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야 페롭스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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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피야 페롭스카야는 19세기 러시아의 혁명가로,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했다. 귀족 출신으로 급진적인 운동에 참여하여 차이코프스키 서클, 토지와 자유, 인민의 의지 등 여러 조직에서 활동했으며, 1881년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을 주도했다. 체포 후 재판을 거쳐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그녀의 삶은 후대의 여성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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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야 페롭스카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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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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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소피야 르보브나 페롭스카야 |
로마자 표기 | Sofiya Lvovna Perovskaya |
인물 정보 | |
출생일 | 1853년 9월 13일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사망일 | 1881년 4월 15일 |
사망지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사망 원인 | 교수형 |
배우자 | 안드레이 젤랴보프 |
경력 | |
소속 | 차이콥스키 단 |
소속 | 인민의 의지 |
활동 | 나로드니키 운동, 테러 |
모교 | 아랄친스키 여자 대학 |
재판 정보 | |
재판 |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사건 |
판결 | 유죄, 사형 |
2. 혁명가로서의 삶
페롭스카야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귀족 가문 출신으로, 어린 시절 크림반도에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스스로 책을 읽으며 지식을 쌓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한 후, 알라르친스키 강좌에 입학하여 급진적인 운동에 관심을 가진 친구들을 만났고, 이들과 함께 차이코프스키 서클에 가입했다.
1872-1873년과 1874-1877년에는 사마라, 트베르, 심비르스크 지방에서 활동하면서 교사와 의료 보조원 자격증을 받았다. 1873년에는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은 비밀 반차르 선전 회의를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여러 음모 아파트를 유지했다. 1874년 1월, 193인 재판과 관련하여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 수감되었다가 1877-1878년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1878년 여름, 페롭스카야는 ''제믈랴 이 볼랴''의 회원이 되었고, 곧 다시 체포되어 올로네츠 현으로 유배되었으나, 망명 가는 길에 탈출하여 지하로 숨어들었다. 1879년 가을, ''제믈랴 이 볼랴''의 집행위원회 및 행정 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페롭스카야는 학생, 군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선전을 펼쳤고, ''노동자 신문'' 조직에 참여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정치범들과 연대했다. 1879년 11월에는 제국 열차를 폭파하려는 시도에 참여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나로드나야 볼랴''에 합류했다.[5]
표트르 크로포트킨은 페롭스카야에 대해 "도덕적 개념에서 '엄격주의자'였지만, 설교하는 유형은 전혀 아니었다. 페롭스카야는 마음속 깊이 '민중주의자'였고, 동시에 혁명가이자 진정한 강철의 투사였다."라고 평가했다. 페롭스카야는 "우리는 위대한 일을 시작했다. 아마도 두 세대가 그 과업에서 희생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말했다.[5]
2. 1. 가문 배경과 유년 시절
소피야 페롭스카야는 엘리자베타 여제의 결혼으로 탄생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5] 그녀의 아버지 레프 니콜라예비치 페롭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군사 지사였고, 할아버지 니콜라이 페롭스키는 타브리다의 지사였다.[5]페롭스카야는 어린 시절을 크림반도에서 보냈는데, 그곳에서 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스스로 책을 읽으며 지식을 쌓았다.[5] 가족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한 후, 페롭스카야는 여자 예비 과정인 알라르친스키 강좌에 입학하여[1] 급진적인 운동에 관심을 가진 친구들을 만났다. 그녀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열여섯 살에 집을 나와 이 친구들과 함께 1871년부터 1872년까지 차이코프스키 서클에 가입했다.[5]
표트르 크로포트킨은 페롭스카야에 대해 "그녀는 도덕적 개념에서 '엄격주의자'였지만, 설교하는 유형은 전혀 아니었다. 페롭스카야는 마음속 깊이 '민중주의자'였고, 동시에 혁명가이자 진정한 강철의 투사였다."라고 평가했다.[5]
2. 2. 차이코프스키 서클 가입과 초기 활동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페롭스카야는 엘리자베타 여제의 결혼으로 탄생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알라르친스키 강좌라는 여자 예비 과정에 입학하여 급진적인 운동에 관심을 가진 소녀들과 친구가 되었고, 1871-1872년에 이들과 함께 차이코프스키 서클에 가입했다.[1][5]표트르 크로포트킨은 차이코프스키 서클의 저명한 일원이었는데, 페롭스카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녀는 도덕적 개념에서 '엄격주의자'였지만, 설교하는 유형은 전혀 아니었다. 페롭스카야는 마음속 깊이 '민중주의자'였고, 동시에 혁명가이자 진정한 강철의 투사였다."[5]
1873년, 페롭스카야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비밀리에 반차르 선전 회의를 열기 위해 여러 곳에 아파트를 마련해 두었다.[5] 1872-1873년과 1874-1877년에는 사마라, 트베르, 심비르스크 지방에서 활동하면서 교사와 의료 보조원 자격증을 취득했다.
2. 3. 제믈랴 이 볼랴(토지와 자유) 활동
페롭스카야는 1878년 여름, 혁명 조직 '''제믈랴 이 볼랴'''(Земля и воля)의 회원이 되었다.[5] 차이코프스키 서클에서 활동하던 중, 187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비밀리에 반(反)차르 선전 회의를 위한 아파트를 운영하다가[5] 1874년 1월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에 수감되었으나, 1877-1878년 193인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5] 이후 혁명가 이폴리트 미시킨을 석방하려는 시도에 참여했으나 실패했다. 제믈랴 이 볼랴에 가입한 직후 다시 체포되어 올로네츠 현으로 유배되었으나, 망명지로 가는 도중에 탈출하여 지하로 숨어들었다.[5]
제믈랴 이 볼랴의 일원으로서 페롭스카야는 하르코프로 가서 중앙 감옥에 수감된 정치범들의 석방을 위해 활동했다.[5] 1879년 가을, 제믈랴 이 볼랴의 집행위원회 위원 및 행정 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그녀는 학생, 군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선전 활동을 펼치고, '노동자 신문' 조직에 참여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정치범들과 연대했다.[5] 같은 해 11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제국 열차를 폭파하려는 시도에 참여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나로드나야 볼랴에 합류했다.[5]
2. 4. 나로드나야 볼랴(인민의 의지) 가입과 활동
표트르 크로포트킨은 페롭스카야에 대해 도덕적 개념에서 "엄격주의자"였지만, 설교하는 유형은 전혀 아니었으며, 마음속 깊이 "민중주의자"였고, 동시에 혁명가이자 진정한 강철의 투사였다고 평가했다.[5] 페롭스카야는 "우리는 위대한 일을 시작했다. 아마도 두 세대가 그 과업에서 희생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말했다.[5]1879년, 페롭스카야는 중앙 감옥에서 정치범들을 석방하기 위해 하르코프로 갔다. 같은 해 가을, 제믈랴 이 볼랴의 집행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나중에는 행정 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페롭스카야는 학생, 군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선전을 펼쳤고, ''노동자 신문'' 조직에 참여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정치범들과 연대했다. 1879년 11월, 모스크바로 가는 제국 열차를 폭파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그녀는 ''나로드나야 볼랴''에 합류했다.[5]
3. 알렉산드르 2세 암살
페롭스카야는 나로드나야 볼랴에 가담하여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을 실행했다. 1881년 3월 1일, 암살에 성공했으나, 3월 10일에 체포되어 다른 당원 4명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3. 1. 암살 준비 과정
페롭스카야는 모스크바 근처(1879년 11월), 오데사(1880년 봄), 상트페테르부르크(1881년 3월 1일, 결국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를 살해한 시도)에서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시도 준비에 참여했다. 그녀는 ''나로드나야 볼랴'' 집행 위원회 멤버인 안드레이 젤랴보프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나중에는 아내가 되었다. 젤랴보프는 이그나치 흐리니에비에츠키, 니콜라이 키발치치, 티모페이 미하일로프, 니콜라이 리사코프 등 4명의 폭탄 투척범 그룹과 함께 폭탄 공격을 지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젤랴보프가 공격 이틀 전에 체포되자 페롭스카야가 그 역할을 맡았다.[1]공격 전날 밤, 페롭스카야는 폭탄 조립을 도왔다.[2][3]
3월 13일 일요일([구력과 신력 날짜|구력]] 3월 1일), 폭탄 투척범들은 텔레즈나야 거리의 그룹 아파트에 모였다. 오전 9시에서 10시 사이에 페롭스카야와 키발치치는 각각 미사일 두 개를 가져왔다.[4][5] 나중에 페롭스카야는 예카테리나 운하로 향하기 전에 그녀, 리사코프, 흐리니에비에츠키가 고스티니 드보르 맞은편에 위치한 제과점에서 알렉산드르 2세의 행렬을 가로채기 위한 적절한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렸다고 말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헤어져 운하에서 만났다.[4]
오후에 차르는 매주 열리는 군사 점호를 지켜본 후 예카테리나 운하를 따라 마차를 타고 돌아오고 있었다. 페롭스카야는 미리 정해진 신호로 손수건을 꺼내 코를 풀면서 암살자들을 운하로 보냈다. 마차가 공격할 만큼 가까이 왔을 때 페롭스카야가 신호를 보냈고, 리사코프가 차르의 마차 아래에 폭탄을 던졌다. 전제 군주는 마차가 방탄(bulletproof)이었기 때문에 이 첫 번째 공격에서 살아남았지만, 이그나치 흐리니에비에츠키가 던진 두 번째 폭탄이 그를 살해했다.
3. 2. 안드레이 젤랴보프와의 관계
페롭스카야는 나로드나야 볼랴 집행 위원회 멤버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안드레이 젤랴보프와 부부 관계를 맺었다.[1] 젤랴보프는 이그나치 흐리니에비에츠키, 니콜라이 키발치치, 티모페이 미하일로프, 니콜라이 리사코프와 함께 4명의 폭탄 투척범 그룹을 지휘하여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을 계획했다. 그러나 젤랴보프가 암살 시도 이틀 전에 체포되면서 페롭스카야가 그 역할을 대신 맡게 되었다.[1]
3. 3. 암살 당일 (1881년 3월 1일)
1881년 3월 13일(구력 3월 1일) 일요일 아침, 니콜라이 리사코프, 이그나치 흐리니에비에츠키를 포함한 폭탄 투척범들은 텔레즈나야 거리에 있는 아파트에 모였다. 오전 9시에서 10시 사이에 페롭스카야와 니콜라이 키발치치는 각각 미사일 두 개를 가져왔다.[1][2] 페롭스카야는 나중에 예카테리나 운하로 향하기 전에, 고스티니 드보르 맞은편에 위치한 제과점에서 알렉산드르 2세의 행렬을 가로채기 위한 적절한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렸다고 회상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헤어져 운하에서 다시 만났다.[1]오후에 차르는 매주 열리는 군사 점호를 지켜본 후 예카테리나 운하를 따라 마차를 타고 돌아오고 있었다. 페롭스카야는 미리 정해진 신호로 손수건을 꺼내 코를 풀면서 암살자들을 운하로 보냈다.[2] 마차가 공격할 만큼 가까이 왔을 때 페롭스카야가 신호를 보냈고, 리사코프가 차르의 마차 아래에 폭탄을 던졌다.[2] 차르는 마차가 방탄(bulletproof)이었기 때문에 이 첫 번째 공격에서 살아남았지만, 이그나치 흐리니에비에츠키가 던진 두 번째 폭탄에 의해 사망했다.
4. 체포, 재판, 처형
페롭스카야는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성공 후, 1881년 3월 10일에 체포되었다. 3월 26일부터 29일까지 통치 상원 특별 법정에서 다른 공모자들과 함께 재판을 받고 교수형을 선고받았다.[2] 그녀는 러시아에서 테러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최초의 여성이었다.
재판 직전, 페롭스카야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부디 침착하시고 저를 위해 슬퍼하지 말아주세요. 제 운명은 저를 조금도 괴롭히지 않으며, 저는 그것을 완전한 평정심으로 맞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오랫동안 그것을 예상했고, 조만간 그것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저는 제 신념이 지시하는 대로 살았고, 달리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4. 1. 체포와 르사코프의 증언
르사코프는 체포된 후,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수사관에게 협조했다. 그의 증언은 다른 참가자들을 연루시켰고, 차르 경찰은 1881년 3월 22일 소피야 페롭스카야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체포했다.[2] 르사코프는 모든 죄수의 신원을 확인했는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을 당의 가명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각자가 수행한 역할을 설명할 수 있었다.[2]재판 직전에 그녀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4. 2. 재판과 사형 선고
르사코프는 체포된 후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수사에 협조했다. 그의 증언으로 차르 경찰은 3월 22일 소피야 페롭스카야를 다른 가담자들과 함께 체포했다. 르사코프는 모든 죄수의 신원을 확인했고, 각자가 수행한 역할을 설명할 수 있었다.[2]재판 직전, 페롭스카야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부디 침착하시고 저를 위해 슬퍼하지 말아주세요. 제 운명은 저를 조금도 괴롭히지 않으며, 저는 그것을 완전한 평정심으로 맞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오랫동안 그것을 예상했고, 조만간 그것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저는 제 신념이 지시하는 대로 살았고, 달리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페롭스카야는 1881년 3월 26일부터 29일까지 다른 공모자들과 함께 통치 상원 특별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교수형을 선고받았다.[2] 그녀는 테러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러시아 최초의 여성이었다.
1881년 4월 15일 아침 (구력 4월 3일), 죄수들은 세메노프스키 연대의 열병식장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모두 검은색 죄수복을 입었고, 가슴에는 "살해자"라고 적힌 팻말이 걸려 있었다. 페롭스카야는 미하일로프, 키발치치와 함께 한 쌍의 말이 끄는 마차에 태워져 도시를 통과했다.[2] 더 타임스(The Times)의 특파원은 처형에 10만 명의 관중이 모였다고 추산했다. 사제가 마지막 의식을 집행하기 위해 교수대에 올라갔을 때, 죄수들은 거의 동시에 그들에게 다가가 십자가에 입을 맞추었다. 사제가 물러나자 젤랴보프와 미하일로프는 페롭스카야에게 다가가 서로 작별 키스를 했다. 페롭스카야는 르사코프에게서 등을 돌렸다.[2]
젤랴보프를 포함한 다른 4명의 페르보마르토프치가 그녀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5]
4. 3. 처형 (1881년 4월 15일)
1881년 4월 15일(구력 4월 3일), 페롭스카야를 포함한 죄수들은 세메노프스키 연대 열병식장으로 이송되어 처형될 예정이었다. 이들은 모두 검은색 죄수복을 입었고, 가슴에는 "살해자"라고 적힌 팻말이 걸려 있었다. 페롭스카야는 미하일로프, 키발치치와 함께 한 쌍의 말이 끄는 마차에 태워져 도시를 통과했다.
더 타임스(The Times) 특파원은 처형에 10만 명의 관중이 모였다고 추산했다. 사제가 마지막 의식을 집행하기 위해 교수대에 올라갔을 때, 죄수들은 거의 동시에 그들에게 다가가 십자가에 입을 맞추었다. 사제가 물러나자 젤랴보프와 미하일로프는 페롭스카야에게 다가가 서로 작별 키스를 했다. 페롭스카야는 르사코프에게서는 등을 돌렸다.
페롭스카야는 젤랴보프를 포함한 다른 4명의 페르보마르토프치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5]
5. 유산과 영향
페롭스카야는 사망 후 30년 뒤인 1910년, 메이지 천황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된 일본 여성주의자 칸노 스가코에게 영감을 주었다.[3] 칸노 스가코 역시 교수형에 처해졌다.
2018년 뉴욕 타임스는 페롭스카야에 대한 부고 기사를 뒤늦게 게재했다.[4]
- 헨리 파크스는 페롭스카야에게서 영감을 받아 "아름다운 테러리스트"라는 시를 썼다. 이 시는 시드니 전자 텍스트 및 이미지 서비스에서 발간한 ''[http://setis.library.usyd.edu.au/ozlit/pdf/v00018.pdf 아름다운 테러리스트와 다른 시]''에 전문이 실려있다.
- 얀 기유는 자신의 저서 "하지만 당신의 딸에 관한 일은 아닙니다"(Men inte om det gälle din dotter)에서 정치적 상황 변화에 따라 테러리스트와 자유 투사 사이의 인식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시로 페롭스카야를 언급했다.
6. 평가
페롭스카야는 라즈모프스키 가문 출신으로, 할아버지는 크림 총독, 아버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총독(겸 사령관)을 지낸 명문가 출신이었다.[1] 이는 나로드니키 운동에 귀족 계층이 다수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1]
표트르 크로포트킨은 차이콥스키단 시절 페롭스카야와 교류하며, 그녀를 "마음으로부터의 '나로드니키'이자, 진정한 강철과 같은 혁명가"라고 평가했다.[1] 그는 페롭스카야가 노동자와 농민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투사였다고 회상했다.[1]
크로포트킨의 회고에 따르면, 페롭스카야는 귀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며 노동자들과 함께했다.[1] 그녀는 직공의 아내로 위장하여 작은 집에서 살았고, 면 옷과 남자의 장화를 신고, 머리에는 면 손수건을 두르는 등 소탈한 모습을 보였다.[1]
크로포트킨은 페롭스카야의 초상화가 그녀의 "진지한 용기, 빛나는 지성, 사랑스러운 성품"을 잘 담아냈다고 평가했다.[1] 또한, 그녀가 처형되기 직전 어머니에게 쓴 편지는 "사랑스러운 영혼의 가장 아름다운 표현"이라고 칭송했다.[1]
참조
[1]
서적
Apostles into Terrorists: Women and the Revolutionary Movement in the Russia of Alexander II
https://archive.org/[...]
Viking Press
[2]
서적
Soviet Russia, Volume 7
https://books.google[...]
Russian Soviet Government Bureau
1922-01-01
[3]
서적
Reflections on the Way to the Gallows: Rebel Women in Prewar Japan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4]
뉴스
Overlooked No More: The Soviet Icon Who Was Hanged for Killing a Czar
https://nytimes.com/[...]
2018-05-31
[5]
서적
The Birth of the Russian Democracy
https://archive.org/[...]
Russian Information Bureau
201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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