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로 (19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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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김병로 (金炳魯, 1887년 12월 15일 ~ 1964년 1월 13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 법조인, 정치인, 시인이다. 호는 가인(街人)이며, 본관은 울산이다.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서 태어났다.
생애일제강점기
- 1910년 일본에 유학하여 법학을 전공하였다.
- 귀국 후 경성전수학교(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전신)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법학을 강의했다.
- 1919년 3·1 운동 이후, 총독부는 한국인에게도 교수 경력이 있으면 판사 자격을 인정해 주었고, 김병로는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원 판사로 임명되었으나, 민족 운동 관련 재판을 맡을 수 없어 1년 만에 사직하였다.
- 변호사로 개업하여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관련 사건들을 무료로 변론하는 등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 허헌, 이인과 함께 조선의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 불렸다.
- 형사공동연구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 관련 사건을 무료 변론하고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 신간회 활동에 참여하여 항일 운동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 1930년대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변호사 생활을 중단하고 경기도 양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칩거하였다.
해방 이후
- 해방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 미군정청 사법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사법제도의 기초를 닦았다.
-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및 제2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법질서 확립에 기여하였다.
- 반민족행위처벌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친일파 청산에 노력했다.
- 이승만 독재에 맞서 싸웠고, 5.16 군사정변 이후 군정 종식을 촉구하며 야권 통합을 추진했다.
주요 활동
- 독립운동가 무료 변론
- 보합단 사건 (1921년)
- 김상옥 의사 사건 (1923년)
- 제2차 의열단 사건
- 6.10 만세 운동 (1926년)
- 간도 공산당 사건 (1928년)
- 원산 파업 사건 (1929년)
- 안창호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 (1932년)
- 광주 학생 운동 관련 사건 (1929년)
기타
-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김병로는 사법권 독립과 재판의 독립성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창동으로 이주하여 은둔 생활을 하기도 했다.
참고:
- 김병로를 검색했을 때, 1943년 생의 정치인 김병로도 검색되지만, 위에서 설명한 김병로는 1887년생의 독립운동가이자 법조인이다.
- 1943년은 김병로가 일제 강점기 말기에 변호사 활동을 중단하고 칩거하던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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