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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아나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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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아나 1세는 1273년 샹파뉴에서 태어나 나바라의 헨리 1세의 딸로, 이듬해 아버지의 죽음으로 샹파뉴 여백작이자 나바라 여왕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섭정을 받았으며, 프랑스 필리프 3세의 보호를 받으며 프랑스의 필리프 4세와 결혼하여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호아나는 필리프 4세와의 사이에서 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 이사벨 등을 낳았고, 1305년 사망했다. 그녀는 나바라 여왕으로서는 통치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샹파뉴 백작부인으로서는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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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아나 1세
기본 정보
프랑스 왕비로서 자선가인 나바라의 후아나 1세, 1305년경, 석회암
후아나 여왕, 1305년경, 석회암
군주 칭호나바라 여왕
샹파뉴 여백작
배우자 칭호프랑스 왕비
재위 기간1274년 7월 22일 – 1305년 4월 2일
프랑스 왕비 재위 기간1285년 10월 5일 – 1305년 4월 2일
프랑스 왕비 대관식1286년 1월 5일
프랑스 왕비 대관식 종류대관식
이전 군주엔리케 1세
다음 군주루이 1세
섭정필리프 1세 (1284년–1305년)
공동 통치자필리프 1세
배우자필리프 4세 (1284년 8월 16일 결혼)
자녀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
이사벨라, 잉글랜드 여왕
가문블루아 가문
블루아-샹파뉴 가문
블루아-나바라 가문
아버지엔리케 1세
어머니블랑슈 다르투아
출생일1273년 1월 14일
출생지바르쉬르센, 프랑스 왕국
사망일1305년 4월 2일 (향년 32세)
사망지뱅센 성, 프랑스 왕국
묻힌 곳파리
에우어어 표기Joana
결혼
배우자프랑스 왕 필리프 4세
이름
프랑스어 표기Jeanne de Champagne

2. 생애

호아나는 1273년 1월 14일 바르쉬르센, 샹파뉴에서 나바라의 헨리 1세와 아르투아의 블랑슈의 딸로 태어났다. 이듬해,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녀는 샹파뉴 여백작이자 나바라 여왕이 되었다. 그녀의 어린 나이 때문에, 어머니 블랑슈는 나바라에서 그녀의 후견인이자 섭정이었다.

외국과 나바라의 여러 세력은 상속녀의 미성년과 여성 섭정의 "약점"을 이용하여 이득을 보려 했고, 이로 인해 호아나와 그녀의 어머니는 프랑스의 필리프 3세의 궁정에서 보호를 구하게 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1274년 프랑스에 도착했고, 1275년 오를레앙 조약을 통해 호아나는 필리프의 아들들 중 한 명 (루이 또는 필리프)과 약혼했다. 따라서 블랑슈는 그녀의 딸과 나바라 정부를 프랑스 왕의 보호 아래 두었다. 이 후 호아나는 필리프와 함께 자랐다. 실제로 그녀가 어린 시절 나바라에 거주했는지는 불분명하다.

1274년, 아버지 엔리케 1세(샹파뉴 백작 앙리 3세)가 사망하면서 왕위와 백작위를 계승했다.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어머니가 섭정으로 정무를 수행했지만, 어린 여왕에 여성 섭정, 게다가 상속자가 적다는 점은 나바라 안팎의 대립 세력에게 빌미를 제공했다. 그래서 모자는 프랑스 왕 필리프 3세에게 보호를 요청했다.[1] 1284년 8월 16일 후아나는 왕세자 필리프(훗날 필리프 4세, 나바라 왕으로서는 펠리페 1세)와 결혼하여 공동 통치를 시작했고, 이후 약 반세기 동안 나바라와 프랑스는 동군 연합이 되었다. 필리프와의 사이에서 루이(스페인어명 루이스, 훗날 루이 10세), 필리프(펠리페, 훗날 필리프 5세), 샤를(카를로스, 훗날 샤를 4세), 이자벨(이사벨,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2세의 왕비) 등을 낳았다.

1305년 후아나는 사망했으며, 센 좌안의 코르들리에 수도원/Couvent des Cordeliers de Paris프랑스어에 매장되었다. 후아나의 사망 원인은 그 상황이 불가해했기 때문에 필리프 4세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2. 1. 어린 시절

호아나는 1273년 1월 14일 바르쉬르센, 샹파뉴에서 나바라의 헨리 1세와 아르투아의 블랑슈의 딸로 태어났다. 이듬해,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녀는 샹파뉴 여백작이자 나바라 여왕이 되었다. 그녀의 어린 나이 때문에, 어머니 블랑슈는 나바라에서 그녀의 후견인이자 섭정이었다.

외국과 나바라의 여러 세력은 상속녀의 미성년과 여성 섭정의 "약점"을 이용하여 이득을 보려 했고, 이로 인해 호아나와 그녀의 어머니는 프랑스의 필리프 3세의 궁정에서 보호를 구하게 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1274년 프랑스에 도착했고, 1275년 오를레앙 조약을 통해 호아나는 필리프의 아들들 중 한 명 (루이 또는 필리프)과 약혼했다. 따라서 블랑슈는 그녀의 딸과 나바라 정부를 프랑스 왕의 보호 아래 두었다. 이 후 호아나는 필리프와 함께 자랐다. 실제로 그녀가 어린 시절 나바라에 거주했는지는 불분명하다.

2. 2. 프랑스 왕비

11세의 나이에 호아나는 1284년 8월 16일, 미래의 필리프 4세와 결혼하여 1년 뒤인 1285년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그들의 세 아들은 차례로 프랑스 왕으로 통치했으며,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 이사벨은 잉글랜드의 왕비가 되었다.

호아나는 프랑스 왕비로서 왕위 계승을 보장했고, 효율적인 궁정의 안주인이었으며, 위엄 있는 영부인이었고, 왕과의 관계도 매우 좋았기에 성공적이었다고 묘사되었다. 함께 자란 부부는 분명히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으며, 필리프는 그녀를 깊이 사랑하고 존경했다고 전해진다. 그녀에 대한 그의 정서적 의존성은 그녀가 나바라를 방문하지 않은 이유로 제시된다. 1294년, 필리프는 그녀의 아들이 미성년인 상태에서 왕위를 계승할 경우 그녀를 프랑스 섭정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나바라와 샹파뉴를 포함한 자신의 영지를 제외하고는 프랑스 문제에 대한 영향력을 맡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1305년에 파리에 나바르 대학교를 설립했다.

2. 3. 나바라 여왕과 샹파뉴 여백작

호아나는 1284년 결혼과 함께 성년으로 선포되었으며, 파리에서 시아버지에게 샹파뉴와 브리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1274년 아버지 엔리케 1세(샹파뉴 백작 앙리 3세)가 사망하면서 나바라 여왕과 샹파뉴 여백작위를 계승했다.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어머니가 섭정을 하였으나, 어린 여왕에 여성 섭정, 게다가 상속자가 적다는 점은 나바라 안팎의 대립 세력에게 빌미를 제공했다. 그래서 모녀는 프랑스 왕 필리프 3세에게 보호를 요청했다.[1]

1284년 8월 16일 호아나는 프랑스 왕세자 필리프(훗날 필리프 4세, 나바라 왕으로서는 펠리페 1세)와 결혼하여 공동 통치를 시작했고, 이후 약 반세기 동안 나바라와 프랑스는 동군 연합이 되었다. 필리프와의 사이에서 루이(스페인어명 루이스, 훗날 루이 10세), 필리프(펠리페, 훗날 필리프 5세), 샤를(카를로스, 훗날 샤를 4세), 이자벨(이사벨,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2세의 왕비) 등을 낳았다.

호아나는 나바라 왕국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는데, 이 왕국은 처음에는 시아버지, 그 다음에는 남편이 호아나의 이름으로 임명한 프랑스 총독이 다스렸다. 프랑스 총독들은 나바라에서 극도로 인기가 없었고, 호아나가 그 나라에 부재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그러나 그녀의 부재에 대한 비난은 그녀 자신이 아닌 프랑스인들에게 향했고, 그녀에 대한 충성심은 의심받지 않았다. 오히려 나바라에서는 프랑스인이 아닌 그녀가 사실상 그들의 군주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멀리서 그녀의 이름으로 칙령이 내려지고, 그녀의 모습이 새겨진 동전이 주조되었으며, 그녀는 예배당과 수도원에 보호를 제공했다. 그녀는 1300년에 카르카손보다 나바라에 더 가까이 간 적이 없었고, 남편은 이 일로 다소 비난을 받았다.

호아나는 샹파뉴 백작부인으로서 훨씬 더 직접적으로 활동했다. 샹파뉴는 왕국이 아닌 백작령이었지만, 훨씬 더 부유하고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필리프 4세는 그녀에게 행정관을 임명했지만, 호아나는 샹파뉴를 정기적으로 방문했고, 통치하는 봉신의 모든 의무에 참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 영역에서 수동적인 인물이 아니라 적극적인 독립적인 통치자로 여겨졌다. 1297년, 그녀는 샹파뉴를 침략한 바르의 앙리 3세 백작에 맞서 군대를 소집하여 이끌었다. 필리프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고, 호아나는 남편과 합류하기 전에 백작을 감옥에 보냈다. 그녀는 또한 샹파뉴와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사기를 통해 자금을 훔쳤다고 비난받은 트루아의 기샤르 주교에 대한 소송에서도 활동했다.

1305년 호아나는 사망했으며, 센 좌안의 에 매장되었다. 호아나의 사망 원인은 그 상황이 불가해했기 때문에 필리프 4세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도 있다.

3. 죽음

4. 자녀

호아나 1세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의 사이에서 3남 4녀를 두었다.


  • 루이 10세: 1305년부터 나바라 국왕 루이 1세, 1314년부터 프랑스 국왕(1289년 10월 – 1316년 6월 5일)
  • 필리프 5세: 1316년부터 1322년까지 나바라 왕국의 왕이자 프랑스의 왕. (1293년경 – 1322년 1월 3일)
  • 샤를 4세: 나바라 왕국의 왕이자 프랑스의 왕. (1294년경 – 1328년 2월 1일)
  • 이사벨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와 결혼 (1295년경 – 1358년 8월 23일)
  • 마르그리트(1288년 – 1294년경)
  • 블랑슈(1290년 – 1294년경)
  • 로베르: (1297년 – 1308년 7월)

참조

[1] 서적 バード、p. 106
[2] 서적 An annotated index of medieval women https://books.google[...] Markus Wiener Publishers 2010-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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