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의군 이영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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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화의군 이영 묘역은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한 화의군 이영의 묘역으로, 서울특별시 은평구에 위치해 있다. 16세기 중반에 조성되었으며, 묘역에는 묘갈, 문인석, 무인석, 망주석, 장명등 등 다양한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묘갈의 관석에 해와 그믐달이 조각된 점이 특징이며, 1569년에 건립된 묘갈과 석물들은 1736년에 정비되었다. 묘역은 화의군 묘를 중심으로 아들 및 후손의 묘와 함께 조성되었으며, 묘역의 구조와 석물의 특징은 조선 시대 묘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아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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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의군 이영 묘역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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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의군 이영 묘역 정보 | |
이름 | 화의군 이영 묘역 |
한자 표기 | 和義君 李瓔 墓域 |
위치 | 서울특별시 은평구 연서로46길 43 |
유형 | 기념물 |
지정 번호 | 24 |
지정일 | 2005년 12월 8일 |
면적 | 265m2 |
소유자 | 전주이씨화의군파종회 |
관련 정보 | |
은평구 | 서울 연서로 |
2. 생애와 활동
2. 1. 출생과 가계
2. 2. 세조 즉위와 탄압
2. 3. 사망 시기와 논란
2. 4. 학문과 절의
3. 사후 평가와 추숭
3. 1. 육종영 추대와 장릉 배식
3. 2. 시호와 개장
4. 화의군 묘역
4. 1. 묘역의 위치와 조성
화의군 이영 묘역은 은평구 진관외동 산60-2 등 5필지에 위치하며, 아들 금난수 이식의 묘 1기 및 기타 후손 묘 2기와 함께 조성되어 있다. 가문에 전해지는 기록에는 1552년(명종 7년) 유언에 따라 양주 서산 진관 신혈리로 이장했다고 하나, 화의군의 생존 시기를 고려하면 불확실하다.화의군 묘역은 16세기 중반에 조성되었으며, 1569년(선조 2년)에 세워진 묘갈과 석물들이 1736년(영조 12년)에 정비되었다. 1984년에는 후손들이 묘역을 정비하면서 무인석 2기를 새로 설치하고 분묘 주위에 호석을 둘렀으며, 곡장 상부를 보수했다.
묘역 내에는 분묘를 중심으로 곡장이 둘러쳐져 있으며, 계체석 위쪽으로 묘갈,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배치되어 있다. 계체석 아래쪽으로는 문인석, 무인석, 망주석이 좌우 각 1기씩 배치되어 있고, 두 무인석 중간에는 장명등 1기가 있다. 무인석은 1984년에 새로 설치된 것이다.
묘갈의 관석은 앞면에 구름무늬 속 해, 뒷면에 구름무늬 속 그믐달이 조각되어 있어 희소한 사례로 평가된다. 망주석은 문인석 아래쪽에 놓여 있는데, 이는 서울 지역의 일반적인 사대부 분묘 배치와는 다른 점이다.
4. 2. 묘갈과 석물
화의군 이영 묘역에는 1569년(선조 2년)에 세워진 묘갈이 있다. 묘갈의 비 머리 부분은 반원형으로, 앞면에는 구름무늬 가운데 해를, 뒷면에는 그믐달을 조각해 놓은 점이 특징이다. 비 몸돌은 방형(方形)으로 앞면에는 '화의군지묘(和義君之墓)'라는 글씨가 해서체(楷書體)로 쓰여 있고, 뒷면에는 '융경사년사월일립(隆慶三年四月日立)'이라고 새겨져 있다. 비 받침돌 상부에는 12잎의 복련(覆蓮)이 조각되어 있으나, 현재 마멸 상태가 심하다.1736년(영조 12년), 영조는 화의군에게 충경(忠景)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예법(禮法)대로 개장(改葬)하게 하였다. 따라서 묘갈과 석물들은 1569년 무렵에 조성되었고, 1736년에 체계적으로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묘역 내 석물은 분묘를 중심으로 뒤쪽에 곡장(曲墻)이 둘러쳐져 있고, 앞쪽으로는 계체석(階砌石)을 경계로 묘갈, 혼유석(魂遊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이 배치되어 있다. 계체석 아래쪽에는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 망주석(望柱石)이 좌우 각 1기씩 배치되어 있으며, 무인석 중간쯤에는 장명등(長明燈) 1기가 있다. 무인석은 1984년 후손들이 묘역을 정비하면서 새로 설치한 것이다. 분묘 주위로는 호석(護石)을 둘렀으며, 곡장(曲墻) 상부도 1984년에 보수되었다.
망주석은 문인석 아래쪽에 놓여 있는데, 이는 서울 지역의 일반적인 사대부 분묘 배치와 다른 점이다. 문인석은 몸과 얼굴 모두 가느다랗고 호리호리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머리에 쓴 관(冠)은 조선 후기 석인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장명등(長明燈)은 전체적으로 4각형 평면이며, 받침돌인 대석(臺石)과 화사석(火舍石)이 하나로 연결되어 조각되었고 그 위에 옥개석(屋蓋石)을 얹은 형태이다.
4. 3. 묘역의 구조와 특징
화의군 이영 묘역은 분묘를 중심으로 뒤쪽에 곡장(曲墻)이 둘러져 있고, 앞쪽으로는 계체석(階砌石)을 경계로 묘갈(墓碣), 혼유석(魂遊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이 배치되어 있다. 계체석 아래쪽에는 문인석(文人石), 망주석(望柱石)이 좌우 각 1기씩 있으며, 두 무인석 중간에는 장명등(長明燈) 1기가 있다. 무인석은 1984년에 새로 설치된 것이다.전체적인 배치는 서울 지역 사대부 분묘와 달리 곡장이 있고, 망주석이 문인석 아래에 놓여 있다. 서울 지역 내 대군묘나 군묘 중 곡장이 있는 것은 광평대군의 아들 영순군 묘뿐이며, 양녕대군, 효령대군, 광평대군 묘에서는 곡장이 보이지 않는다. 일반 사대부 묘에서는 망주석이 문인석 위쪽에 배치되는 경우가 많지만, 화의군 묘에서는 망주석이 문인석 아래쪽에 있다.
화의군 분묘 정면 중앙의 묘갈은 비 머리 부분[관석(冠石)]이 반원형이며, 앞뒷면에 구름무늬가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 앞면 구름무늬에는 해, 뒷면에는 그믐달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동류 문화재 중 매우 희소한 사례이다. 비 몸돌[비신(碑身)]은 방형(方形)으로 앞면에 '화의군지묘(和義君之墓)'라는 해서체(楷書體) 글씨가, 뒷면에는 ‘융경사년사월일립(隆慶三年四月日立)’이 새겨져 있어 1569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 받침돌[비좌(碑座)・비대(碑臺)]은 방형이며, 상부에 12잎의 복련(覆蓮)이 조각되어 있으나 마멸 상태가 심하다.
혼유석과 향로석은 일반적인 형태이며, 상석은 북석[고석(鼓石)] 2기가 받치고 있는데, 북석에는 문양이 없다.
문인석은 좌우 각 1기씩 총 2기가 설치되어 있으며, 몸과 얼굴이 가느다랗고 호리호리하다. 얼굴은 눈을 감았지만 입에 유쾌한 미소를 띠고 있으며, 머리에 쓴 관(冠)은 조선 후기 석인상에서 많이 보이는 형태로 복두(幞頭)가 높다.
망주석은 원수(圓首), 운두(雲頭), 염의(簾依), 8면 주신(八面柱身), 대석(臺石) 모두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별도 문양이나 세호(細虎)는 조각되어 있지 않다.
장명등은 4각형 평면으로, 받침돌인 대석(臺石)과 화사석(火舍石)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그 위에 옥개석(屋蓋石)을 얹은 형태이다. 대석은 4각 요고형(腰鼓形)으로 하대석(下臺石)에는 운족(雲足), 중대석(中臺石)은 민무늬, 상대석(上臺石)은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상대석과 연결된 4각형 화사석에는 원형(圓形)의 화창(火窓)이 4면에 나 있으며, 옥개석은 완만한 경사의 팔작지붕 형태로 4면에 합각이 표현되어 있고, 맨 윗부분에는 보주(寶珠)가 조각되어 있다.
4. 4. 석물의 특징
화의군 묘역 내 석물 중 묘갈은 반원형 관석에 앞면에는 해, 뒷면에는 그믐달이 조각되어 있어 희소하다. 묘갈은 1569년에 건립되었으며, 비문에는 '화의군지묘(和義君之墓)'라고 쓰여 있다. 비좌에는 복련이 조각되어 있으나 마멸이 심하다.문인석은 가느다랗고 호리호리하며, 복두가 높은 형태를 하고 있어 조선 후기 석인상의 특징을 보인다. 망주석은 문양이 없고 세호가 조각되지 않았다.
장명등은 4각형 평면에 화사석과 옥개석이 연결된 형태이며, 조선 전기에 비해 안정감이 떨어진다. 대석은 4각 요고형으로 하대석에는 운족, 상대석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고, 화사석에는 원형 화창이 있다. 옥개석은 완만한 경사의 팔작지붕 형태이다.
전체적으로 묘역 내 석물들은 16세기 중반부터 영조 연간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당시의 묘제와 석물 조각 방식을 잘 보여준다.
4. 5. 문화재적 가치
화의군 이영 묘역은 16세기 중반에 조성된 묘역으로,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했던 화의군의 절의를 기리는 장소이다. 이 묘역은 선조부터 영조 연간에 이르는 묘제와 석물 조각 방식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묘갈의 관석에는 앞면에 해, 뒷면에 그믐달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매우 희귀한 사례로 꼽힌다.묘역은 화의군 묘를 중심으로, 아들 금난수(金蘭守) 이식(李軾) 묘 1기, 기타 후손 묘 2기가 단차를 두고 조성되어 있다. 분묘는 곡장(曲墻)으로 둘러싸여 있고, 계체석 위쪽으로 묘갈,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아래쪽으로는 문인석, 무인석, 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다. 무인석은 1984년에 새로 설치된 것이다.
묘갈은 1569년(선조 2년)에 세워졌으며, 비문에는 '화의군지묘(和義君之墓)'라는 글귀와 함께 건립 연도가 새겨져 있다. 망주석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장명등은 조선 전기에 비해 안정감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화의군 묘역, 후손 묘역, 사당, 재실, 정려문, 신도비 구역은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5. 관련 시설
5. 1. 정려문과 충경사
5. 2. 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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