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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다니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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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와다니 촌은 1889년 나카쿠비키 군의 여러 촌이 합병하여 발족한 촌이다. 1901년 미나모토 촌에 편입되어 소멸했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309명의 인구가 거주했으며, 메이지 시대에는 조밥과 절임 채소를 주식으로 하는 등 곤궁한 생활을 했다. 가미카와 신사, 구마노 삼사, 지장당, 호사이 사 등 사찰과 신사가 있었으며, 사쿠라자카 고개에는 외부와의 교통을 통제하는 구치도메반쇼가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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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다니촌 - [옛 지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자치체 명칭가와다니촌
요미가나かわだにむら
한자 표기川谷村
행정 구역
폐지일1901년 11월 1일
폐지 이유신설 합병
폐지 상세가와다니촌, 미나모토촌(일부), 가미요시카와촌(일부) → 미나모토촌
현재의 자치체조에쓰시
도도부현니가타현
나카쿠비키군
인접 자치체미나모토촌, 가미요시카와촌, 히가시쿠비키군나카호쿠라촌, 아사히촌, 미네촌, 카리와군메다니촌
소재지나카쿠비키군 가와다니촌

2. 연혁


  • 1873년(메이지 6년) 9월 - 7대 구역 중 소7구로 지정되었다. (호수 117호)
  • 1875년(메이지 8년) 9월 - 가와다니 지장당 내에 학교가 개교하였다.
  • 1883년(메이지 16년) 1월 1일 - 인구 711명, 호수 123호였다.
  • 1884년(메이지 17년) 7월 - 호장 사무소를 오가미 촌에 설치하였다.
  • 1889년(메이지 22년) 4월 1일 - 정촌제 시행에 따라 나카쿠비키군 가와다니 촌, 나기야마 촌, 이시야 촌, 오가미 촌(일부)이 합병하여, '''가와다니촌'''이 발족하였다.
  • 1901년(메이지 34년) 11월 1일 - 나카쿠비키군 스이겐 촌(일부), 가미요시카와 촌(일부)과 합병하여, '''미나모토촌'''이 되어 소멸하였다.

3. 가와다니 촌의 생활상

1592년(임진왜란) 어검지에 따르면, 가와타니는 미수 향에 속하며 인구는 309명이었다.[1] 볏짚 생산량은 55석 3말 1되 9홉, 본납은 13석 3말 2되 3홉 6작으로, 4말 들이 가마니로 환산하면 약 138가마니를 생산하고 33가마니 남짓을 상납해야 했다.[1] 나머지 105가마니(1인당 약 136홉)로 309명이 1년 동안 생활해야 했으므로, 가와타니 촌 백성들의 생활은 몹시 고되었다.[1]

3. 1. 식생활

1592년(문록 2년) 어검지 기록에 따르면 쌀 생산량이 적어 주민들은 곤궁한 생활을 했다.[1] 메이지 시대 중반에는 쌀 7할과 조 3할 정도를 섞고 무를 썰어 넣어 지은 조밥을 주식으로 삼았다. 절임 음식으로는 무를 쌀겨에 절여 만든 단무지가 있었고, 채소는 소금에 절여 먹었으며, 된장 절임은 고급 음식이었다. 또한, 된장을 걸러 국으로 만들어 '스마시'라 불렀으며 간장 대용으로 일상적으로 사용했다.

3. 2. 마을 내 소자(小字)

가와다니촌에는 가미카와다니(上川谷), 시모카와다니(下川谷) 등의 소자(小字)가 있었다.

3. 2. 1. 가미카와다니(上川谷)

지명읽는 법비고
고에도코에도
주고에도츄고에도
칸몬칸몬
아카사카아카사카
카노즈카카노즈카
요코미치하라요코미치하라
츠부레자와츠부레자와
모기다이라모기다이라
조가자와죠가자와
사쿠라자카사쿠라자카
나카무라나카무라


3. 2. 2. 시모카와다니(下川谷)

오무카이, 니시무카이, 헤이츠보

4. 마을 내 사찰과 신사

가와다니촌에는 다음과 같은 사찰과 신사가 있었다.


  • 가미카와 신사: 1878년(메이지 11년) 4월, 사당 합사령에 따라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모시는 신명사 등 여러 신사를 합사하여 만들어졌다. 1907년(메이지 40년)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하고 가와다니촌 후카사와에 사전을 조영했다.[1]
  • 구마노 삼사: 창건 연대는 불분명하지만, 1683년의 기록에 경내에 신전이 있었다는 내용이 있다. 오쿠노인에는 "구마노 슈겐 신상"이 안치되어 있으며, 배전에는 가네코 겐타로가 쓴 "구마노 삼자의 신연"이 걸려 있다.
  • 지장당: 1683년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1875년(메이지 8년)에는 가와다니촌 제27소학교 구역의 분교가 설치되기도 했다.[1]
  • 호사이 사(法西寺): 정토진종 오타니파(동본원사) 사찰로, 1593년에 마쓰우라 히코베의 동생 진타로가 교뇨의 제자가 되어 작은 암자를 짓고 아미타여래상을 안치한 것을 시작으로 한다.[1] 1924년(다이쇼 13년)에는 군마현 시부카와시에 쇼렌지(正蓮寺)를 개창했다.
  • 구로히메 사 터(黒姫社跡): 미즈하노메노미코토를 모시던 신사였으나, 현재는 흔적만 남아있다. 나가시마 씨의 씨신으로 숭배받았으며, 1903년에 큰 느티나무를 기증한 후 구마노 삼사에 합사되었다.[1]

4. 1. 가미카와 신사

1878년(메이지 11년) 4월, 사당 합사령에 따라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모시는 신명사, 가와다니촌가와다니(上川谷) 나카야시키에 있던 호다와케노 미코토를 모시는 가와다니 야하타 신사(와카이 씨와 타나베 씨의 씨족신), 가와다니촌 스와바야시에 있던 타케미나카타노 미코토를 모시는 스와 신사(미야가와 씨의 씨족신), 가와다니촌 후카사와에 있던 아메노코야네노 미코토를 모시는 가스가 신사(시오자키 씨의 씨족신)의 4개 신사를 합사했다.[1]

1907년(메이지 40년) 9월 11일, 가스가 신사 터에 가미카와 신사로 이름을 바꿀 것을 니가타현 지사에게 제출하여 허가받고, 가와다니촌 후카사와에 사전을 조영했다.[1] 사전 조영을 위해 삼주를 고에치노의 와카이 씨 부지에 임시로 옮겼다가, 1909년(메이지 42년) 3월에 천좌식을 거행했다.[1]

4. 2. 구마노 삼사

창건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1683년(덴나 3년) 가와다니 촌 검지 수장에는 5무(畝)보의 경내에 "신전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쿠노인(奥ノ院)에는 "구마노 슈겐 신상"이 안치되어 있으며, 양손은 앞에서 공수하고 있고, 구마노 슈겐 특유의 두건 형태를 한 삼각모 모양의 보관을 쓰고 있다. 또한, 배전에 걸려 있는 "구마노 삼자의 신연"은 정2위 백작 가네코 겐타로가 쓴 것이다.

4. 3. 지장당

1683년(덴나 3년) 가와다니촌 어검지 수장에는 "경내에 삼나무 등 오래된 숲이 보이고, 오두막이 세워져 있으며, 마을 사람들이 이를 지키고 있으므로, 예전부터 연공을 제외해 왔다는 것은 잘 조사한 결과 틀림없으므로, 연공 납부는 면제합니다"라는 뜻의 기록이 있다. 덴나 검지 이전에는 1598년(게이초 3년) 호리 씨가 실시한 검지가 있었으며, 적어도 게이초 연간에는 어제지로 간주되어 지장당이 상당히 오래전에 창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1]

1875년(메이지 8년) 9월, 당의 절반에 수학의 장을 마련하여 가와다니촌 제27소학교 구역의 분교가 개교했다.[1]

4. 4. 호사이 사(法西寺)

정토진종 오타니파(동본원사) 사찰로, 마쓰우라 히코베의 동생인 진타로를 개기(開基)로 하며, 사격은 여간(餘間)이다.[1] 진타로가 교뇨의 제자가 되어 호사이(法西)라는 이름을 받았다. 1593년(분로쿠 3년) 아미타여래상을 받아 귀국하여 작은 암자를 짓고 영실에 안치한 것을 시작으로 한다. 1924년(다이쇼 13년) 제12대 주지 오누키 씨가 군마현 시부카와시에 쇼렌지(正蓮寺)를 개창했다.

4. 5. 구로히메 사 터(黒姫社跡)

미즈하노메노미코토를 모시는 신사였으나, 현재는 흔적만 남아있다. 하카와다니 촌 아자(字) 히라쓰보(平坪)의 땅에 있었으며, 경내에는 느티나무 고목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나가시마 씨의 씨신으로 숭배받았으며, 나가시마 고헤이타에몬(長島小平太ヱ門)의 조상이 권청했다고 전해진다.[1]

1903년 (메이지 36년) 도쿄 쇼세이도(東京彰星堂宇) 건립 시 큰 느티나무를 기증했고, 그 후에 구마노 삼사에 합사되었다. 경내에 남아있던 수목은 벌채되었으며, 현재는 사찰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1]

5. 사쿠라자카 고개의 구치도메반쇼

사쿠라자카 고개에는 구치도메반쇼가 설치되어 있었다. 낮에는 2명, 밤에는 4명이 마을 사람들에 의해 교대로 경호 임무를 맡았으며, 호쿠라 마을, 우오누마군, 가리와군 방면으로 가는 사람들을 단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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