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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습 (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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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풍습은 삼국 시대 촉한의 장수로, 유비 휘하에서 형주 시대부터 활약했다. 221년 유비가 오나라를 공격했을 때 영군으로 임명되어 오반, 장남과 함께 손환을 대파하는 등 초반에는 활약했으나, 222년 육손의 화공으로 촉군이 대패하면서 반장의 부하에게 참수당하거나, 장남과 함께 전사했다. 양희는 그의 과신을 패배의 원인으로 평가했으며,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에게 충성하는 용감한 장수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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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습 (촉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청두 무후사의 풍습 소상 (가운데)
청두 무후사의 풍습 소상 (가운데)
이름풍습
휴원
출생생년 미상
출생지형주 남군 (현재의 허난성 뤄산현)
사망장무 2년 (222년)
사망지형주 의도군 (현재의 후베이성 이창시) 또는 장양 투자족 자치현 (후베이성)
직업장군
소속촉한
주군유비
관직
관직명대독 (大督)
임기 시작221년
임기 종료222년
군주유비

2. 생애

풍습의 자세한 생애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삼국지》, 《계한보신찬》 등의 사료를 통해 그의 행적을 파악할 수 있다. 풍습은 유비를 따라 촉한 건국에 기여했으며, 이릉 전투에서 활약하다 전사했다.

유비형주를 다스릴 때부터 그를 섬겼으며, 유비의 입촉에도 동행한 남군(현재의 징저우, 후베이성 일대) 출신의 촉한 장수였다.[1]

221년, 유비관우의 복수와 형주 탈환을 위해 오나라를 공격할 때 풍습은 영군(領軍)에 임명되어 참전했다.[6][7][8] 222년 6월,[6] 육손의 화공으로 촉군이 대패했을 때, 반장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했다.[9] 전투 초기, 오반과 함께 오나라 장수 이이 등을 격파하기도 했다.[2]

양희의 『계한보신찬』에서 풍습은 "휴원(馮習)은 적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에 국가에 손실을 초래하여 죽음에 이르렀다"라고 평가받아, 패전의 책임을 추궁당했다.

2. 1. 초기 생애 및 촉한 건국 기여

풍습은 남군(현재의 징저우, 후베이성 일대) 출신으로, 삼국 시대 촉한의 건국 황제인 유비 휘하의 장수로 복무했다.[1] 유비형주를 다스릴 때부터 그를 섬겼으며, 유비의 입촉에도 동행했다.

2. 2. 이릉 전투에서의 활약과 죽음

221년, 유비관우의 복수와 형주 탈환을 위해 오나라를 공격할 때 풍습은 영군(領軍)에 임명되어 참전했다.[6][7][8] 전투 초기, 오반과 함께 오나라 장수 이이 등을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웠다.[2] 222년 6월,[6] 육손의 화공으로 촉군이 대패했을 때, 풍습은 반장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했다.[9]

양희의 『계한보신찬』에서 풍습은 "휴원(馮習)은 적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에 국가에 손실을 초래하여 죽음에 이르렀다"라고 평가받아, 패전의 책임을 추궁당했다.

3. 평가

양희는 《계한보신찬》에서 "휴원(풍습)은 적을 가볍게 여겨 국가에 손실을 초래하여 죽음에 이르렀다"라고 평가했다.[6] 이는 이릉 전투에서 풍습의 과신과 오판이 패배의 한 원인이었음을 보여준다.

4.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풍습은 제83회부터 유비 휘하의 선봉대를 맡는다. 기후가 맹서가 되고, 물 보급에 어려움을 겪자, 풍습은 유비에게 군세를 강가 나무 그늘로 이동시킬 것을 호소한다.

4. 1. 이릉 전투 초반 활약

222년, 유비관우장비의 원수를 갚고 오나라의 배신으로 빼앗긴 형주를 되찾고자 오나라로 쳐들어갈 때 풍습은 부장이 되었다.[1] 이릉 전투 초반, 풍습은 의도에서 오반, 장남과 함께 야습 공격을 해 손환을 크게 무찔렀다.[1]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81회에서 이릉 전투에 참전하는 촉군의 부장으로 등장한다.[4] 제82회에서는 오반 휘하의 장수로서 손환 군과 대치하는데, 손환에게 야습을 가하고, 주연 군의 구원에 대비하여 관흥, 장포를 복병으로 배치할 것을 제안한다.[4] 이 작전으로 손환을 격파하고, 주연은 오지 않았지만, 그 휘하의 최우를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4]

4. 2. 최후

삼국지연의에서 풍습은 유비의 오나라 정벌군 총사령관이 되어 오반과 함께 오나라 장수 이이를 격파한다. 이릉 대전에서 육손의 화공으로 혼란에 빠졌을 때, 반장의 부하에게 목이 베어져 죽임을 당한다.[1]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 제84회에서 촉군 본대는 육손의 화공을 받아 대패한다. 불길과 오군의 공격을 피한 풍습은 이릉성 포위에 임하고 있던 오반과 장남에게 위기를 알린다. 이후 장남과 함께 유비 구원에 나서지만, 전후에서 적의 공격을 받아 난전 중에 사망한다.[1] 『계한보신찬』처럼 패전의 책임을 추궁받는 일은 없이, 작중의 시에서는 "풍습의 충성은 둘이 없다(馮習忠無二)"고 칭송받는다.[1]

5. 한국에서의 인식

한국에서는 풍습이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를 통해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삼국지연의에서 풍습은 이릉 전투에 참전한 촉한의 장수로 등장한다. 소설 속에서 풍습은 유비 휘하의 선봉대를 맡아 활약하지만, 육손의 화공에 촉군 본대가 대패하면서 위기에 처한다. 풍습은 이릉성에 포위된 오반장남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유비 구원에 나서지만, 결국 난전 중에 전사한다.[1]

삼국지연의에서 풍습은 패전의 책임을 추궁받지 않고, 오히려 "풍습의 충성은 둘이 없다(馮習忠無二)"라는 칭송을 받으며 유비에 대한 충성을 다한 장수로 묘사된다.[1] 이러한 묘사는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45
[2] 서적 Zizhi Tongjian vol. 69
[3] 서적 Sanguozhi vol. 32
[4] 서적 Sanguozhi vol. 55
[5] 서적 Sanguozhi vol. 45
[6] 서적 『三国志』蜀書 先主伝
[7] 서적 『三国志』呉書 潘璋伝
[8] 서적 『三国志』呉書 陸遜伝
[9] 서적 『三国志』潘璋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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