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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18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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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김기태(金琪邰, 1887년 8월 5일 ~ 1941년 7월 5일)는 일제강점기의 관료이자 친일파입니다. 본적은 경상남도 진주군 내동면이며, 일본식 이름은 가네사와 데루아키(金澤輝昌)입니다.
주요 활동:


  • 관료 경력: 1902년 탁지부 세무주사로 임명된 후 관직을 사임했다가, 1921년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를 지냈습니다.
  • 친일 행적: 1909년 의병의 군자금 요청을 경찰에 고발한 것을 시작으로, 1910년 일본 관서지방 연합공진회에 관광단으로 참석, 1920년대에는 각종 관변단체 자문 및 고문직을 맡아 활동비를 지원했습니다. 중일전쟁 발발 시기에는 애국비행기 진주호 헌납을 주도하고 내선일체를 주장했습니다.
  • 경제 활동: 380만 원에 달하는 자산을 소유한 대지주였으며, 서울 이부자, 경주 최부자와 함께 진주 김부자로 불리는 남한 3대 갑부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경상농공은행, 진주전기주식회사 등 여러 기업의 임원을 역임했습니다.
  • 교육 활동: 진주보통학교, 진주제일보통학교 학무위원, 사립 독명학교 교장, 보성전문학교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교육계에도 관여했습니다.
  • 언론 활동: 1909년 경남일보를 창간하고 임시사무소장, 회계감사장, 부사장 등으로 활동했습니다. 1936년에는 월간지 《영남춘추》의 고문을 맡았습니다.
  • 수상 내역: 진주공립보통학교에 교사를 기부한 공로로 은잔을 받았고, 진주헌병대 사천분견대에 부지를 기부한 공로로 대정대례기념장을 받았습니다.


김기태는 일제강점기 동안 친일 행적을 통해 부와 권력을 누렸으며, 이러한 행적은 현재까지도 비판받고 있습니다. 2023년에는 김기태를 기리는 공덕비가 진주시에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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