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로 4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페로 4세는 1336년 아라곤의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즉위 초 계모 엘레오노르와의 갈등, 마요르카의 자메스 3세와의 대립을 겪었다. 자메스 3세를 굴복시키고 마요르카를 아라곤 왕관에 병합했으며, 카스티야의 페드로 1세와 "두 페드로의 전쟁"을 벌였다. 재위 기간 동안 제네랄리타트를 설립하고 유대인, 종교 재판과 관련된 사건들이 있었으며, 1387년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고, 그의 아들 후안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페르는 1336년에 아버지 알폰소 4세가 사망하면서 왕위를 계승했다.[1] 그는 사라고사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하고, 페르 2세가 교황령에 했던 항복을 거부하며 스스로 대관식을 거행하여 사라고사의 대주교를 실망시켰다.[1]
페로 4세는 법적 절차가 마무리되자, 섬 주민들이 과도한 세금에 시달려 자신을 지지할 것이라는 조언을 바탕으로 전쟁을 시작했다.[7] 1343년 5월, 알헤시라스 봉쇄에 참여했던 함대가 마요르카에 상륙, 산타 폰사 전투에서 마요르카의 자메스 3세의 군대를 신속하게 격파했다.[5][7] 페로 4세는 발레아레스 제도 전체의 항복을 받아내고, 아라곤의 자메스 1세 시절처럼 섬의 특권을 인정했다.[8]
2. 초기 생애 및 계승 분쟁
이후 페르는 발렌시아로 가서 대관식을 치렀다. 가는 길에 예이다에 들러 우사게스와 헌법을 확정하고, 카탈루냐 공국의 신하들로부터 경의를 표했는데, 이는 관례와 달리 바르셀로나에서 의식을 거행하지 않아 그곳 시민들을 화나게 했다.[3]
발렌시아에서 페르는 계모 엘레오노르의 상속 문제를 처리하면서 그녀의 수입을 박탈하고 카스티야 보호자인 페르 폰세 데 레온 이 헤리카를 불법화했다. 하지만 헤리카는 페르의 영토 내에서 충분한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었고, 결국 1338년에 교황의 중재를 통해 헤리카와 화해하며 엘레오노르는 토지와 관할권을 회복했다.[4]
1338년, 페르는 필리프 3세와 조안 2세의 둘째 딸인 마리아와 결혼했다.[4] 1339년 5월, 카스티야의 알폰소 11세와 동맹을 맺어 모로코에 대항했지만, 리오 살라도 전투 (1340년 10월)에서 그의 함대 지원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3]
2. 1. 출생과 상속
페르(Peter)는 당시 우르젤 백작이었던 알폰소 4세와 그의 첫 번째 아내 테레사 데 덴사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자 상속자였다.[1] 페르는 아버지의 모든 지위를 상속받도록 지정되었으며, 우르젤은 그의 남동생 하이메에게 넘어갔다.
2. 2. 즉위 초 갈등
페르는 당시 우르젤 백작이었던 알폰소 4세와 그의 첫 번째 아내 테레사 데 덴사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자 상속자였다.[1] 페르는 아버지의 모든 지위를 상속받도록 지정되었으며, 우르젤은 그의 남동생 하이메에게 넘어갔다.
아버지를 계승한 후 그는 대관식을 위해 사라고사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했다. 그는 스스로 대관식을 거행하여 사라고사의 대주교를 실망시켰는데, 이는 페르 2세가 교황령에 했던 항복을 거부하는 행위였다.[1] 이는 전통적인 의식과는 달랐다. 그의 후일 보고에 따르면, 이 행위는 그에게 약간의 "고뇌"를 안겨주었다.[1] 하지만 그는 아라곤의 자유와 특권을 옹호했다.[2] 또한 그가 사라고사에 있는 동안 카스티야의 사절단이 그를 만나 그의 아버지가 새어머니 엘레오노르에게 한 토지 기부를 지지하겠다고 약속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기부의 정당성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거부했다.[2]
사라고사에서의 축제가 끝난 후, 페르는 발렌시아로 가서 그곳에서 대관식을 치르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 그는 예이다에 들러 우사게스와 헌법을 확정하고, 카탈루냐 공국의 신하들로부터 경의를 표했다. 이는 보통 그 의식이 거행되던 바르셀로나를 화나게 했고, 그 도시의 시민들은 왕에게 불만을 제기했는데, 왕은 예이다가 발렌시아로 가는 길에 있다고 주장했다.[3] 발렌시아에 있는 동안 그는 계모의 상속에 대한 결정을 내려 그녀의 수입을 박탈하고 그녀의 카스티야 보호자인 페르 폰세 데 레온 이 헤리카를 불법화했다.[2] 하지만 헤리카는 페르의 영토 내에서 충분한 지지자를 가지고 있었고, 페르는 자신의 입장을 유지할 수 없었고, 1338년에 교황의 중재를 통해 헤리카는 왕과 화해했고, 엘레오노르는 그녀의 토지와 관할권을 회복했다.[4] 페르는 카스티야와 발렌시아를 겨냥한 모로코의 새로운 침략으로 인해 대체로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1338년에 그는 마리아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필리프 3세와 조안 2세의 둘째 딸이었다.[4] 1339년 5월, 그는 카스티야의 알폰소 11세와 동맹을 맺어 모로코에 대항했지만, 그의 함대 지원은 결정적인 리오 살라도 전투 (1340년 10월)에서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했다.[3]
3. 마요르카 정복
자메스 3세가 평화를 요청하고 교황 클레멘스 6세가 중재를 시도했으나, 페로 4세는 루시용 백국과 세르다뉴 백국을 침공할 준비를 하며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5][7] 1344년, 마침내 이 지역들이 정복된 후 자메스 3세는 안전 통행증을 조건으로 항복했지만, 결국 소영주 신세로 전락했다.[5][7] 같은 해 3월, 페로 4세는 마요르카 왕국을 아라곤 왕국에 영구적으로 통합한다고 선언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7][8]
3. 1. 갈등의 시작
페로 4세는 통치 초기에 매형이자 누이인 콘스탄체의 남편 마요르카의 자메스 3세와 갈등을 겪었다. 자메스 3세는 봉건 영주인 페로 4세에게 충성 맹세를 두 차례나 미루었고, 1339년에 맹세할 때도 자신의 조건을 내걸었다.[3] 마요르카는 서부 지중해에서 독자적인 시장을 구축하고 무역 특권을 얻어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바르셀로나의 지배력을 위협했다.[3] 마요르카가 금화를 주조하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강대국들로부터 외교적 동등함을 인정받은 것은 페로 4세를 더욱 자극했고, 자메스 3세는 페로 4세의 적이었던 모로코의 왕 아부 알-하산과 동맹을 맺었다.[3]
1341년, 자메스 3세가 몽펠리에 영지에 대한 권리 분쟁으로 프랑스의 침략 위협을 받자, 종주국인 아라곤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페로 4세는 분노를 표출할 기회를 얻었다.[5][6] 페로 4세는 프랑스를 불쾌하게 하지 않으면서 자메스 3세를 지원하지 않기 위해, 마요르카의 왕을 바르셀로나의 ''코르테스''에 소환했다. 자메스 3세가 오지 않을 것을 예상한 페로 4세는 자메스 3세나 그의 대표가 나타나지 않자, 자메스 3세에 대한 종주국의 의무에서 자유롭다고 선언했다.[5][6]
페로 4세는 자메스 3세에게서 왕국을 빼앗을 목적으로 법적 절차를 시작했다. 그는 자메스 3세의 화폐가 루시용 백국과 세르다뉴 백국에서 유통되는 것이 화폐 독점에 대한 왕실 권리를 침해한다고 주장했다.[5][6] 교황 클레멘스 6세의 개입으로 자메스 3세는 교황 사절 앞에서 바르셀로나에서 심리를 받게 되었다.[5][6] 페로 4세는 자메스 3세가 자신을 체포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5][6] 자메스 3세는 페로 4세가 마요르카를 침략하여 무력으로 점령할 것을 두려워하여 방어를 준비하기 위해 섬으로 돌아갔다.[7] 1343년 2월, 페로 4세는 자메스 3세를 불복종한 봉신으로 선언하고 그의 왕국과 토지를 몰수했다.[5][7]
3. 2. 전쟁과 병합
페로 4세의 통치 초기, 그의 매형이자 누이 콘스탄체의 남편인 마요르카의 자메스 3세는 페로 4세에게 큰 골칫거리였다. 자메스 3세는 봉건 영주인 페로 4세에게 충성 맹세를 두 번이나 미루다가, 1339년에야 자신의 조건으로 맹세했다.[3]
마요르카는 서부 지중해에서 독자적인 시장을 구축하고 무역 특권을 얻어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바르셀로나의 지배력을 위협했다.[3] 마요르카의 금화 주조와 프랑스 및 이탈리아 강대국들로부터 부여받은 외교적 동등함은 페로 4세를 더욱 자극했고, 자메스 3세는 페로 4세의 적이었던 모로코의 왕 아부 알-하산과 동맹을 맺었다.[3]
1341년, 자메스 3세가 몽펠리에 영지에 대한 권리 분쟁으로 프랑스의 침략 위협을 받자, 종주국인 아라곤에 도움을 요청하기 전까지 페로 4세는 분노를 표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5][6] 프랑스를 자극하지 않고 자메스 3세를 지원하지 않기 위해, 페로 4세는 마요르카의 왕을 바르셀로나의 ''코르테스''에 소환했는데, 그는 자메스 3세가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자메스 3세나 그의 대리인이 나타나지 않자, 페로 4세는 자메스 3세에 대한 종주국의 의무에서 자유를 선언했다.[5][6]
페로 4세는 자메스 3세에게서 그의 왕국을 빼앗을 목적으로 법적 절차를 시작했다. 그는 자메스 3세의 화폐가 루시용 백국과 세르다뉴 백국에서 유통되는 것이 화폐 독점에 대한 왕실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5][6] 이는 루시용과 세르다뉴의 오랜 관습을 고려하면 의문이 제기될 수 있었지만, 페로 4세는 그대로 진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 6세의 개입으로 자메스 3세는 교황 사절 앞에서 바르셀로나에서 심리를 받게 되었다.[5][6] 페로 4세는 자메스 3세가 자신을 체포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5][6] 자메스 3세는 페로 4세가 마요르카를 침략하여 무력으로 점령할 것을 두려워하여 방어를 준비하기 위해 섬으로 돌아갔다.[7] 1343년 2월, 페로 4세는 자메스 3세를 불복종한 봉신으로 선언하고 그의 왕국과 토지를 몰수했다.[5][7]
법적 절차가 끝나자 페로 4세는 섬 주민들이 세금에 시달리고 있어 자신을 쉽게 지지할 것이라는 조언에 따라 전쟁을 시작했다.[7] 5월, 알헤시라스를 봉쇄했던 함대가 마요르카에 상륙하여 산타 폰사 전투에서 자메스 3세의 군대를 빠르게 격파했다.[5][7] 페로 4세는 모든 발레아레스 제도의 항복을 받았고, 아라곤의 자메스 1세 시대와 마찬가지로 섬의 특권을 확인했다.[8] 자메스 3세가 평화를 호소하고 교황 클레멘스 6세가 중재를 시도했지만, 페로 4세는 루시용과 세르다뉴를 침략할 준비를 하고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5][7] 1344년에 마침내 정복된 후, 자메스 3세는 안전 통행증을 받고 항복했지만, 결국 작은 영주의 지위로 전락했다.[5][7] 3월에 페로 4세는 자신의 왕국을 아라곤 왕관에 영구적으로 통합한다고 선언하고 스스로 왕관을 썼다.[7][8]
4. 내치와 군사 활동
페드로 4세는 카스티야의 알폰소 11세를 도와 모로코의 침입을 막아내고, 알헤시라스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지브롤터 공략은 실패했다.
이후 아라곤 연합 및 발렌시아 연합과 갈등을 겪으며 왕권이 크게 약화되기도 했지만, 흑사병 확산과 에필라 전투 승리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권력을 회복했다. 이 과정에서 발렌시아 연합에 가혹한 보복을 가하기도 했다.
1356년에는 카스티야의 페드로 1세와 두 페드로의 전쟁을 벌였으나, 흑사병과 자연재해로 인해 1375년 알마잔 조약을 맺고 종결했다.
1377년에는 시칠리아를 정복했지만, 아들 마르틴에게 소유권을 넘겨주었다.
4. 1. 아라곤 연합과의 갈등
페드로 4세는 마드리드 조약에 따라 알폰소 11세의 알헤시라스 공격(1344)을 지원하고 지브롤터 공격(1349)에는 실패했지만, 모로코의 반격을 막아야 했다.페드로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형제 우르젤 백작 하이메가 아라곤 왕위의 유력한 상속자였다. 그러나 페드로는 하이메의 의도를 불신하여, 하이메 1세와 알폰소 4세가 여성을 왕위에서 제외한 선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딸 콘스탄스를 상속자로 지명하려 했다. 이를 위해 하이메에게 전통적으로 아라곤 왕위 계승자에게 주어지는 직위인 검찰관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하이메는 사라고사로 도망쳐, 군주를 통해 권력을 되찾고 싶어하는 일부 귀족들의 지지를 얻었다. 페드로는 결국 사라고사에서 코르테스를 개최하라는 압력에 굴복했고, 왕의 권한을 여러 번 양보하여 아직 진압할 수 없는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 그 중 하나는 콘스탄스를 상속자로 지명하려는 시도를 철회하고 하이메를 다시 검찰관으로 복원하는 것이었다. 페드로는 사르데냐의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는 구실로 코르테스를 해산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카탈루냐에 있는 동안 하이메가 갑자기 사망했다. 많은 사람들은 페드로가 하이메를 독살했다고 의심했다. 지도자를 잃은 아라곤 연합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후 페드로는 발렌시아로 진출했지만, 아라곤 연합을 본뜬 발렌시아 연합을 만났다. 무르비에드로 (사군토)에서 페드로는 이복 형제 페르난을 새로운 검찰관으로 임명해야 했다. 연합주의자들을 달래기 위해 왕의 권한에 대한 추가적인 양보가 이루어졌다. 페드로는 발렌시아에서 연합의 포로로 감금되었고, 가장 큰 굴욕으로 그와 그의 여왕은 하인임을 보여주기 위해 평민들과 춤을 춰야 했다. 그러나 흑사병으로 인해 발렌시아가 1348년 5월 무너지면서, 페드로는 혼란 속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아라곤에서 왕당파 군대를 소집한 페드로는 1348년 7월 21일 에필라 전투에서 연합군을 공격하여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사라고사로 진격한 페드로는 단 13명의 연합 지도자만 처형했는데, 이는 14세기 기준으로 훌륭한 관대함이었다. 그러나 발렌시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고, 발렌시아 연합이 회의를 소집하기 위해 울린 종은 녹여져 그 금속이 연합 지도자들의 목구멍에 부어졌다.
4. 2. 발렌시아 연합과의 갈등
페드로 4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형제 우르젤 백작 하이메가 아라곤 왕위의 유력한 상속자였다. 그러나 페드로 4세는 하이메의 의도를 불신하여, 딸 콘스탄스를 상속자로 지명하려 했다. 이를 위해 하이메에게 전통적으로 아라곤 왕위 계승자에게 주어지는 직위인 검찰관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하이메는 사라고사로 도망가 군주를 통해 권력을 되찾고 싶어하는 일부 귀족들의 지지를 얻었다. 페드로 4세는 결국 사라고사에서 코르테스를 개최하라는 압력에 굴복했고, 왕의 권한을 여러 번 양보해야 했다. 그 중 하나는 콘스탄스를 상속자로 지명하려는 시도를 철회하고 하이메를 다시 검찰관으로 복원하는 것이었다. 페드로 4세는 사르데냐의 위기를 핑계로 코르테스를 해산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이메가 갑자기 사망했다. 많은 사람들은 페드로 4세가 하이메를 독살했다고 의심했다. 지도자를 잃은 아라곤 연합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후 페드로 4세는 발렌시아에서 아라곤 연합을 본뜬 발렌시아 연합을 만났다. 무르비에드로(사군토)에서 페드로 4세는 이복 형제 페르난을 새로운 검찰관으로 임명해야 했다. 연합을 달래기 위해 왕의 권한에 대한 추가적인 양보가 이루어졌다. 페드로 4세는 발렌시아에서 연합의 포로로 감금되었고, 그와 그의 여왕은 평민들과 춤을 춰야 하는 굴욕을 겪었다. 그러나 1348년 5월 흑사병이 발렌시아를 덮치면서 페드로 4세는 혼란 속에 탈출할 수 있었다.
아라곤에서 왕당파 군대를 소집한 페드로 4세는 1348년 7월 21일 에필라 전투에서 연합군을 격파하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사라고사에서는 13명의 연합 지도자만 처형했지만, 발렌시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특히, 그는 발렌시아 연합이 회의를 소집하기 위해 울린 종을 녹여 그 금속을 연합 지도자들의 목구멍에 부었다.
4. 3. 카스티야와의 전쟁 (두 페드로의 전쟁)
1356년, 페로 4세는 카스티야의 페드로 1세와 "두 페드로의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흑사병과 몇몇 자연 재해로 인해 승자 없이 1375년 알마잔 조약으로 종료되었다.4. 4. 시칠리아 문제
페드로 4세는 카스티야의 알폰소 11세가 알헤시라스를 성공적으로 공격(1344)하고 지브롤터를 공격(1349)했으나 실패했을 때, 모로코의 반격을 막기 위해 지원해야 했다.페드로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형제 우르젤 백작 하이메가 아라곤 왕위의 유력한 상속자였다. 페드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이메의 의도를 불신하게 되었다. 페드로 4세는 하이메 1세와 알폰소 4세가 여성을 왕위에서 제외하도록 한 선례에도 불구하고, 그의 딸 콘스탄스를 상속자로 지명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그는 하이메에게 전통적으로 아라곤 왕위 계승자에게 주어지던 직위인 검찰관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하이메는 사라고사로 도망가 군주를 통해 권력을 되찾고 싶어하는 일부 귀족들의 호감을 얻었다. 페드로는 결국 사라고사에서 코르테스를 개최하라는 압력에 굴복했고, 그곳에서 그가 아직 진압할 입장에 있지 않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왕의 권한을 여러 번 양보했다. 그러한 양보 중 하나는 콘스탄스를 상속자로 지명하려는 시도를 철회하고 하이메를 다시 검찰관으로 복원하는 것이었다.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페드로는 사르데냐에서 발생한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코르테스를 해산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페드로가 카탈루냐에 있는 동안 하이메가 갑자기 사망했다. 많은 사람들이 페드로가 하이메를 독살하도록 조치했다고 의심했다. 지도자를 잃은 아라곤 연합은 크게 약화되었다.
다음으로 발렌시아로 진출한 페드로는 아라곤의 연합에서 힌트를 얻은 발렌시아 연합을 만났다. 무르비에드로(사군토)에서 페드로는 이복 형제 페르난을 새로운 검찰관으로 임명해야 했다. 연합주의자들을 달래기 위해 왕의 권한에 대한 추가적인 양보가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좋지 않은 상황에서 벗어나려 했을 때, 페드로는 발렌시아에서 연합의 포로로 감금되었다. 아마도 가장 큰 굴욕을 겪으며, 그와 그의 여왕은 하인임을 보여주기 위해 평민들과 춤을 춰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구원은 흑사병이었다. 발렌시아는 1348년 5월 이 전염병으로 무너졌고, 페드로는 혼란 속에 탈출할 수 있었다. 아라곤에서 점점 더 강력해지는 왕당파 군대를 소집한 페드로는 1348년 7월 21일 에필라 전투에서 연합군을 공격했다. 페드로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사라고사로 진격한 페드로는 단 13명의 연합 지도자만 처형했다. 14세기 기준으로는 훌륭한 관대함의 발현이었다. 발렌시아의 운명에 대해서는 같은 말을 할 수 없다. 도시 전체를 불태우고 소금을 뿌리지 말라는 설득을 받은 후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특히, 그는 발렌시아 연합이 회의를 소집하기 위해 울린 종을 녹여 버렸다. 녹은 종의 금속은 연합 지도자들의 목구멍에 부어 "그 액체를 맛보게 했다".
1356년, 그는 카스티야의 페드로 1세와 "두 페드로의 전쟁"이라고 불리는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흑사병과 몇몇 자연 재해로 인해 승자 없이 알마잔 조약으로 1375년에 종료되었다.
그는 1377년에 시칠리아를 정복했지만 그 소유는 그의 아들 마르틴에게 주어졌다.
5. 제네랄리타트 설립
페드로는 1358년에서 1359년 사이에 바르셀로나, 빌라프랑카 델 페네데스, 세르베라에서 열린 카탈루냐 코르테스에서 제네랄리타트 또는 제너럴 디퍼테이션을 설립했다. 카스티야가 최근 아라곤과 발렌시아를 침공했고, 코르테스는 재정 및 왕실의 물적 정책을 감독하기 위해 12명의 대의원을 지정하여 정부를 효율화하기로 결정했다. 초대 "제네랄리타트 회장"은 히로나 주교인 베렝게르 데 크루이예스였다(1359년).
6. 유대인과의 관계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아라곤의 페로 4세와 그의 유대인 의사는 유대인이 기독교인이 만진 코셔 와인을 마시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우호적인 논쟁을 벌였다. 그러자 의사는 왕의 발을 씻기 위해 물을 가져왔고, 왕은 이 물을 마시며 부정함에 대한 두려움이 금지의 이유가 아님을 증명했다.[9][10][11]
1350년, 흑사병에 대응하여 페로 4세는 레리다 시장에게 기존 묘지가 새로 발생한 시체로 인해 과포화 상태가 되자 새로운 유대인 묘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했다.[12]
7. 종교 재판과의 갈등
페드로 4세는 재위 기간 동안 종종 이단 심문소장 니콜라스 아이메리치(Nicolás Aymerich)와 대립했다.
8. 말년과 죽음
9. 결혼과 자녀
페로 4세는 평생 4번 결혼했다.
1338년 7월 23일 알라곤에서 마리아와 첫 번째 결혼을 했다. 마리아는 나바라의 필리프 3세와 나바라의 조안 2세의 딸이었다. 이 둘 사이에서는 네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콘스탄스 | 1343년 | 1363년 7월 | 시칠리아의 프레데리크 3세와 결혼 |
조안나 | 1344년 11월 7일 | 1385년 | 암푸리아스 백작 존과 결혼 |
마리아 | 1345/6년 | 1348년 6월 3일 | |
페르 | 1347년 4월 28일 | 1347년 4월 28일 | 출생 당일 사망 |
1347년 11월 15일 바르셀로나에서 엘레오노르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엘레오노르는 포르투갈의 아폰수 4세의 딸이었으나, 결혼 1년 뒤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1349년 8월 27일 발렌시아에서 엘레오노르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엘레오노르는 시칠리아의 페트로 2세의 딸이었다. 이 둘 사이에서는 네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후안 1세 | 1350년 12월 27일 | 1396년 5월 19일 | |
마르틴 1세 | 1356년 | 1410년 5월 31일 | |
엘레오노르 | 1358년 2월 20일 | 1382년 9월 13일 | 카스티야의 후안 1세와 결혼, 아라곤의 페르난도 1세의 어머니 |
알폰소 | 1362년 5월 또는 6월 | 1364년 |
1377년 10월 11일 바르셀로나에서 시빌라와 마지막 결혼을 했다. 시빌라는 베르나트 데 포르티아의 딸이자 아르탈 데 포세스의 미망인이었고, 이전에는 페로 4세의 정부였다. 이 둘 사이에서는 세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알폰소 | 1376년 | 1377년 | 1377년에 적자로 인정받았으며, 모렐라 백작 |
페르 | 1379년 4월 | 1379년 4월 | 출생 당일 사망 |
이사벨 | 1380년 | 1424년 | 우르젤 백작 하이메 2세와 결혼, 코임브라 공작부인 우르젤의 이사벨의 어머니. 이사벨을 통해 페르와 시빌라는 포르투갈의 조안 공주와 포르투갈의 주앙 2세의 조상이 됨. |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문서
Grätz, l.c. i. 12
[10]
웹사이트
DISPUTATIONS
http://www.jewishenc[...]
2015-02-09
[11]
웹사이트
DISPUTATIONS AND POLEMICS
http://www.jewishvir[...]
The Gale Group
2015-02-09
[12]
서적
"Regiment de Preservació de Pestilència" de Jacme d'Agramont
Excelentísima Diputación Provincal Tarragona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