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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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위백규(魏伯珪, 1727년 ~ 1798년)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문인이다.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자화(子華), 호는 존재(存齋), 계항(桂巷), 계항거사(桂巷居士)이다. 호남 실학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생애전라도 장흥부 계항동(현재의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에서 태어났다. 2세에 육십갑자를 외우고 6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으며, 8세에 역학에 몰두하는 등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25세에 윤봉구를 찾아가 사사했으며, 이후 15년간 학문에 전념했다. 39세에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대과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향촌 교화와 자제 교육에 힘썼다. 70세에 서영보의 천거로 기장현감, 태인현감, 옥과현감 등에 제수되었으나, 만언봉사를 올려 사직했다.
학문과 사상위백규는 성리학에 밝았지만,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실학에 전념했다. 그는 향촌 사회의 자율성을 강조하며 향중공론에 입각한 개혁론을 주장했다. 또한, 토지 소유의 제한과 세금 제도의 개혁을 통해 빈부격차를 해소하고자 했다. 그의 경세사상은 다산 정약용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되나, 다산의 저술에서 위백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저술위백규는 문학, 정치, 경제, 역사, 천문지리, 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9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주요 저서로는 《존재집(存齋集)》, 《정현신보(政鉉新譜)》, 《환영지(寰瀛誌)》, 《농가(農歌)》 등이 있다.
- 《환영지》: 한국 최초의 세계지리서 겸 팔도지리서
- 《정현신보》: 당시 민정의 부패상을 비판하고 제도 개혁을 주장
- 《농가》: 농촌 생활의 풍경과 농민의 애환을 담은 가사
평가와 영향위백규는 호남 실학의 선구자로서, 조선 후기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개혁을 주창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사상은 향촌 사회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백성의 삶을 개선하고자 했던 점에서 실학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기타
- 장흥군에서는 위백규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매년 5월 15일을 '존재의 날'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 장흥군 충렬소공원에는 위백규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 위백규는 신경준, 황윤석과 함께 '호남 3천재'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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