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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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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김길창(金吉昌, 1892년 11월 11일 ~ 1977년 12월 11일)은 일제강점기에 적극적으로 부일협력 활동을 한 장로교 목사입니다. 해방 이후에는 교육자로 활동하며 여러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주요 생애:


  • 출생 및 성장: 1892년 11월 11일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에서 출생했습니다. 9세에 그의 집안이 기독교를 접했고, 그는 한문 서당과 계성학교에서 수학했습니다.
  • 목회 활동: 1923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마산 문창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이후 여러 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했습니다.
  • 친일 행적: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및 조선교단 경남 교구장으로서 적극적으로 부일협력 활동을 했습니다. 신사참배를 독려하고 황민화 정책에 동조했습니다. 이로 인해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2009년 친일·반민족 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명단에 등재되었습니다. 1949년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체포되었으나 기소유예로 풀려났습니다.
  • 교육 활동: 해방 후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실업여학교의 재산을 인수하고, 대규모의 적산(敵産) 땅을 불하받아 학교법인 남성·훈성·대동·한성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았습니다. 그가 설립한 학교로는 남성초등학교, 남성여고, 대동중학교, 광성공업고등학교(현 경성전자고), 대동고등학교, 훈성여고(현 계성여고), 거제중학교(현 거성중학교), 경성대학교 등이 있습니다.
  • 기타 활동: 한국기독교연합회 회장, 부산신학교 교장 및 이사장을 역임했습니다.
  • 사망: 1977년 12월 11일에 사망했습니다.

논란:

  • 친일 행적: 김길창의 가장 큰 논란은 일제강점기 동안의 친일 행적입니다.
  • 재혼: 1962년, 71세의 나이에 34세의 여성과 재혼하여 세간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김길창은 목회자, 교육자로서 다양한 활동을 했지만, 친일 행적으로 인해 논란이 많은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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