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마 타카토
1. 개요
오시마 타카토는 1826년 모리오카번에서 태어난 일본의 기술자이다. 그는 서양 기술을 배워 일본 최초의 상용 고로를 건설하여 '일본 근대 제철의 아버지'로 불린다. 1858년 가마이시에서 철광석 제련에 성공했으며, 이후 메이지 정부에서 기술자로 활동하며 광산 업계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에 참여하여 유럽 광산을 시찰하고, 1890년 일본광업회의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1888년 욱일장, 1889년 일본제국헌법공포 기념장을 받았으며, 아들 오시마 미치타로도 야금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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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오카시 출신 -
이시카와 다쿠보쿠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이와테현 출신의 일본 시인이자 소설가로, 빈곤과 질병 속에서도 활발한 창작 활동을 펼쳐 『일각의 모래』와 같은 대표적인 시집을 남겼으며, 그의 작품과 일기는 일본 근대 단가 문학에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
모리오카시 출신 -
미하라 요코
미하라 요코는 1951년 배우로 데뷔하여 신토호의 섹시 라인 톱스타, 도에이 핑키 폭력 장르의 주요 여배우로 활동하며 다수의 영화와 TV 드라마에 출연했고 부동산 사업으로도 성공한 일본 배우이다. -
막말 모리오카번 사람 -
니토베 이나조
니토베 이나조는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초기까지 활동한 일본의 농학자이자 교육자, 외교관, 국제연맹 사무차장으로, 『부시도: 일본의 영혼』의 저자로 알려져 있지만 식민지 정책 옹호 등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
막말 모리오카번 사람 -
도조 히데노리
도조 히데노리는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으로 육군대학교 수석 졸업 후 독일 유학을 마치고 러일 전쟁에 참전, 중장으로 진급했으나 작전 미스로 예비역 편입 후 전술 연구와 저술 활동을 하다가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
1901년 사망 -
쇼타이왕
쇼타이왕은 류큐 왕국 제2쇼씨 왕조의 마지막 국왕이자 류큐번의 번왕으로, 일본 제국에 의해 강제 퇴위당한 후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류큐 왕국의 격동적인 멸망 시기를 겪었다. -
1901년 사망 -
이홍장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던 이홍장은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 기여하고 직례총독으로서 외교를 주도하며 군사력 강화에 힘썼으나, 청일 전쟁 패배와 부패 논란 등 역사적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의 삶은 청나라 격변기와 근대화 노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2. 경력
오시마 다카토는 1826년 6월 16일(5월 11일 (음력)) 모리오카번의 시의(侍医)였던 오시마 슈이(大島周意)의 장남으로 모리오카시 仁王小路에서 태어났다. 1842년 17세에 에도로 유학하여 난학의인 미나쓰쿠리 난포와 츠보이 신도에게 배웠고, 나가사키에서 채광 기술을 배웠다. 1853년,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명으로 나카미나토 반사로를 건설하고 대포 주조에 성공했으나, 재료가 사철이었기 때문에 성능이 좋지 않았다. 서양에 견줄 고품질의 철을 만들기 위해 양질의 철광석을 산출하는 가마이시시에 가서 휴게닌의 책을 참고하여 서양식 고로를 건설했다. 1858년 1월 15일(안세이 4년 12월 1일) 철광석 제련을 통한 본격적인 연속 출선(出銑)에 성공했다.
이는 일본 최초의 상용 고로였다. 오시마는 이후 메이지 정부에서도 기술자로 높게 평가되었고, 광산 업계의 선두에서 활약하여 '일본 근대 제철의 아버지'라는 평을 받게된다.
1855년 하시노(橋野) 고로건설을 진행했다. 모리오카번으로 돌아와서 난학과 영어, 의학, 물리, 화학, 병술, 포술 등을 가르치는 일신당을 세웠다. 유신 후 1871년에 이와쿠라 사절단에 동행하여, 유럽 광산을 시찰했다. 1874년 이와테현 가마이시에에 세워진 최초의 관영제철소에 의견을 제출했는데 독일 기술자 비얀히(ビヤンヒー)와 의견이 대립했다. 정부는 비얀히의 대형 고로안을 채택했다. 1875년 타카토는 가마이시를 떠났지만 관영제철소 사업은 시작 3년만에 좌절되어 이후 다나카 초베, 요코야마 큐타로 등의 민간이 나서서 재건하기 전까지 멈추게 되었다.
1890년 일본광업회의 초대회장이 되었다. 이후 포도농사와 포도주 양조장을 꾸리며 살았다.
1888년 욱일장, 1889년 일본제국헌법공포 기념장을 받았다. 아들 大島道太郎도 야금학자였다.
2.1. 초기 생애 및 교육
2.2. 일본 근대 제철 기술 도입
오시마 타카토는 1826년 모리오카시 仁王小路에서 모리오카번의 시의 大島周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42년 에도로 유학하여 난학의인 箕作阮甫나 坪井信道에게 배웠고, 나가사키에서 채광 기술을 배웠다. 1853년,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명으로 那珂湊에서 반사로를 건조하고 대포 주조에 성공했으나, 사철(砂鉄)을 재료로 사용했기 때문에 성능이 좋지 않았다.
서양에 견줄 고품질의 철을 만들기 위해 양질의 철광석을 산출하는 가마이시에 가서 휴게닌의 책을 참고하여 서양식 고로를 건설했다. 1858년 가마이시에서 철광석 제련에 의한 본격적인 연속 출선(出銑)에 성공하였다. 이것은 일본 최초의 상용 고로였다. 오시마는 이후 메이지 정부에서도 기술자로 높게 평가되었고, 광산 업계의 선두에서 활약하여 일본 근대 제철의 아버지라는 평을 받게된다.
1855년 하시노(橋野) 고로건설을 진행했다. 모리오카번으로 돌아와서 난학과 영어, 의학, 물리, 화학, 병술, 포술 등을 가르치는 일신당을 세웠다. 유신 후 1871년에 이와쿠라 사절단에 동행하여, 유럽 광산을 시찰했다. 1874년 이와테현 가마이시에에 세워진 최초의 관영제철소에 의견을 제출했는데, 독일 기술자 비얀히(ビヤンヒー)와 의견이 대립했다. 정부는 비얀히의 대형 고로안을 채택했다. 1875년 타카토는 가마이시를 떠났지만 관영제철소 사업은 시작 3년만에 좌절되어, 이후 田中長兵衛、横山久太郎 등의 민간이 나서서 재건하기 전까지 멈추게 되었다.
1890년 일본광업회의 초대회장이 되었다.
2.3. 닛신도(日新堂) 설립
2.4. 이와쿠라 사절단 참여 및 가마이시 제철소 분쟁
모리오카시 仁王小路에서 모리오카번의 시의 大島周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42년 17세에 에도로 유학하여 난학의인 箕作阮甫나 坪井信道에게 배웠다. 나가사키에서 채광 기술을 배웠다. 1853년,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명으로 那珂湊에서 반사로를 건조했다. 대포 주조에 성공했으나 재료로 사철(砂鉄)을 썼기 때문에 성능이 좋지 않았다. 서양에 견줄 고품질의 철을 만들기 위해 양질의 철광석을 산출하는 가마이시에 가서 휴게닌의 책을 참고하여 서양식 고로를 건설했다. 1858년 연속 철광석 제련 산출을 성공시켰다.
일본 최초의 상용 고로였다. 오시마는 이후 메이지 정부에서도 기술자로 높게 평가되었고, 광산 업계의 선두에서 활약하여 일본 근대 제철의 아버지라는 평을 받게된다.
1855년 하시노(橋野) 고로건설을 진행했다. 모리오카번으로 돌아와서 난학과 영어, 의학, 물리, 화학, 병술, 포술 등을 가르치는 일신당을 세웠다. 유신 후 1871년에 이와쿠라 사절단에 동행하여, 유럽 광산을 시찰했다. 1874년 이와테현 가마이시에에 세워진 최초의 관영제철소에 의견을 제출했는데 독일 기술자 비얀히(ビヤンヒー)와 의견이 대립했다. 정부는 비얀히의 대형 고로안을 채택했다. 1875년 타카토는 가마이시를 떠났지만 관영제철소 사업은 시작 3년만에 좌절되어 이후 田中長兵衛、横山久太郎 등의 민간이 나서서 재건하기 전까지 멈추게 되었다.
1890년 일본광업회의 초대회장이 되었다. 이후 포도농사와 포도주 양조장을 꾸리며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