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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고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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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425고지 전투는 1953년 7월 20일부터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강원도 화천군 425/406고지에서 대한민국 국군 제7사단과 중공군 제135사단이 맞붙은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한국 전쟁에서 대한민국 국군과 중공군 사이에 벌어진 마지막 전투로 기록되었습니다.
배경:


  • 1953년 7월, 정전 협정이 임박한 상황에서 남북 양측은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고지전을 벌였습니다.
  • 특히 화천 425고지는 당시 남한 전력 생산의 30%를 담당하던 화천발전소를 방어하는 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북한의 김일성은 화천발전소 탈환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 역시 화천발전소 사수를 명령했습니다.

전투 경과:

  • 1953년 7월 20일, 중공군 제135사단은 425고지를 공격해 왔습니다.
  • 국군 제7사단은 중공군의 파상공세에 맞서 백병전까지 불사하며 치열하게 저항했습니다.
  • 특히, 7사단 8연대 1대대 1중대장 김한준 대위는 160여 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중공군 950여 명을 사살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습니다.
  • 7월 23일부터는 406고지에서도 전투가 벌어졌으며 3연대 6중대가 고지로 올라오는 중공군을 상대로 격퇴전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 정전 협정이 체결된 7월 27일까지 전투는 계속되었고, 국군은 결국 425고지와 화천발전소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결과 및 의의:

  • 425고지 전투는 한국전쟁의 마지막 전투이자, 국군의 승리로 기록되었습니다.
  • 이 전투의 승리로 국군은 화천발전소를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휴전선을 38선에서 35km 북쪽으로 끌어올리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 1953년 12월 8일, 이승만 대통령은 425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한준 대위와 9명의 용사를 경무대로 초청해 표창했고, 김한준 대위는 태극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 1991년 10월 18일, 425고지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 주파리에 425고지 전적비가 건립되었습니다. 전적비는 강원도 철원군에 위치해 있지만, 화천군청의 허가를 받아야 출입할 수 있습니다.


425고지 전투는 한국전쟁의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헌신한 국군 장병들의 용기와 희생정신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425고지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전투 정보
분쟁한국전쟁
날짜1953년 7월 20일 ~ 27일
장소강원도 화천군 및 김화군 원남면
결과대한민국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대한민국
교전국 2중화인민공화국
지휘관
지휘관 1김한준 대위 등
지휘관 2?
병력 규모
병력 1제7사단 8연대 1대대
병력 2중공군 제135사단
사상자 규모
사상자 1160여명 전사
사상자 2950여명 전사, 30여명 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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