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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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윤중은 당나라 말기 위박 절도사를 지낸 인물이다. 814년에 태어나, 아버지 한국창의 영향으로 군문에 사관하여 유진과의 전투에 참여했다. 870년 하홍경 사후, 위박 번진의 장병들에 의해 유후로 추대되었고, 당 의종에 의해 위박유후에 임명되었다. 이후 당 희종으로부터 재상직을 하사받고 '윤중'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874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한간이 뒤를 이었다. 산둥성 선현에 위치한 한씨 가족묘지는 한윤중과 그의 친족들의 묘지가 있는 기념물 단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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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중 | |
|---|---|
| 기본 정보 | |
![]() | |
| 본관 | 여흥(驪興) |
| 휘 | 載晃 (재황) |
| 자 | 시백(時伯) |
| 호 | 석파(石坡), 해동(海東) |
| 시호 | 헌의(獻毅) |
| 추존왕 | 헌의대왕(獻毅大王) |
| 가족 관계 | |
| 아버지 | 남연군 이구 |
| 어머니 | 군부인 민씨 |
| 부인 | 부대부인 민씨 |
| 아들 | 고종 |
| 손자 | 순종 |
| 생애 | |
| 출생 | 1820년 12월 21일 (음력 11월 7일) |
| 사망 | 1898년 2월 22일 |
| 묘소 | 경기도 파주 운천면 선영 |
| 업적 | |
| 주요 업적 | 세도 정치 종식 비변사 혁파 경복궁 중건 호포제 실시 사창제 실시 서원 철폐 |
| 기타 | |
| 관련 인물 | 고종 명성황후 최익현 박규수 조대비 |
| 휘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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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한윤중은 당나라 말기 위박 절도사로 재임한 인물이다. 870년 병사들의 반란으로 하권호가 살해된 후 아버지 한국창의 뒤를 이어 군인이 되어 위박 절도사에 올랐다.
873년 당 희종 즉위 후에는 재상 직함인 '동중서문하평장사'를 받고 '운중(雲中)'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874년 사망 후, 그의 아들 한건이 절도사직을 계승했다.
2. 1. 출신 배경 및 초기 경력
한윤중은 814년 당나라 헌종 치세에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위주(魏州, 현재의 허베이성 한단시) 출신으로, 위보 절도사의 수도였다. 그의 아버지 한국창(韓國昌)은 군벌 하홍경 휘하의 위보군에서 오랫동안 복무한 장교였다. 한윤중은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젊은 시절부터 군 복무를 시작했으며, 833년부터 834년까지 당나라 무종 치세에 아버지 한국창과 함께 군사 작전에 참여했다. 이때 하홍경은 황실군에 합류하여 황제의 허가 없이 인접한 조의 절도사(昭義, 현재 산시성 창즈시)를 점령한 유진을 공격했다.[4]2. 2. 위박 번진의 점거
870년경, 하홍경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하전호가 위박절도사가 되었다. 하전호는 어렸지만, 엄격한 형벌과 법령을 실행할 정도로 거칠고 난폭했으며 살인을 좋아하였다. 게다가 하전호가 장병들에게 지급할 급여를 삭감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격분한 장병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하전호는 도주 중에 살해되었다.[5]당시 한군웅은 위박 번진의 대장이었는데, 반란을 일으킨 장병들은 그를 유후(留後)로 추대하였다. 인근 성덕군 절도사(成德軍節度使. 본거지는 현 허베이성 스자좡 시) 왕경숭이 한군웅을 위하여 정절(旌節. 절도사 임명 시 사용되는 의장)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왕경숭의 지지로 당 의종은 한군웅을 위박유후(魏博留後)에 임명하였다.[5] 당 의종은 그의 아들인 보왕(普王) 이엄(李儼. 훗날의 당 희종)을 명목상의 위박절도사로 삼았다.[4] 871년, 한군웅은 정식으로 절도사에 임명되었다.[5]
2. 3. 절도사 재임과 죽음
870년 당 의종 연간에 하홍경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하전호가 위박절도사가 되었다. 하전호는 어렸지만, 엄격한 형벌과 준엄한 법령을 실행할 정도로 거칠고 교만하고 난폭하여 살인을 좋아하였다. 게다가, 하전호가 장병들의 급여를 삭감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격분한 장병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하전호는 도주 중에 살해되었다.[5]당시 한군웅은 위박 번진의 대장이었는데, 반란을 일으킨 장병들은 그를 유후(留後)로 추대하였다. 인근 성덕군 절도사(본거지는 현 허베이성 스자좡 시) 왕경숭이 한군웅을 위하여 정절(旌節. 절도사 임명에 사용되는 의장)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의종은 왕경숭의 지지로 한군웅을 위박유후에 임명하였다.[5] 그리고 그의 아들인 보왕 이엄(훗날의 당 희종)을 명목상 위박절도사로 삼았다.[4] 871년, 한군웅은 정식으로 절도사에 임명되었다.[5]
873년, 의종이 사망하고 이엄(이현으로 개명)이 당 희종으로 즉위하였다. 희종은 즉위하면서 몇몇 절도사들에게 재상의 명예 직함을 하사하였는데, 한군웅은 동중서문하평장사를 받았다. 희종은 그에게 '윤중(允中, 중심에 뜻을 둠. 즉 공평함)'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한군웅은 '''한윤중'''으로 불리게 되었다.[5] 한윤중은 절도사에 취임했을 당시 검교공부상서였는데, 이후 검교사공으로 승진하였다.[4]
874년 11월, 한윤중은 6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위박 번진의 장병들은 그의 아들인 절도부사 한간을 유후로 추대하였고, 희종은 한간을 위박유후로 삼았다.[5] 한윤중은 사후 태위에 추증되었다.[4]
3. 평가 및 기념
한윤중은 신도 전통에 따라 조성된 한씨 가족묘지()에 안장되었으며, 이 묘역은 중요 역사 및 문화 유적 국가 목록에 등재되어 있다.[3]
3. 1. 한씨 가족묘지
한씨 가족묘지()는 한윤중과 그의 친족들의 묘지가 있는 기념물 단지이다. 수구의 비석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한 쌍의 비희 받침대 비석과 기타 조각상이 있으며, 이는 신도 전통에 따른 것이다. 이곳은 중요 역사 및 문화 유적 국가 목록에 등재되어 있다.[3]이 단지는 산둥성 선현 인근 둥두좡 진() 량피잉 촌() 근처에 있다.[3]
참조
[1]
서적
Old Book of Tang
https://zh.wikisourc[...]
[2]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3]
블로그
韩王墓
http://blog.sina.com[...]
Tombs of Princes Han
[4]
서적
구당서
https://zh.wikisourc[...]
권 181 - 열전(列傳) 제131
[5]
서적
자치통감
https://zh.wikisourc[...]
권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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