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송상현 묘소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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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송상현 묘소 및 신도비는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에 위치한 조선 중기의 충신 천곡(泉谷) 송상현(1551∼1592) 선생의 묘소와 신도비입니다. 1984년 12월 31일 충청북도의 기념물 제6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송상현 묘소송상현 묘소는 원래 동래에 있었으나, 1610년(광해군 2년)에 현재 위치로 이장되었습니다. 묘역은 강촌 묵방산에 자리 잡고 있으며, 묘소는 큰 묘를 중심으로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 묘표 등이 배열되어 있습니다.
송상현 신도비송상현 신도비는 강촌마을 묘소 아래 진입로 왼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1659년에 세워진 것으로, 높이 280cm, 폭 90cm, 두께 26cm의 비신(碑身)을 세우고 이수(螭首)를 얹었으며, 1980년에 보호각을 세웠습니다. 보호각은 정면 1칸, 옆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 기와집으로 홍살로 사면을 막았습니다.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썼으며, 비의 제목은 이정영(李正英)이 전서(篆書)로 썼습니다. 비문에는 송상현의 가계,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사로서의 활약, 그리고 순국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송상현이 순국 직전 고향의 부친에게 남긴 '고성월휘(孤城月暉) 열진고침(列陣高枕) 군신의중 부자은경(君臣義重 父子恩輕)' 즉, '외로운 성에 달무리 지니, 여러 군진은 높이 베개를 베고 잠자네.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중요한 것이며, 아버지와 아들간의 은혜는 가벼운 것입니다.'라는 절명사(絶命詞)가 유명합니다.
송상현의 업적송상현은 1576년(선조 9년)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591년 동래부사가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민과 더불어 혈전을 벌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는 글을 남기고 순국했습니다. 그의 충절은 왜적 장수에게도 감명을 주어, 왜장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추가 정보
- 청주에는 송상현 신도비와 묘소 외에도, 큰길 건너편에 충렬사가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부산에는 송상현 광장이 조성되어 있어, 청주와 부산을 잇는 역사적 인물의 흔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청주 송상현 묘소 및 신도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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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송상현 묘소 및 신도비 | |
개요 | |
국가 | 대한민국 |
위치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산1-1번지 |
유형 | 기념물 |
지정 번호 | 66 |
지정일 | 1984년 12월 31일 |
관리 | 여산송씨종중 |
수량 | 일곽 |
문화재청 ID | 23,00660000,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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