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매리너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폴 매리너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활약한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이자 감독이다. 촐리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플리머스 아가일을 거쳐 입스위치 타운에서 전성기를 보냈으며, 아스널, 포츠머스 등에서도 뛰었다.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으로 35경기에 출전하여 13골을 기록했고, 1982년 FIFA 월드컵에도 참가했다. 은퇴 후에는 지도자로 활동하며 플리머스 아가일과 토론토 FC의 감독을 역임했고, 방송 해설가로도 활동했다. 2021년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폴 매리너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폴 매리너 |
전체 이름 | Paul Mariner |
출생일 | 1953년 5월 22일 |
출생지 | 잉글랜드 판워스 |
사망일 | 2021년 7월 9일 |
키 | 1.83m |
포지션 | 은퇴 (과거 중앙 공격수) |
클럽 경력 | |
청소년 클럽 연도 | 1971–1973 |
청소년 클럽 | 촐리 |
연도1 | 1973–1976 |
클럽1 | 플리머스 아가일 |
출전1 | 135 |
골1 | 56 |
연도2 | 1976–1984 |
클럽2 | 입스위치 타운 |
출전2 | 260 |
골2 | 96 |
연도3 | 1984–1986 |
클럽3 | 아스널 |
출전3 | 60 |
골3 | 14 |
연도4 | 1986–1988 |
클럽4 | 포츠머스 |
출전4 | 56 |
골4 | 9 |
연도5 | 1988 |
클럽5 | 울런공 시티 |
출전5 | 2 |
골5 | 0 |
연도6 | 1989–1992 |
클럽6 | 올버니 캐피털스 |
출전6 | 17 |
골6 | 1 |
연도7 | 1990-1991 |
클럽7 | 나샤르 라이언스 |
연도8 | 1990-1991 |
클럽8 | 샌 프란시스코 베이 블랙호크스 |
출전8 | 10 |
골8 | 0 |
통산 출전 | 555 |
통산 골 | 179 |
국가대표팀 경력 | |
국가대표팀 연도 | 1977–1985 |
국가대표팀 | 잉글랜드 |
국가대표팀 출장수 (골) | 35 (13) |
감독 경력 | |
감독 연도 | 2003 |
감독 클럽 | 하버드 크림슨 (수석 코치) |
감독 연도 | 2004–2009 |
감독 클럽 | 뉴 잉글랜드 레벌루션 (수석 코치) |
감독 연도 | 2009–2010 |
감독 클럽 | 플리머스 아가일 |
감독 연도 | 2012–2013 |
감독 클럽 | 토론토 |
2. 선수 경력
2. 1. 1970년대

매리너는 리그에 속해 있지 않은 아마추어 구단인 촐리에서 축구를 시작했고, 랭카셔에 연고를 둔 구단에서 공격 지향적인 경기 방식은 플리머스 아가일의 관심을 끌었고, 결국 1973년에 그 구단과 계약했다.[8]
그는 데번 주 연고 구단에서 인상적인 득점 행진을 벌였고, 135번의 경기에 출전해 56골을 기록했고, 매리너의 발전을 지켜보던 보비 롭슨 감독 체제의 입스위치 타운에 구단 기록인 £220,000으로 이적했고,[9] 존 페덜티와 테리 오스틴이 계약 조건에 따라 반대로 플리머스 선수가 되었다. 매리너는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언과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로부터 비슷한 조건의 제의를 받았지만, 입스위치 행을 결정지었다.[10]
매리너는 1976년 9월에 입스위치 첫 경기를 치렀고,[11] 고전적 9번 선수(거친 견제와 수비수와의 치열한 몸싸움을 이길 수 있는 선수로, 득점력도 출중해야 했다.) 선수로서 입스위치 선수로 빠르게 입지를 다졌다. 당시 전문가에 따르면 매리너가 '표적형' 중앙 공격수로는 그가 유일한 방안이었지만, 실제로도 많은 골을 발로 창출했고, 중앙 혹은 측면에서 배급하는 공을 떠먹기보다는 스스로 득점 기회를 만들어 냈다.[12]
매리너는 입스위치 합류 후 6개월 만에 큰 충격을 주었고, 그는 웸블리에서 5-0으로 이긴 룩셈부르크와의 경기에서 교체로 출전해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경기를 치렀고, 벨파스트의 윈저 파크에서 열린 북아일랜드와의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경기에서는 선발로 출전했다.[8] 그는 두 경기에서 모두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지만, 이후 6경기 동안 모두 결장했다. 이 시기에 입스위치는 풋볼 리그 1부\1부 리그를 3위로 마쳤고, 매리너는 28번의 경기에서 10골을 기록했다.[8]
매리너의 3번째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경기는 룩셈부르크와의 월드컵 예선전 경기로, 막판에 쐐기골로 2-0 승리에 일조했다.[8] 이 시기에 매리너는 스튜어트 피어슨과 밥 래치퍼드와 함께 론 그린우드 호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표적형' 중앙 공격수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결국, 매리너가 대부분의 경기에서 기용되며 승자가 되었다.[13]
소속 구단에서 매리너는 기복 있는 행보를 보였다. 그는 입스위치에서 11골을 기록했지만, 소속 구단은 1부 리그에서 시즌을 18위로 마감해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FA컵 결승전에 진출해 웸블리에서 아스널에 명경기 끝에 1-0으로 이겼다. 매리너는 이 경기에서 한 차례 득점 기회를 잡아 골대를 강타했다.
그린우드는 1979년 내내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 매리너를 차출하지 않았지만, 이 시기에 소속 구단인 입스위치에서 33경기 출전해 13골을 넣으며 가장 많은 득점을 기록했다. 그는 1980년이 되어서야 6번째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경기에 출전했는데, 이는 5번째 국가대표팀 경기를 치른 지 거의 2년이 되는 시기였고, 그는 렉섬에서 열린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1-4로 패할 당시 득점을 기록해 영패를 면케 했다. 그는 대패 이후에도 국가대표팀에서 계속 활약했고, 시드니에서 유로 1980을 앞두고 열린 오스트레일리아와의 출정식 경기에서 2-1로 이겼다. 매리너는 그린우드의 대회 최종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대회 예선전 내내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8]
그는 토리노에서 1-1로 비긴 벨기에와의 1차전 경기에 결장했지만, 남은 2번의 조별 리그 경기에서 교체로 출전했는데, 이탈리아에 패한 후 스페인에 승리했고, 잉글랜드는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14]
2. 1. 1. 플리머스 아가일 FC
매리너는 리그에 속해 있지 않은 아마추어 구단인 촐리에서 축구를 시작했고, 랭카셔에 연고를 둔 구단에서 공격 지향적인 경기 방식은 플리머스 아가일의 관심을 끌었고, 결국 1973년에 그 구단과 계약했다.[8]그는 데번 주 연고 구단에서 인상적인 득점 행진을 벌였고, 135번의 경기에 출전해 56골을 기록했고, 매리너의 발전을 지켜보던 보비 롭슨 감독 체제의 입스위치 타운에 구단 기록인 £220,000으로 이적했고,[9] 존 페덜티와 테리 오스틴이 계약 조건에 따라 반대로 플리머스 선수가 되었다. 매리너는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언과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로부터 비슷한 조건의 제의를 받았지만, 입스위치 행을 결정지었다.[10]
2. 1. 2. 입스위치 타운 FC
매리너는 리그에 속해 있지 않은 아마추어 구단인 촐리에서 축구를 시작했고, 랭카셔에 연고를 둔 구단에서 공격 지향적인 경기 방식은 플리머스 아가일의 관심을 끌었고, 결국 1973년에 그 구단과 계약했다.[8]그는 데번 주 연고 구단에서 인상적인 득점 행진을 벌였고, 135번의 경기에 출전해 56골을 기록했고, 매리너의 발전을 지켜보던 보비 롭슨 감독 체제의 입스위치 타운에 구단 기록인 £220,000으로 이적했고,[9] 존 페덜티와 테리 오스틴이 계약 조건에 따라 반대로 플리머스 선수가 되었다. 매리너는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언과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로부터 비슷한 조건의 제의를 받았지만, 입스위치 행을 결정지었다.[10]
매리너는 1976년 9월에 입스위치 첫 경기를 치렀고,[11] 고전적 9번 선수(거친 견제와 수비수와의 치열한 몸싸움을 이길 수 있는 선수로, 득점력도 출중해야 했다.) 선수로서 입스위치 선수로 빠르게 입지를 다졌다. 당시 전문가에 따르면 매리너가 '표적형' 중앙 공격수로는 그가 유일한 방안이었지만, 실제로도 많은 골을 발로 창출했고, 중앙 혹은 측면에서 배급하는 공을 떠먹기보다는 스스로 득점 기회를 만들어 냈다.[12]
매리너는 입스위치 합류 후 6개월 만에 큰 충격을 주었고, 그는 웸블리에서 5-0으로 이긴 룩셈부르크와의 경기에서 교체로 출전해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경기를 치렀고, 벨파스트의 윈저 파크에서 열린 북아일랜드와의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경기에서는 선발로 출전했다.[8] 그는 두 경기에서 모두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지만, 이후 6경기 동안 모두 결장했다. 이 시기에 입스위치는 풋볼 리그 1부\1부 리그를 3위로 마쳤고, 매리너는 28번의 경기에서 10골을 기록했다.[8]
매리너의 3번째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경기는 룩셈부르크와의 월드컵 예선전 경기로, 막판에 쐐기골로 2-0 승리에 일조했다.[8] 이 시기에 매리너는 스튜어트 피어슨과 밥 래치퍼드와 함께 론 그린우드 호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표적형' 중앙 공격수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결국, 매리너가 대부분의 경기에서 기용되며 승자가 되었다.[13]
소속 구단에서 매리너는 기복 있는 행보를 보였다. 그는 입스위치에서 11골을 기록했지만, 소속 구단은 1부 리그에서 시즌을 18위로 마감해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FA컵 결승전에 진출해 웸블리에서 아스널에 명경기 끝에 1-0으로 이겼다. 매리너는 이 경기에서 한 차례 득점 기회를 잡아 골대를 강타했다.
그린우드는 1979년 내내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 매리너를 차출하지 않았지만, 이 시기에 소속 구단인 입스위치에서 33경기 출전해 13골을 넣으며 가장 많은 득점을 기록했다. 그는 1980년이 되어서야 6번째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경기에 출전했는데, 이는 5번째 국가대표팀 경기를 치른 지 거의 2년이 되는 시기였고, 그는 렉섬에서 열린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1-4로 패할 당시 득점을 기록해 영패를 면케 했다. 그는 대패 이후에도 국가대표팀에서 계속 활약했고, 시드니에서 유로 1980을 앞두고 열린 오스트레일리아와의 출정식 경기에서 2-1로 이겼다. 매리너는 그린우드의 대회 최종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대회 예선전 내내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8]
그는 토리노에서 1-1로 비긴 벨기에와의 1차전 경기에 결장했지만, 남은 2번의 조별 리그 경기에서 교체로 출전했는데, 이탈리아에 패한 후 스페인에 승리했고, 잉글랜드는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14]
2. 2. 1980년대
매리너는 입스위치에서 득점력을 점차 개선하면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주전 선수로 자리잡았는데, 1980년에는 41번의 경기에서 17골을 넣었고, 소속 구단은 그 다음 시즌이 개막할 때 준수한 성적을 거두며 선전했다. 잉글랜드는 1982년 월드컵 예선 일정을 노르웨이전 4-0 대승으로 시작했는데, 매리너는 훌륭한 골을 22미터에서 등을 돌려 넣었다.[15] 그러나, 그는 그 다음 경기에서 결장했고, 부쿠레슈티에서 루마니아에 졸전 끝에 1-2로 패했다. 그린우드는 그 다음 달에 반드시 이겨야 할 스위스전에서 다시 선발로 매리너를 기용했고, 그는 선제골을 넣어 2-1 승리를 견인했다.[15]입스위치는 1981년이 끝날 무렵에 3개 대회 우승을 노렸는데, 매리너가 다시 앞장서서 36번의 경기에서 13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입스위치 타운은 애스턴 빌라에게 1부 리그를 내주었고,(입스위치는 미들즈브러전에서 우승이 좌절) 맨체스터 시티와의 FA컵 준결승전 맞대결에서 패했다. 그러나, UEFA컵에서는 매리너가 주역으로 활약하며 두고두고 회자될 우승에 성공했다.[16]
그는 앞서 2차례 득점을 기록해 생-테티엔과의 8강전을 통과했다. 프랑스 원정으로 치른 1차전에서, 매리너는 2골을 기록해 입스위치가 4-1로 앞서나갔고, 2차전에서도 1골을 기록해 인상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준결승전을 넘어, 매리너가 결승전의 해결사가 되었는데, AZ와의 결승전 1차전에서 다시 골망을 흔들어 입스위치의 3-0 승리에 일조했다. 결국, 소속 구단은 합계 5-4로 우승했다.
양쪽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하면서 매리너는 이후 몇 달 동안 출전하지 못했고, 25번의 입스위치 경기에서 8골에 그쳤다.
매리너의 소속 구단 감독인 롭슨이 이후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해 유로 1984 예선전에서 계속 선발로 출전했다. 매리너는 입스위치에서 득점 행진을 이어갔지만, 젊고 활기찼던 그는 노쇠화하면서 기량이 덜어지기 시작했다.
매리너는 그 후, 1984년 2월에 £150,000의 이적료로 입스위치에서 아스널로 이적했다.[17] 1984년 2월 18일, 그는 하이버리에서 열린 애스턴 빌라와의 경기에 출전해 1-1 무승부를 거두었고, 그 다음 주에 노팅엄 포리스트를 상대로 1호골을 성공시켰다. 이 당시 매리너는 30대에 접어들었지만, 아스널에서도 꾸준히 활약하며 시즌 말 15번의 경기에서 7골을 기록했고, 아스널은 1983-84 시즌에 리그 6위로 반등했다.[17]
그는 1984-85 시즌에 주전 선수로 활약하며 단 7경기만 결장했지만, 41번의 경기에서 9골을 넣는 데 그쳤다.[17]
매리너는 아킬레스건 부상에 허덕이며 1985-86 시즌에는 9경기 출전에 그쳤고, 그나마 몇 경기는 중앙 반면 수비수로 비상 출전한 것이었다.[18] 그는 1986년 4월 8일에 노팅엄 포리스트와의 소속 구단 마지막 경기에서 교체로 출전했다.[19]
1986년 8월, 아스널의 조지 그레이엄 신임 감독은 매리너를 자유 이적으로 방출했는데, 이 결정은 그레이엄 감독 취임 이전에 결정된 일이었다. 매리너는 총 70번의 아스널 경기에 출전해 17골을 기록했다.[20] 그의 다음 행선지는 포츠머스로 2년을 보냈다. 1989년 5월, 그는 미국 사커 리그의 올버니 캐피털스로 이적했다.[20]
2. 2. 1. 입스위치 타운 FC (1980년대)
매리너는 입스위치에서 득점력을 점차 개선하면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주전 선수로 자리잡았는데, 1980년에는 41번의 경기에서 17골을 넣었고, 소속 구단은 그 다음 시즌이 개막할 때 준수한 성적을 거두며 선전했다. 잉글랜드는 1982년 월드컵 예선 일정을 노르웨이전 4-0 대승으로 시작했는데, 매리너는 훌륭한 골을 22미터에서 등을 돌려 넣었다.[15] 그러나, 그는 그 다음 경기에서 결장했고, 부쿠레슈티에서 루마니아에 졸전 끝에 1-2로 패했다. 그린우드는 그 다음 달에 반드시 이겨야 할 스위스전에서 다시 선발로 매리너를 기용했고, 그는 선제골을 넣어 2-1 승리를 견인했다.[15]입스위치는 1981년이 끝날 무렵에 3개 대회 우승을 노렸는데, 매리너가 다시 앞장서서 36번의 경기에서 13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입스위치 타운은 애스턴 빌라에게 1부 리그를 내주었고,(입스위치는 미들즈브러전에서 우승이 좌절) 맨체스터 시티와의 FA컵 준결승전 맞대결에서 패했다. 그러나, UEFA컵에서는 매리너가 주역으로 활약하며 두고두고 회자될 우승에 성공했다.[16]
그는 앞서 2차례 득점을 기록해 생-테티엔과의 8강전을 통과했다. 프랑스 원정으로 치른 1차전에서, 매리너는 2골을 기록해 입스위치가 4-1로 앞서나갔고, 2차전에서도 1골을 기록해 인상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준결승전을 넘어, 매리너가 결승전의 해결사가 되었는데, AZ와의 결승전 1차전에서 다시 골망을 흔들어 입스위치의 3-0 승리에 일조했다. 결국, 소속 구단은 합계 5-4로 우승했다. 몇 주 후, 그린우드는 다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선발로 그를 복귀시켰고, 스위스전에서 패한 후, 헝가리전에서 귀중한 승리를 챙겼고, 노르웨이에 충격패를 당했다. 이후, 잉글랜드의 월드컵 3개 대회 연속 예선 탈락의 악몽이 드리우기 시작했지만, 헝가리가 본선 진출을 확정지은 가운데 웸블리에서 최종전에서 맞대결을 펼치고 필요한 승점 1점을 추가하여 수렁을 탈출하는데 성공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매리너가 이 경기에서 1-0 결승골을 기록했는데, 넘어지고도 골을 차넣어 직접 골망을 흔든 것이 아닌 굴절되어 들어간 골이었지만, 귀중한 골로 본선행을 확정지었다.
양쪽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하면서 매리너는 이후 몇 달 동안 출전하지 못했고, 25번의 입스위치 경기에서 8골에 그쳤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열린 월드컵을 앞두고 웸블리의 네덜란드전에서 홀로 질주해 득점한 것을 포함해 5번의 연습 경기에서 4골을 기록했다. 그 덕에, 매리너는 그린우드의 대회 최종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처음으로 주요 대회 본선 경기에 선발로 출전해 프랑스를 상대했다.
잉글랜드가 브라이언 롭슨의 역대 최단 시간 득점 2위인 골을 포함해 2골로 2-1로 앞서나간 와중에, 매리너가 근거리에서 뜬 공을 마무리해 3-1 승리에 쐐기를 박았다. 이 골은 그가 22번째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터뜨린 국제 경기 11호 골이었고, 다른 선수들과 비교하면 당시로서는 높은 득점율이었다. 이로서 그는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6경기 연속 득점에도 성공했는데, 이 업적을 달성한 선수는 지미 그리브스가 유일했다.
그린우드는 대회 기간 내내 매리너를 선발로 중용했지만, 추가로 골을 터뜨리지는 못했고, 2차 조별 리그에서 득점 없이 2경기를 비긴 잉글랜드는 탈락했다. 매리너는 스페인전에서 케빈 키건이 득점 기회를 날려버린 후 무릎을 꿇고,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좌절하자 부상 문제로 교체 투입되어 넘어진 잉글랜드의 주장을 부축하여 끌고간 것으로 회자되었다.(앞서 서독이 스페인을 2-1로 이겼기에 잉글랜드는 더 큰 점수차로 스페인을 꺾어야 했고, 이 골을 성공시켜도 잉글랜드의 준결승행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매리너의 소속 구단 감독인 롭슨이 이후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해 유로 1984 예선전에서 계속 선발로 출전했다. 매리너는 입스위치에서 득점 행진을 이어갔지만, 젊고 활기찼던 그는 노쇠화하면서 기량이 덜어지기 시작했다.
잉글랜드는 예선전에서 비틀거렸고, 매리너는 헝가리와 룩셈부르크전에서 연속으로 득점했지만, 룩셈부르크전 득점은 그의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13호이자 마지막 골이 되었다.
2. 2. 2. 아스널 FC
매리너는 1984년 2월에 £150,000의 이적료로 입스위치에서 아스널로 이적했다. 1984년 2월 18일, 그는 하이버리에서 열린 애스턴 빌라와의 경기에 출전해 1-1 무승부를 거두었고, 그 다음 주에 노팅엄 포리스트를 상대로 1호골을 성공시켰다. 이 당시 매리너는 30대에 접어들었지만, 아스널에서도 꾸준히 활약하며 시즌 말 15번의 경기에서 7골을 기록했고, 아스널은 1983-84 시즌에 리그 6위로 반등했다.[17]그는 1984-85 시즌에 주전 선수로 활약하며 단 7경기만 결장했지만, 41번의 경기에서 9골을 넣는 데 그쳤다.[17]
매리너는 아킬레스건 부상에 허덕이며 1985-86 시즌에는 9경기 출전에 그쳤고, 그나마 몇 경기는 중앙 반면 수비수로 비상 출전한 것이었다.[18] 그는 1986년 4월 8일에 노팅엄 포리스트와의 소속 구단 마지막 경기에서 교체로 출전했다.[19]
1986년 8월, 아스널의 조지 그레이엄 신임 감독은 매리너를 자유 이적으로 방출했는데, 이 결정은 그레이엄 감독 취임 이전에 결정된 일이었다. 매리너는 총 70번의 아스널 경기에 출전해 17골을 기록했다.[20]
2. 2. 3.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1980년대)
매리너는 입스위치에서 득점력을 점차 개선하면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주전 선수로 자리잡았다. 1980년에는 41번의 경기에서 17골을 넣었고, 소속 구단은 그 다음 시즌이 개막할 때 준수한 성적을 거두며 선전했다. 잉글랜드는 1982년 월드컵 예선 일정을 노르웨이전 4-0 대승으로 시작했는데, 매리너는 22미터에서 등을 돌려 넣는 훌륭한 골을 기록했다.[15] 그러나, 그는 그 다음 경기에서 결장했고, 부쿠레슈티에서 루마니아에 졸전 끝에 1-2로 패했다. 그린우드는 그 다음 달에 반드시 이겨야 할 스위스전에서 다시 선발로 매리너를 기용했고, 그는 선제골을 넣어 2-1 승리를 견인했다.[15]그는 앞서 2차례 득점을 기록해 생-테티엔과의 8강전을 통과했다. 프랑스 원정으로 치른 1차전에서, 매리너는 2골을 기록해 입스위치가 4-1로 앞서나갔고, 2차전에서도 1골을 기록해 인상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준결승전을 넘어, 매리너가 결승전의 해결사가 되었는데, AZ와의 결승전 1차전에서 다시 골망을 흔들어 입스위치의 3-0 승리에 일조했다. 결국, 소속 구단은 합계 5-4로 UEFA컵 우승을 차지했다.[16] 몇 주 후, 그린우드는 다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선발로 그를 복귀시켰고, 스위스전에서 패한 후, 헝가리전에서 귀중한 승리를 챙겼고, 노르웨이에 충격패를 당했다. 이후, 잉글랜드의 월드컵 3개 대회 연속 예선 탈락의 악몽이 드리우기 시작했지만, 헝가리가 본선 진출을 확정지은 가운데 웸블리에서 최종전에서 맞대결을 펼치고 필요한 승점 1점을 추가하여 수렁을 탈출하는데 성공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매리너가 이 경기에서 1-0 결승골을 기록했는데, 넘어지고도 골을 차넣어 직접 골망을 흔든 것이 아닌 굴절되어 들어간 골이었지만, 귀중한 골로 본선행을 확정지었다.
양쪽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하면서 매리너는 이후 몇 달 동안 출전하지 못했고, 25번의 입스위치 경기에서 8골에 그쳤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열린 월드컵을 앞두고 웸블리의 네덜란드전에서 홀로 질주해 득점한 것을 포함해 5번의 연습 경기에서 4골을 기록했다. 그 덕에, 매리너는 그린우드의 대회 최종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처음으로 주요 대회 본선 경기에 선발로 출전해 프랑스를 상대했다.
잉글랜드가 브라이언 롭슨의 역대 최단 시간 득점 2위인 골을 포함해 2골로 2-1로 앞서나간 와중에, 매리너가 근거리에서 뜬 공을 마무리해 3-1 승리에 쐐기를 박았다. 이 골은 그가 22번째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터뜨린 국제 경기 11호 골이었고, 다른 선수들과 비교하면 당시로서는 높은 득점율이었다. 이로서 그는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6경기 연속 득점에도 성공했는데, 이 업적을 달성한 선수는 지미 그리브스가 유일했다.
그린우드는 대회 기간 내내 매리너를 선발로 중용했지만, 추가로 골을 터뜨리지는 못했고, 2차 조별 리그에서 득점 없이 2경기를 비긴 잉글랜드는 탈락했다. 매리너는 스페인전에서 케빈 키건이 득점 기회를 날려버린 후 무릎을 꿇고,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좌절하자 부상 문제로 교체 투입되어 넘어진 잉글랜드의 주장을 부축하여 끌고간 것으로 회자되었다.(앞서 서독이 스페인을 2-1로 이겼기에 잉글랜드는 더 큰 점수차로 스페인을 꺾어야 했고, 이 골을 성공시켜도 잉글랜드의 준결승행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매리너의 소속 구단 감독인 롭슨이 이후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해 유로 1984 예선전에서 계속 선발로 출전했다. 잉글랜드는 예선전에서 비틀거렸고, 매리너는 헝가리와 룩셈부르크전에서 연속으로 득점했지만, 룩셈부르크전 득점은 그의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13호이자 마지막 골이 되었다.
매리너는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경기에 2번 더 출전했지만, 장신의 재능 있는 신예 마크 헤이틀리가 비상하고, 게리 리네커와 피터 비어슬리가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해 경쟁이 치열해졌다. 헤이틀리는 1984년 9월에 동독전 승리 당시 매리너와 교체되어 들어가 승리에 일조했고, 매리너는 1985년 5월에 0-0으로 비긴 루마니아전에서 마지막이자 35호 국가대표팀 경기를 치렀는데, 이 경기는 1986년 월드컵 예선전 경기였다.[17] 헤이틀리가 비상하고 매리너가 아스널의 벤치만 지키면서, 롭슨은 본선에 진출한 1986년 멕시코 대회에서 그를 명단에서 제외했다.
2. 2. 4. 포츠머스 FC와 이후
1990-91 시즌, 폴 매리너는 몰타의 나샤르 라이언스에서 활약했다. 매리너는 1991년에 미국 프로 사커 리그에 소속된 캐피털스로 복귀했는데, 이 리그는 미국 사커 리그와 웨스턴 사커 리그가 통합하여 출범했다. 그는 캐피털스에서 3시즌을 보냈고, 1990년에는 리그 대표 11인에 명명되었다.[21][22][23][24] 매리너는 올버니에서 3년을 보내면서, 수석 코치도 역임했다. 1992년 봄, 캐피털스 구단주는 감독직을 제의했지만, 해단 소문이 돌자, 그는 샌 프란시스코 베이 블랙호스크의 선수 겸 감독이 되었다. 그는 캐피털스의 해단 수순에 대한 소식을 듣고 이적을 감행했다. 1990년대 초, 폴 매리너는 서드버리 서포크를 연고로 하는 일요 리그 구단인 바이엄 데어리의 경기에 2번 출전했다.[25]2. 3. 1990년대
폴 매리너는 1990-91 시즌, 몰타의 나샤르 라이언스에서 활약했다. 1991년에 미국 프로 사커 리그에 소속된 캐피털스로 복귀했는데, 이 리그는 미국 사커 리그와 웨스턴 사커 리그가 통합하여 출범했다. 그는 캐피털스에서 3시즌을 보냈고, 1990년에는 리그 대표 11인에 명명되었다.[21][22][23][24] 매리너는 올버니에서 3년을 보내면서, 수석 코치도 역임했다. 1992년 봄, 캐피털스 구단주는 감독직을 제의했지만, 해단 소문이 돌자, 그는 샌 프란시스코 베이 블랙호스크의 선수 겸 감독이 되었다. 그는 캐피털스의 해단 수순에 대한 소식을 듣고 이적을 감행했다. 1990년대 초, 폴 매리너는 서드버리 서포크를 연고로 하는 일요 리그 구단인 바이엄 데어리의 경기에 2번 출전했다.[25]3. 감독 경력
3. 1. 초기 경력
매리너는 은퇴 후 BBC 라디오 랭카셔에서 축구 평론가로 활동했고,[26] 축구 선수들을 위한 지도자 단체를 설립했다. 잉글랜드로 복귀한 뒤 볼턴 학교를 잠깐 지도한 후,[27]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애리조나 주 피닉스의 델 솔 축구단 유소년부를 지도했다. 2003년, 그는 하버드 대학교 축구단의 수석 코치가 되었고,[45][41] 2004년에는 메이저 리그 사커의 뉴 잉글랜드 레벌루션에 합류해 스티브 니콜을 보좌했다.[28] 그는 2004년 2월 5일에 정식적으로 입단한 것으로 발표되었다.[29] 그는 시애틀 사운더스의 감독직을 협상하기도 했다.[30]3. 2. 플리머스 아가일 FC
2009년 10월, 폴 매리너는 친정 구단이었던 플리머스 아가일과 연락이 닿은 것으로 보도되었고, 2018년 월드컵 유치전 홍보를 위해 데번 주를 방문하면서 논란이 커졌다.[31] 2009년 10월 18일, 그는 폴 스투록과 함께 플리머스 아가일의 감독이 된 것으로 발표되었다.[31]2009년 12월 10일, 플리머스가 2부 리그 최하위로 떨어지는 부진에 빠지자 매리너는 스투록을 대신하여 감독이 되었다.[32] 그러나 플리머스의 성적을 반등시키지 못했고, 결국 2010년 4월 19일에 6년 만의 챔피언십 강등이 확정되었다.[33]
2010년 5월 6일, 플리머스는 후임 감독을 물색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매리너는 감독직을 유지했다.[34] 2010년 6월 24일, 피터 리드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매리너의 임기는 종료되었다.[35] 매리너는 2010년 12월 30일에 홈 파크에서 자신의 지위를 내려놓고 다른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36] 피터 리드 감독은 "저는 폴을 오래 전부터 알아왔고, 그와 동행한 일은 환상적이었습니다", "그가 앞으로 무엇을 하든지 성공하리라 장담합니다. 그는 훌륭한 인물로, 이 구단의 지지자들에게 전설로 통하는 인물이었으니까요."라고 덧붙였다.[37]
3. 3. 토론토 FC
매리너는 2011년 1월 6일에 선수 발전 부장으로 토론토에 합류하여 아론 빈터르의 사단에 합류했다. 시즌을 9경기 연속 패배로 시작한 후, 빈터르는 토론토 감독직을 그만두었고, 2012년 6월 7일에 매리너가 신임 감독으로 취임했다. 매리너는 6월 27일에 앵팍 드 몽레알전에서 토론토에서의 첫 승리를 기록했는데, 적지에서 3-0으로 이겼다. 구단은 신임 감독 취임 후 반등하여 2012년 시즌을 "10무 4패의 리그 성적"으로 마무리했고, 매리너는 2013년 1월 7일에 해임되었다. 토론토 전 선수들인 앤드류 위드먼과 에리크 아슬리는 이후 매리너에게 찬사를 보냈다.4. 방송 경력
매리너는 현역 은퇴 후 BBC 라디오 랭카셔에서 해설가로 잠시 활동했다.[45] 2014년에는 토론토에서 짧은 지도자 생활을 마치고 뉴 잉글랜드 레벌루션에 방송인으로 복귀해 6년 동안 구단의 텔레비전 및 라디오 해설을 맡았다.[28] 그는 2009년부터 2020년까지 ESPN의 분석가로도 활동했다.[46]
5. 개인사와 최후
폴 매리너는 1953년 5월 22일에 볼턴 인근의 판워스에서 출생했는데,[1][2] 그의 부친 제임스 매리너는 크레인 기사였고, 모친은 마거릿 캐서린 턴불이었다.[47] 그는 1953년 7월 19일에 호리치의 성 카탈리나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47] 그는 호리치의 오텀 로에서 부모와 동거했고,[47] 호리치 군 중고등학교(현 리빙턴-블랙로드 고등학교 관할 학교)를 졸업했다.[7] 그는 배우자로 앨리슨 로스코를 1976년에 데번 주 플리머스에서 맞이했고,[48][49]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다.[7] 두 부부는 1989년에 파경했다.[50] 매리너는 2021년 7월 9일 향년 68세에 뇌종양으로 영면에 들었다.[51]
6. 경력 통계
6. 1. 클럽
폴 매리너는 플리머스 아가일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1973-74 시즌부터 1976-77 시즌까지 154경기에 출전해 61골을 기록했다.[52][53][54][55] 1973-74 시즌에는 3부 리그에서 41경기에 출전하여 14골을 넣었고, 1974-75 시즌에는 45경기에 출전하여 20골을 기록하며 팀의 2부 리그 승격에 기여했다.[52][53][54][55] 2부 리그로 승격한 후에도 1975-76 시즌 38경기 15골, 1976-77 시즌 10경기 7골을 기록하며 꾸준한 활약을 보였다.[52][53][54][55]이후 입스위치 타운으로 이적하여 1976-77 시즌부터 1983-84 시즌까지 337경기에 출전해 136골을 기록하며 전성기를 보냈다.[52][53][54][55] 특히 1977-78 시즌에는 37경기 11골을 기록하며 팀의 FA컵 우승에 공헌했고, 1980-81 시즌에는 36경기 13골과 UEFA컵 11경기 6골을 기록하며 팀의 UEFA컵 우승을 이끌었다.[52][53][54][55]
1983-84 시즌 도중 아스널로 이적하여 1985-86 시즌까지 70경기에 출전해 17골을 기록했다.[52][53][54][55]
매리너의 클럽 통산 기록은 561경기 출전 214골이다.[52][53][54][55]
6. 2. 국가대표팀
폴 매리너는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서 35경기에 출전하여 13골을 기록했다.[56] 1977년 10월 12일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1978년 월드컵 예선전에서 룩셈부르크를 상대로 국가대표팀 데뷔골을 기록했다.[57]매리너는 1980년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에서 웨일스를 상대로 득점을 기록했고,[58] 같은 해 오스트레일리아와의 친선 경기에서도 골을 넣었다.[59] 1982년 월드컵 예선전에서는 노르웨이,[60] 스위스,[61] 헝가리를[62] 상대로 득점하며 잉글랜드의 월드컵 본선 진출에 기여했다.
1982년에는 네덜란드와의[63] 친선 경기, 스코틀랜드와의[64]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경기, 핀란드와의[65] 친선 경기에서 두 골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했다. 1982년 월드컵 본선에서는 프랑스를[66] 상대로 골을 기록했다.
매리너는 유로 1984 예선전에서도 헝가리와[67] 룩셈부르크를[68] 상대로 득점하며 잉글랜드의 공격을 이끌었다.
국가대표팀 | 연도 | 출장 | 골 |
---|---|---|---|
잉글랜드 | 1977 | 3 | 1 |
1978 | 2 | 0 | |
1980 | 8 | 4 | |
1981 | 5 | 1 | |
1982 | 11 | 5 | |
1983 | 4 | 2 | |
1984 | 1 | 0 | |
1985 | 1 | 0 | |
합계 | 35 | 13 |
6. 3. 감독 통계
wikitable구단 | 취임 | 해임 | 기록 | 주석 | ||||
---|---|---|---|---|---|---|---|---|
경기 | 승리 | 무승부 | 패배 | 승률 | ||||
플리머스 아가일 | 2009년 12월 10일 | 2010년 6월 24일 | 29 | 7 | 6 | 16 | 24.1% | [35][69] |
토론토 | 2012년 6월 7일 | 2013년 1월 7일 | 28 | 6 | 8 | 14 | 21.4% | [39][42][70] |
합계 | 57 | 13 | 14 | 30 | 22.8% | — |
7. 수상
7. 1. 선수
폴 매리너는 선수 시절 여러 대회에서 우승 및 준우승을 경험하고, 개인 수상 경력도 가지고 있다.플리머스 아가일 소속으로 3부 리그 준우승(1974-75)을 차지했다. 또한, 플리머스 아가일 올해의 선수(1974–75, 1975–76) 및 세기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입스위치 타운 소속으로는 FA컵 우승(1977–78), UEFA컵 우승(1980–81)을 달성했다. 1980-81 시즌 풋볼 리그 1부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고,[71] 1982-83 시즌에는 입스위치 타운 올해의 선수로 뽑혔다. 2011년에는 입스위치 타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72]
7. 2. 개인
참조
[1]
웹인용
폴 매리너
http://barryhugmansf[...]
Barry Hugman's Footballers
2017-09-02
[2]
웹인용
Birth Index entry
https://www.freebmd.[...]
ONS
2021-07-10
[3]
서적
Rothmans Football Yearbook 1987–88
https://archive.org/[...]
Queen Anne Press
1987
[4]
웹인용
1988 season – round 14 results
http://www.ozfootbal[...]
2012-02-10
[5]
웹인용
1988 season – round 15 results
http://www.ozfootbal[...]
2012-02-10
[6]
웹인용
Paul Mariner – profile
http://socceroutside[...]
Socceroutsider.com
2012-02-10
[7]
뉴스
Paul Mariner obituary
https://www.theguard[...]
2021-07-11
[8]
웹인용
Green Barmy: How Paul Mariner became one of the Plymouth Argyle greats
https://www.plymouth[...]
2017-11-29
[9]
인용
1976/77 step back in time
2003-11-22
[10]
서적
Plymouth Argyle: A Complete Record 1903–1989
https://archive.org/[...]
Breedon Books
[11]
웹인용
Paul Mariner
http://www.sporting-[...]
Sporting Heroes
2021-07-10
[12]
뉴스
Paul Mariner: Former Ipswich and England striker dies aged 68
https://www.bbc.com/[...]
BBC Sport
2021-07-10
[13]
웹인용
All England national football team players
https://www.11v11.co[...]
11v11
2021-07-10
[14]
웹인용
Paul Mariner » Internationals
https://www.worldfoo[...]
Worldfootball.net
2021-07-10
[15]
웹인용
England: the road to Spain 1982
http://www.englandfo[...]
England Football online
2021-07-10
[16]
웹인용
Ipswich Town football club match record: 1981
https://www.11v11.co[...]
11v11
2021-07-10
[17]
웹인용
Paul Mariner - English Caps 1977-85 - England
http://www.sporting-[...]
[18]
웹인용
historic/players/paul-mariner
https://www.arsenal.[...]
2023-02-01
[19]
서적
Arsenal Who's Who
Independent UK Sports Publications
[20]
뉴스
CAPITALS WILL PUT BOLTS TO THE TEST
The Boston Globe
1989-05-27
[21]
웹사이트
1990 Albany Capitals
http://a-leaguearchi[...]
[22]
웹사이트
1989 Albany Capitals
http://a-leaguearchi[...]
[23]
웹인용
The Year in American Soccer – 1990
http://www.sover.net[...]
2009-06-29
[24]
웹사이트
1991 Albany Capitals
http://a-leaguearchi[...]
[25]
웹인용
The Player
http://www.jonathanv[...]
2009-06-29
[26]
웹사이트
http://www.chorleyfc[...]
[27]
뉴스
WHERE ARE THEY NOW?: Paul Mariner
https://www.independ[...]
2011-10-22
[28]
뉴스
Former New England Revolution coach, commentator dies of brain cancer
https://www.wcvb.com[...]
WCVB
2021-07-11
[29]
웹인용
Revolution Names Former England Great Paul Mariner Assistant Coach
http://www.revolutio[...]
2004-05-08
[30]
뉴스
Ralston back in groove
http://www.boston.co[...]
2022-12-27
[31]
뉴스
Mariner set for Plymouth return
http://news.bbc.co.u[...]
BBC Sport
2009-10-18
[32]
뉴스
Mariner in for Sturrock at Argyle
http://news.bbc.co.u[...]
2009-12-10
[33]
뉴스
Mariner wants to stay at Plymouth
http://news.bbc.co.u[...]
BBC Sport
2010-04-20
[34]
뉴스
Plymouth Argyle to look for new manager
http://news.bbc.co.u[...]
BBC Sport
2017-04-02
[35]
뉴스
Peter Reid appointed manager of Plymouth Argyle
http://news.bbc.co.u[...]
BBC Sport
2017-04-02
[36]
뉴스
Paul Mariner leaves cash-strapped Plymouth Argyle
http://news.bbc.co.u[...]
2010-12-30
[37]
웹사이트
Peter Ridsdale in to save club as Paul Mariner walks away from Home Park
http://www.thisisply[...]
2010-12-31
[38]
웹사이트
New management team announced
http://www.torontofc[...]
2011-01-06
[39]
뉴스
Aron Winter out as Toronto FC head coach, replaced by Paul Mariner
https://www.thestar.[...]
2012-06-07
[40]
웹인용
Recap: Rampant Toronto throttle Impact 3–0 in Montreal
http://www.mlssoccer[...]
mlssoccer.com
2012-06-27
[41]
뉴스
From soccer pitch to sidelines, Paul Mariner left powerful impression
https://www.cbc.ca/s[...]
2021-07-10
[42]
뉴스
Toronto FC fires coach Paul Mariner, replaced by Ryan Nelsen
https://www.thestar.[...]
2013-01-07
[43]
웹인용
Andrew Wiedeman RedNation Online Interview
http://www.rednation[...]
2014-12-22
[44]
웹인용
Eric Hassli RedNation Online Interview
http://www.rednation[...]
2015-05-29
[45]
뉴스
Paul Mariner obituary
https://www.theguard[...]
2021-07-11
[46]
웹인용
ESPN Remembers Paul Mariner
https://www.espnfron[...]
2021-07-10
[47]
영상
The Parish Records of St Catherine's Church, Horwich, Lancashire, from 1896
Horwich Heritage
[48]
웹인용
Marriage Index: Paul Mariner, 1976
https://www.freebmd.[...]
ONS
[49]
웹인용
Marriage Index: Alison Roscoe, 1976
https://www.freebmd.[...]
ONS
[50]
뉴스
Paul Mariner obituary
https://www.thetimes[...]
2024-04-12
[51]
웹인용
Paul Mariner dies aged 68
https://www.skysport[...]
2021-07-10
[52]
웹사이트
GoS: Paul Mariner
http://www.greensons[...]
[53]
웹사이트
Ipswich Town: Season's Gone by
http://www.itfc.co.u[...]
[54]
웹사이트
Paul Mariner: Sporting Heroes
http://www.sporting-[...]
[55]
웹사이트
Gunnermania: Paul Mariner
http://jkarlsson.net[...]
[56]
웹인용
Paul Mariner - 35 Caps (13 Goals)
https://www.englands[...]
[57]
웹인용
'Match No. 516 - Wednesday, 12th October 1977, 8:00pm'
https://www.englands[...]
[58]
웹인용
'540 - Wales 4-1 England, Saturday, 17th May 1980'
https://www.englands[...]
[59]
웹인용
'543 - Australia 1-2 England, Saturday, 31st May 1980'
https://www.englands[...]
[60]
웹인용
'547 - England 4 - 0 Norway, Wednesday, 10th September 1980'
https://www.englands[...]
[61]
웹인용
'549 - England 2 - 1 Switzerland, Wednesday, 19th November 1980'
https://www.englands[...]
[62]
웹인용
'558 - England 1 - 0 Hungary, Wednesday, 18th November 1981'
https://www.englands[...]
[63]
웹인용
'561 - England 2 - 0 Netherlands, Tuesday, 25th May 1982'
https://www.englands[...]
[64]
웹인용
'562 - Scotland 0 - 1 England, Tuesday, 29th May 1982'
https://www.englands[...]
[65]
웹인용
'564 - Finland 1 - 4 England, Thursday, 3rd June 1982'
https://www.englands[...]
[66]
웹인용
'565 - France 1 - 3 England, Wednesday, 16th June 1982'
https://www.englands[...]
[67]
웹인용
'583 - Hungary 0 - 3 England, Wednesday, 12th October 1983'
https://www.englands[...]
[68]
웹인용
'584 - Luxembourg 0 - 4 England, Wednesday, 16th November 1983'
https://www.englands[...]
[69]
웹인용
Managers: Paul Mariner
http://www.soccerbas[...]
Centurycomm
[70]
웹인용
Toronto FC: Matches
https://int.soccerwa[...]
Perform Group
[71]
서적
The Official P.F.A. Footballers Heroes
[72]
웹인용
Sir Alf Ramsey inducted into Ipswich Town Hall of Fame
http://www.eadt.co.u[...]
2011-04-0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