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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지카타 가쓰타카 (16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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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지카타 가쓰타카는 1642년에 태어난 인물로, 히지카타 가쓰쓰구의 차남이다. 형의 병약함으로 인해 세자가 되었고, 1679년 부친의 은거로 가문을 계승했다. 이후 후계자 문제와 측실 살해 사건으로 인해 1684년 개역되어 봉지를 몰수당했고, 에치고국 무라카미번으로 유배되었다. 1691년 유배지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동생에게 재산과 비축금이 주어지고 자손은 하타모토로 존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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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지카타 가쓰타카 (1642년)
기본 정보
씨족토모카타 씨
시대에도 시대 전기 - 중기
출생간에이 19년 ( 1642년 )
사망겐로쿠 4년 6월 12일 ( 1691년7월 7일 )
개명토모타카 (초명), 토모타카
다른 이름통칭: 겐모노
묘소오사카부가이즈카시 모리노 아오마쓰지
관위종5위하야마시로노카미, 이가노카미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이에쓰나 → 쓰나요시
무쓰구보타번 번주
부모히지카타 가쓰쓰구, 나이토 다다오키 딸
형제자매가쓰노부, 토모타카, 가쓰요시, 하야시 사다토시, 우카이 가네하루,
로쿠고 마사노부 계실, 이토 모처
배우자고이데 요시시게 딸
직책
번주구보타번 (히지카타가)
대수3
임기1679년 ~ 1684년
전임 및 후임
전임자히지카타 가쓰쓰구
후임자개역

2. 생애

간에이 19년(1642년), 고모노번의 2대 번주 히지카타 가쓰쓰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병약했던 형 히지카타 가쓰노부를 대신하여 세자가 되었고, 만지 2년(1659년)에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를 배알했다.

엔포 7년(1679년), 아버지의 은퇴로 가문을 계승하여 3대 번주가 되었다. 이때 동생 히지카타 가쓰요시에게 영지 2천 석을 나누어 주어 1만 8천 석의 영주가 되었으며, 종5위하 야마시로노카미에 서임되었다가 덴나 원년(1681년)에는 이가노카미에 임명되었다. 그의 정실은 코이데 요시시게의 딸이다.

덴나 2년(1682년) 이후, 후계자 문제로 가문 내 분쟁이 발생했다. 가쓰타카는 다른 가문에 양자로 갔던 동생 하야시 사다토키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가신들은 형 가쓰노부의 아들 히지카타 타쿠미를 지지했다. 이 갈등은 조쿄 원년(1684년) 에도에서의 소동으로 번졌고, 결국 막부에 제소되는 사태로 이어졌다. 또한 가쓰타카 본인이 측실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일으키면서, 같은 해 7월 22일 개역 처분을 받고 영지를 몰수당했다. 이 과정에서 가쓰타카의 의붓동생인 아리마 도요스케도 연루되어 개역되었다.

개역 후 가쓰타카는 에치고국 무라카미번으로 보내져 번주 사카키바라 마사쿠니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겐로쿠 4년(1691년) 유배지에서 향년 50세로 사망했다. 그의 가문은 동생 가쓰요시가 1700석의 하타모토로서 이어가게 되었다.

2. 1. 가문 계승

간에이 19년(1642년), 2대 번주 히지카타 가쓰쓰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병약했던 형 히지카타 가쓰노부를 대신하여 세자가 되었다. 만지 2년(1659년)에 도쿠가와 이에쓰나를 배알했으며, 엔포 7년(1679년) 11월 27일 부친의 은거로 가문을 계승했다. 정실은 코이데 요시시게의 딸이다. 이때 동생 히지카타 가쓰요시에게 2000석을 나누어 주어, 가쓰타카의 영지는 1만 8000석이 되었다. 동시에 종5위하 야마시로노카미에 서임되었고, 덴나 원년(1681년)에는 이가노카미에 서임되었다.

덴나 2년(1682년), 가신 하야시 씨 가문에 양자로 들어간 동생 하야시 사다토키를 임시 양자로 삼아 가문을 잇게 하려 했다. 그러나 영지의 가신들은 이미 다른 가문에 속한 사다토키가 아닌, 형 가쓰노부의 아들 히지카타 타쿠미에게 가문을 잇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쿄 원년(1684년), 가쓰타카는 이를 받아들여 타쿠미를 양자로 삼기 위해 함께 에도로 향했으나, 에도의 가신들은 사다토키를 지지하며 소동이 일어났다. 사다토키가 이 문제를 막부 오메츠케에 제소했고, 또한 가쓰타카가 자신의 측실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결국 이 때문에 1684년 7월 22일에 개역되어 영지를 몰수당했다.

개역 후 가쓰타카는 에치고국 무라카미번 번주 사카키바라 마사쿠니에게 맡겨졌다. 후계자 후보였던 사다토키는 이세국 히사이번 번주 도도 다카미치에게 맡겨졌고, 타쿠미는 하치조 섬으로 유배되었다. 가신의 대부분도 처분되었으며, 소동의 중재를 맡았으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가쓰타카의 의붓동생이자 치쿠고국 마쓰자키번 번주였던 아리마 도요스케도 개역 처분을 받았다.

가쓰타카는 겐로쿠 4년(1691년)에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향년 50세였다.

개역 4일 후, 동생 가쓰요시에게 가쓰타카의 재산과 에도 번저 비축금 5만 냥이 주어졌다. 가쓰요시의 자손은 1700석의 하타모토로서 가문을 존속시켰다. 나이토 마사사다는 이 가쓰요시의 차남에 해당한다.

2. 2. 후계자 분쟁과 개역

엔포 7년(1679년) 11월 27일, 아버지 히지카타 가쓰쓰구가 은거하자 가문을 계승하였다. 이때 동생 가쓰요시에게 2천 석의 영지를 나누어 주어, 고모노번의 영지는 1만 8천 석이 되었다. 같은 해 종5위하 야마시로노카미(山城守)에 서임되었고, 덴나 원년(1681년)에는 이가노카미(伊賀守)에 서임되었다. 그의 정실은 고이데 요시시게의 딸이다.

덴나 2년(1682년), 가쓰타카는 가신 하야시(林) 가문의 양자로 들어간 동생 사다토키를 임시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정하려 했다. 그러나 영지의 가신들은 이미 다른 가문에 들어간 사다토키 대신, 가쓰타카의 형인 가쓰노부의 아들 타쿠미를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쿄 원년(1684년), 가쓰타카는 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타쿠미를 양자로 삼기로 하고 함께 에도로 향했다. 하지만 에도에 있던 가신들은 사다토키를 지지하며 반발했고, 이는 큰 소동으로 번졌다. 결국 사다토키는 막부의 오메츠케(大目付, 감찰관)에게 이 문제를 제소했다. 설상가상으로 가쓰타카가 자신의 측실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결국 같은 해 7월 22일, 가쓰타카는 개역 처분을 받아 영지를 몰수당했다. 그는 에치고국 무라카미번 번주 사카키바라 마사쿠니에게 맡겨지는 신세가 되었다. 후계자 후보였던 사다토키는 이세국 히사이번 번주 도도 다카미치에게 맡겨졌고, 타쿠미는 하치조 섬으로 유배되었다. 가신들 대부분도 처벌을 받았다. 또한, 이 소동의 중재를 맡았으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가쓰타카의 의붓동생이자 치쿠고국 마쓰자키번 번주였던 아리마 도요스케 역시 개역 처분을 받았다.

가쓰타카는 겐로쿠 4년(1691년) 유배지에서 향년 50세로 사망했다.

가쓰타카가 개역된 지 4일 후, 막부는 그의 동생 가쓰요시에게 가쓰타카의 재산과 에도 번저에 비축되어 있던 금 5만 냥을 지급했다. 가쓰요시의 가계는 1700석의 하타모토(旗本, 쇼군의 직속 가신)로서 존속하게 되었다. 후에 나이토 마사사다는 이 가쓰요시의 둘째 아들이다.

2. 3. 유배와 죽음

덴나 2년(1682년), 가쓰타카는 가신의 하야시 씨 가문에 양자로 들어간 동생 사다토키를 임시 양자로 삼아 가문을 계승시키려 했다. 그러나 영지의 가신들은 이미 다른 가문에 속한 사다토키 대신, 가쓰타카의 형 가쓰노부의 아들인 타쿠미가 가문을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반대했다. 조쿄 원년(1684년), 가쓰타카는 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타쿠미를 양자로 삼기 위해 함께 에도로 향했으나, 에도에 있던 가신들은 사다토키를 지지하면서 내부 분열이 일어났다. 결국 사다토키는 이 문제를 막부의 오메츠케에 제소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가문 계승 분쟁 와중에 가쓰타카가 자신의 측실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 두 사건을 이유로 1684년 7월 22일, 막부는 가쓰타카에게 개역 처분을 내리고 영지를 몰수했다. 가쓰타카는 에치고국 무라카미번의 번주 사카키바라 마사쿠니에게 신병이 맡겨져 유배되었다.

이 소동에 연루된 다른 인물들도 처벌을 피하지 못했다. 사다토키는 이세국 히사이번 번주 도도 다카미치에게 보내졌고, 타쿠미는 하치조 섬으로 유배되었다. 가신들 대부분도 처벌을 받았으며, 소동을 중재해야 했음에도 이를 방치했다는 이유로 가쓰타카의 의붓동생이자 치쿠고국 마쓰자키번 번주였던 아리마 도요스케마저 개역 처분을 받았다.

가쓰타카는 겐로쿠 4년(1691년)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향년 50세였다.

가쓰타카가 개역된 지 4일 후, 그의 재산과 에도 번저에 보관되어 있던 비축금 5만 냥은 동생 가쓰요시에게 주어졌다. 가쓰요시의 후손들은 1700석의 하타모토로서 가문을 유지하게 되었다. 나이토 마사사다는 이 가쓰요시의 둘째 아들이다.

2. 4. 가문의 존속

개역 4일 후, 동생 가쓰요시에게 가쓰타카의 재산과 에도 번저 비축금 5만이 주어졌다. 가쓰요시의 자손은 1700석의 하타모토로 존속하게 되었다. 나이토 마사사다는 이 가쓰요시의 차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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