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르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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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괴르데 전투는 1813년 9월 16일부터 18일까지 일어난 전투로, 프로이센, 러시아, 영국, 하노버 연합군이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이 전투는 연합군이 독일 주둔 프랑스군을 상대로 거둔 최초의 승리였으며, 프랑스군의 보급선을 방해하고, 콩그리브 로켓이 성공적으로 배치된 첫 사례로 기록되었다. 괴르데 전투의 승리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연합군이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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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르데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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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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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니더작센의 괴르데 근처 |
전투 정보 | |
전투 | 괴르데 전투 |
분쟁 | 나폴레옹 전쟁 중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의 독일 전역 |
날짜 | 1813년 9월 16일 |
결과 | 동맹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랑스 |
교전국 2 |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하노버 선제후국 |
지휘관 | |
지휘관 1 | 페쉐 |
지휘관 2 | 발몽덴 |
병력 규모 | |
병력 1 | 3,000명 |
병력 2 | 12,300명 |
사상자 규모 | |
사상자 1 | 1,000명 |
사상자 2 | ? |
2. 배경
1813년 봄, 프리드리히 카를 폰 테텐보른 휘하의 러시아군은 함부르크와 하노버 북부 지역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려 했다. 프로이센 왕국이 프랑스에 대항해 전쟁에 참여하면서 하노버 동부 지역 역시 나폴레옹에게 저항해 봉기했다. 루트비히 폰 발모덴김보른 중장은 엘베강 하류 지역에서 연합군의 총지휘권을 인수받았다. 연합군은 러시아 독일 군단, 뤼초프 자유군단, 한자 동맹 군단, 조지 왕 군단의 일부를 포함한 프로이센, 러시아, 영국, 하노버, 함부르크, 메클렌부르크, 스웨덴 군으로 구성되었다.
1813년 9월 16일 이른 오후, 마르크 니콜라 루이 페슈 휘하의 프랑스군 부대는 나흐렌도르프(Nahrendorf)에 있는 스테인케르 호헨(Steinker Höhen, 스테인케르 고지대)에 도착하여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 발모덴의 부대는 조금 늦게 전장에 도착했지만, 프랑스군을 공격하여 격퇴했다. 휴 할켓의 하노버 연대는 프랑스군을 저녁때까지 퇴각하게 만들었다.
괴르데 전투는 연합군이 독일 주둔 프랑스군을 상대로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이 승리로 연합군은 함부르크에 사령부를 둔 다부 원수의 제13 군단과 작센에 머무르고 있던 나폴레옹 본대와의 연락을 교란하고, 프랑스에서 하노버를 거쳐 마그데부르크와 베를린으로 이어지는 프랑스군의 보급선을 방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얼마 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연합군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괴르데 전투는 독일 주둔 프랑스군에 대한 최초의 승리였다. 이 전투로 다부 원수 휘하의 제13군단(본부는 함부르크)과 나폴레옹의 주력군(당시 작센) 사이의 연결이 끊어졌고, 프랑스에서 마그데부르크와 베를린으로 이어지는 하노버를 통한 프랑스군의 보급선이 차단되었다. 이 결과는 곧 이어진 라이프치히 전투의 결과에 매우 중요했다.
1839년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거대한 석비가 리히퉁 단너베르크(Richtung Dannenberg)에 있는 올덴도르프 뒤쪽 약 2km 정도 떨어진 216번 국도 북쪽에 오늘날에도 자리하고 있다.
뤼초프 자유군단과 같은 자유 군단은 엘베 강 남쪽, 메클렌부르크 주변 지역에서 프랑스군의 보급선과 기지를 공격했다. 루이 니콜라 다부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군 제13 군단은 연합군의 움직임을 경계하며 수동적인 태도를 취했다. 다부 원수는 마르크 니콜라 루이 페슈 장군에게 제50 보병 연대의 일부를 이끌고 엘베강 서쪽으로 이동하여 그곳의 병력과 합류한 후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뤼네부르크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페슈는 임무를 완수한 후 마그데부르크에 있는 프랑스군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발모덴은 9월 15일 12,3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도미츠로 진격하여 엘베강을 건너 프랑스군을 목표로 이동, 단넨베르크에 막사를 설치했다.
3. 전투과정
발모덴의 보병이 중앙을 공격하는 동안, 돈베르크(Dornberg)는 KGL 기병대와 포병대를 이끌고 적의 좌익을 공격했다. 그러나 돈베르크는 대포와 로켓을 너무 먼 거리에서 발사했고, 그들의 포격은 효과가 없었고 리옹(Lyon) 장군의 보병 공격은 지연되었다. 프랑스군은 방진을 이루며 후퇴하기 시작했고, 토마스 폭스 스트레인지웨이스 중위는 "적 보병의 사격 아래에서" 로켓을 발사하기 위해 전진했다. KGL 제3 척탄병 기병대는 두 개의 방진을 무너뜨렸고, 로켓은 후퇴하는 대열에 큰 공포를 퍼뜨려 더 이상 질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프랑스군은 궤멸되어 사방으로 도망쳤다.
4. 결과
이 전투는 새롭게 개발된 콩그리브 로켓이 작전에 성공적으로 배치된 최초의 전투였다.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보그와 스트레인지웨이스가 지휘하는 로켓 여단은 스웨덴의 베르나도트 왕세자의 군단에 배속되어 상당한 공격을 가했다.
5. 전투의 의의 (한국적 관점)
이 전투는 새롭게 개발된 콩그리브 로켓이 작전에 성공적으로 배치된 최초의 전투였다.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보그와 스트레인지웨이스가 지휘하는 로켓 여단은 스웨덴의 베르나도트 왕세자의 군단에 배속되어 상당한 공격을 가했다.
6. 기념
양군 합쳐 1,000명에 달하는 전사자가 숲에 매장되었으며, 이들의 거대한 무덤은 기념비가 있는 곳에서 약 1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무덤은 1985년 재발견되었다.
루돌프 폰 베니히센의 아버지 카를 폰 베니히센은 이 전투에 부관으로 참여했다. 자유의 투사로 유명한 엘로노아르 프로챠스카는 남자로 변장하고 뤼초프 자유군단에 합류하여 전투에 참여하였다. 전투 와중에 그녀는 부상을 입었고, 얼마 안 있어 단네베르크의 병원에서 부상으로 인해 사망하고 만다. 다흘렌부르크에서는 2년마다 전투 재연 행사가 개최된다. 이 도시에 있는 하이마트 박물관(Heimatmuseum)에는 1,500개의 주석 병사 모형을 통해 당시 전투를 보여주는 디오라마가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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