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데 가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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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안 데 가라이는 16세기 스페인 제국의 군인, 탐험가, 정치가였다. 그는 1543년 페루 부왕령으로 이주하여 산타크루스데라시에라 건설에 참여하고, 아순시온 총독을 거쳐 1580년 리오데라플라타 강둑에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재건설했다. 그는 파라나 강 탐험을 통해 산타페 데 라 베라크루스 시를 건설했으며, 원주민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추구했다. 1583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산타페로 가는 도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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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데 가라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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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후안 데 가라이 |
출생 | 1528년 |
출생지 | 비스카야 지방, 스페인 |
사망 | 1583년 |
사망지 | 산타페, 페루 부왕령 |
국적 | 스페인 |
배우자 | 이사벨 데 베세라 후아나 데 에스핀돌라 이 팔로미노 |
자녀 | 후안 데 가라이 이 베세라 |
직업 | 정치인, 콩키스타도르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직위 | |
관직 | 리오데라플라타 및 파라과이 총독 (1578년-1583년) 아순시온 부총독 (1577년-1578년) 산타페 부총독 (1574년-1576년) |
군주 | 펠리페 2세 |
2. 생애
후안 데 가라이는 스페인 제국의 탐험가이자 식민지 개척자였다. 펠리페 2세 통치 아래 페루 부왕령에서 활동했으며, 1573년 파라나강 유역 원정에 참여하여 오늘날 아르헨티나에 있는 여러 도시를 건설했다. 1580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두 번째로 건설했다.
비스카야에 있는 가라이 마을의 가장 오래된 지역에는 후안 데 가라이가 지은 가라티쿠아라는 궁전식 농가가 있는데, 19세기에는 "가라이-고이티아"라고 불렸다.
가라이에게는 헤로니마 데 콘트레라스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리오데라플라타 총독 에르난도 아리아스 데 사아베드라와 결혼했다.[2]
2. 1. 초기 생애
후안 데 가라이의 출생지는 논란이 있으며, 카스티야 지방의 훈타데비야르바데로사라는 주장과 바스크 지방의 비스카야주 오르두냐라는 주장이 있다. 1543년 그는 삼촌 페드로 데 사라테와 함께 스페인 제국에서 페루 부왕령으로 항해했다.[1] 1561년에는 현재 볼리비아에 있는 산타크루스데라시에라 건설에 참여했고,[1] 1568년에는 현재 파라과이에 있는 아순시온으로 이주하여 정치적 지위를 얻었다.[1]2. 2. 남아메리카로의 이주와 활동
1543년 그는 페루로 향하는 블라스코 누녜스 벨라(Blasco Núñez Vela) 총독의 첫 원정대에 삼촌 페드로 데 사라테(Pedro de Zárate)와 함께 항해했다.[1] 1561년에는 산타크루스데라시에라 건설에 참여했고,[1] 1568년 아순시온으로 거주지를 옮겨 정치적 지위를 얻었다.[1] 1573년 4월 아순시온 총독은 그에게 8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파라나강 탐험을 명령했고, 그 과정에서 산타페 데 라 베라크루스(Santa Fe de la Vera Cruz) 시를 건설했다.[1] 1576년에는 아순시온 총독으로 임명되었다.[1] 그의 주요 목표는 원주민들 사이에 정의와 문명을 도입하여 평화와 조화를 증진하는 것이었다.[1] 이러한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그는 인디언 마을을 설립하고 지역 통치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1]1580년 총독령의 사령관(Capitan General)이 된 그는 리오데라플라타 강둑에 도시를 재건설했다.[1] 이 도시는 1536년 페드로 데 멘도사에 의해 누에스트라 세뇨라 델 부엔 아예레(Nuestra Señora del Buen Ayre)라는 이름으로 처음 건설되었지만 나중에 원주민에 의해 파괴되었다.[1] 가라이는 1580년 6월 11일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두 번째로 건설했다.[1] 그는 마요 광장 지역의 강둑에 상륙하여 도시 이름을 시우다드 데 라 트리니다드(Ciudad de la Trinidad)라고, 항구 이름을 산타 마리아 데 부에노스 아이레스(Santa Maria de Buenos Ayres)라고 명명했다.[1]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파라나 분지의 주요 도시이자 가장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1]
이후 그는 전설적인 카이사르의 도시(1581-1582)를 찾아 탐험을 떠났다.[1]
1583년 3월 20일, 후안 데 가라이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산타페로 가는 도중 리오데라플라타 근처에서 사망했다.[1] 그의 40명의 부하, 프란체스코 수도사 한 명, 그리고 몇몇 여성으로 구성된 일행은 알려지지 않은 석호에 들어갔고, 고대 산티 스피리투스 요새(Sancti Spíritus Fort) 근처 카르카라냐 강 강둑에서 밤을 보내기로 결정했다.[1] 그들은 케란디(Querandí) 원주민의 매복 공격을 받았고, 가라이, 수도사, 한 여성, 그리고 병사 12명이 살해당했다.[1]
가라이에게는 제로니마 데 컨트레라스(Jerónima de Contreras)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녀는 리오데라플라타 총독(Governorate of the Rio de la Plata)인 에르난도 아리아스 데 사아베드라(Hernando Arias de Saavedra)와 결혼했다.[2]
2. 3. 파라나 강 탐험과 산타페 건설
1543년 그는 삼촌 페드로 데 사라테와 함께 블라스코 누녜스 벨라 총독의 첫 페루 원정대에 합류했다. 1561년 산타크루스데라시에라 건설에 참여했고, 1568년 아순시온으로 이주하여 정치적 지위를 얻었다. 1573년 4월, 아순시온 총독은 그에게 80명의 부하를 이끌고 파라나강을 탐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 과정에서 산타페 데 라 베라크루스 시를 건설했다.[1] 1576년 아순시온 총독으로 임명된 그는 원주민들 사이에 정의와 문명을 도입하여 평화와 조화를 이루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인디언 마을을 설립하고 지역 통치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2. 4. 아순시온 총독 시절
1568년 아순시온으로 거주지를 옮겨 정치적 지위를 얻었다. 1573년 4월 아순시온 총독은 그에게 8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파라나강 탐험을 명령했고, 그 과정에서 산타페데라베라크루스(Santa Fe, Argentina) 시를 건설했다. 1576년에는 아순시온 총독으로 임명되었다.[1] 그의 주요 목표는 원주민들 사이에 정의와 문명을 도입하여 평화와 조화를 증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그는 인디언 마을을 설립하고 지역 통치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1580년 총독령의 사령관(Capitan General)이 된 그는 리오데라플라타 강둑에 도시를 재건설했다. 이 도시는 1536년 페드로 데 멘도사에 의해 누에스트라 세뇨라 델 부엔 아예레(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이름으로 처음 건설되었지만 나중에 원주민에 의해 파괴되었다. 후안 데 가라이는 1580년 6월 11일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두 번째로 건설했다. 그는 마요 광장 지역의 강둑에 상륙하여 도시 이름을 시우다드 데 라 트리니다드(Ciudad de la Trinidad)라고, 항구 이름을 산타 마리아 데 부에노스 아이레스(Santa Maria de Buenos Ayres)라고 명명했다.[1]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파라나 분지의 주요 도시이자 가장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
2. 5. 부에노스아이레스 재건
1580년 총독령의 사령관(Capitan General)이 된 후안 데 가라이는 리오데라플라타 강둑에 도시를 재건설했다. 이 도시는 1536년 페드로 데 멘도사에 의해 누에스트라 세뇨라 델 부엔 아예레(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이름으로 처음 건설되었지만, 이후 원주민에 의해 파괴되었다.[1] 1580년 6월 11일, 가라이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두 번째로 건설했다. 그는 마요 광장 지역의 강둑에 상륙하여 도시 이름을 시우다드 데 라 트리니다드(Ciudad de la Trinidad)라고 짓고, 항구 이름은 산타 마리아 데 부에노스 아이레스(Santa Maria de Buenos Ayres)라고 명명했다.[1]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파라나강 분지의 주요 도시이자 가장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2. 6. 카이사르의 도시 탐험
이후 그는 전설적인 카이사르의 도시를 찾아 탐험을 떠났다(1581-1582).[1]2. 7. 죽음
후안 데 가라이는 1583년 3월 20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산타페로 가던 도중 리오데라플라타 근처에서 사망했다.[1] 가라이와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한 명, 여성 한 명, 그리고 40명의 부하로 구성된 일행은 알려지지 않은 석호에 들어갔고, 산티 스피리투스 요새 근처 카르카라냐 강 강둑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이들은 케란디 원주민의 매복 공격을 받아 가라이와 수도사, 여성 한 명, 병사 12명이 살해당했다.[2]3. 가족
가르시아 카라파에 따르면, 가라이 가문의 문장(금색 사자를 휘날리는 빨간색 방패에 은색 깃발)은 13세기에 이미 언급된 투델라(나바라)의 귀족 가라이 가문의 기원을 나타낸다. 비스카야 출신인 후안 데 가라이는 기사 작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푸에로스"(Fueros, 바스크 지방의 특권 규약)가 모든 비스카야인에게 부여한 작위였다. 가라이 가문은 어느 정도 경제적, 문화적 수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삼촌이 세고비아의 판사이자 "알칼데 마요르"(Alcalde Mayor, 시장 겸 치안판사)로 임명되었고, 그의 사촌이 살라망카 대학교에 다녔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후안은 삼촌 페드로 오르티스 데 사라테, 그의 아내 카탈리나 우리베 이 살라사르, 그리고 사촌들인 페드로 오르티스 데 사라테, 아나 살라사르, 프란시스코 우리베와 함께 살았다. 세 자녀는 서로 다른 성을 가지고 있는데, 장남만이 아버지의 성을 유지하고 다른 자녀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당시 매우 흔한 일이었다). 그는 또한 리오 데 라 플라타의 세 번째 "아델란타도"(Adelantado, 선구자)인 후안 오르티스 데 사라테와도 가족 관계였다.
참조
[1]
위키소스
Acta de fundación de Buenos_Aires (1580)
[2]
서적
Aquellos, Los Que Se Quedaron
http://www.cfired.or[...]
Ciudad Gótica
2017-12-00 #날짜 정보가 부정확하여 00으로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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