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릴 술탄 이븐 미란 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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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할릴 술탄은 티무르 제국의 통치자였으며, 티무르의 손자이다. 그는 티무르의 인도 원정에 참여하여 페르가나를 분봉받았으며, 티무르 사후 스스로 후계자를 자처하며 사마르칸드를 장악했다. 그러나 샤 루흐와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포로가 되었고, 이후 라이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내 샤드 알물크는 할릴의 몰락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할릴 사후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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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릴 술탄 이븐 미란 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직함 | 술탄 |
칭호 | 티무르 제국의 아미르 |
전체 이름 | 부르한 웃딘 할릴 |
로마자 표기 | Bureuhan Utddin Hallil |
출생 | 1384년 |
사망 | 1411년 11월 4일 (27세) |
사망 장소 | 레이, 티무르 제국, 현재의 이란 테헤란 레이 |
종교 | 이슬람교 |
계승 | 티무르 제국의 아미르 |
선임자 | 티무르 |
후임자 | 샤 루흐 |
통치 | |
재위 기간 | 1405년 2월 18일 ~ 1409년 |
가문 | |
왕조 | 티무르 왕조 |
아버지 | 미란 샤 |
어머니 | 세빈 베그 칸자다 |
배우자 | 자한 술탄 아가 샤드 말리크 아가 다른 아내 1명 |
자녀 | 알리 미르자 무함마드 바하두르 미르자 베르쿨 미르자 탈루체르 미르자 무함마드 바이크라 미르자 시린 베그 아가 사라이 말리크 아가 술탄 바디 알 물크 아가 |
2. 생애
할릴 술탄은 티무르 제국의 창건자 티무르의 손자로, 티무르 생전에 총애를 받으며 인도 원정 등에서 활약했고 페르가나 계곡을 다스렸다.[2][6]
1405년 티무르가 사망하자, 할릴 술탄은 티무르가 지명한 후계자 피르 무함마드를 제치고 재빨리 수도 사마르칸트를 장악하여 스스로 티무르의 후계자임을 선언했다.[2][8][12] 그는 티무르의 막대한 유산을 차지하고 잠시 마 와라 알나흐르 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15][18]
그러나 그의 통치는 시작부터 불안정했다. 헤라트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운 티무르의 아들 샤 루흐가 그의 권위에 도전했고[19], 사마르칸트 내부에서도 귀족들과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특히 그가 총애했던 아내 샤드 물크는 국정에 개입하여 귀족들의 반감을 샀으며[3][6], 기근까지 겹쳐 민심이 악화되었다.[3][6] 여러 차례 반란이 일어났고[23], 결국 1409년 할릴 술탄은 모굴리스탄 칸국의 유력자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다.[25]
그 사이 샤 루흐가 사마르칸트를 점령했고[22], 할릴 술탄은 샤 루흐에게 항복했다. 샤 루흐는 그를 이란의 레이 총독으로 임명했으나, 할릴 술탄은 1411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내 샤드 물크도 그의 죽음 직후 자살했다고 전해진다.[5][6]
2. 1. 초기 생애와 티무르의 총애
티무르의 생애 동안 할릴 술탄은 티무르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2] 그는 1398년부터 1399년에 걸친 티무르의 인도 원정에서 군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냈고,[6][2] 1402년에는 페르가나 계곡의 통치자로 임명되었다.[6][2] 1404년부터 시작된 티무르 최후의 원정인 동방 원정에서는 우익군 지휘관으로 참가하여 타슈켄트에 주둔했다.[8]2. 2. 티무르 사후 권력 투쟁
1405년 2월 티무르가 오트랄에서 사망하자, 그의 제국은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혼란에 빠졌다. 티무르는 죽기 직전 손자인 피르 무함마드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9], 당시 피르 무함마드는 칸다하르에 주둔하고 있어 수도 사마르칸트로 즉시 귀환하기 어려웠다[8]。할릴 술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스스로 티무르의 후계자임을 선언하며 사마르칸트 장악에 나섰다.티무르의 사망 소식을 들은 조카 술탄 후세인이 먼저 사마르칸트로 진군하자, 오트랄에 있던 티무르의 측근들은 할릴에게 밀사를 보내 술탄 후세인의 저지를 요청했다[10]。할릴은 재산 분배를 약속하며 일부 아미르(귀족)들과 사마르칸트 지사 아르군 샤의 지지를 확보했고, 아르군 샤는 술탄 후세인을 비롯한 다른 왕족들의 사마르칸트 입성을 막았다[11]。티무르의 유언을 따르겠다는 서약을 하고 다른 아미르들의 지지까지 얻은 할릴은 1405년 3월 18일, 마침내 사마르칸트에 입성했다[12]。그는 사마르칸트에 축적된 막대한 보물과 재산을 접수하고[15], 튀르크와 몽골의 관습에 따라 티무르의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며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했다[16]。또한, 할릴은 티무르가 생전에 후계자로 지명했던 또 다른 사촌 무함마드 술탄의 어린 아들 무함마드 자한기르를 꼭두각시 칸으로 내세워[17], 그의 이름으로 칙령을 반포하면서도 화폐와 후트바(금요 예배 설교)에는 자신의 이름을 넣어 실질적인 통치자임을 분명히 했다[18]。할릴은 술탄 후사인 타이치우드와 같은 다른 티무르 왕족의 지지도 확보했다.[2]
그러나 헤라트를 중심으로 호라산 지방을 통치하던 티무르의 넷째 아들 샤 루흐는 티무르의 유언을 무시한 할릴의 행동에 강력히 반발했다[19]。샤 루흐는 할릴을 상대로 아무다리야강(옥수스 강)까지 진군했으나, 할릴의 아버지 미란 샤와 형제 아부 바크르 이븐 미란 샤가 아제르바이잔에서 지원군을 이끌고 오자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티무르 제국은 할릴을 중심으로 한 미란 샤 가문 지지 파벌과 샤 루흐 파벌로 양분되었다[19]。
할릴은 1406년 2월 카르시 근교 전투에서 티무르가 지명한 후계자 피르 무함마드 군대를 격파했고[21], 패배한 피르 무함마드는 발흐로 후퇴했다. 이듬해인 1407년 2월, 할릴은 모략을 통해 피르 무함마드를 살해하여 경쟁자를 제거했다[22]。
하지만 할릴의 통치는 점차 불안정해졌다. 그는 아신 사이푸딘의 아내였던 샤드 물크를 왕비로 맞이하여 총애했는데[6], 샤드 물크는 국정에 깊이 관여하며 신분이 낮은 인물들을 중용하고 티무르 시대의 원로들과 왕족들을 존중하지 않아 귀족들의 큰 반감을 샀다[6][3]。게다가 기근까지 겹치면서 민심은 더욱 악화되었다[6][3]。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북동부 지역에서는 자라이르 부족의 샤이크 누르딘과 모굴리스탄 칸국의 유력자 후다이다드 후세인이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켰다. 오트랄, 타슈켄트, 호젠트, 안디잔, 시그나크 등 광범위한 지역이 반란군의 수중에 넘어갔고[23], 할릴은 여러 차례 원정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24]。결국 할릴은 자신의 옛 스승인 후다이다드 후세인과 함께 페르가나 계곡으로 돌아가 모굴리스탄의 지원을 얻으려 했으나[3], 1409년 3월 오히려 후다이다드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다[22][25]。페르시아 역사가 흐반다미르는 후다이다드가 할릴에게 반기를 들어 포로로 잡은 뒤 동 차가타이 칸국의 칸 샴스-이-자한에게 넘겼으나, 샴스-이-자한은 오히려 후다이다드를 처형하고 할릴을 풀어주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4]
할릴이 사마르칸트를 비운 사이, 샤 루흐는 1409년 5월 13일 저항 없이 사마르칸트에 입성했다[22]。샤 루흐는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을 아들 울루그 베그에게 맡겼다. 결국 할릴은 샤 루흐에게 항복했고, 샤 루흐는 할릴의 아내 샤드 물크를 돌려주고 그를 이란의 레이 총독으로 임명했다. 할릴은 1411년 레이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아내 샤드 물크는 할릴이 죽은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해진다[6][5]。
2. 3. 사마르칸트 통치와 몰락
1405년 티무르가 사망하자 할릴 술탄은 스스로를 티무르의 후계자로 선언했다.[2] 티무르가 생전에 후계자로 지명했던 사촌 피르 무함마드는 칸다하르에 주둔하고 있어 수도 사마르칸트로 즉시 귀환하기 어려웠고, 이 틈을 타 할릴은 사마르칸트로 향했다.[8][10] 그는 재산 분배를 약속하며 일부 아미르(귀족)들과 사마르칸트 지사 아르군 샤의 지지를 확보했고, 아르군 샤는 술탄 후사인 타이치우드, 울루그 베그 등 다른 왕족들의 사마르칸트 입성을 막았다.[11] 할릴은 티무르의 유언을 준수하겠다는 선서를 하고 다른 아미르들의 지지를 얻어 1405년 3월 18일 사마르칸트에 입성했다.[12] 그는 사마르칸트에 축적된 막대한 보물과 재산을 확보하고[14][15], 튀르크와 몽골의 관습에 따라 티무르의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며 자신의 후계자 지위를 강조했다.[16] 또한, 할릴은 티무르가 차가타이 칸국의 꼭두각시 칸에게 부여했던 방식을 따라, 사망한 사촌 무함마드 술탄의 어린 아들 무함마드 자한기르를 명목상의 칸으로 내세우고 그의 이름으로 칙령을 반포하는 한편, 화폐와 후트바(금요 예배 설교)에는 자신의 이름을 넣었다.[17][18] 할릴은 티무르의 또 다른 손자인 술탄 후사인 타이치우드를 동맹으로 확보하기도 했다.[2]헤라트를 다스리던 티무르의 넷째 아들 샤 루흐는 할릴의 행동에 반발하여 아무다리야강(옥수스 강)으로 진군했다.[2][19] 그러나 할릴의 아버지 미란 샤와 형제 아부 바크르 이븐 미란 샤가 아제르바이잔에서 지원군을 이끌고 오자 샤 루흐는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2] 그럼에도 할릴의 입지는 불안정했다. 마 와라 알나흐르 지역을 장악했지만, 제국은 할릴을 지지하는 미란 샤 가문 파벌과 티무르의 유언을 중시하는 샤 루흐 파벌로 나뉘었다.[19] 사마르칸트의 귀족과 민중들은 할릴을 싫어했는데, 특히 귀족들은 할릴이 총애한 아내 샤드 물크를 경멸했다.[3][6] 샤드 물크는 본래 아신 사이푸딘의 아내였으나 할릴의 왕비가 되었으며[6], 할릴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신분이 낮은 인물들을 고위직에 임명하도록 부추기고 티무르 시대의 원로들이나 미망인들을 존중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3][6] 게다가 기근까지 겹치면서 민심은 더욱 악화되었다.[3][6]
한편, 할릴은 티무르가 지명한 후계자였던 피르 무함마드와도 대립했다. 피르 무함마드는 샤 루흐와 연합하여 마 와라 알나흐르로 진군했으나, 1406년 2월 카르시 교외 전투에서 할릴에게 패배하고 발흐로 후퇴했다.[21] 이듬해인 1407년 2월, 할릴은 모략을 통해 피르 무함마드를 살해하는 데 성공했다.[22]
그러나 할릴의 통치는 계속해서 도전을 받았다. 북동부에서는 자라이르 부족의 샤이크 누르딘이 모굴리스탄 칸국의 유력자 후다이다드와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켜 오트랄, 타슈켄트, 호젠트, 안디잔, 시그나크 등 넓은 지역을 장악했다.[23] 할릴은 여러 차례 원정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24] 할릴과 후다이다드의 관계에 대해서는 상반된 기록이 존재한다. 할릴이 페르가나 계곡으로 돌아가 옛 스승이었던 후다이다드를 통해 모굴리스탄의 지원을 얻으려 했다는 설[3]과, 페르시아 역사가 흐반다미르의 기록처럼 후다이다드가 할릴을 배신하고 포로로 잡아 동 차가타이 칸 샴스-이-자한에게 넘겼으나 오히려 샴스-이-자한이 후다이다드를 처형하고 할릴을 풀어주었다는 설이 있다.[4]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후다이다드는 샤 루흐와 연합하여 할릴을 공격했고, 1409년 3월 할릴은 결국 후다이다드의 포로가 되었다.[22][25]
할릴이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샤 루흐는 마 와라 알나흐르로 진격하여 1409년 5월 13일, 저항 없이 사마르칸트에 입성했다.[5][22] 샤 루흐는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을 자신의 아들 울루그 베그에게 맡겼다.[5] 할릴은 샤 루흐가 자신의 아내 샤드 물크를 사로잡고 있다는 것을 알고 항복했다.[5] 샤 루흐는 할릴에게 아내를 돌려주고 이란의 레이 총독으로 임명했다.[5] 할릴은 1411년 레이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아내 샤드 물크는 할릴이 죽은 직후 단검으로 자결했다고 전해진다.[5][6]
2. 4. 샤 루흐와의 관계와 죽음
티무르 사후 할릴 술탄은 스스로 후계자를 자처하며 사마르칸드를 장악했지만, 헤라트를 다스리던 티무르의 넷째 아들 샤 루흐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샤 루흐는 할릴 술탄을 상대로 아무다리야강(옥수스 강)까지 진군했으나, 할릴의 아버지 미란 샤와 형제 아부 바크르 이븐 미란 샤가 아제르바이잔에서 지원군을 이끌고 오자 일단 물러났다.[2]하지만 할릴 술탄의 입지는 점차 불안정해졌다. 사마르칸드의 귀족들은 할릴 술탄의 아내 샤드 물크를 탐탁지 않게 여겼는데, 그녀가 신분이 낮은 인물들을 고위직에 임명하도록 할릴 술탄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3][6] 또한 기근까지 겹치면서 민심은 더욱 악화되었다.[6]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할릴 술탄은 1406년 2월 카르시 교외 전투에서 피르 무함마드에게 승리하고[21] 이듬해 그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22], 북동부 지역에서는 자라이르 부족의 샤이크 누르딘 등이 모굴리스탄 칸국의 유력자 호다이다드와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켜 오트랄, 타슈켄트, 호젠트, 안디잔, 시그나크 등 여러 지역이 할릴 술탄의 통제에서 벗어났다.[23][24] 결국 할릴 술탄은 옛 스승이었던 호다이다드 후세인에게 의지하려 했으나[3], 오히려 그에게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다.[25] 페르시아 역사가 흐반다미르는 호다이다드 후세인이 할릴 술탄을 배신하고 포로로 잡아 동 차가타이 칸국의 칸 샴스-이-자한에게 넘겼다고 기록했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샴스-이-자한이 후다이다드 후세인을 처형하고 할릴 술탄을 풀어주었다고도 한다.[4]
결국 1409년 5월 13일, 샤 루흐는 별다른 저항 없이 사마르칸드에 입성하여 도시를 장악했다.[22] 샤 루흐는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을 자신의 아들 울루그 베그에게 맡겼다. 할릴 술탄은 샤 루흐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샤 루흐는 그의 아내 샤드 물크를 돌려주고 이란의 레이 지역 총독으로 임명했다. 할릴 술탄은 1411년 레이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아내 샤드 물크는 남편이 죽은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해진다.[5][6]
3. 가족 관계
'''배우자'''
칼릴 술탄은 최소 다섯 명의 부인 또는 첩을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름 | 비고 |
---|---|
자한 술탄 아가 | 알리 미르자 아르라트의 딸 |
샤드 말리크 아가 | |
(알리 미르자의 어머니) | 이름 알려지지 않음 |
투크마크 | 여자 노예 |
(이름 미상) | 이름 알려지지 않은 1명의 妃 |
'''자녀'''
칼릴 술탄은 최소 여섯 명의 아들과 다섯 명의 딸을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름 | 구분 | 어머니 | 비고 |
---|---|---|---|
알리 미르자 | 아들 | 이름 알려지지 않음 | |
무함마드 바하두르 미르자 | 아들 | 자한 술탄 아가 | |
베르쿨 미르자 | 아들 | 자한 술탄 아가 | |
무함마드 바예카라 미르자 | 아들 | 샤드 말리크 아가 | |
부르굴 | 아들 | 정보 없음 | |
무함마드 바키르 | 아들 | 정보 없음 | |
키차크 아가 (시린 베그 아가) | 딸 | 자한 술탄 아가 | |
사라이 말리크 아가 | 딸 | 샤드 말리크 아가 | |
술탄 바디 알-물크 아가 | 딸 | 샤드 말리크 아가 | 샤 루흐의 아들인 울루그 베그와 결혼[26] |
자한 술탄 베킴 | 딸 | 정보 없음 | |
샤디 물크 | 딸 | 정보 없음 |
참조
[1]
서적
A Century of Princes: Sources on Timurid History and Art
1989
[2]
문서
[3]
문서
[4]
서적
The history of Persia. Containing, the lives and memorable actions of its kings from the first erecting of that monarchy to this time; an exact Description of all its Dominions; a curious Account of India, China, Tartary, Kermon, Arabia, Nixabur, and the Islands of Ceylon and Timor; as also of all Cities occasionally mention'd, as Schiras, Samarkand, Bokara, &c. Manners and Customs of those People, Persian Worshippers of Fire; Plants, Beasts, Product, and Trade. With many instructive and pleasant digressions, being remarkable Stories or Passages, occasionally occurring, as Strange Burials; Burning of the Dead; Liquors of several Countries; Hunting; Fishing; Practice of Physick; famous Physicians in the East; Actions of Tamerlan, &c. To which is added, an abridgment of the lives of the kings of Harmuz, or Ormuz. The Persian history written in Arabick, by Mirkond, a famous Eastern Author that of Ormuz, by Torunxa, King of that Island, both of them translated into Spanish, by Antony Teixeira, who liv'd several Years in Persia and India; and now render'd into English.
[5]
문서
[6]
서적
ムガル皇帝歴代誌
[7]
서적
ティムール帝国
[8]
서적
ティムール帝国
[9]
서적
ティムール帝国
[10]
간행물
チムールの帝国
[11]
간행물
チムールの帝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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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ティムール帝国
[13]
간행물
チムールの帝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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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チムールの帝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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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ティムール帝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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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ティムール帝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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ティムール帝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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ティムール帝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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ティムール帝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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ティムール帝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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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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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서적
ティムール帝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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