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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톤섬·레넉스섬·누에바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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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픽턴섬·레넉스섬·누에바섬은 비글 해협 남쪽에 위치한 섬들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칠레와 아르헨티나 간의 영유권 분쟁의 대상이 되었다. 1881년 칠레-아르헨티나 국경 조약 이후 칠레 영토로 간주되었으나, 아르헨티나가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영국 여왕의 중재와 요한 바오로 2세의 중재를 거쳐 1983년 아르헨티나가 칠레의 영유권을 인정하며 영토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 섬들은 쥘 베른의 소설 배경이 되기도 했으며, 푸에르토 배너는 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함대의 기항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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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톤섬·레넉스섬·누에바섬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리 정보
1915년 픽톤섬의
1915년 픽톤섬의 "푸에르토 피에드라"
일반 정보
현지 이름이슬라스 픽톤, 누에바 이 레녹스(Islas Picton, Nueva y Lennox)
약칭PNL, PLN
해양태평양
수역대서양(섬 동쪽)
행정 구역
국가칠레
레히온마가야네스 주
지방안타르티카칠레나 지방
코무나카보데오르노스
인구 정보
기타 정보
추가 정보NGA UFI=-896223 (픽톤), -893896 (누에바), -888860 (레녹스)

2. 역사

로버트 피츠로이와 필립 파커 킹의 탐험 이후, 19세기 말 칠레 정부는 이 섬들에 대한 토지 사용권을 부여했고, 20세기 초에는 가축 사육과 광업을 위한 정착이 이루어졌다. 1914년 독일 동아시아 함대가 푸에르토 배너에 정박하면서 칠레의 중립성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후 푸에르토 배너는 칠레 해군의 석탄 공급 기지로 지정되었다. 칠레 토지 개혁 기간 동안, 나바리노 섬의 동쪽 부분과 세 섬(86,000 ha)은 경제적 단위 계획의 일부였다.[3]

비글 해협 남쪽에 위치하고 태평양대서양 사이의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이 섬들은 1904년부터 아르헨티나에 의해 영유권이 주장되었다. 이는 어업, 다른 섬, 남극에 대한 영유권 주장과 관련이 있었다. 1971년 칠레살바도르 아옌데아르헨티나의 알레한드로 라누세는 중재 협정에 서명했지만, 1978년 아르헨티나는 중재 결정을 거부하고 오페라시온 소베라니아를 계획하며 칠레와 전쟁 직전까지 갔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 이후,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세 섬의 군사 점령을 계획하기도 했다.

1979년 요한 바오로 2세의 중재와 1985년 평화 우호 조약 비준, 그리고 1983년 라울 알폰신 정권의 칠레와의 화해를 통해 3개 섬의 칠레 영유를 인정함으로써 영토 문제는 해결되었다. 2007년부터 칠레에서는 육군과 해군의 지뢰 제거 부대가 지뢰 제거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8]

2. 1. 초기 역사와 명칭

로버트 피츠로이와 필립 파커 킹은 이 섬을 서인도 제도의 초대 영국 총독인 토머스 픽턴을 기려 "픽턴"이라고 명명했다. 레녹스 섬은 1624년 네덜란드 제독 사펜함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처음 발견한 장교의 이름을 따서 테르할텐이라고 명명했다가 이후 피츠로이와 파커 킹에 의해 이름이 바뀌었다.[2]

1881년 칠레와 아르헨티나 간의 국경 조약이 체결된 이후 1904년까지 이 섬들은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칠레 영토로 간주되었다.

19세기 말, 칠레 정부는 누에바 섬에 안토니오 밀리치치, 레녹스 섬에 에스테반 론카릭, 토머스 브리지스에게 픽턴 섬에 대한 최초의 토지 사용권을 부여했다. 1910/11년에는 누에바 섬의 칼레타 라스 카사스, 픽턴 섬의 푸에르토 피에드라, 레녹스 섬의 칼레타 오로와 칼레타 쿠테르에 사람들이 거주했다.[3] (Caleta|칼레타es는 스페인어로 '작은 만'을 뜻한다). 이 토지 사용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기업가들에게 이전되었으며, 주로 가축 사육이나 광업을 위해 사용되었다.

2. 2.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분쟁

비글 해협 남쪽에 위치해 있다는 점과, 대서양을 직면하고 있다는 두 가지 지리적인 이점으로 인해, 아르헨티나가 소유권을 주장하였고 이는 이웃하는 칠레를 자극해, 심각한 영토 분쟁을 벌이게 되었다.[2] 이후 두 나라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에 의한 중재에 따르기로 동의하였다. 그러나 1977년 5월, 여왕은 섬과 모든 근접한 형성물이 칠레에 속한다라는 규정을 내렸다. 이에 아르헨티나는 그 규정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으며, 이 때문에 칠레와 아르헨티나 양국 간의 관계는 극도로 긴장되어 갔으며, 전쟁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1979년 몬테비데오 조약을 통하여 두 나라는 합의를 이루었다.[2]

비글 해협, 태평양에서 대서양까지.


1881년 칠레와 아르헨티나 간의 국경 조약이 체결된 이후 1904년까지 이 섬들은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칠레 영토로 간주되었다. 19세기 말, 칠레 정부는 누에바 섬에 안토니오 밀리치치, 레녹스 섬에 에스테반 론카릭, 토머스 브리지스에게 픽턴 섬에 대한 최초의 토지 사용권을 부여했다. 1910/11년에는 누에바 섬의 ''칼레타 라스 카사스'', 픽턴 섬의 ''푸에르토 피에드라'', 레녹스 섬의 ''칼레타 오로''와 ''칼레타 쿠테르''에 사람들이 거주했다.[3] (''칼레타''는 스페인어로 '작은 만'을 뜻한다). 이 토지 사용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기업가들에게 이전되었으며, 주로 가축 사육이나 광업을 위해 사용되었다.

비글 해협 남쪽에 위치하고 태평양대서양 사이의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이 섬들은 1881년 조약 때문이 아니라 소위 "정치적 이유"로 1904년부터 아르헨티나에 의해 영유권이 주장되었다. 피크턴, 레녹스, 누에바 섬을 통제하는 정부는 더 멀리 떨어진 해양(어업에 중요), 다른 여러 섬, 그리고 자원 개발과 탐사가 중요한 남극까지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이 섬들의 지배권을 둘러싼 분쟁은 20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1971년 7월 22일, 칠레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었던 살바도르 아옌데와 알레한드로 라누세는 중재 협정([https://web.archive.org/web/20120202082203/http://untreaty.un.org/cod/riaa/cases/vol_XXI/53-264.pdf '''1971년 중재 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은 양국 간의 영토 및 해양 경계 분쟁, 특히 남아메리카 대륙 최남단에 있는 피크턴, 누에바, 레녹스 섬의 영유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협정은 영국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후원 하에 구속력 있는 중재에 회부되었다.

1978년 1월 25일, 아르헨티나는 중재 결정을 거부했다. 아르헨티나는 전쟁 준비를 시작했고, 세 섬과 에르미테 섬, 월라스턴 섬이 아르헨티나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 오페라시온 소베라니아에 대한 억지력을 높이기 위해 칠레 해군은 섬의 전략적 지역에 지뢰밭을 설치했다.[4] 1978년 12월 22일, 아르헨티나는 이 섬들과 칠레 본토를 침공하기 위해 오페라시온 소베라니아를 시작했다가 몇 시간 만에 중단했다.[5] 아르헨티나 정부는 작전을 중단했지만 칠레에 압력을 가하기 위한 군사력 사용을 포기하지 않았다.[6] 1982년 아르헨티나 포클랜드 침공 직후 설치된 마지막 지뢰밭은 2007년부터 칠레 육군과 해군의 지뢰 제거 부대가 지뢰 제거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8]

1979년에 양국은 요한 바오로 2세의 중재에 동의했고 1985년 5월에 평화 우호 조약을 비준했다. 1983년에 아르헨티나가 라울 알폰신 정권 하에 칠레와의 역사적인 화해를 추진하여 3개의 섬의 칠레 영유를 인정함으로써, 3개의 섬을 둘러싼 영토 문제는 해결되었다.

2. 3. 중재와 갈등 고조

비글 해협 남쪽에 위치하고 대서양을 마주보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아르헨티나는 이 섬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고, 이는 칠레와의 심각한 영토 분쟁으로 이어졌다. 양국은 영국 엘리자베스 2세의 중재에 동의했다. 그러나 1977년 5월, 여왕은 섬과 모든 근접한 형성물이 칠레에 속한다고 판정했다.[4] 아르헨티나는 이 판정을 거부했고, 양국 관계는 극도로 긴장되어 전쟁 직전까지 갔다.[5]

1978년 1월 25일, 아르헨티나는 중재 결정을 거부하고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픽톤섬, 레넉스섬, 누에바섬과 에르미테 섬, 월라스턴 섬이 아르헨티나의 주요 목표였다.[4] 칠레 해군은 오페라시온 소베라니아에 대한 억지력을 높이기 위해 섬의 전략적 지역에 지뢰밭을 설치했다.[4] 1978년 12월 22일, 아르헨티나는 이 섬들과 칠레 본토를 침공하기 위해 오페라시온 소베라니아를 시작했다가 몇 시간 만에 중단했다.[5] 1982년 포클랜드 침공 이후,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세 섬의 군사 점령을 계획했다.[7] 당시 아르헨티나 공군 참모총장이었던 바실리오 라미 도조 준장은 아르헨티나 잡지 ''페르필''과의 인터뷰에서 L.F. 갈티에리가 ''"[칠레]는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칠레가 다음 차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고 밝혔다.[7]

1979년 양국은 요한 바오로 2세의 중재에 동의했고, 1985년 평화 우호 조약을 비준했다. 1983년, 아르헨티나가 라울 알폰신 정권 하에 칠레와의 역사적인 화해를 추진하여 3개 섬의 칠레 영유를 인정함으로써 영토 문제는 해결되었다.

2. 4. 평화적 해결

1977년 5월, 엘리자베스 2세비글 해협 남쪽에 위치한 섬들과 모든 근접한 형성물이 칠레에 속한다는 규정을 내렸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그 규정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으며, 이 때문에 칠레와 아르헨티나 양국 간의 관계는 극도로 긴장되어 전쟁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1] 1979년 양국은 요한 바오로 2세의 중재에 동의했고,[2] 1985년 5월에 평화 우호 조약을 비준했다.[2] 1983년 라울 알폰신 정권 하의 아르헨티나가 칠레와의 역사적인 화해를 추진하여 픽톤섬, 레넉스섬, 누에바섬의 칠레 영유를 인정함으로써, 3개 섬을 둘러싼 영토 문제는 해결되었다.[2]

3. 푸에르토 배너

1914년 12월 3일부터 6일까지, 코로넬 해전 이후 독일 동아시아 함대(장갑순양함 와 , 경순양함 , , 그리고 상선 ''Santa Isabel'', ''Baden'', ''Seydlitz'', 노획한 노르웨이 선박 ''Drummuir'')는 슈페 백작의 지휘 하에 포클랜드 해전으로 향하던 중 푸에르토 배너에 정박했다. 이는 칠레의 중립국 지위 위반으로 간주되었고, 칠레 정부는 푸에르토 배너를 칠레 해군의 석탄 공급 기지로 지정하도록 강요받았다. 푸에르토 배너는 어니스트 섀클턴의 제국 남극 횡단 탐험을 구출하기 위한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옐초''의 석탄 공급 기지 역할을 두 번 수행했다.[3]

4. 문학 작품

쥘 베른이 1897년에 집필하고, 사후인 1909년에 아들 미셸에 의해 ''조나단호의 난파자들''(Les naufragés du "Jonathan")이라는 제목으로 개작되어 출판된 소설 조나단호의 생존자들(The Survivors of the 'Jonathan')(또는 "마젤라니아호"(Magellania))[9]은 누에바 섬에 사는 카우-제르라는 수수께끼의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의 좌우명은 "신도 없고 주인도 없다"이다. 그는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서구 문명과의 모든 접촉을 거부하고, 마젤라니아(Magellania)의 원주민들을 돕는다. 그러나 1881년의 경계 조약은 이 지역의 무주지 상태를 종식시키기 때문에 그의 파라다이스인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를 파괴할 것이다.

참조

[1] 웹사이트 UN SYSTEM-WIDE EARTHWATCH Web Site, Island directory, Chile http://islands.unep.[...] 2013-05-01
[2]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Chile https://books.google[...]
[3] 문서 Crónica de las tierras del sur del Canal Beagle
[4] 웹사이트 Landmines in Chile: Who is at Risk? http://maic.jmu.edu/[...] 2013-10-09
[5] 뉴스 Clarín http://www.clarin.co[...] Clarín 1998-12-20
[6] 서적 Violent Peace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1
[7] 간행물 http://www.diarioper[...] Perfil 2009-11-22
[8] 웹사이트 Chile, 2007 http://www.the-monit[...] Landmine and cluster munition Monitor 2013-10-09
[9] 웹사이트 Les Voyages Extraordinaires http://epguid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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