위 체제 수립을 호소했다.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1872년부터 장강 수사 시찰 명령을 받고 매년 시찰했다. 1883년 병부상서로 발탁됐다.[1]
청불 전쟁 때 광동성 방어를 위해 파견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했다. 사후 태자태보(太子太保)로 추증되었으며, 강직(剛直)이라는 시호가 주어졌다.[1]
군무를 하는 틈틈이 그림과 시문을 즐겼으며, 그의 시는 ‘평강직시집’(彭剛直詩集)으로 정리되었다.[1]
2. 1. 초기 생애
안휘성 안경 출신으로, 1832년 아버지를 따라 본적인 호남성 형양으로 이주했다.[1]2. 2. 태평천국의 난 진압
1853년 증국번이 상군 수사를 설립하자 팽옥린은 수사제독에 임명되었다. 그는 양악빈과 함께 수군을 이끌며 장강 연안에서 태평천국군과 전투를 벌였다.[1] 1861년, 팽옥린은 수군 지휘가 전문 분야였기 때문에 광동 포정사 발탁과 안휘순무 원갑삼의 군무 보좌를 고사하고 수사제독에 다시 임명되었다.[1] 1862년에는 병부우시랑으로서 수군을 이끌고 남경을 포위하는 증국전을 보좌했다.[1] 1868년 증국번과 함께 장강수사영제를 상주하여 방위 체제 수립을 호소했다.[1]2. 3. 청나라 관료 생활
1861년, 광동 포정사로 발탁되었다. 안휘순무로 임명된 원갑삼의 군무를 보좌하도록 임명받았으나, 수군 지휘가 전문 분야라며 사양하고 수사제독에 임명되었다.[1] 1862년, 병부우시랑으로 수군을 이끌고 남경을 포위하는 증국번을 보좌했다.[1] 1868년, 증국번과 함께 장강수사영제를 상주하여 방위 체제 수립을 호소했다.[1]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1872년부터 장강 수사 시찰 명령을 받고 매년 시찰했다.[1] 1883년, 병부상서로 발탁됐다.[1]청불 전쟁 때 광동성 방어를 위해 파견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했다.[1]
2. 4. 만년
군무를 하는 틈틈이 그림과 시문을 즐겼다. 그의 시는 이후에 ‘평강직시집’(彭剛直詩集)으로 정리되었다. 사후 태자태보(太子太保)로 추증되었으며, 강직(剛直)이라는 시호가 주어졌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