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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퍼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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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어퍼빌 전투는 1863년 6월 21일, 남북 전쟁 중 벌어진 기병전으로, 연방군 기병대가 남부 연합군 J.E.B. 스튜어트의 방어선을 뚫기 위해 라우던 계곡에서 벌인 일련의 전투 중 하나이다. 스튜어트는 어퍼빌에서 연방군의 셰넌도어 계곡 진입을 막았으며, 구즈 크리크 전투와 어퍼빌 전투를 통해 지연전을 펼쳤다. 이 전투는 스튜어트가 게티스버그로 향하는 연방군을 우회하여 동쪽을 기습하는 결정에 영향을 미쳤으며, 미국 전장 신탁은 어퍼빌 전장의 보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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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퍼빌 전투
전투 개요
전투 명칭어퍼빌 전투
어퍼빌 전투: 하퍼스 위클리, 1863년 7월 18일
어퍼빌 전투: 하퍼스 위클리, 1863년 7월 18일
일부미국 남북 전쟁
날짜1863년 6월 21일
장소버지니아주 라우던 카운티
결과결론 없음
교전 세력
교전국 1북부연방
교전국 2남부동맹
지휘관 및 병력
북부연방 지휘관알프레드 플레손튼, 스트롱 빈센트
남부동맹 지휘관웨이드 햄프턴, 베벌리 로버트슨
북부연방 병력기병 2개 사단, 보병 1개 여단
남부동맹 병력기병 4개 여단
사상자 및 피해
북부연방 사상자209명
남부동맹 사상자180명
전역 정보
관련 전역게티즈버그 전역

2. 배경

남북 전쟁 당시, 남부 연합군의 J.E.B. 스튜어트 소장은 로버트 E. 리의 북버지니아군 주력 부대 위치를 연방군의 앨프레드 플리슨턴 기병대가 알아내는 것을 막기 위해 라우던 계곡에서 일련의 지연전을 벌였다. 북버지니아군의 상당수는 어퍼빌 서쪽 셰넌도어 계곡에 있었다. 스튜어트는 알디 전투와 미들버그 전투에서 참호, 개울, 돌담을 활용하여 서쪽으로 천천히 후퇴하면서 연방군의 진격을 늦추었다.

2. 1. 라우던 계곡 전투의 중요성

라우던 계곡은 셰넌도어 계곡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길목이었으며, 남부 연합군에게는 북쪽으로 진격하기 위한 필수적인 통로였다. 이 지역에서 벌어진 일련의 기병 전투는 남군의 게티스버그 전역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J.E.B. 스튜어트의 성공적인 지연 전술은 로버트 E. 리의 본대가 연방군의 방해 없이 셰넌도어 계곡을 통과하여 펜실베이니아주로 진입할 수 있게 해주었다.[1]

3. 구즈 크리크 전투 (1863년 6월 21일)

6월 19일 미들버그 전투 이후, 밤새 쏟아진 폭우로 6주간의 가뭄이 끝났다. 이 비로 웨이드 햄프턴 3세 여단이 젭 스튜어트를 지원, 애쉬비 턴 파이크를 따라 비벌리 로버트슨 여단 근처에 배치되었다. 존 R. 챔블리스 여단은 북쪽으로 이동, 유니슨 근처의 윌리엄 존스 부대와 합류했다. 토마스 T. 문포드 여단은 스니커스빌 통로를 엄호했고, 존 모스비의 게릴라 부대는 북군 위치를 정찰했다.[1]

6월 20일, 알프레드 플레손튼은 조지 미드 소장의 5 군단으로부터 보병 지원을 받았다. 플레손튼은 저드슨 킬패트릭 여단을 애쉬비 갭 도로로 보내고, 데이비드 맥머트리 그레그 기병 사단을 예비대로, 존 뷰퍼드 사단은 측면 우회를 시도했다.[1]

3. 1. 구즈 크릭 다리 전투

6월 21일 오전 8시경, 북군 포병대가 스튜어트의 진지에 포격을 가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1] 스튜어트는 돌담, 좁은 골짜기, 하천 등 지형을 이용하여 북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했다.[1] 구즈 천에 세워진 돌다리(구즈 크릭 다리)를 지나는 렉터 교차로 서쪽에서 2시간 동안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1] 북군은 남군 포병을 저격하기 위해 명사수들을 배치했다.[1]

북군의 공격에 밀려 남군 포병대는 퇴각하던 중 블레이클리 포 1문을 잃었다.[1] 이는 스튜어트 기병대가 처음으로 잃은 포였다.[1] 남은 3문의 대포 중 2문도 곧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스튜어트는 지연 작전을 벌이며 서쪽으로 어퍼빌을 향해 철수했다.[1]

4. 어퍼빌 전투 (1863년 6월 21일)

존 뷰퍼드의 북군 기병대는 어퍼빌 북쪽에서 스튜어트의 보급 마차 대열을 호위하고 있던 "투덜이" 존스와 챔블리스 여단을 공격했다. J. 어빙 그레그와 저드슨 킬패트릭 여단은 애쉬비 갭 턴파이크를 따라 진격했다.[1]

4. 1. 빈야드 언덕 전투

저드슨 킬패트릭의 기병대는 어퍼빌 동쪽의 능선인 빈야드 언덕(Vineyard Hill)에서 웨이드 햄프턴과 로버트슨의 여단을 공격했다.[1] 격렬한 기마 전투 끝에, 일부 북군 기병대는 어퍼빌 마을까지 진출했지만, 결국 격퇴되었다.

4. 2. 스튜어트의 철수와 우회 기동

남군 보병부대가 포토맥 강을 건너 메릴랜드주로 진입했다는 소식에 스튜어트는 애쉬비갭에서 강력한 방어진지를 확보하고자 철수했다.[1] 기병대의 정찰 활동이 줄어들면서, 스튜어트는 게티스버그로 향하는 북군을 우회하여 북군 후방인 동쪽을 기습한다는 치명적인 결정을 내렸다.[1]

어퍼빌은 스튜어트가 플레손튼이 리의 보병 사단들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지연 전술을 펼친 곳이었다.[1] 스튜어트는 리의 북버지니아군과 북군 포토맥군이 점점 가까워지는 결정적인 순간에 브랜디역 전투에서 당한 수모를 씻겠다며 자리를 비웠다.[1]

5.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어퍼빌 전투는 스튜어트가 성공적인 지연 전술을 펼쳐 플레손튼이 리의 보병 사단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게 한 중요한 전투였다. 이로 인해 북군은 남군의 위치와 목표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 스튜어트는 브랜디 역 전투의 패배를 만회하고자 리의 북버지니아군과 북군 포토맥군이 근접하는 상황에서 자리를 비웠다.[1]

5. 1. 전장 보존 노력

미국 전장 신탁과 그 파트너들은 2023년 중반 기준으로 매입 또는 보존 권리를 통해 어퍼빌 전장의 1004acres를 보존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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