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반성회
1. 개요
해군반성회는 1977년 나카자와 타스쿠 전 중장의 제안으로 시작된 모임이다. 해군 병학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지지를 얻어 1980년 3월 28일에 제1회 회의가 열렸다. 1991년 4월 25일까지 총 131회 회의가 개최되었다. 회의 내용과 쟁점, 주요 발언자들의 기록은 단행본 출판과 NHK 스페셜 프로그램을 통해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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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문서 -
엔기시키
엔기시키(延喜式)는 905년 다이고 천황의 명으로 편찬되어 927년에 완성된 일본의 율령 시행세칙으로, 신사, 의례, 행정 등 다양한 분야의 규정을 담고 있으며 초기 일본 역사 및 종교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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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일기
에도 막부 초기의 외교 기록을 담은 이국일기는 1608년부터 1655년까지의 외국과의 교류, 서신 왕래, 조선 통신사 관련 기록 등을 담은 2책의 필사본으로,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교토국립박물관에 기탁 보관 중이다. -
일본 제국 해군 -
욱일기
욱일기는 태양 문양 주위로 햇살을 그린 깃발로, 일본에서 경사스러운 상징으로 여겨져 왔으나,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져 한국 등 피해 국가에서는 사용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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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 사건
5·15 사건은 1932년 일본 해군 청년 장교들이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암살하고 주요 시설을 공격했으나 실패한 쿠데타 미수 사건으로, 정당 내각 붕괴와 군부 영향력 강화로 이어져 일본이 군국주의 시대로 접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2. 회의 과정
1977년 7월 11일, 스이코우자에서 나카자와 타스쿠 전 중장의 체험을 이야기하는 담화회에서 나카자와 타스쿠가 "해군은 반성해야 할 점이 있으며, 반성회 같은 것을 만들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이때 참석했던 노모토 타메테루가 의견을 제시했고, 미요이치 가즈토시도 동의했다. 그 후, 해군병학교 50기 졸업생을 중심으로 지지를 얻어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노모토의 이름을 따서 '노모토회'라고 불렸지만, 제1차 회의에서 "해군반성회"로 정식 결정되었다.
제1회는 1980년 3월 28일에 열렸으며, 제131회(1991년 4월 25일)까지 개최되었지만, 최종회는 밝혀지지 않았다.
3. 회의 내용 및 쟁점
해군반성회는 스이코우자(水交社)에서 11년간 131회 개최되었다. 전 해군 대령 도요타 쿠마오(豊田隈雄)가 남긴 회의 기록과 400시간 이상 녹음테이프가 남아 있다. 이미 알려진 사실도 많지만, 반성회 참가자들을 중심으로 한 관계자들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또한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제2복원성에 의해 전범이었던 전 해군 간부에 대한 형량 감형 공작에 참여한 실태 등 처음 공개된 사실도 있다. 육해군의 불화, 해군의 개전 책임, 일본 국민의 개전 책임도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규슈 대학의 미와노 무네히로(三輪宗弘) 교수는 해군반성회 문서를 정리하는데 일본 제국 육군의 하라 시로(原四郎)와 이나바 마사오(稲葉正夫)가 개입했으며, 일부 자료가 날조되었다고 지적했다.
3.1. 주요 논의 내용
해군반성회는 수교회관에서 11년간 131회에 걸쳐 개최되었다. 특히, 구 해군 대좌 도요다 구마오가 남긴 회의 기록과 400시간 분량의 녹음 테이프가 남아 있다. 주제의 성격상 이미 알려진 사실도 많지만, 반성회 참가자들을 중심으로 관계자들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또한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제2복원성이 관여한 전범 구 해군 간부의 감형 공작 실태 등, 처음 공개된 사실도 있다고 여겨진다. 게다가 지금까지 언급되지 않았던 육군과 해군의 갈등, 해군의 개전 책임, 일본 국민의 개전 책임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규슈 대학의 미와 무네히로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해군반성회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대일본제국 육군의 하라 시로와 이나바 마사오가 관여했으며, 자료의 일부가 조작되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3.2. 쟁점
해군반성회는 11년간 131회에 걸쳐 스이코우자(水交社)에서 개최되었으며, 전 해군 대령 도요타 쿠마오(豊田隈雄)가 남긴 회의 기록 및 400시간 이상 녹음테이프가 남아 있다. 주제의 성격상 이미 알려진 사실도 많지만, 반성회 참가자들을 중심으로 한 관계자들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또한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제2복원성에 의해 전범이었던 전 해군 간부에 대한 형량 감형 공작에 참여한 실태 등 처음 공개된 사실도 있다고 한다.
해군반성회에서는 지금까지 언급되지 않았던 육해군의 불화와 해군의 개전 책임, 그리고 일본 국민의 개전 책임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규슈 대학의 미와노 무네히로(三輪宗弘)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해군반성회의 문서를 정리하는데 일본 제국 육군의 하라 시로(原四郎)와 이나바 마사오(稲葉正夫)가 개입했으며, 일부 자료의 날조가 있었음이 지적되었다.
4. 언론 보도 및 평가
해군반성회는 11년간 스이코우자(水交社)에서 131회에 걸쳐 개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 해군 대령 도요타 쿠마오(豊田隈雄)가 남긴 회의 기록 및 400시간 이상 녹음테이프가 남아있다. 이미 알려진 사실도 많지만, 참가자를 중심으로 한 관계자가 어떤 견해를 갖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는 데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또한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제2복원성에 의해 전범이었던 전 해군 간부에 대한 형량 감형 공작에 참여한 실태 등 처음 공개된 사실도 있다고 한다. 육해군의 불화와 해군의 개전 책임, 일본 국민의 개전 책임도 처음으로 언급했다.
규슈 대학의 미와노 무네히로(三輪宗弘) 교수는 해군반성회 문서를 정리하는데 일본 제국 육군의 하라 시로(原四郎)와 이나바 마사오(稲葉正夫)가 개입했으며, 일부 자료가 날조되었음을 지적했다.
사료 조사위원회에서 문서 정리를 하던 토다카 카즈나리(戸高一成)는 전 해군 관계자와의 친분을 통해 반성회의 녹음테이프가 남아있는 것을 알았다. 테이프는 세 군데 정도에 분산되어 저장되어 있었으며, 처음에는 그 존재조차도 파악되지 않은 상태였다. 구술사로서의 가치를 중시한 토다카가 테이프 보관자 등의 의견과 관계자가 사망한 것, 일정 기간이 지나면 공표해도 좋다고 했던 것 등의 사정에 의해 결국 거의 모든 녹음 자료를 모을 수 있었다. 그 중 서두의 회의록은 테이프가 깨져 PHP보다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테이프는 장기에 걸쳐 일반 가정 등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태가 나빠져서 NHK에서 복원 작업을 했다.
2009년 8월 9일 - 11일까지 3일간 NHK 종합의 《NHK 스페셜》에서 반성회를 테마로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5. 주요 발언자
| 이름 | 기수 | 최종 계급 |
|---|---|---|
| 신미 마사카즈 | 해군병학교 36기 | 중장 |
| 호시나 젠시로 | 병학교 41기 | 중장 |
| 노모토 타메테루 | 병학교 44기 | 소장 |
| 야마모토 치카오 | 병학교 46기 | 소장 |
| 야마키 아키라 | 병학교 46기 | 소장 |
| 쿠보타 요시오 | 기관학교 25기 | 소장 |
| 사나기 타케시 | 병학교 50기 | 대좌 |
| 테라자키 류지 | 병학교 50기 | 대좌 |
| 오이 아츠시 | 병학교 51기 | 대좌 |
| 오기 카즈토 | 병학교 51기 | 대좌 |
| 미요 이치나리 | 병학교 51기 | 대좌 |
| 스에쿠니 마사오 | 병학교 52기 | 대좌 |
| 후쿠치 마사오 | 병학교 53기 | 대좌 |
| 도이 카즈오 | 병학교 54기 | 중좌 |
| 나카지마 치카타카 | 병학교 54기 | 중좌 |
| 토리스 켄노스케 | 병학교 58기 | 중좌 |
| 키야마 마사요시 | 기관학교 40기 | 소령 |
| 소가 키요시 | 기관학교 51기 | 소위 |
| 스즈키 코이치 | 병학교 59기 | 소령 |
| 쿠하라 카즈토시 | 병학교 60기 | 소령 |
| 혼나 스스무 | 병학교 62기 | 소령 |
| 이치키 토시오 | 병학교 67기 | 대위 |
| 코이케 이노이치 | 비행 예비 학생 14기 | 중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