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혜황후 (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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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효혜황후 장씨는 전한 혜제의 황후로, 여태후의 섭정 아래에서 정치적 격변을 겪었다. 기원전 192년, 여태후의 강요로 혜제와 결혼했으나, 혜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녀도 없었다. 여태후는 후궁의 아이를 장씨의 아들로 속여 황제로 옹립했으나, 소제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여태후에게 반항하면서 폐위되고, 혜제의 다른 아들인 유홍이 즉위했다. 여태후 사후, 장씨는 폐위되어 북궁에 유폐되었고, 기원전 163년에 사망하여 혜제의 능에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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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혜황후 (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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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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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장언 |
로마자 표기 | Zhang Yan |
신상 정보 | |
아버지 | 장오, 조나라 왕 |
어머니 | 노원공주 |
출생 | 기원전 202년? |
사망 | 기원전 163년 4월 또는 5월 (38~39세) |
배우자 | |
배우자 | 한 혜제 |
칭호 | |
칭호 | 한나라의 황후 |
재위 기간 | 기원전 192년 ~ 기원전 188년 |
선임 | 여황후 |
후임 | 여황후 (후소) |
시호 | 효혜황후(孝惠皇后) |
2. 생애
기원전 192년 11월, 여태후의 강요로 노원공주의 딸 장씨는 12세의 어린 나이에 외숙부인 혜제와 혼인하여 황후가 되었다.[1][3] 혜제는 황후를 가까이하지 않았고,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1][3] 이에 여태후는 혜제의 후궁이 낳은 아이를 장황후의 아들로 속이고 생모를 죽였다.
기원전 188년, 혜제가 2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자, 혜제의 후궁 소생의 아들(훗날 전한 소제)이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실권은 여태후가 장악했다. 소제는 자신이 장황후의 친아들이 아니며, 생모가 여태후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여태후에게 복수를 다짐했다.[1] 기원전 184년, 여태후는 소제를 폐위하고 처형한 후, 혜제의 또 다른 아들인 유홍(후소제)을 황제로 옹립했다. 유홍 역시 장황후의 양자가 되었다.[1][2] 소제 재위 기간 동안 장황후의 남동생 장언은 노왕으로 책봉되었다.[2] 장황후는 황태후가 되지 못하고, 여태후가 태황태후로서 권력을 행사했다.[2]
기원전 180년, 여태후가 사망하고 여씨의 난이 발생하여 여씨 일족이 몰락했다.[1] 진평, 주발 등 대신들은 여씨 일족을 제거하고 소제 홍을 폐위한 후, 고조의 아들인 유항(문제)을 황제로 추대했다.[1] 장황후는 살해되지는 않았지만 황후 자리에서 폐위되어 북궁에 유폐되었고, 이후 혜황후로 불렸다.[1] 장황후의 동생 장언도 폐위되어 남궁후로 강등되었다.[1]
기원전 163년, 장황후는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혜제의 안릉(安陵)에 합장되었으나, 별도의 능묘는 만들어지지 않았다.[1]
2. 1. 어린 시절과 혼인
기원전 192년, 여태후의 강요로 장황후는 12세의 어린 나이에 외숙부인 혜제와 혼인하여 황후가 되었다.[1] 고조와 여태후의 딸인 노원공주는 장오(張敖)에게 시집가서 딸(장황후)과 아들 장언을 낳았다.[3] 혜제는 황후를 가까이하지 않았고,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1][3]2. 2. 여태후의 섭정과 소제 옹립
기원전 188년, 혜제가 2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자, 혜제의 후궁 소생의 아들(훗날 전한 소제)이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실권은 여태후가 장악했다. 소제는 자신이 장황후의 친아들이 아니며, 생모가 여태후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여태후에게 복수를 다짐했다.[1]여태후는 혜제의 후궁이 낳은 아이를 장황후의 아들로 속이고 생모를 죽였다. 기원전 184년, 여태후는 소제를 폐위하고 처형한 후, 혜제의 또 다른 아들인 유홍(후소제)을 황제로 옹립했다. 유홍 역시 장황후의 양자가 되었다.[1][2] 소제 재위 기간 동안 장황후의 남동생 장언(張偃)은 노왕(魯王)으로 책봉되었다.[2]
장황후는 황태후가 되지 못하고, 여태후가 태황태후로서 권력을 행사했다.[2]
2. 3. 여씨 일족 몰락과 폐위
기원전 180년, 여태후가 사망하고 여씨의 난이 발생하여 여씨 일족이 몰락했다.[1] 진평(陳平)·주발(周勃) 등 대신들은 여씨 일족을 제거하고 소제 홍을 폐위한 후, 고조의 아들인 유항(문제)을 황제로 추대했다.[1] 장황후는 살해되지는 않았지만 황후 자리에서 폐위되어 북궁에 유폐되었고, 이후 혜황후로 불렸다.[1] 장황후의 동생 장언도 폐위되어 남궁후로 강등되었다.[1]2. 4. 쓸쓸한 죽음
기원전 180년, 여후가 사망하고 진평(陳平)·주발(周勃) 등이 여씨 일족을 몰아낸 후, 소제 홍을 폐위하고 고조의 아들인 대왕 유항을 황제로 추대했다. 이 과정에서 여씨 일족과 소제 홍 등은 살해되었지만, 장황후는 목숨을 보전했다. 그러나 황후 자리에서 폐위되어 북궁(北宮)에 유폐되었다.[1]기원전 163년, 장황후는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혜제의 안릉(安陵)에 합장되었으나, 별도의 능묘는 만들어지지 않았다.[1]
3. 가족 관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삼촌)
남궁후(南宮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