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량 명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후량 명제는 562년 후량의 황제가 되어 585년까지 재위했다. 그는 양 무제의 손자이자 서량의 황제 소찰의 아들로, 즉위 후 연호를 천보로 정했다. 재위 기간 동안 진나라의 공격으로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북주와 수나라에 조공하며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북주 무제에게 깊은 신뢰를 얻어 자치를 인정받았으며, 딸을 수 양제의 부인으로 보내는 등 수나라와의 관계를 돈독히 했다. 585년 사망 후 아들 소종이 뒤를 이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585년 사망 - 비다쓰 천황
비다쓰 천황은 572년부터 585년까지 재위하며 불교 수용을 둘러싼 갈등과 한국과의 관계 재건을 시도하다가 궤양으로 사망한 일본의 제30대 천황이다. - 542년 출생 - 원광
원광은 6세기 신라의 승려로서 대승 불교를 전파하고 화랑도에게 세속오계를 가르쳤으며, 수나라에 고구려 출병을 요청하는 걸사표를 지어 국가 의식을 보여주었다. - 542년 출생 - 주라후
주라후는 남북조 시대 진나라와 수나라에서 활약한 장군으로, 진나라에서 군공을 세워 장군이 되었으나 수나라에 항복한 후 수나라에서도 여러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 양 (남조)의 황제 - 소기
소기는 양 무제의 아들로, 익주자사 재임 중 쓰촨성 지역을 발전시키고 후경의 난 이후 황제를 칭했으나, 이복형 양 원제 소역과의 갈등과 서위의 침공으로 인해 살해당했다. - 양 (남조)의 황제 - 양 원제
양 원제는 남조 양나라의 황족으로, 형주 자사를 거쳐 후경의 난 이후 황위에 올랐으나, 서위의 침공으로 피살되었으며, 그의 치세는 외교적 실책과 미신 의존으로 국가를 쇠퇴하게 했다고 평가받는다.
후량 명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후량 명제 소규 |
한자 | 後梁 明帝 蕭巋 |
신상 정보 | |
본명 | 소규(蕭巋) |
자 | 인원(仁遠) |
출생 | 542년 |
사망 | 585년 |
매장지 | 현릉(顯陵) |
가족 관계 | |
부친 | 선제 소찰 |
모친 | 귀빈 효황태비 조씨 |
배우자 | 황후 장씨 |
자녀 | 소총, 정제 소환, 의성왕 소찬, 진릉왕 소경, 임해왕 소훈, 남해왕 소양, 의안왕/도구후 소우, 신안왕/송공 소씨, 수나라 민황후 |
통치 정보 | |
칭호 | 후량의 제2대 황제 |
재위 기간 | 562년 ~ 585년 |
묘호 | 세종(世宗) |
시호 | 효명황제(孝明皇帝) |
연호 | 천보(天保, tiān bǎo) |
계승자 | 정제 소총 |
전임자 | 선제 소찰 |
기타 | |
왕조 | 서량 |
2. 생애
명제는 글과 학문을 좋아했으며, 불교 경전인 내전(內典)을 즐겨 읽었다. 562년 아버지 소찰이 죽자 황제 자리에 올랐고, 이듬해 연호를 천보(天保)로 고쳤다.[1]
577년 북주 무제가 북제를 멸망시키자, 명제는 북제의 수도였던 업에 직접 가서 축하했다.[1] 이때 명제는 무제에게 후량 건국을 도운 북주의 은혜를 칭송하며 눈물을 흘렸는데, 후량 건국을 도운 것은 서위였지만 당시 서위 황제는 실권이 없는 꼭두각시였고, 실권자 우문태가 사실상 후량 건국을 도왔기 때문이다. 우문태의 아들이 무제였으므로 명제는 감사를 표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아부 외에도 북주에게 잘 보여 나라를 존속시키고, 특히 진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해 가는 나라를 구원해 달라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무제는 명제가 귀국할 때 직접 비파를 연주하며 배웅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1]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무제는 후량 수도 강릉 서쪽에 주둔하던 북주 군대를 철수시키고 명제를 총관에 임명하여 사실상 후량의 자치를 인정했다.[1]
581년 북주가 멸망하고 수나라가 건국된 후에도, 수도 장안에 가서 조현하고 예우를 받았다.[1] 이때 수 문제는 진나라를 멸망시키면 옛 양나라 영토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1] 명제의 딸은 양견의 차남이자 훗날 수 양제가 되는 양광의 부인이 되었고, 남편이 황제가 되자 양민소황후가 되었다.[1]
582년 명제는 강릉총관에서 파직되어 영토 안에서만 통치하게 되었으나,[1] 소찰의 불안정한 정권과 달리 명제의 정권은 비교적 안정되어 수도 강릉에서는 양나라로부터 계승된 문화가 꽃피었다.[1] 명제 자신도 학문에 재능이 있어 《효경주역의기》, 《대소승유미》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1]
585년에 사망하여 아들 소종이 뒤를 이었으며, 현릉(顯陵)에 안장되었다.[1]
2. 1. 가계와 출생
소규는 증조부 양 무제 치세인 542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무제의 손자이자 악양왕인 소차였고, 어머니는 소차의 후궁인 조 부인이었다.[2] 소규의 할아버지 소통은 무제의 황태자였지만, 531년 5월 소통이 죽은 후 황태자 계승은 소통의 동생 소강에게로 넘어갔다.2. 2. 즉위와 통치
562년 선제가 사망하자 황제 자리에 올랐고, 이듬해 연호를 천보(天保)로 고쳤다.[1] 재위 기간 동안 진나라 장수 오명철에게 여러 차례 패하여 강남의 여러 지역을 빼앗기면서 후량의 세력은 날로 약화되었다.[1]577년 북주 무제가 북제를 멸망시키자, 명제는 북제의 수도였던 업에 직접 가서 축하했다.[1] 이때 명제는 무제에게 후량 건국을 도운 북주의 은혜를 칭송하며 눈물을 흘렸다.[1] 무제는 명제가 귀국할 때 직접 비파를 연주하며 배웅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1]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무제는 후량 수도 강릉 서쪽에 주둔하던 북주 군대를 철수시키고 명제를 총관에 임명하여 사실상 후량의 자치를 인정했다.[1]
581년 북주가 멸망하고 수나라가 건국된 후에도, 수도 장안에 가서 조현하고 예우를 받았다.[1] 이때 수 문제는 진나라를 멸망시키면 옛 양나라 영토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1] 명제의 딸은 양견의 차남이자 훗날 수 양제가 되는 양광의 부인이 되었고, 남편이 황제가 되자 양민소황후가 되었다.[1]
582년 명제는 강릉총관에서 파직되어 영토 안에서만 통치하게 되었으나,[1] 소찰의 불안정한 정권과 달리 명제의 정권은 비교적 안정되어 수도 강릉에서는 양나라로부터 계승된 문화가 꽃피었다.[1] 명제 자신도 학문에 재능이 있어 《효경주역의기》, 《대소승유미》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1]
2. 3. 진나라와의 전쟁
562년 아버지인 소찰이 죽자 명제가 즉위하였고, 이듬해 연호를 천보(天保)로 고쳤다.[1] 재위 기간 중 진나라의 장수 오명철에게 여러 차례 패하여 강남의 여러 지역을 빼앗기면서 후량의 세력은 나날이 약화되었다.[1]566년 진 문제가 사망하고 어린 아들 진 폐제가 즉위한 후, 진나라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567년, 폐제의 숙부인 진 후 안성왕이 유사지(劉師之)와 도중거(到仲舉)를 살해하고 권력을 장악하자, 화교(華皎)는 서량과 북주에 비밀리에 투항하여 양쪽에 원조를 요청했다. 북주 무제와 그의 섭정 우문호는 무제의 동생 우문직(宇文直) 위왕에게 군대를 파견했고, 명제 또한 장군 왕조(王操)가 지휘하는 군대를 모아 화교를 지원했다. 그러나 이들은 둔구(沌口, 현대 우한, 후베이성)에서 순우량(淳于量)과 오명철이 지휘하는 진나라 군대에게 패배했고, 화교와 우문직은 모두 강릉으로 도망쳐야 했다. 북주 장군 원정(元定)과 서량 장군 이광(李廣)이 포로로 잡혔다. 오명철은 이 기회를 틈타 서량의 하동군(河東, 현대 형주)을 점령했다. 우문직은 패배의 책임을 서량 장군 은량(殷亮)에게 돌렸고, 명제는 은량이 잘못이 없음을 알면서도 우문직에게 반대할 의사가 없어 은량을 처형했다.
568년 봄, 무는 강릉을 포위하고 물길을 돌려 침수시키려 했다. 명제는 북주 지휘관 전홍(田弘)의 호위를 받으며 인근 지남(紀南) 요새로 피신했다. 부지휘관 고린(高琳)과 왕조는 강릉에 남아 100일 이상을 방어했으며, 서량 장군 마무(馬武)와 길철(吉徹)이 반격하여 무를 격파하고 철수하게 하여 명제가 강릉으로 돌아갈 수 있게 했다.
570년 가을, 진나라 장군 장소달(章昭達)은 강릉을 포위하는 동시에 삼협 인근에 북주가 건설한 안촉(安蜀) 요새를 점령했다. 강릉은 거의 함락될 뻔했고, 우문직이 이천철(李遷哲)이 지휘하는 군대를 보내 도시를 구원한 후에야 장소달이 철수했다.
571년, 567년 패배 이후 명제의 관료로 복무했던 화교는 대신 북주 수도 장안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그는 우문직의 방어 기지인 양양(襄陽, 현대 샹양, 후베이성)에서 우문직을 만났다. 그는 우문직에게 서량이 너무 많은 영토를 잃어 가난해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고 지적하며 북주가 여러 주를 서량에 대여하는 것이 합리적인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우문직은 이에 동의하고 무제에게 제안을 제출했고, 이에 무제는 기주(基州), 평주(平州), 약주(鄀州) (함께 현대 징먼 및 이창, 후베이성을 구성)를 서량에 주었다.
2. 4. 북주와의 관계
577년 북주 무제가 북제를 멸망시키자 명제는 북제의 수도였던 업에 황제의 몸으로 직접 가서 축하했다. 이때 명제는 무제에게 후량을 건국하게 도와준 북주의 옛 은혜를 칭송하며 눈물을 흘렸다. 후량 건국 당시 도와준 것은 서위였지만, 서위의 황제는 꼭두각시였고 실권자 우문태가 집정하고 있었기에 사실상 우문태가 건국을 도와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문태의 아들이 무제였으므로 감사를 표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아부 외에도 북주에게 잘 보여 나라를 존속시키고, 특히 진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해 가는 나라를 구원해 달라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무제는 명제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자 스스로 비파를 연주하며 직접 배웅할 만큼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 이렇게 신뢰를 얻어 무제는 후량의 수도 강릉 서쪽에 주둔하고 있던 북주 군대를 철수시키고 명제를 총관으로 임명하여 사실상 후량의 자치를 인정했다. 이는 우문태가 소찰을 도와주고 후량의 황제로 세웠으나, 의심하여 강릉 서쪽에 군대를 주둔시켰던 것보다는 나아진 셈이다.571년에 567년 패배 이후 명제의 관료로 복무했던 화교는 북주 수도 장안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그는 우문직의 방어 기지인 양양(襄陽, 현대 샹양, 후베이성)에서 우문직을 만났다. 그는 우문직에게 서량이 너무 많은 영토를 잃어 가난해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고 지적하며 북주가 여러 주를 서량에 대여하는 것이 합리적인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우문직은 이에 동의하고 무제에게 제안을 제출했고, 무제는 세 주 - 기주(基州), 평주(平州), 약주(鄀州) (함께 현대 징먼 및 이창, 후베이성을 구성)를 서량에 주었다.
578년에 북주 무제가 사망하고 그의 변덕스럽고 잔인한 아들 선제가 즉위했다. 580년에 선제 또한 사망했고, 선제의 장인 양견은 선제의 어린 아들 북주 징제에 대한 섭정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북주 장군 유치경은 양견의 의도를 의심하여 업성에서 양견에게 반기를 들었다. 대부분의 서량 장군들은 명제에게 유치와 동맹할 것을 권고했는데, 유치가 성공하면 황족 우문씨에게 충성한 대가로 보상을 받을 것이고, 유치가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이 기회를 틈타 영토를 빼앗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명제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관료 유장(柳莊)을 장안으로 보냈을 때, 양견은 그가 과거 강릉에서 장군으로 주둔했을 때 명제의 손님이었다는 점을 언급하며 서량의 충성을 간청했다. 유장은 유치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고 강릉으로 돌아와 명제에게 양견 편을 들라고 조언했다. 명제는 이에 동의했고, 이후 양견이 유치를 격파했을 때 유장에게 "만약 내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었다면 제국은 멸망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2. 5. 수나라와의 관계
581년 북주가 멸망하고 수나라가 건국되자, 명제는 수도 장안에 가서 조현하고 예우를 받았다. 이때 수 문제는 자신이 진나라를 멸망시키면 옛 양나라 영토를 명제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명제의 딸은 수 문제의 차남이자 훗날 수 양제가 되는 양광의 부인이 되어, 남편이 황제가 되자 황후(양민소황후)가 되었다.[2]582년, 수 문제는 명제를 더욱 존중하고자 그의 딸 중 한 명을 양광의 부인으로 삼겠다고 제안했다. 명제는 점을 쳐 본 후, 자신의 딸들이 모두 부적합하다고 판단했지만, 582년 2월에 태어나 불운하다고 여겨져 외삼촌 장가(張軻)에게 길러진 딸이 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는 딸을 궁으로 소환했고, 점쟁이들은 그녀가 적합하다고 말했으며, 결국 양광과 결혼했다.[1] 이러한 혼인 관계 때문에 수 문제는 강릉의 강릉 사령관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잠시 동안 명제는 수나라의 간섭을 줄이면서 자신의 국가를 통치할 수 있었다.[1] 583년, 수나라는 수도를 옛 장안에서 인근의 새로 건설된 수도 대흥으로 옮겼고, 명제는 자신의 태자 소총을 보내 문제에게 축하했다.[1] 584년 봄, 명제는 스스로 새로운 수도를 방문하여 문제에게 경의를 표했는데, 두 사람은 황제의 복장을 갖췄지만 명제는 신하로서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조금 덜 화려하게 차려입었다.[1]
2. 6. 죽음
585년 여름, 명제가 사망했다. 아들 소종이 그의 뒤를 이었다(경제로 즉위). 현릉(顯陵)에 안장되었다.[1][2]3. 가족 관계
배우자 | 자녀 |
---|---|
귀빈 조씨(曹氏) | |
황후 장씨(張氏) |
4. 연호
연호 | 기간 |
---|---|
천보 | 562년 ~ 585년 |
참조
[1]
서적
Book of Sui
585-07-01
[2]
서적
Book of Sui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