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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수 (19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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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창수는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나 한진중공업 노동자로 일하며 노동운동에 참여한 인물이다. 1990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전국노동자협의회 활동을 주도하다 1991년 2월 구속되었다. 안기부의 고문과 전노협 탈퇴 압박에 저항하다가 1991년 5월 안양병원에서 의문사했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고문치사 및 자살 위장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병원에 정체불명의 남자 출현, 자살 위장 정황 등 논란이 있었다.

2. 생애

박창수는 1958년 부산직할시 영주동에서 태어났다. 1979년 부산기계공고를 졸업하고 공장 노동자가 되었다가, 1981년 대한조선공사(현, HJ중공업)에 배관공으로 입사하여 한진중공업에서 근무하였다. 1987년부터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하여 3년간 노조 회계감사를 맡았고, 1990년 7월 노조위원장에 당선되었다.[2] 그해 9월 노동조합총연합 부산지역지부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안기부의 미행과 내사를 받았으며, 전노협 탈퇴 공작에도 불구하고 전국 노동자 연대 투쟁을 이끄는 지도자로 활동하며 노동 시위를 주도하였다. 1991년 2월 대우조선 투쟁 지원 연대 회의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고, 한진중공업에서 해임되었다.[2]

1991년 2월 안기부로 이감되어 조사받았다. 안기부 특별보좌관(차관급) 등이 직접 고문을 가했지만 전노협 탈퇴를 거부했고, 고문은 계속되었다.[1] 5월 4일 감옥에서 전노협 탈퇴 권고에 맞서다 부상당하고 경기도 안양시 안양병원에 입원하였다.[1] 5월 6일 새벽 안기부의 전노협 탈퇴 공작에 저항하다가 고문으로 사망하였다.[1]

박창수가 갑자기 죽자 고문 치사 의혹이 제기되었다. 경찰은 5월 7일 시신이 안치된 안양병원에 백골단과 전경 22개 중대를 투입하여 시신을 탈취하였다. 경찰은 강제로 부검을 실시한 뒤, 박창수가 18미터 높이 병실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발표했다.[2] 이후 안기부에서 고문치사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자살로 위장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해 6월 30일 양산군 솥발산 묘역에 안장되었다.

2. 1. 초기 활동

1958년 부산직할시 영주동에서 태어났다. 1979년 부산기계공고를 졸업하고 공장 노동자가 되었다가, 1981년 대한조선공사(현, HJ중공업)에 배관공으로 입사하였다. 이후 줄곧 한진중공업에서 근무하였다.

2. 2. 노동운동

1987년부터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하여, 3년 간 노조 회계감사를 맡았다. 1990년 7월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선거에서 93%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당선되었다.[2] 그해 9월 노동조합총연합 부산지역지부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안기부의 미행과 내사를 받았으며, 안기부의 전노협 탈퇴 공작에도 불구하고 전국 노동자 연대 투쟁을 이끄는 지도자로 활동하며 노동 시위를 주도하였다. 1991년 2월 대우조선 투쟁 지원 연대 회의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고, 한진중공업에서 해임되었다.[2]

당시 안기부는 전노협 탈퇴를 협박했으나, 그는 "전노협이 나고 내가 전노협인데 어떻게 전노협을 탈퇴할 수 있단 말이냐"며 저항했다고 전해진다.[2]

2. 3. 고문과 최후

1991년 2월 안기부로 이감되어 조사받았다. 안기부 특별보좌관(차관급) 최O희 등이 직접 고문을 가했지만 전노협 탈퇴를 거부했고, 고문은 계속되었다.[1]

5월 4일 감옥에서 전노협 탈퇴 권고에 맞서다 부상당하고 경기도 안양시 안양병원에 입원하였다.[1] 입원 후 정체불명의 젊은 남자들이 병실을 방문하였다 한다.[1] 5월 6일 4시 45분경 안기부의 전노협 탈퇴 공작에 저항하다가 고문으로 사망하였다.[1] 당시 33세였다.[1]

2. 4. 사후

박창수가 갑자기 죽자 고문 치사 의혹이 제기되었다. 경찰은 5월 7일 시신이 안치된 안양병원에 백골단과 전경 22개 중대를 투입하여 시신을 탈취하였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영안실 벽을 부수고 들어와 그의 주검을 빼앗아갔다.[2] 경찰은 강제로 부검을 실시한 뒤, 박창수가 18미터 높이 병실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발표했다.[2] 이후 안기부에서 고문치사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자살로 위장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해 6월 30일 양산군 솥발산 묘역에 안장되었다.

3. 논란과 의혹

박창수의 죽음을 둘러싸고 여러 의혹이 제기되었다. 1991년 5월 5일부터 5월 6일 사이에 박창수가 입원해 있던 병원에 정체불명의 남자가 출입했다는 의혹이 있으며[2], 금속노조는 안기부가 박창수를 타살하고 자살로 위장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1]

금속노조는 박창수가 안양교도소 수감 중 의문의 상처를 입고 안양병원에 입원한 지 이틀 만에 병원 마당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점, 당시 정부가 이를 자살로 발표했지만 자살로 보기 어려운 정황들이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특히 병원 측에서 추락 방지를 위해 창문과 옥상 문을 잠근 상태였고, 자살할 사람이 링거병을 7층 옥상까지 가지고 간 점은 의문으로 남는다.[1]

3. 1. 병원에 정체불명의 남자 출현 논란

박창수가 안양병원에 입원해 있던 1991년 5월 5일~5월 6일, 정체불명의 젊은 남자들이 병원에 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2] 그는 안기부 요원이 교도관의 눈을 피해 박창수를 데리고 나간 뒤 몇 시간 만에 시신으로 발견되었다.[2]

3. 2. 자살 위장 논란

금속노조는 박창수의 죽음이 안기부에 의한 타살이며, 자살로 위장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1] 금속노조는 안기부가 구속된 박창수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간부들에게도 "전노협을 탈퇴하면 박창수 위원장을 풀어 줄 수 있다"며 회유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박창수는 "내가 전노협이다"라며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1]

박창수는 안양교도소 수감 중이던 1991년 5월 4일 의문의 상처를 입고 안양병원에 입원했고, 이틀 뒤인 5월 6일 병원 마당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당시 정부는 이를 자살로 발표했지만, 금속노조는 다음과 같은 정황을 들어 자살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1]

  • 자살할 사람이 링거병을 7층 옥상까지 가지고 간 점
  • 병원 측에서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 병원 전체의 창문과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쇠창살과 열쇠로 잠근 상태였던 점


금속노조는 안기부 직원이 병원에 입원 중인 박창수를 살해하고 자살로 위장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5월 6일 정체불명의 젊은 남자가 박창수가 입원한 안양병원의 응급실 병동에 나타났고, 안기부 직원이 전화를 통해 계속 박창수와의 통화를 요청해왔다는 점을 들었다. 금속노조는 이를 통해 안기부가 전노협 탈퇴를 종용하며 박창수를 살해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

참조

[1] 뉴스 20년 전 박창수 노동열사 죽음 의문, 밝혀지지 않았다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11-05-02
[2] 뉴스 박창수 열사 20주기, 추모기간 선포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11-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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