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 신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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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홋카이도 신궁은 홋카이도 개척을 위해 1871년 삿포로 신사로 건립된 신사이다. 홋카이도와 가라후토를 수호하기 위해 건설되었으며, 메이지 천황의 칙령에 따라 오쿠니타마노미코토, 스쿠나비코 신, 오쿠니누시 신의 3신을 모셨다. 1964년 쇼와 천황에 의해 홋카이도 신궁으로 승격되었으며, 메이지 천황을 추가로 모셨다. 홋카이도 개척 관련 인물들을 모신 개척신사 등 여러 섭사가 있으며, 매년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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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신궁 - [지명]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홋카이도 신궁 |
다른 이름 | 삿포로 신사 |
로마자 표기 | Hokkaidō Jingū |
위치 | 마루야마 공원, 474 미야가오카, 주오구, 삿포로시, 홋카이도 064-8505, 일본 |
종교 | 신토 |
창건 | 1871년 |
제례일 | 6월 15일 (삿포로 축제) |
공식 웹사이트 | 공식 홈페이지 |
모시는 신 | |
주요 신 | 오쿠니타마노미코토, 오쿠니누시, 스크나히코나 |
추가 신 | 메이지 천황 |
신사 정보 | |
건축 양식 | 신명조 |
옛 사격 | 관폐대사 |
현 사격 | 별표신사 |
이미지 정보 | |
![]() |
2. 역사
일본 제국은 러시아 제국과의 홋카이도와 가라후토 영유권 분쟁에서 이 지역을 점령하고 수호하기 위해 홋카이도 개척의 일환으로 신사 건립을 추진하였다. 홋카이도 신궁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탄생했으며, 보통 신궁이 남향으로 지어지는 것과 달리 동북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러시아 제국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였다.[1]
1869년, 메이지 천황은 홋카이도 진호신의 제사에 관한 칙령을 발표하고, 오쿠니타마노미코토, 스쿠나비코 신, 오쿠니누시 신의 3신을 홋카이도 개척의 수호신으로 정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들은 '개척삼신(開拓三神)'으로 불렸으며, 초기 국가 신도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2][3]
1871년, 홋카이도 신궁의 전신인 '''삿포로 신사'''(ja)가 건립되어 국폐소사로 지정되었고, 메이지 천황의 칙령에 따른 신사였기에 칙제사 자격도 보유하게 되었다.
1964년, 쇼와 천황은 삿포로 신사를 '''홋카이도 신궁'''으로 승격시켰으며, 이때 메이지 천황의 신령도 새롭게 모셔졌다.[1]
1974년 방화로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1978년에 복원되었다. 현재 홋카이도 신궁은 신사본청의 별표 신사로 지정되어 있다.
2. 1. 홋카이도 개척과 신사 건립 구상
일본 제국은 러시아 제국과의 홋카이도와 가라후토 영유권 분쟁에서 이 지역을 점령하고 수호하기 위해 홋카이도 개척의 일환으로 신사 건립을 추진하였다. 탐험가 마쓰우라 다케시로(松浦武四郎일본어)는 이시카리 대사 건립을 구상했고, 하코다테 하치만구 신사(箱館八幡宮일본어) 궁사인 기쿠치 시게카타(菊池重賢일본어)는 삿포로에 하코다테 하치만궁의 말사를 건립하려 했으나 개척사 설치로 무산되고, 대신 그는 훗날 홋카이도 신궁의 초대 궁사가 되었다.[6]개척사 판관 사가라 마사카쓰(相良正勝일본어)는 삿포로에 홋카이도 11국의 이치노미야를 건립하는 안을 제안했으나 거절되었다.[7] 시마 요시이사는 아스카 시대에 에조 정벌을 실시한 아베 히라후(阿倍比羅夫일본어)를 포함한 삼신을 제사하는 안을 제출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8]
1869년, 메이지 천황은 홋카이도 진호신의 제사에 관한 칙령을 발표하고, 홋카이도 개척의 수호신으로 오쿠니타마노미코토, 스쿠나비코 신, 오쿠니누시 신의 3신을 제정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2. 2. 개척삼신 봉안과 삿포로 신사 건립
1869년, 메이지 천황은 홋카이도 개척을 위한 수호신으로 오쿠니타마노미코토, 오쿠니누시 신, 스쿠나비코 신 3신을 제정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칙령을 발표했다. 이 세 신은 '개척삼신(開拓三神)'으로 불리며, 도쿄에서 홋카이도로 옮겨져 홋카이도 진좌신제가 거행되었다.[1]탐험가 마쓰우라 다케시로는 이시카리 대사를 구상하고 있었고, 하코다테 하치만궁의 궁사였던 기쿠치 시게카타는 삿포로에 자신의 신사 말사를 짓는 것을 추진했으나, 개척사 설치로 실행되지 못했다. 대신 그는 홋카이도 신궁의 궁사가 되었다.[6]
개척사 판관이었던 사가라 마사카쓰는 삿포로에 홋카이도 11국의 이치노미야 건설을 제안했으나 거절되었다.[7] 시마 요시타케는 개척 삼신 외에 아스카 시대 에조 정벌을 실시한 아베 히라후를 합쳐 삼신으로 제사하는 안을 제출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8]
1871년, 홋카이도 신궁의 전신인 '''삿포로 신사'''(ja)가 건립되어 국폐소사로 지정되었고, 메이지 천황의 칙령에 따른 신사였기에 칙제사 자격도 보유하게 되었다.[14][9][12]
2. 3. 마루야마 이전과 발전
1869년, 메이지 천황이 홋카이도 개척을 위한 수호신으로 오쿠니타마, 오쿠니누시 신, 스쿠나비코 신 3신을 제정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1] 이 세 신은 개척 삼신(開拓三神)으로 불렸으며, 도쿄에서 제사를 지낸 후 홋카이도 개척사 관리들에 의해 삿포로로 옮겨졌다.1870년 삿포로에 임시 건물이 세워졌으나, 현재 홋카이도 신궁의 위치는 아니었다. 1871년 현재 위치에 신사를 건립하고 '삿포로 신사(札幌神社)'로 명명했으며, 1871년 9월 14일에 개청식을 거행하였다.
1871년(메이지 4년) 6월 14일, 칙명에 따라 '''삿포로 신사'''로 명명되어 국비소사(國幣小社)에 봉해졌다.[14][9] 당시 기록에 따르면, 메이지 천황의 칙명으로 봉안되었기에 삿포로 신사는 칙제사(勅祭社)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12] 공식적으로 "일노궁(一ノ宮)"으로 지정된 적은 없지만, 일반적으로 "일노궁"이라고 불렸다.[18] 당시 사료나 후세의 문헌에서도 "일노궁"이라고 부르는 예가 많이 보인다.
섬 기유(島義勇)는 원산 지역이 신사 부지로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신사 부지를 정했다.[10] 섬 기유는 웅장한 신전을 짓고자 했으나, 예산 문제로 포기했다. 히가시쿠세 미치요시(東久世通禧)는 섬 기유가 정한 원산에 1871년(메이지 4년) 6월 가마쿠라궁을 본뜬 새로운 신전[17]을 완공하고, 9월 14일에 천궁(遷宮)을 거행했다.[14]
1872년에는 관폐소사(官幣小社)가 되었다. 그러나 개척사 직원들에게 이 승격은 반드시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다. 국폐소사일 때는 개척사에 권한이 있었지만, 관폐소사로 승격함으로써 사소한 일까지 신기성(神祇省), 교부성(教部省) 등의 허가를 얻어야 했다.[24]
초대 궁사(宮司)로 임명된 자가 삿포로에 부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초대 궁사를 역임한 것은 하코다테 하치만궁의 궁사였던 키쿠치 시게카타(菊池重賢)이다.[25]
원산으로의 이전은 참배의 어려움, 신사 운영 자금 고갈 등의 문제를 야기했다. 신사에서 독자적인 수입을 얻기 위해 배찰(配札)을 하려고 했지만, 관사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개척사가 이에 반대했다. 배찰이 허용되기까지는 1900년까지 걸렸다.[26]
처음에는 9월 1일을 예제(例祭)로 정했으나, 1872년(메이지 5년) 6월 15일을 예제(例祭)로 하는 칙지가 내려왔다. 당시 개척장관 구로다 기요타카는 6월 15일 당일에는 관민이 함께 업무를 쉬고 참배하도록 포고하였다.[27] 이후 6월 15일이 삿포로 축제일이 되어, 현재도 당일은 '''향토의 날'''로 삿포로 시내의 공립학교 등에서도 반일 휴업이 실시된다.[28]
2. 4. 국가 신도와 홋카이도 신궁
홋카이도 개척을 위해 건설한 신사로, 당시 이 지역의 개척을 놓고 러시아 제국과 다투고 있었던 일본 제국은 러시아로부터 홋카이도와 가라후토를 점령 및 수호하기 위해 건설하였다. 보통 신궁은 유교적 관례에 따라 남향으로 짓는 반면 이 신궁은 동북쪽을 향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러시아 제국이다.[1]이 신사를 구상한 사람은 탐험가인 마쓰우라 다케시로(松浦武四郎일본어)였다.
1869년, 메이지 천황은 홋카이도 진호신의 제사에 관한 칙령을 발표하여, 홋카이도 개척을 위한 수호신으로 오쿠니타마노미코토, 스쿠나비코 신, 오쿠니누시 신의 3신을 제정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후 홋카이도 진좌신제가 행해지게 된다.
1871년에는 홋카이도 신궁의 전신인 삿포로 신사(札幌神社일본어)가 건립되었으며, 국폐소사의 사격을 부여받음과 동시에 메이지 천황의 칙령으로 인한 신사였기에 칙제사의 사격 역시 보유하게 된다.
개척 삼신은 초기 국가 신도 발전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개척 신학"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2][3]
1964년, 쇼와 천황은 삿포로 신사를 홋카이도 신궁으로 승격시켰으며, 비로소 홋카이도 신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같은 해 메이지 천황의 신령도 새롭게 모셔졌다.[1]
홋카이도의 개척 당시 사할린·쿠릴에 진출을 추진하고 있던 러시아 제국에 대한 방비라는 의미에서, 큰 토리이가 북동쪽을 향하고 있다.
1893년에는 관폐중사, 1899년에는 마침내 관폐대사가 되었다.
전쟁 전에는 지역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한 국가 신도가 행해졌지만, 홋카이도에서는 삿포로 신사가 그 중심지가 되었다. 삿포로 신사에는 황전강구소의 분소가 설치되어 홋카이도 내 신직의 양성 및 교부가 이루어졌다.
이 이전에 홋카이도 각지에 있던 신사는 각 지역 사람들의 개별적인 신앙에 근거하여 건립된 것이었지만, 이후 공식적으로 인가되는 신사는 일본의 제정일치 정치 제도의 하나로서 건립되게 되었다.[29] 홋카이도에서의 삿포로 신사의 모습은, 후에 타이완, 조선 등에 건립되는 외지 신사의 모델이 되었다.[30]
2. 5. 홋카이도 신궁으로 개칭과 현대
1964년 쇼와 천황이 삿포로 신사를 홋카이도 신궁으로 승격시키면서, 홋카이도 신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1] 1968년에는 쇼와 천황과 고준 황후가 홋카이도 신궁을 방문했다.[31]1974년 11월 10일, 방화로 인해 본전, 축사전, 내배전 등이 불타는 사건(홋카이도 신궁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불탄 건물들은 1978년에 재건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신사본청의 별표 신사가 되었다.
3. 제신
- 대국혼신(大国魂神)
- 대나무치신 ( 대국주명(大国主命)의 별명)
- 소명신(少彦名神)
- 메이지 천황
4. 건축물
경내에는 본전, 배전, 기도전, 참집전, 사무소, 직심정, 양심관 등의 건물이 있다. 사무소는 배전 옆에 있는 상 사무소와 밖에 있는 현대식 건물인 본 사무소로 나뉘어 있다. 양심관은 검도 수련관이다.
경내에는 홋카이도 개척에 공헌한 사람들을 모신 개척신사, 홋카이도 광업회 순직자를 기리는 광령신사, 홋카이도 택지은행(北海道拓殖銀行) 순직자를 모신 호타키신사가 있다. 경외에는 개척 삼신을 모시는 홋카이도 신궁 둔궁(北海道神宮頓宮)이 있다.
4. 1. 섭사
開拓神社|가이타쿠 신사일본어경내 말사이다. 홋카이도 개척에 공헌한 37명을 모시고 있다.
인물 | ! 인물 | ! 인물 | ! 인물 |
---|---|---|---|
아즈마 겐 | 이노우에 다다타카 | 이노우에 나가아키 | 이와무라 미치토시 |
오카모토 간스케 | 쿠로다 키요타카 | 코바야시 시게키치 | 콘도 주우조 |
사토 노부카게 | 사노 마고에몬 | 시마 요시타케 | 시미즈다니 킨나루 |
시모쿠니 아키 | 스즈카 진에몬 | 스하라 각베에 | 타카다야 카헤에 |
타케다 노부히로 | 타사키 아즈마 | 다테 쿠니나오 | 다테 쿠니나리 |
다무라 아키마사 | 츠즈키 토요지 | 나카가와 고로지 | 나가야마 타케시로 |
나베시마 나오마사 | 하야카와 야고자에몬 | 히가시쿠세 미치요시 | 혼다 토시아키 |
마츠우라 타케시로 | 마츠카와 벤노스케 | 마츠다 덴주로 | 마쓰마에 요시히로 |
마쓰마에 도쿠히로 | 마미야 린조 | 무라야마 덴베에 | 모가미 토쿠나이 |
보다 벤조 |
鉱霊神社|고레이 신사일본어
경내말사. 홋카이도 광업회 순직자 영령을 모신다.
穂多木神社|호타키 신사일본어
경내말사. 홋카이도 택지은행(北海道拓殖銀行) 순직자 영령을 모신다. "호타키"는 "홋카이도(ほっかいどう) 택지(たくしょく) 은행(ぎんこう)"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32] 코마이누는 드물게 청동제이다.[32]
頓宮|돈궁일본어 - 경외섭사
5. 행사
1월 1일에는 세원제(歳元祭일본어), 1월 3일에는 원시제(元始祭일본어), 1월 4일에는 고신찰소납제(古神札焼納祭일본어)가 열린다.[1] 1월 셋째 주 일요일에는 기청제(祈請祭일본어)가 열린다.[1]
4월 13일에는 시마 판관 위령제(島判官慰霊祭일본어)가 열린다.[1]
6월 15일에는 예제(例祭일본어)가 열린다.[1] 홋카이도 신궁의 주요 축제는 매년 6월 14일부터 16일까지 열리며, "삿포로 축제(삿포로 마쓰리)"라고도 불린다.[5] 이때 신여(미코시)를 짊어진 사람들의 행렬이 신궁으로 향하는 거리를 행진한다.[5] 처음에는 9월 1일을 례제로 정했으나, 1872년(메이지 5년) 6월 15일을 례제로 하는 칙지가 내려왔다.[27] 당시 개척장관 구로다 기요타카(黒田清隆)는 6월 15일 당일에는 관민이 함께 업무를 쉬고 참배(멀리 있는 경우에는 원거리 참배)하도록 포고하였다.[27] 이후 6월 15일이 삿포로 축제일이 되어, 현재도 당일은 '''향토의 날'''로 삿포로 시내의 공립학교 등에서도 반일 휴업이 실시된다.[28] 삿포로 일대 건설업계는 일제히 휴업하는 관습이 있다.
9월 1일에는 어진재기념제(御鎮斎記念祭일본어)가 열린다.[1]
10월 17일에는 신상봉축제(神嘗奉祝祭일본어)가 열린다.[1]
11월 3일에는 명치제(明治祭일본어)가 열리고,[1] 11월 23일에는 신상제(新嘗祭일본어)가 열린다.[1]
12월 23일에는 천장제(天長祭일본어)가 열린다.[1]
다음은 월별 주요 행사 내용이다.
월 | 행사명 | 내용 |
---|---|---|
1월 | 세찬제(1월 1일), 원시제(1월 3일), 고신찰소납제(1월 14일), 기청제(1월 셋째 일요일) | |
2월 | 절분제(절분 날), 기원제(2월 11일), 기년제(2월 17일), 천장제(2월 23일) | |
3월 | 입학제(3월 마지막 일요일) | 초등학교 입학하는 아동의 학업성취와 심신건전, 교통안전을 기원하는 의례 행사 |
4월 | 섬판관위령제(4월 13일) | 홋카이도 개척과 홋카이도 신궁의 창사에 공적이 있었던 시마 요시이 판관을 추모하는 위령제 |
5월 | 모내기제(5월 상순) | |
6월 | 례대제(6월 14일~16일), 소궁제(6월 14일), 례제(6월 15일), 신행도고(6월 16일), 여름넘기 대례식(6월 30일) | 홋카이도 신궁의 가장 큰 축제로 삿포로 축제라고도 불리며 삿포로 초여름의 풍물시로 시민들에게 친숙하다. 메이지 11년에 시작되었다. 현재는 천 명 정도의 봉사자들이 네 기의 봉륜과 아홉 대의 산차를 가지고 시민의 안녕을 기원하며 시내를 행렬한다. |
8월 | 개척신사례제(8월 15일) | 홋카이도 개척의 공로자 37주(柱)의 영혼을 기리는 위령제로 미타마사이라고도 불린다. |
9월 | 고진제기념제(9월 1일), 발수제(9월 상순), 돈궁례제(9월 15일) | 개척 삼신이 고진제(御鎮斎)된 기념일을 축하한다. 신전田의 이삭을 수확한다. |
10월 | 신상봉축제(10월 17일), 칠석(홋카이도에서는 11월이 되면 추위와 강설의 영향으로 외출이 제약되기 때문에 10월에 실시하는 지역이 많다.) | |
11월 | 메이지제(11월 3일), 신장제·신곡근로감사제(11월 23일) | 홋카이도 신궁의 창립의 단을 내리고, 제신이기도 한 메이지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제례 행사 |
12월 | 십이월의 대례(12월 31일), 제야제(12월 31일) | |
매월 | 월수제(매월 1일), 월차제(매월 15일), 순제(매월 10일·20일) |
6. 교통
- 삿포로 시영 지하철 도자이 선 마루야마코엔 역에서 도보 15분
- JR 홋카이도 버스 또는 반케이 버스 「신궁마에」정류장에서 도보 1분
7. 갤러리
8. 기타
홋카이도 신궁 부지는 180000m2이며,[1] 마루야마 공원과 인접해 있다. 벚꽃이 피는 계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신궁을 찾아 꽃놀이(하나미)를 즐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설날에 신년 참배(하츠모데)를 위해 신궁을 방문한다.
매년 6월 14일부터 16일까지는 "삿포로 축제(삿포로 마쓰리)"라고도 불리는 홋카이도 신궁의 주요 축제가 열리며, 신여(미코시)를 짊어진 사람들의 행렬이 신궁으로 향하는 거리를 행진한다. 스카우트 활동도 지원하고 있다.[5]
삿포로 지방기상대(札幌管区気象台)는 1953년(쇼와 28년)부터 58년간 홋카이도 신궁 경내에 있는 소메이요시노(ソメイヨシノ)를 봄 벚꽃(サクラ)의 개화 및 만개 예상을 관측하는 표본목(標本木)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수령 약 80년의 노목이 되어 관측이 어려워짐에 따라 2012년(헤이세이 24년)부터 삿포로 지방기상대 구내의 소메이요시노로 표본목을 변경하였다.[33]
참조
[1]
웹사이트
Hokkaido Jingu, History of the Hokkaido Jingu and kami
http://www.hokkaidoj[...]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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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omsbury Academic
2022-10-06
[3]
학술지
A Concept of "Overseas Shinto Shrines": A Pantheistic Attempt by Ogasawara Shōzō and Its Limitations
https://www.jstor.or[...]
20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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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196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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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 Boyscouting in Sappo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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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西白河郡米村出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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札幌の寺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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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海道神宮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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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海道神宮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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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和天皇御召列車全記録
新潮社
201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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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爪句@私の都市秘境
共同文化社
200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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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札幌気象台が観測木を変更 樹齢80年の桜が“引退”
http://www.sponichi.[...]
スポニチ
2011-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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