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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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충제는 143년에 태어나 145년에 사망한 후한의 황제이다. 순제의 아들이자 유일한 황태자였으며, 1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양태후가 섭정했다. 재위 기간 동안 농민 반란과 순제의 무덤 도굴 등 사회 불안이 심화되었으며, 2세의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사후에는 양태후가 섭정하며 질제가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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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년 사망 - 유대 (부릉절왕)
양가 원년에 부릉왕에 봉해진 유대는 13년간 재위하다 영희 원년에 사망하여 시호를 받았으나 아들이 없어 봉국이 폐지된 후, 그의 형이 부릉왕에 봉해져 가문을 이었다. - 2세기 중국의 군주 - 후한 영제
후한 영제는 환제 뒤를 이어 13세에 즉위한 후한의 제12대 황제로, 재위 기간 동안 환관들의 발호와 매관매직, 황건적의 난 등으로 후한 멸망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붕어 후에는 황위 계승 싸움으로 후한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 2세기 중국의 군주 - 후한 소제 (13대)
후한 소제는 후한 영제의 아들로 189년에 황위에 올랐지만 동탁에 의해 폐위되어 홍농왕으로 강등되었고, 결국 독살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후한 충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휘 | 유병(劉炳) |
시호 | 효충황제 |
묘호 | 없음 |
생년 | 143년 |
몰년 | 145년 2월 15일 (2세) |
부친 | 후한 순제 |
모친 | 우미인 |
능묘 | 회릉 |
재위 | |
즉위일 | 144년 9월 20일 |
퇴위일 | 145년 2월 15일 |
전임자 | 후한 순제 |
후임자 | 후한 질제 |
연호 | |
연호 | 영희 (145년) |
2. 생애
순제와 그의 후궁 우미인 사이에서 143년에 황태자 빙이 태어났다.[3] 그의 어머니 우미인은 12세에 입궁하여 빙의 여동생인 안향공주를 낳았다.[3] 황태자 빙은 순제의 유일한 아들이었다.[3]
144년 6월 3일, 순제는 병이 깊어지자 빙을 황태자로 책봉했다.[3] 4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순제가 죽었고, 당시 한 살이었던 황태자 빙은 숭제로 즉위했다.[3]
어린 나이로 즉위한 충제는 양태후가 섭정을 맡았다. 양태후는 섭정 업무에 비교적 성실하고 개방적이었으나, 부패하고 폭력적인 오빠 양기를 신뢰한 것이 가장 큰 과오였다.[4] 유능한 관료 황보규(황보숭의 숙부)는 양기와 그의 형제 양부의가 겸손하고 검소하게 살 것을 암시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는데, 양기는 황보규를 해임하고 여러 차례 그를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무고하려 했다.[4]
충제 재위 기간 동안, 순제 통치 말기에 이미 문제였던 농민 반란이 더욱 심각해졌으며, 심지어 순제의 무덤이 도굴당하기도 했다.
145년 2월, 충제가 사망했다.[4] 양태후는 처음에 후계자를 결정할 때까지 충제의 죽음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핵심 관리인 이고의 말을 듣고 충제의 죽음을 즉시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로 결정했다.[4] 양태후는 충제의 사촌인 청하왕 유산과, 박해효왕 유홍의 아들인 유찬을 수도로 소환하여 두 사람을 고려했다. 유산은 성인으로 보였고 엄숙하고 바른 인물로 묘사되었으며, 관리들은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양기는 더 오랫동안 절대적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어린 황제를 원했고, 양태후를 설득하여 일곱 살의 유찬을 황제(질제)로 옹립했다.[4]
어린 나이에 사망한 충제는 비용 절감을 위해 아버지의 능묘 단지에 묻혔다.[4]
충제 사후 한참 뒤인 175년 11월, 영제는 충제의 어머니인 유귀인(貴人)에게 원래의 작위인 미인(美人)보다 높은 귀인(貴人)의 작위를 수여하여 황제의 어머니로서의 지위를 인정했다.[4]
2. 1. 출생과 즉위
순제와 그의 후궁 우미인 사이에서 143년에 황태자 빙이 태어났다.[3] 그의 어머니 우미인은 12세에 입궁하여 빙의 여동생인 안향공주를 낳았다.[3] 황태자 빙은 순제의 유일한 아들이었다.[3]
144년 6월 3일, 순제는 병이 깊어지자 빙을 황태자로 책봉했다.[3] 4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순제가 죽었고, 당시 한 살이었던 황태자 빙은 숭제로 즉위했다.[3]
2. 2. 짧은 재위와 죽음
어린 나이로 즉위한 충제는 양태후가 섭정을 맡았다. 양태후는 섭정 업무에 비교적 성실하고 개방적이었으나, 부패하고 폭력적인 오빠 양기를 신뢰한 것이 가장 큰 과오였다.[4] 유능한 관료 황보규(황보숭의 숙부)는 양기와 그의 형제 양부의가 겸손하고 검소하게 살 것을 암시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는데, 양기는 황보규를 해임하고 여러 차례 그를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무고하려 했다.[4]충제 재위 기간 동안, 순제 통치 말기에 이미 문제였던 농민 반란이 더욱 심각해졌으며, 심지어 순제의 무덤이 도굴당하기도 했다.
145년 2월, 충제가 사망했다.[4] 양태후는 처음에 후계자를 결정할 때까지 충제의 죽음을 비밀로 하려 했으나, 핵심 관리인 이고의 말을 듣고 충제의 죽음을 즉시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로 결정했다.[4] 양태후는 충제의 사촌인 청하왕 유산과, 박해효왕 유홍의 아들인 유찬을 수도로 소환하여 두 사람을 고려했다. 유산은 성인으로 보였고 엄숙하고 바른 인물로 묘사되었으며, 관리들은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양기는 더 오랫동안 절대적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어린 황제를 원했고, 양태후를 설득하여 일곱 살의 유찬을 황제(질제)로 옹립했다.[4]
어린 나이에 사망한 충제는 비용 절감을 위해 아버지의 능묘 단지에 묻혔다.[4]
충제 사후 한참 뒤인 175년 11월, 영제는 충제의 어머니인 유귀인(貴人)에게 원래의 작위인 미인(美人)보다 높은 귀인(貴人)의 작위를 수여하여 황제의 어머니로서의 지위를 인정했다.[4]
3. 연호
영희(永熹) 145년
4. 가계
wikitext
조상 | |
---|---|
한 안제 (94–125) | 공민 황후 (115년 사망) |
부모 | |
한 순제 (115–144) | 유부인 (179년 사망) |
한 충제 (143–145) |
5. 기년
6. 둘러보기
참조
[1]
서적
Emperor Chong's biography in Book of the Later Han
Houhanshu
144-09-20
[2]
서적
Emperor Chong's biography in Book of the Later Han
Houhanshu
145-02-15
[3]
서적
Emperor Shun's biography in Book of the Later Han
Houhanshu
[4]
서적
Houhan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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