퉁구스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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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퉁구스 공화국은 1924년 6월, 소비에트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퉁구스족의 임시 정부를 의미한다. 1922년 야쿠트 ASSR에서 분리된 오호츠크 지역에서 소비에트 정부의 강압적인 정책과 탄압에 저항하여 봉기가 일어났다. 미하일 아르테미예프를 중심으로 넬칸에서 봉기가 시작되었고, 아얀 항구를 점령하며 독립을 선포했다. 삼색기를 국기로 제정하고 국제 연맹 등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1925년 평화 협정을 통해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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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퉁구스 공화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현지 이름 | ru: Временное Центральное Тунгусское Национальное Управление (Vremennoye Tsentral'noye Tungusskoye Natsional'noye Upravleniye) sah: Быстах Киин Тоҥ уус Национальнай Дьаһалта (Bıstax Kîn Toñ ûs Natsionalnay Cahalta) |
| 일반 명칭 | 퉁구스 공화국 |
| 시대 | 해당 없음 |
| 상태 | 해당 없음 |
| 상태 설명 | 해당 없음 |
| 정부 형태 | 해당 없음 |
| 수도 | 해당 없음 |
| 국가 모토 | 해당 없음 |
| 국가 | "Саргылардаах сахаларбыт" ("Sakha, covered with happiness" 사하, 행복으로 가득 찬) |
| 공용어 | 해당 없음 |
| 종교 | 해당 없음 |
| 통화 | 해당 없음 |
![]() | |
| 역사 | |
| 사건 시작 | 선포 |
| 시작일 | 1924년 7월 14일 |
| 사건 종료 | 해당 없음 |
| 종료일 | 1925년 5월 9일 |
| 이전 사건 | 아야 점령 |
| 이전 날짜 | 1924년 5월 10일 |
| 이후 사건 | 해당 없음 |
| 이후 날짜 | 해당 없음 |
| 정치 | |
| 이전 국가 | 소련 |
| 이후 국가 | 소련 |
2. 배경
1922년 4월, 오호츠크 지역은 야쿠트 ASSR에서 분리되어 프리모르스키와 캄차카 지방으로 이관되었다.[1] 신 경제 정책이 시행된 야쿠티아와 달리, 오호츠크 해안에서는 전시 공산주의 시대의 강압적인 정책이 지속되었다.[1] OGPU과 지방 당국은 공포 정치를 펼쳤으며, 체카 요원들은 퉁구스족 유르트를 포격하고, 평화로운 주민들이 탄 배를 기관총으로 침몰시키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1]
1924년 5월 10일, 미하일 아르테미예프를 중심으로 넬칸에서 봉기가 시작되었다.[3][17] 6월 6일에는 퉁구스족 지도자 P. 카람진과 야쿠트족 M.K. 아르테미예프가 이끄는 60명의 반군이 18시간의 전투 끝에 아얀 항구를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OGPU 수장 수보로프와 붉은 군대 병사 3명이 사망했다.[4][5][18][19]
원주민들에게는 깃털, 무기, 장작, 개, 나무 껍질 등 거의 모든 것에 과도한 세금이 부과되었고, 심지어 백군이 부과했던 빚까지 징수했다.[1] 소비에트 정부 대표들은 퉁구스족의 문화와 관습을 무시했으며, 민족 학교 부재, 원주민 대표 부재, 통역 부족 등 소통의 어려움도 있었다.[2]
3. 봉기의 전개
6월, 넬칸에서 퉁구스족과 야쿠트족 대표들이 모여 '임시 중앙 퉁구스 민족 정부'를 수립하고 소비에트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아르테미예프는 참모총장으로, 카람진은 전체 부대 지도자로 선출되었다.[6][7][20][21]
7월 14일, 아얀에서 '전(全)퉁구스 회의'가 개최되어 퉁구스족의 독립과 영토, 자원의 불가침성을 선언했다.[8][22] 퉁구스 공화국은 삼색기를 국기로 제정하고, "Sargılardaah sahalarbıt"를 국가로 채택했다.[9][10][23][24] 또한, 국제연맹과 서방 열강에 독립을 호소하며 지원을 요청했다.[8][22]
3. 1. 봉기의 지도자들
4. 봉기의 진압과 해산
1925년 5월, M.K. 아르테미예프와 I.Y. 스트로드, R.F. 쿨라코프스키 간의 평화 협상 과정에서 양측은 합의점을 찾을 수 있었다.[25] 아르테미예프는 야쿠트 ASSR 지도부가 테러 정책을 수행하지 않았고, 공화국에서 민족 부흥이 진행 중이며, 퉁구스 지역의 야쿠트 ASSR 편입 문제가 논의 단계에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25]
협상 결과, 5월 9일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고, 아르테미예프 부대는 무기를 내려놓기로 결정했다.[25] 7월 18일에는 오호츠크에서 50km 떨어진 메드베야 지역에서 P. 카람진이 이끄는 부대가 항복했다.[26][27] 아르테미예프 부대에서 484명, 카람진 부대에서 35명이 무기를 내려놓았다.[28] 아르테미예프 부대에는 야쿠트족 315명, 퉁구스족 85명, 러시아인 46명, 타타르족 3명, 폴란드인 2명, 캄차달인 1명, 한국인 1명, 그리고 국적 불명자 14명이 포함되어 있었다.[28]
5. 봉기의 의의와 한계
6. 한국과의 관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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