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엽
1. 개요
육엽은 고평상 육영의 아들로, 동진 시대의 관료이다. 효렴으로 추천받았지만 관직에 나가지 않다가, 낭야왕 사마예가 강남에 주둔하자 제주로 소환되었다. 이후 강주 자사 화일을 토벌한 공으로 평망정후에 봉해졌으며, 태자첨사, 상서, 양주대중정 등을 역임했다. 명제가 즉위한 후 광록훈, 태상, 상서좌복야를 거쳐 영군장군, 강릉백에 이르렀다. 소준의 난 당시에는 성제를 따라 석두로 피난했으며, 난이 평정된 후 위장군으로 진급했다. 함화 9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시중과 차기대장군이 추증되고 시호는 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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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년 출생 -
육기
육기는 동오 황실과 관련된 인물로, 오나라 멸망 후 서진에서 문인 관료로 활동하며 문학적 재능을 발휘했고, 팔왕의 난 시기에는 군 지휘관으로 활동하다 모함으로 처형당했다. -
334년 사망 -
이웅
이웅은 오호십육국 시대 성한을 건국한 파저족 출신의 초대 황제로, 아버지 이특의 거병에 참여하여 활약 후 황제에 즉위, 국가 기틀을 다졌으나 후계자 선정 문제로 사후 성한은 쇠퇴했다. -
334년 사망 -
석홍
석홍은 후조의 2대 황제로, 석륵 사후 옹립되었지만 실권은 석호에게 있었고 폐위되어 살해당했으며 그의 통치는 후조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
오군 육씨 -
육기
육기는 동오 황실과 관련된 인물로, 오나라 멸망 후 서진에서 문인 관료로 활동하며 문학적 재능을 발휘했고, 팔왕의 난 시기에는 군 지휘관으로 활동하다 모함으로 처형당했다. -
오군 육씨 -
육강
육강은 후한 말기의 효렴 출신 관료로, 고성 현령과 무릉태수를 거쳐 여강태수를 지냈으며 선정과 황양의 난 평정으로 명성을 얻었으나, 원술과의 대립 중 손책의 공격으로 여강이 함락되고 병사하였다.
2. 가계
아버지는 원외산기상시(員外散騎常侍)였던 육영(陸英)이다. 오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육희(陸喜)는 그의 큰아버지이고, 육기(陸機)는 그의 사촌형이며, 육완(陸玩)은 그의 친동생이다.
3. 생애
영창 원년(322년), 명제가 즉위하자 육엽은 광록훈이 되었고, 태상으로 전임되었다. 태녕 2년(324년)에 기첨이 사망하자, 육엽은 대신 상서좌복야가 되었고, 태자소부를 겸했다. 태녕 3년(325년), 금자광록대부의 벼슬이 더해졌고, 변곤을 대신하여 영군장군이 되었다. 전봉을 평정한 공적으로 작위를 강릉백으로 진급했다. 명제가 병상에 눕자, 육엽은 왕도, 변곤, 유량, 온교, 희감 등과 함께 유명을 받고, 황태자사마연을 보좌하며, 전중에 들어가 병사를 이끌고 숙직했다. 녹상서사가 되었고, 산기상시의 벼슬이 더해졌다.
성제가 즉위하자, 육엽은 산기상시의 자리에 머물면서 좌광록대부·개부의동삼사의 벼슬을 받았다. 함화 9년(334년) 9월 무인일, 74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시중·차기대장군의 벼슬이 추증되었고, 시호는 목이었다.
3.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고평국 상 육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어서부터 명망이 있었고, 사촌 육기는 "우리 집은 대대로 공직에 나갈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라고 평했다. 후에 효렴으로 추천받아 영세현령과 오강현령을 지냈지만,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낭야왕 사마예가 강남에 주둔하자, 육엽은 소환되어 제주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위장군·의흥군태수에 임명되었지만, 병 때문에 받지 않았다. 영가 5년(311년)에 강주자사 화일을 토벌한 공적으로 평망정후에 봉해졌다. 산기상시·오군대중정을 지냈다. 대흥 원년(318년), 태자첨사로 전임되었다. 이때 사마예는 시중에 화북의 인사를 임명하기만 하고, 강남의 인물을 등용하려 하지 않자, 청렴하고 올바른 행실로 평판이 높은 육엽을 시중으로 임명했다. 상서로 전임되었고, 양주대중정을 지냈다.
3.2. 동진 건국과 활약
고평국 상 육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어서부터 명망이 있었고, 사촌 육기는 "우리 집은 대대로 공직에 나갈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라고 평했다. 후에 효렴으로 추천받아 영세현령과 오강현령을 지냈지만,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낭야왕 사마예가 강남에 주둔하자, 육엽은 소환되어 제주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위장군·의흥군태수에 임명되었지만, 병 때문에 받지 않았다. 영가 5년(311년)에 강주자사 화일을 토벌한 공적으로 평망정후에 봉해졌다. 산기상시·오군대중정을 지냈다. 대흥 원년(318년), 태자첨사로 전임되었다. 이때 원제(사마예)는 시중에 화북의 인사를 임명하기만 하고, 강남의 인물을 등용하려 하지 않자, 청렴하고 올바른 행실로 평판이 높은 육엽을 시중으로 임명했다. 상서로 전임되었고, 양주대중정을 지냈다.
영창 원년(322년), 명제가 즉위하자, 육엽은 광록훈이 되었고, 태상으로 전임되었다. 태녕 2년(324년)에 기첨이 사망하자, 육엽은 대신 상서좌복야가 되었고, 태자소부를 겸했다. 태녕 3년(325년), 금자광록대부의 벼슬이 더해졌고, 변곤을 대신하여 영군장군이 되었다. 전봉을 평정한 공적으로 작위를 강릉백으로 진급했다. 명제가 병상에 눕자, 육엽은 왕도, 변곤, 유량, 온교, 희감 등과 함께 유명을 받고, 황태자사마연을 보좌하며, 전중에 들어가 병사를 이끌고 숙직했다. 녹상서사가 되었고, 산기상시의 벼슬이 더해졌다.
성제(사마연)가 즉위하자, 육엽은 산기상시의 자리에 머물면서 좌광록대부·개부의동삼사의 벼슬을 받았다. 함화 2년(327년)에 소준의 난이 일어나자, 이듬해 육엽은 성제를 따라 석두로 옮겨갔다. 육엽은 강남의 선비들 사이에서 명망이 있었기 때문에, 소준도 감히 육엽을 해치려 하지 못했다. 함화 4년(329년), 광술이 원성에서 항복하자, 육엽은 광술과 함께 독궁성군사가 되었다. 소준의 난이 평정되자, 육엽은 위장군의 호를 더해졌다. 작위는 공으로 진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